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읽는 세계사
구정은, 장은교, 남지원 지음 | 인물과사상사
카페에서 읽는 세계사
구정은 외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6년 9월 / 336쪽 / 15,000원
1. 방 안에서 보는 일상의 역사
역사를 바꾼 악마의 음료
오늘날의 사람들은 카페에서 많은 일을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수다를 떨기도 하고, 비즈니스 미팅을 하기도 하고, 모임을 열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현대인에게 카페는 놀이터이자 쉼터이자 일터다. 그렇다면 먼 옛날의 카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인류가 커피를 처음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9세기경 아프리카 동부의 에티오피아에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커피는 곧 홍해를 건넜고, 예멘의 아덴항을 통해 아라비아반도에 퍼졌다. 처음에 종교의식에나 사용되었던 커피는 점차 종교적인 의식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즐기는 기호품으로 변해갔다.
커피하우스의 기원: 커피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15세기 이후 중동에는 커피하우스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라고 알려진 곳은 오스만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1475년 개점한 키바 한이다. 당시 오스만제국에서 커피가 얼마나 중요했냐면, 부인은 남편이 매일 일정량의 커피를 제공하지 못하면 이혼할 권리가 있을 정도였다. 또한 중동에서 가장 활발한 도시이자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메카에서 커피하우스는 사람들이 사회적, 정치적 견해를 나누는 곳으로 발전해갔다. 1530년대 이후 커피하우스는 다마스쿠스와 카이로 같은 중동의 도시들로 퍼져 나갔다.
커피문화가 유럽에 전래된 것은 17세기 들어서의 일이다. 커피는 주로 아랍과 이슬람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마셨던 탓에, 기독교 문화가 지배적인 유럽인들은 커피를 ‘이교도나 마시는 음료’라고 생각했다. 커피는 실제로 ‘이슬람교도의 와인’이라고 불렸다. 이탈리아 무역상들이 커피를 유럽으로 들여왔지만 문화적 거부감이 너무 커서 유럽 전역에 전파되기는 어려웠다. 이 편견을 깨뜨린 것은 교황 클레멘스 8세다. 클레멘스 8세의 측근들이 “커피를 악마의 음료라고 선포해달라”고 청원했지만 커피를 마셔본 교황은 “악마의 음료라기에는 너무 맛있으니 커피에게 세례를 주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1600년경의 일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시기를 즈음해서 커피가 유럽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1629년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유럽 최초로 커피하우스가 탄생했다. 영국 런던에는 1650년, 프랑스 파리에는 1672년에 첫 커피하우스가 생겼다. 커피하우스는 이후 유럽 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정치와 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런던에 문을 연 로이드라는 이름의 커피하우스에는 상인들과 선원들, 해운업계 사람들이 모였다. 영국의 대형 보험사 로이드의 효시가 바로 이곳이다. 세계적 경매회사 소더비와 크리스티도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가 된 커피하우스: 19세기와 20세기, 유럽의 커피하우스는 작가와 예술가들의 작업실이자 이들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 파리 생제르맹 데프레에서 1880년대에 영업을 시작한 두 카페, 카페 레 되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베르 카뮈, 파블로 피카소, 시몬느 드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지식인과 작가, 미술가들의 아지트였다. 파리의 상징적 공간이기도 한 이 커피하우스들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같은 문학작품과 영화에서도 숱하게 언급되었다. 두 커피하우스는 아직도 파리에 남아있다.
20세기 미국으로 가보자. 미국의 커피하우스는 20세기 중반 팝 음악의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커피하우스가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바뀌면서 포크 가수들이 커피하우스 한복판에서 노래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대 히피 문화가 확산되며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자유로워진 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있다. 미국 대중음악의 한 축인 포크는 커피하우스 공연을 통해서 발달했다. 세계적인 뮤지션 존 바에즈나 밥 딜런 같은 사람들도 처음에는 커피하우스에서 기타 한 대 들고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타벅스의 시대: 에스프레소는 높은 온도와 압력을 이용해 아주 짧은 시간에 추출해낸 진한 커피다. 에스프레소를 물에 타면 아메리카노, 우유에 타면 카페 라테가 된다. 하워드 슐츠라는 사업가가 1980년대 미국 시애틀의 한 원두 판매점 경영에 참여했다. 1971년 시애틀에서 영업을 시작한 이 원두 판매점의 이름은 스타벅스였다. 슐츠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다가 밀라노에서 에스프레소 바를 방문했고, 스타벅스를 에스프레소 바처럼 커피를 파는 곳으로 변신시키자고 동업자들에게 제안했다. 커피를 쉽고 빠르게 만들어 파는 커피하우스가 바쁜 미국인들에게 환영받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업자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슐츠는 1985년 스타벅스에서 쫓겨나 ‘’일 조르날레‘라는 커피하우스를 개업했다. 장사는 놀랄 만큼 번창했고 슐츠는 2년 후 스타벅스를 인수한다. 오늘날 전 세계를 지배하는 커피 공룡 스타벅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스타벅스는 놀랄 만큼 성장했다. 1992년 미국 전역에 165개의 점포를 소유하게 되었고, 1995년 일본 도쿄 매장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987년부터 2007년 사이 스타벅스는 매일 평균 2개의 신규 매장을 열었다고 한다. 2015년 기준으로 스타벅스는 65개국에 진출해 있으며 매장은 2만 1,536곳에 달한다. 스타벅스는 현대 커피 문화의 표준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같은 커피를 맛볼 수 있을 정도로 표준화된 메뉴와 커피 맛,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 테이크아웃 위주의 음료 제조 시스템, 주문한 뒤 카운터에서 직접 커피를 찾아와야 하는 방식까지, 스타벅스 이후 우후죽순 생긴 다른 프랜차이즈 커피하우스들은 스타벅스의 성공방식을 모방하며 발전했다.
되풀이되는 비극, 사건 사고의 역사
공멸을 향한 질주, 핵실험
2016년 1월 6일 북한 조선중앙TV에 한복을 입은 리춘희 아나운서가 등장했다. 올해 72세인 리춘희 아나운서는 조선중앙TV의 간판스타였다. 2006년 북한이 첫 핵실험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을 때, 2011년 김정일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리춘희 아나운서가 등장해 소식을 전했다. 김정일의 사망 이후 방송을 떠난 줄 알았던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은 무언가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오랜만에 등장한 리춘희 아나운서는 특유의 격앙된 목소리로 “북한이 처음으로 수소핵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알렸다. 북한은 2006년과 2009년, 2013년 원자폭탄 실험을 했다. 수소 폭탄은 원자폭탄보다 만들기 어렵고 위력도 수천 배나 강하기 때문에 북한이 정말 실험에 성공했는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성공 여부를 떠나 북한이 여전히 핵무기 개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열었고 새로운 대북 제재 방안을 논의했다.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하는 핵무기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워싱턴포스트』는 “1945년부터 2016년 1월 6일까지 총 2,055번의 핵실험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핵실험의 역사를 알아보자.
세계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 세계 최초의 핵실험은 1945년 7월 16일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중이었다.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아인슈타인의 편지였다.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아인슈타인 박사다. 독일 출신으로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고 광전효과 연구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아인슈타인은 나치의 집권을 피해 1933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아인슈타인은 1939년과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빨리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독일이 핵폭탄을 만들고 있으니 미국이 그보다 빨리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독일의 위력은 세계를 집어삼킬 기세였고 불안한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핵무기를 만드는 연구였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었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과학자들도 힘을 보탰다.
3년의 노력 끝에 맨해튼 프로젝트팀은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앨라모고도 사막에서 세계 최초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모든 것이 비밀이었던 이 핵실험에는 ‘트리니티’라는 암호명이, 폭탄에는 ‘가제트’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가제트는 오전 5시 29분 45초에 성공적으로 폭발했다. 인류 최초의 핵폭발은 하늘에 엄청난 섬광을 만들어냈고, 12킬로미터 상공까지 버섯구름 기둥을 만들었다. 실험 장소에서 2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핵폭탄이 만들어낸 빛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제트는 TNT 20킬로톤의 위력을 가진 것으로 증명되었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뉴멕시코 주는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 정부는 공군기지에 있던 탄약 창고가 폭발한 것이라고 속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꼬마’와 ‘뚱보’: 최초의 핵실험은 핵무기가 정말 가능한 것인지, 그 위력은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최초의 핵실험은 트리니티였다면 핵무기가 인류에 신고식을 한 곳은 일본 히로시마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항복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끝까지 연합군과 대치했다. 미국은 새로 발명한 핵무기를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했다. ‘리틀 보이(Little Boy)’라는 이름의 이 폭탄은 히로시마 600미터 상공에서 폭발했다. 폭발 당시 사망자만 8만 명, 이후 방사능 오염으로 사망한 사람은 수십 만 명에 달했다. 사람들은 단 한 번의 폭발로 도시 하나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폭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과학적 도박을 했다”며 성공적인 핵폭발을 자축했다. 1945년 8월 9일에는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폭탄 ‘팻 맨(Fat Man)’이 투하되었다. 나가사키에서 첫 넉 달 동안만 6~8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그해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일등공신이 ‘꼬마’와 ‘뚱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핵폭탄의 사용이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사망자 대부분이 민간인이었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조차도 평생 후유증으로 고통 받았기 때문이다. 핵폭탄이 전쟁을 빨리 끝내긴 했지만 전쟁이 몇 년 더 지속되었다고 해서 원자폭탄만큼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특히 미국이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폭탄을 떨어뜨린 것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기보다 두 번째 핵폭탄의 위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이 많다. 핵폭탄의 위력이 사망자 수로 증명된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핵실험이었다.
핵은 정치적 무기: 핵을 가진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가 정면충돌하지 않고 21세기를 맞은 것은 열강들이 서로 갖고 있는 핵무기의 힘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제 원자력기구에서 일한 안준호 박사는 『핵무기와 국제정치』라는 책에서 “인류를 전멸할 수 있는 핵무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핵무기를 서로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핵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효과가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유럽에 평화가 유지되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북한 핵실험 발표 후 “가난하고 고립된 나라들은 종종 리더십을 강화하거나 국제사회의 원조를 쥐어짜내기 위해 ‘핵 위협’을 무기로 쓰곤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핵무기가 군사무기가 아니라 정치적 무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핵무기가 각 나라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기만 할지, 핵무기가 안전하게 관리될 것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언젠가는 내가 먼저 핵무기를 폐기했다고 자랑하며 경쟁하는 평화의 시대가 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역사를 바꾸어놓은 전염병
2015년 여름 한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2014년 전 세계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던 에볼라 바이러스, 인류 최초의 전염병이라고 불렸다가 지금은 사라진 천연두와 역사의 물꼬를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흑사병, 저개발의 상징 에이즈까지, 인류의 역사는 전염병 없이 쓸 수 없다.
아테네를 무너뜨린 장티푸스, 중세를 끝장낸 흑사병: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이끄는 연맹이 역내 패권을 두고 벌인 펠로폰네소스전쟁 중, 아테네가 승기를 잡아가던 전쟁 2년째인 기원전 430년, 의문의 역병이 아테네를 휩쓸었다. 질병의 유입경로는 아테네의 유일한 음식과 물자 공급로였던 피레우스 항구였다. 이 역병으로 숨진 사람은 7만 5,000명에서 10만 명, 아테네 전체 인구의 25퍼센트로 추정된다. 전쟁을 이끈 아테네의 영웅 페리클레스도 이 병에 감염되어 숨졌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이 참상은 생생히 전해졌다. 역사를 바꾸어놓은 전염병으로 기록된 첫 사례가 아닐까 한다. 현대에 와서야 이 병의 정체가 장티푸스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역사를 바꾸어 놓은 질병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중세를 무너뜨린 흑사병이 아닐까 한다. 1347년 시칠리아에서 항해를 마치고 당도한 선원들이 괴질로 죽어갔다.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흑사병이 교역로를 타고 유럽에 진입한 순간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선박 기술이 발달해 지중해를 사이에 둔 무역이 활발했지만, 당연하게도 방역 시스템은 전무했다.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퍼지는 데 불과 수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중동에도 흑사병이 창궐했다. 중세 아랍의 저명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다마스쿠스에서 매일 2,000명이 죽어갔다는 이야기를 여행기에 남기기도 했다.
전 유럽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늘 정결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교리 때문에 손발을 열심히 씻던 유대인 등이 병에 잘 걸리지 않자,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헛소문이 퍼지고 대량학살이 잇따랐다. 사람들이 점성술 같은 미신에 기대면서 병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했던 교회는 권위를 크게 잃었다. 무엇보다 계층별 인구구성이 변하며 사회구조도 극적으로 변했다. 사망자의 대부분이 질병에 취약한 하층계급이었기 때문에 노동력이 심각하게 부족해져 노동자 임금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된 것이다. 농노들이 영지를 떠나 도시 노동자가 되거나 더 후한 조건을 부르는 영주에게로 떠나버리는 일이 잦아지며 영주 권력이 약해졌다. 흑사병이 중세 농노제의 해체와 도시의 발전에 기여한 셈이다.
신대륙이 내린 재앙, 유럽발 천연두: 천연두는 ‘신세계’ 사람들을 죽인 ‘구세계’의 전염병이다. 천연두는 ‘인류 최초의 전염병’이라고 불린다. 기원전 1500년에 고대 인도에서도 발병했고, 기원전 1145년에 사망한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5세의 미라에서도 천연두의 흔적인 곰보 자국이 발견되었다. 유럽에서 천연두는 흔한 질병이었다. 하지만 바깥 세계 사람들과 접촉이 없었던 남미의 원주민들은 천연두를 만난 적이 없었다. 1519년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현재의 멕시코 땅에 있던 아스테카제국에 도착했다. 코르테스가 데려온 군대는 아즈텍 원주민 군대보다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그 중에는 천연두에 전염된 군인이 1명 있었다. 코르테스는 천연두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전쟁에 가져갔다. 아스테카제국이 천연두로 황폐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년 만에 아즈텍 군인 대부분이 죽었고 인구의 25퍼센트가 사망했다. 스페인 수도사 모톨리니아는 이 참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질병 치료법을 몰랐던 원주민들은 마치 빈대처럼 떼로 죽어갔다. 한 가구가 전부 죽었는데 묻을 곳이 없어서 집을 봉쇄하기도 했다. 집은 그래도 이들의 무덤이 되었다.” 천연두에 걸려 죽어간 사람들의 시체를 밟지 않고는 지나다닐 수도 없었다고 한다.
잉카제국에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천연두 바이러스가 퍼졌다. 잉카인들이 건설해놓은 효율적인 도로 시스템은 바이러스 역시 효율적으로 퍼뜨렸다. 잉카제국의 황제와 황실 가족들, 원주민 약 20만 명이 천연두로 죽었다. 잉카 인구의 60~90퍼센트가 천연두에 쓰러지면서 잉카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천연두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 지금의 칠레부터 북쪽 끝 알레스카까지 번졌고 19세기까지 천연두 대유행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