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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망치다

유영만 지음 | 나무생각



공부는 망치다

유영만 지음

나무생각 / 2016년 9월 / 323쪽 / 14,800원





What - 무엇이 공부인가?

공부는 낯선 마주침이다 - 공부는 우연한 마주침에서 깨우침을 얻는 색다른 각성제다: 기계는 알고리즘에 없는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임기응변력을 발휘하여 상황 대응적인 대처를 할 수 없다. 대처가 가능하더라도 축적된 경우의 수에 비례하는 프로그램상의 대처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 시계 제로의 일상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필연성 속에서 인과법칙을 토대로 미래 현상을 예측하는 능력을 개발하는 일이 중차대한 과제다.

하지만 삶은 우연성의 연속인 경우가 많으며, 생각지도 못한 지혜는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만남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예로 우연히 떠오른 생각의 단상을 메모장에 끼적거렸던 흔적이 지금 현실로 펼쳐지곤 한다. 또 우연히 만난 사람과의 짧은 만남이 삶의 향방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이 운명을 획기적으로 바꿔놓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들뢰즈가 창안한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처럼 우발적 접속을 통한 지식의 수평적 확산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우연의 끝은 또 다른 우연으로 접속되어 무한대의 또 다른 우연으로 뻗어나갈 뿐이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또 다른 대사다. 이걸 공부로 바꿔도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꼭 거창한 공부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공부일 수 있다.”

공부는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망치질이다 - 공부는 틀에 박힌 생각의 타성을 깨부수는 창조적 기폭제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과정을 태생적으로 반복해왔다. 기존 생각의 범위 내에서 기존에 짜인 프레임대로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공부는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나 뜻밖의 비정상적인 생각을 하면서 내 생각도 틀릴 수 있음을 치열한 실천 체험을 통해 뼈아프게 깨닫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면 공부는 결국 생각의 고치 안에 안주하고 있는 생각을 망치로 깨부수고 새로운 생각을 잉태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공부는 과거의 체험과 생각에 닻을 내리고 붙어 있는 통념을 버리고 비우는 망각의 과정이기도 하다.

망치를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창조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생각의 고치를 깨부순 공부의 모델이 있다. 바로 철학자 니체다. 니체는 근대를 마감하면서 플라톤 이후 2,500년간 서구인들이 신봉해왔던 전통적 가치관을 가차 없이 깨부쉈다. 니체가 주장한 철학적 개념 중에 영원회귀라는 말이 있다. 영원회귀는 동일한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영원회귀는 모든 것을 반복하되 이전과 다른 차이를 반복해서 생성하는 움직임이다. 이전과 다른 차이를 반복할 때 그 반복은 단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잉태하는 반복이며, 그 반복이 바로 영원회귀다. 영원회귀도 결국 니체에게는 새로운 차이를 반복해서 생성하는 창조적 파괴의 다른 이름이다.

공부는 즐거운 육체노동이다 - 공부는 온몸으로 깨닫고 느끼는 체험적 자극제다: 경지에 이르는 공부의 왕도(王道)는 없다. 이상을 향한 꿈을 꾸면서 현실적 벽을 넘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만이 공부의 왕도에 이르는 길이다. 밭을 가는 농부가 게으름을 피우며 경작하지 않으면 밭에는 아무런 농작물이 자라지 않듯이 마음의 밭을 가는 공부를 게을리하면 아무런 사상적 열매도 거둘 수 없다. 공부(工夫)는 ‘장인 공(工)’ 자에 ‘아비 부(夫)’ 자가 합쳐진 말이다. 그래서 공부(工夫)는 도구를 들고 있는 건강한 사내를 일컫는다. 신영복 교수도 공부(工夫)란 쟁기를 들고 서 있는 사내, 즉 농사짓는 일과 같다고 해석했다. 농사짓는 일이 앉아서 머리만 굴리는 일이 아니듯 공부는 몸을 움직여 애쓰는 과정이다. 공부는 그만큼 온몸으로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무리 위대한 생각이나 아이디어라고 할지라도 내 몸이 수반되는 체험이 동반되지 않는 공부는 관념적 파편에 머무를 수 있다. 그래서 제대로 공부를 하려면 발로 뛰어다니면서 현장을 만나야 되고 거기서 진실을 캐내야 된다. 관련된 사람을 만나 인터뷰하고 기록하고 관련 논문이나 책을 수없이 읽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조목조목 따지고 연결시키고 비교하고 대조하고 치밀하게 분석하여 그것이 우리 사회 또는 공동체에 던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해야 한다.

공부는 따뜻한 가슴으로 만나는 공감이다 - 공부는 타인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는 열정적 공감제다:공부는 단편적인 정보의 질적 속성을 판단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아무런 관계없이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정보들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파악,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이슈의 본질을 읽어내는 과정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홀로 고독하게 책을 읽고 몸을 움직이는 체험적 깨달음을 무장하는 사투보다, 스마트폰으로 검색되는 단편적인 정보에 길들여져 있다. 하지만 진짜 앎은 떠도는 정보에 있지 않고 그 정보를 만들어내고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에 있음을 깨닫는 과정에서 생긴다.

참고로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스마트폰에 접속할수록 오히려 인간의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제기되고 있다. 2010년 미시건 대학교에서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30년 전의 대학생들과 비교해볼 때 요즘 대학생들의 공감 능력이 40%나 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감 능력의 저하는 주로 2000년 이후에 발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쓴 수전 손택은 이미지나 사진에 익숙해질수록 현대인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되고 사회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된다고 해도, 공부를 통해서 배워야 할 점은 기계가 대신해줄 수 없는 공감 능력이다. 보이지 않는 관계가 겪고 있는 아픔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단순한 연민(sympathy)의 감정보다 공감(empathy)을 느낌으로써, 인간관계도 스쳐가는 한순간의 관계가 아니라 더불어 행복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희망의 연대임을 알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서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 연민하는 감정과 공감하는 능력의 차이를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최근 빈번해진 일본과 에콰도르 등지의 지진 관련 뉴스를 보면서 연민을 느끼면서도 나와 직접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흘려보낸다. 연민은 지금 있는 자리에서 느끼고 더 이상의 감정과 행동이 뒤따르지 않지만, 공감은 지금 느끼는 감정으로만 그치지 않고 용기 있는 결단을 하고 고통으로 위협받고 있는 현장으로 달려간다. 공부는 먼발치에서 느끼는 연민이 아니라 가까이서 아픔을 같이하는 공감이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고, 다른 사람의 귀로 들으며, 다른 사람의 가슴으로 느끼는 것을 공감이라고 한다. 공부는 연민의 감정을 넘어 역지사지가 되어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느끼는 측은지심으로 공감하는 과정이다.

공부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 공부는 한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는 치명적인 중독제다: 공부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이나 위기의식에 단서를 제공하는 화두를 만났을 때 순식간에 일어나는 혁명적인 변화다. 그렇다고 공부가 아무런 노력 없이 운 좋게 뭔가를 습득하는 행운은 아니다.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다 우연히 만난 책이나 사람을 통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만나는 과정이다. 공부를 육체노동이라고 언급했듯이 수고와 정성이 깃드는 가운데 힘겹게 얻는 깨달음의 정수는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변한다고 해도 불변하는 진리다.



Why - 왜 공부하는가?

호기심의 물음표를 가슴에 품기 위해 - 공부는 호기심의 물음표를 던져 감동의 느낌표를 찾는 과정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한 한 마디가 바로 ‘왜’라는 질문이다. ‘왜’라는 호기심의 물음표에 담긴 인간의 지적 욕망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탐구심을 자극해왔다. 그 결과 인류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문명을 창조했으며, 원래 그렇고 당연한 세계도 더 이상 그런 세계가 아님을 규명해왔다. 공부는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어제와 다른 물음을 배우는 과정이다. 학문(學問)도 묻는 방법(問)을 배우는(學) 과정이다. 묻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내가 묻는 만큼 답도 생긴다.

[공부를 하면서 던져야 될 네 가지 질문] 진정한 승리자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문제에 대해서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어쩌면 이 문제는 평생 동안 되물어보고 반추해야 할 물음일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Who)”이다. 이 물음은 공부를 통해서 달성하고 싶은 꿈에 관한 문제다. 두 번째 질문은 “무엇을 할 것인가?(What)”에 대한 것이다. 이를 공부하는 삶에 대입해보면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또는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에 관련된 문제 제기”다. 세 번째 질문은 “왜 할 것인가?(Why)”이다. 이는 공부의 미션(mission)에 관련된 물음이다. 네 번째는 “어떻게 할 것인가(How)”와 관련된 문제 제기다. 공부하는 사람의 문제의식과 연결시키면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로 질문을 바꿔볼 수 있다.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 공부는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의 ‘적’을 퇴치하는 과정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타성에 젖어 살아가려는 생각의 중심을 죽비로 내려치면서 틀 밖의 사유를 즐기기 위해서다. 공부하지 않으면 틀에 박힌 생각, 습관적인 타성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지를 모른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궁금해서 매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지만, 어른이 되면서 세상은 점점 당연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당연한 것은 없다. 따라서 ‘물론’과 ‘당연’, 그리고 ‘원래’에 물음표를 던지고 시비를 걸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생각의 임신이 가능하다. 공부는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과연 나는 누군가의 생각의 노예가 되어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닌지, 모든 걸 자기중심적 또는 자기 편향적으로 생각하는 자기 편의주의에 물들어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보려는 문제 제기다.

덕분에 본분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 공부는 본분을 지키고 덕분에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덕분(德分)에’라는 말은 ‘덕(德)’을 ‘나누어(分)’준다는 말이다. ‘때문에’라는 말은 핑계와 자기합리화를 위해 둘러대는 말이지만, ‘덕분에’라는 말은 당신이 나에게 덕을 나누어준 그 덕분에 내가 잘되었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 덕분에 존재하는 빚쟁이다. 나는 부모님 덕분에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고, 내가 나름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나를 만나면서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제공해준 무수히 많은 은인들 덕분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물건, 내가 이용하는 교통수단, 내가 듣는 음악과 보는 그림, 내가 누리는 세상의 모든 혜택 중에 내가 직접 수고와 정성을 들여 만든 건 거의 없다. 모든 일은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덕분에 뭔가를 성취할 수 있으며 덕분에 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그 덕(德)을 나누며(分) 살아가는 덕분의 미덕을 몸으로 실천해야 된다. 공부는 세상의 모든 일이 덕분에 잘되고 있음을 온몸으로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실천에 옮기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현명하게 길을 잃기 위해 - 공부는 길을 잃은 덕분에 우연히 다른 길을 만나는 과정이다: 공부는 정해진 길 위에서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공부는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찾아 새로운 길을 내거나, 지금 걷고 있는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하는 탐구의 과정이다. 그리고 공부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 다른 목적지로 다시 탈주하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다. 공부는 내가 목적지라고 생각했던 이상이 환상과 몽상일 수도 있음을 온몸으로 실험하고 모색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할 경우 공부하는 과정에서 재미와 즐거움이 사라질 수 있다. 공부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사투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여정에서 즐겁고 신나게 노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는 놀이다. 목적지로 가는 여정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책, 우연히 스쳐 지나간 사물과 사건과의 만남이 내 운명을 바꾸는 신호탄이 될 거라고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니까 내가 만난 수많은 점들의 향연이 나의 오늘을 만드는 선이 된 것이고, 그 선이 모여서 나의 면모를 만든 원동력이 된 셈이다.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 공부는 나만의 색다름을 찾아 나다움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공부의 목적은 자기다움을 찾는 데 있다. 자기다움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남과 비교할 수 없는 나다움이자 색다름이다. 즉, 나답게 살면 자기다움이 저절로 드러나고 색달라진다. 나다움을 찾은 사람은 자기의 존재 이유를 찾은 사람이다. 자기의 존재 이유를 찾은 사람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길을 걸어간다.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은 내가 하면 신나는 일, 내가 하면 잘할 수 있는 일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고 부끄러워할 줄 안다. 또한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은 나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깨닫는 것과 같다. 그런데 나의 한계는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알 수 없다. 나의 한계는 한계에 도전하는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계에 도전하는 체험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공부다. 남들처럼 살지 않고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야 한다. 그 답은 밖에 있지 않고 이미 내 안에 존재한다.



How -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보는 방법을 배워라 - 공부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배우는 독특한 관점이다: [공부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네 가지 눈 - 육안(肉眼), 뇌안(腦案), 심안(心眼), 영안(靈眼)]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에 보면, 사람에게는 네 가지 눈이 있다고 한다. ‘육안’은 사물의 물리적 특성을 보는 눈이다. 그리고 ‘뇌안’은 사물의 과학적 특성을 분석하는 눈이다. 그런데 똑같은 육안과 뇌안을 갖고 있지만 남다른 성취를 이루어내는 사람들은 남이 갖고 있지 않는 ‘심안’을 갖고 있다. 햄버거를 보고 맛있다고 생각하는 눈은 육안이며, 햄버거가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눈은 뇌안이다. 그런데 심안을 갖고 있는 사람은 햄버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심안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현상의 이면을 보는 눈이다. 한마디로 머리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눈이다. 햄버거를 먹을 때 겉으로 드러난 영양 성분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햄버거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시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이다. 햄버거를 생산하는 시스템의 역기능적 폐해를 읽어내는 눈이다.

남다른 문제의식은 물리적 특성을 보는 육안,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뇌안과 시적 상상력을 떠올리는 심안을 넘어 ‘영안’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영안은 일상의 작은 사물이나 현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질서와 체계를 읽어내는 눈이다. 작은 사물 및 실체가 다른 전체와 맺고 있는 구조적 관계를 꿰뚫어 읽어 내거나,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는 ‘혜안(慧眼)’이다. 영안은 부분 속에서 전체를 읽어내는 직관적 통찰력의 눈이다. 햄버거를 많이 먹을수록 숲을 파괴하고 환경오염과 지구 온난화 현상을 일으킨다는 점을 아는 눈이 바로 영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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