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1
윌리엄 R. 맨체스터 지음 | 미래사
맥아더 1
윌리엄 R. 맨체스터 지음
미래사 / 2016년 6월 / 624쪽 / 18,000원
낮은 북 그리고 팡파르(Ruffles and Flourishes 1880~1917)
아버지 아서 2세가 복무했던 K중대가 리븐워스에 주둔할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아버지는 더글러스를 더그(Doug), 어머니 핑키는 더기(Dougie)라고 불렀다. 더글러스의 회상에 따르면 셀던 요새에서 어머니는 세 개의 R(읽기, 쓰기, 산수)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하는 동시에 ‘의무감’을 다음처럼 주입시키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리 큰 개인적인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우리는 옳은 일이라면 반드시 해야 한다. 국가는 항상 우선하는 것이다.’ 한편 1893년 아버지가 서부의 샌안토니오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더글러스는 학교에 들어갔는데, 이곳은 나중에 텍사스군사학교가 되었다. 그는 1897년 졸업생 대표로 졸업연설을 하고, 1899년 웨스트포인트(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03년 수석으로 졸업한다.
소위로 임관된 맥아더는 공병단에 배치되고, 한동안 마닐라에서 근무하면서 필리핀 사단의 지불장교 및 공병 최고책임자의 보좌관으로 복무한다. 그 후 맥아더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다. 그리고 1905년 7월 맥아더는 태평양사단의 공병대장 대리로 임명되었는데, 이 발령과 관련해서 아버지의 지위가 어떤 고려 요인이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석 달 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시문은 이와 달랐다. 그 지시문은 다음과 같다, ‘공병대 소속 맥아더 중위의 현직을 면함. 일본 도쿄에 있는 미합중국 아서 맥아더 소장에게 직접 출두하여 신고하고 그로부터 부관의 명을 받을 것.’
아버지 아서 2세는 동양에 대한 의미 깊은 시찰 여행에 아내와 젊은 아들을 동반하고 싶었다. 젊은 더글러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10월 29일 비 내리는 일요일, 요코하마에 있는 오리엔탈 팰리스 호텔에서 부모와 합류했다. 여행은 수요일에 시작되었다. 우선 나가사키, 고베, 교토 등지에 있는 일본군 기지를 여행했다. 그다음엔 상하이, 홍콩, 자바로 향했다. 크리스마스는 싱가포르에서, 새해는 버마에서 맞이했다. 1906년 1월 14일 캘커타에 도착했다. 이후 두 달간 인도를 여행하면서 전성기를 맞은 에드워드 왕 치세의 주요 관심거리를 관광했다. 4월에는 방콕을 방문하여 라마 5세 왕이 맥아더 일가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베푼 만찬에 참석했다. 이어서 사이공을 여행한 뒤 중국 순방에 나서 광둥, 칭다오, 베이징, 톈진, 한커우, 상하이 등을 여행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6월 하순이었다.
7월 17일 미국으로 돌아가는 배가 떠나기 전 맥아더 부자는 일본의 장군들과 얘기를 나누고 나서, 새로이 떠오르는 세계의 강자에 대한 인상을 정리했다. 아서 맥아더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심이 ‘태평양 문제’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그는 전쟁성 장관에게 “필리핀 제도라는 전략적 요충이 미국의 자산에서 부채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리핀에 대한 보호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그 후 맥아더는 1906년 12월 4일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더글러스에게 극동에 대한 견해를 구했다. 하급 장교 입장에서 이것은 너무 자극적인 와인이었다. 그 후 맥아더는 리븐워스에서 4년간 근무했다. 참고로 1911년 2월 대위로 승진한 다음(중위 계급을 거의 7년 동안 달았음)에 군은 그에게 3~6개월 정도 소요되는 임무를 여러 가지 맡겼는데, 그중 하나가 파나마 운하와 관련된 임무였으므로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로버트 E. 우드와 함께 운하지역의 기술문제, 물자 공급, 위생 상황 등을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1911년 중반에는 에이첼버거와 함께 텍사스 기동훈련에도 참가했다. 그리고 이듬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유년의 추억과 쓰라리게 결별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뒤 3개월 만에 더글러스 맥아더는 워싱턴으로 전배되어 아버지 동료였던 레너드 우드 장군 바로 밑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그의 후원 아래 군 권력사회의 핵심에 자리를 잡게 된다.
맥아더는 자신에게 미셔너리 리지(남북전쟁 당시 유명한 전투지로 아버지 아서 2세는 이곳 전투지에서의 공훈으로 훈장을 받았음)의 영웅에 필적하는 인물임을 증명할 단 한 번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기회 하나가 1914년 봄에 찾아왔다. 당시 미국과 멕시코는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첩보를 필요로 했던 우드는 첩보를 수집할 스파이로 맥아더 대위가 최적임자라고 결정하고, 맥아더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수집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획득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가 미 군함 네브래스카 호를 타고 멕시코 베라크루스에 도착한 것은 5월 1일 금요일이었다. 베라크루스는 윌슨 대통령의 명에 따라 해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도시를 점령하고 있는 여단의 사령관은 프레드릭 펀스턴 준장이었고, 펀스턴의 병력은 우에르타 군(멕시코 반군) 1만 1천 명 병력에 포위된 상황이었다. 맥아더는 일단 문제에 대한 평가를 끝내고 멕시코 영토 깊숙이 1인 작전을 벌이는 것으로 결정했다. 참고로 베라크루스에는 철도 위에 차량은 많이 있었지만 기관차가 없었다.
맥아더는 엔진을 내륙 쪽에서 찾아보기로 작정하고 철도 엔지니어 한 명을 술에서 깨운 뒤 철도 소방수 두 명을 포섭해서 이들 세 명의 멕시코인들에게 기관차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면 금화 150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소방수들을 보내고 나서 엔지니어의 몸을 수색하여 38구경 리볼버권총과 작은 단도를 압수했다. 그런 다음 그 엔지니어에게 자기 몸을 수색하도록 해서 자기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맥아더를 죽여 봐야 신분표와 작은 피스톨 이외에 건질 것이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들은 우에르타 지역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밤 1시에 알바라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기관차 5대를 발견했는데, 2대는 쓸모없는 역 구내용 기관차였으나 나머지 3대는 크고 좋은 장거리용 기관차로서 부품 몇 가지만 보충하면 완벽해질 상태였다. 기관차를 조사하고 난 다음 귀환을 시작했다.
귀환 길은 피비린내 나는 길이었다. 살리나스에서는 5명의 무장병이 일행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맥아더는 데린저 권총으로 응사하여 2명을 사살했다. 피에드라에서는 안개가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15명의 무장 기병과 마주쳤다. 이들은 맥아더의 옷에 총알구멍 3개를 냈고 멕시코인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겨우 아침 늦게 미군 지역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맥아더는 우드에게 보내는 짤막한 작전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첨언했다. “펀스턴 장군은 일을 잘 처리하고 있으며 특별히 흠잡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관은 친애하는 장군님께서 가지고 계신 명쾌하고 단호한 지휘 방식이 불러일으키는 영감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장군께서 야전을 직접 지휘하시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전쟁이 끝나고 종국적으로는 장군께서 백악관으로 가시는 결과를 낳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이후 멕시코에 대한 선전포고는 없었고 우드는 야전을 지휘하지도 않았으며 백악관으로 들어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베라크루스 사건을 계기로 맥아더의 많은 부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독창성, 지형을 파악하는 안목, 개인적인 용맹성 및 상급자를 향한 아부 등, 후일에도 그는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들을 향해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는 비슷한 축원을 거듭했다.
진격(Charge 1917~1918)
제2차 세계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의 광기조차도 제1차 세계대전의 광기에는 감히 상대가 안 될 정도였다. 미국이 이 재앙에 개입하게 된 것은 하나의 실수였다. 당시 카이저(Kaiser)는 영국의 식량 및 물자를 고갈시키겠다고 중립국 선박에 대해 무제한적인 잠수함전을 선언했다. 미국 하원의 공식적인 대독 선전포고에 따라 1917년 10월 더글러스 맥아더 대령이 제42사단의 병력을 인솔하고 코빙턴 호에 승선하였을 때는 다시 육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 수송선은 독일군 U보트가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생나제르 항구에서 4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좌초했고 결국 돌아가는 항해 중에 격침되었는데, 이 시점에 맥아더는 이미 부대병력을 해안가로 인솔하고 있었다. 비록 그는 공식적으로는 레인보사단의 참모장이었으나 실제로는 한시적인 지휘관이었다. 사단장 만은 병들고 늙은 몸을 침대에 의지하고 있었다. 마침내 12월 19일 퍼싱은 찰스 T. 미노허 소장을 레인보사단의 신임 사단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맥아더 휘하의 병사들은 그를 우상처럼 신봉했다. 그는 다른 고급장교들에 비해 병사들과 연령차이가 적었고, 병사들이 자기를 “동료(Buddy)”라고 부르도록 부추겼고, 그들과 불편함과 위협을 함께 나누었으며 그들이 자기를 받드는 것처럼 그도 그들을 받들었다. 또 그는 작전, 정보, 행정 등에 관한 권한을 소령, 중령 등에게 많이 위임했다. 즉, 그는 참모들이 그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 나갈 수 있게 됨으로써, 자신은 자유로이 공격병력과 함께 무인지대를 건너 진격하기를 원했다.
레인보사단은 3월 9일 야간 기습공격계획을 세웠다. 미노허의 정식 승인하에 맥아더는 아이오와 대대와 합류하여 살리엥 뒤 페에 있는 독일군 참호를 협공하기로 했다. 공격 개시 5분 전 프랑스군의 60개 포대가 방어를 위해서 집중포화를 쏟아붓기 시작했고, 공격시점이 되자 맥아더는 공격용 사닥다리에 올랐다. “나는 올라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참호 위로 올라가 엄호 없이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중앙을 돌파해 나가는 것은 마치 불붙은 용광로 속을 달려가는 것 같았다. 공포의 10초 동안 나는 병사들이 나를 따라오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채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잠시나마 부하들을 의심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깨달았다. 순식간에 병사들은 내 주위로, 내 앞으로 총검을 번쩍이며 적을 향해 산사태처럼 쇄도했다. 아군은 적의 진지를 탈취했다.” 이 결과로 맥아더는 자신의 ‘냉철함과 탁월한 용맹성’에 대해 청동수훈십자장을 받았다. 맥아더의 전설은 점점 그 크기를 더해갔다. 병사들은 그를 “미 원정군의 다르타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가 제6감(초인간적인 감각을 말함)을 지니고 있는 덕분에 불사신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귀영(Call to Quarters 1919~1935)
전쟁이 발발하면 웨스트포인트는 시련을 겪는다. 1917년 대독 선전포고가 발표되자 3, 4학년 생도들은 바로 임관되었다. 나머지 생도들은 1918년에 임관시켰지만 공병단장은 훈련되지 않은 자들을 장교로 수용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정전 뒤 제일 마지막에 임관된 생도들은 다시 사관학교로 복귀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사관학교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육군참모총장 페이튼 C. 마치는 1919년 봄, 웨스트포인트가 ‘재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맥아더에게 교장직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가 교장이 되고 나서 생도들은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여유가 생겼다. 왜냐하면 맥아더가 제일 먼저 개혁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생도 각자가 매월 5달러씩 돈을 쓸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주말엔 6시간 외출허가를 받았고 여름철에는 2일간 외박허가를 받았다. 우편물에 대한 검열도 철폐되었다. 신고식은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는데 신입생들을 길들이는 동안에는 상급생도들이 아니라 장교들이 반드시 임석하도록 했다. 완고한 동창생들은 맥아더가 관대함이라는 세균을 유포시켜 웨스트포인트를 부패시키려 한다고 항의했다. 재임 두 번째 해에는 좌절에 좌절이 겹쳤다. 교수진을 개혁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 스타디움 건설 계획과 생도 규모를 2배로 증원하려는 계획이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아마도 그가 이룬 최대의 업적은 당시의 생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 생도들 가운데 리먼 렘니처와 맥스웰 테일러가 후일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호이트 반덴버그와 토머스 D. 화이트는 공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21년 참모총장이 된 퍼싱은 웨스트포인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와 그의 참모들은 사관학교의 시계를 옛날로 되돌려놓고 싶어 했다. ‘삐친 옛날 졸업생들’의 분노와 펄펄 끓는 교수단의 자극을 받아 그들은 이미 맥아더의 후임 교장으로 프레드 W. 슬레이든 준장을 선정해 놓았다. 결국 퍼싱은 1922년 1월 맥아더를 필리핀으로 전출시킨다고 공표했고, 6월 하순 맥아더는 슬레이든에게 넘기고 퇴임하였다. 그의 새로운 임무는 만리라 군구와 필리핀 스카우트여단을 지휘하는 일이었다.
맥아더는 두 번째 별을 1925년 1월에 달았고 같은 날짜로 새로운 직책을 부여받았다. 그는 내국 근무의 명을 받고 귀국하여 제일 먼저 애틀랜타로 가서 아버지가 옛날에 전투를 치렀던 케니소 마운틴, 피치 트리 크릭 등지를 돌아보고 나서 볼티모어로 갔다. 그리고 1927년 9월 중순 미국 올림픽위원장이 갑자기 쓰러지자, 웨스트포인트 시절 맥아더가 운동선수들을 강력히 지원해준 사실을 알고 다른 위원들이 위원장직을 제안했다. 맥아더는 즉시 수락했다. 미국 선수단은 17개의 신기록을 세웠고 2, 3등이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맥아더가 대통령에게 올림픽에 대한 보고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닐라로 가서 필리핀에 있는 모든 병력을 지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국기를 향하여(To the Colors 1935~1941)
필리핀에서 복무 중, 1936년 8월 말라카냥 궁에서는 연방국의 대통령 부인 오로라 케손 여사가 맥아더에게 황금 지휘봉을 바치는 정교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맥아더가 이제 필리핀 연방국의 원수가 된 것이다. 그런데 맥아더는 1937년 9월 멀린 크레이그 참모총장에게 사임서를 보냈다. 맥아더는 자신이 “후배 장교들의 승진”에 걸림돌이 되고 있고, 또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복무 기간 중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사태는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사임을 수락하는 전문에서, 맥아더의 군에서의 생애는 “미국 역사의 찬란한 한 장”이었다며 “힘들여 얻은 여생을 행복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라고 축원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교신이 흔히 그렇듯이 그것은 눈속임에 불과했다. 워싱턴에는 맥아더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들이 있었다. 크레이그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프랭크 머피도 그중 하나였는데, 머피는 필리핀이 맥아더의 지휘 아래 ‘군사화’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최종 마무리로 크레이그는 맥아더에게 “장군은 만 2년 동안의 해외근무를 마쳤으므로 이제 귀국해서 국내에서 임무를 맡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통보했고, 이 통보를 받은 다음 맥아더는 사임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한편 1940년에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는데 그해 봄 프랑스가 함락되자 아시아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일으켰다. 지난해에 일본은 중국의 동부연안 전체를 점령하고, 이제 베트남 북부를 점령하여 필리핀의 측면을 포위했고, 9월 27일에는 3국군사동맹(독일, 이탈리아, 일본 간의 군사동맹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베를린-로마 추축에 가담했다. 이제 공은 워싱턴의 앞마당에 있었다. 그리고 워싱턴은 드디어 그 점을 인정할 채비에 들어갔다. 전쟁성의 전쟁계획부가 필리핀 내의 미군 증강의 필요성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일찍이 1938년 가을 뮌헨 회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맥아더에게는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1937년 말 이래 맥아더는 연방국의 피고용인 신분에 불과하므로 비밀정보를 알아야 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지금 회고하면 실제로 필리핀이 일본의 맹공격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미국이 저지른 모든 대실책 가운데 최악의 하나는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를 때까지 미군의 지휘계통을 계속해서 이원화된 상태로 놓아두었다는 점이다. 한쪽에는 맥아더 원수가 원주민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미군과 미군의 역할을 수행하는 필리핀 스카우트로 구성된 필리핀 주둔 미군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연방국 원수와 필리핀 주둔 미군사령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