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안병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안병진 지음
메디치 / 2016년 7월 / 271쪽 / 16,000원
1부 문명 전환기의 징후들 : 트럼프, 샌더스, 그리고 오바마
트럼프와 샌더스의 기적 : 동시대 문명에 대한 반작용
“그렇소, 나는 사회주의자요” - 버몬트 주가 낳은 진보 포퓰리스트, 샌더스: 2016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 대선 유세 현장을 찾았다. 이제 대학생이 된 딸은 이번 여정 내내 한국에서 보낸 어린 시절(그룹 빅뱅을 포함하여)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난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빅뱅의 무대만큼 열정적인 콘서트를 보았다. 바로 2016년 1월 31일 디모인의 그랜드뷰 대학에서 열린 버니 샌더스의 유세 현장이 그것이다. 마침내 샌더스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 그 열기는 하늘을 찔렀다. 현장에 있던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눈앞의 현실이라기보다 마치 영화 「불워스」의 한 장면 같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재선을 앞두고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의 눈치를 살피던 한 중도주의자 상원의원이 어느 날 갑자기 진짜배기 진보 정치가로 변신하여 대활약하는 코미디물이다. 암살을 가장한 자살을 염두에 두었던 탓에 거칠 것이 없어진 제이 빌링턴 불워스 상원의원은 정치권의 위선에 관한 비판을 신랄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토해낸다. 마치 불워스처럼 유세장의 샌더스는 일부 독점 은행의 국유화 등 도저히 미국 주류 정치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위험천만한 말들을 속사포 랩으로 쏟아냈다. 그때마다 유세장은 청중들의 가슴속에서부터 우러나는 환호로 뒤덮였다. 과거 유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미국이 몇 달 만에 사라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도대체 미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사실 우리가 눈을 감았고 주류 미디어가 외면했을 뿐, 샌더스는 수십 년간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그는 1981년 벌링턴 시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때부터 주류 언론들은 벌링턴 시를 일명 ‘벌링턴 인민공화국’이라 부르며 붉은 낙인을 찍었다. 그러나 이들이 조소를 보내는 동안에도 그는 진정으로 벌링턴 시민을 위한 민생 정치를 꾸준히 실천해왔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시가보다 낮게 주택을 공급하거나 대형 유통 체인에 맞서 소규모 유기농 협동조합을 유지하면서부터 주민들의 인식은 바뀌어갔다. 벌링턴 시민들은 이러한 ‘생활 정치 사회주의’를 통해 자신들의 삶이 개선된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샌더스의 강력한 지지층으로 결속되었다.
“물고문 정도 가지고 되겠냐?” - 뉴욕이 낳은 ‘백만장자 포퓰리스트’: 동구의 슈퍼스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9ㆍ11 테러 직후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아연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고문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방송의 공적 토론의 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상식에서는 진보적 논객이라면 당연히 이 이슈 자체를 토론의 대상으로 삼지 말았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이 주제가 토론의 무대에 오르면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야만 사회로 향하는 문의 봉인이 뜯기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지젝의 불길한 예감은 옳았다. 나는 9ㆍ11 테러가 발생했던 당시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5년 남짓한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미국에서 몇 개월을 보내면서, 나는 내가 과거에 알았던 미국은 이제 사라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9ㆍ11 테러 여파로 2004년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유권자들은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 강경 보수주의자들인 네오콘의 손을 들어준 부시조차 이슬람계 이민자들에 대한 관용을 호소했다. 미국인이라면 공적인 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마지노선이 그들을 자제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트럼프는 이슬람계와 멕시코계 이민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노골적으로 막말을 쏟아내고 있다.
사실 불길한 예감을 가진 이가 지젝만은 아니었다. 한국어로도 번역된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의 저자인 세계적 석학 로버트 라이시 역시 2010년에 불길한 예언을 한 바 있다. 그는 이 책에서 2020년 대선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을 축으로 하는 양당제는 무너진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면서 양당의 후보가 아닌 제3당의 참주 선동가가 대통령이 되어서 미국 역사상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앞서 예견한 라이시조차도 당황할 정도로 지금 미국의 지축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처럼 백만장자 포퓰리스트에게는 사회의 기둥이 흔들리는 시기가 곧 기회의 땅이 된다.
트럼프가 등장하기 전 미국은 이미 1992년에 로스 페로라는 백만장자 포퓰리스트를 통해 기업주의 국가 리더의 모델을 선보인 바 있다. 그는 민주, 공화 양 정당의 정치를 싸잡아 무능하고 자기들의 잇속만 차리는 기득권층으로 매도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집권하면 성공한 기업가로서 효율적으로 국가를 운용하겠노라 약속했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대중의 정치적 반감을 이용한 정치를 ‘반정치의 정치’라 부른다. 트럼프는 로스 페로가 극단적으로 진화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는 더욱더 포퓰리스트의 본질에 충실하다. 그의 발언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공화당의 전통적 분파처럼 화석 연료에 기반한 경제를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경영자들의 보수 삭감과 부자 증세를 말하기도 한다. 때때로 트럼프는 샌더스처럼 금권정치를 거부하기도 한다. 트럼프는 후원을 받는 잭 부시나 다른 후보들에게 ‘후원자에 대항하는 발언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던지며, 본인은 자기 돈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반금권정치의 대표 주자라고 주장한다. 백만장자가 반금권정치라니 기괴한 논리이다. 하지만 유권자들에게는 이 논리가 먹힌다.
굳이 트럼프와 그 지지층의 정책 지향성에서 일관성을 찾자면, 기존 공화당 정책 지향의 삼두마차, 즉 문화적 보수주의, 시장주의, 국제 개입주의와는 다소 구별되는 이른바 ‘레드넥(redneck) 보수주의’이다. 레드넥이란 ‘땡볕에 벌개진 목덜미’를 뜻하는 말로, 미국 남부의 백인 하층 노동자를 비하하는 용어이다. 이 레드넥 보수주의자의 핵심적인 심성은 잘나가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자신이 처한 삶의 기반에 대한 불안감이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히스패닉 등 새로운 이민자층과 국제무역협정 때문에 야기되었다고 믿는 일자리 축소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분노이다. 이들은 미국 우선주의 경향이 매우 강하여 미국의 엘리트들이 다른 나라를 지원하고 지구적 질서를 형성하느라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 부어 자국민의 삶의 질이 악화된다고 믿는다.
대통령 중심주의 대 의회 중심주의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그렇다면 이러한 샌더스와 트럼프 현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미국 정치와 경제의 극단적 양극화가 이 강력한 포퓰리스트들을 만들어냈다는 분석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이 이례적인 현상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환경은 주체들이 전략적으로 선택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샌더스와 트럼프 현상의 뿌리는 소위 동시대 문명이라 일컫는 오늘날의 정치 질서에 대한 반작용이자 근대 초기로 돌아가고자 하는 복고적 열망이다. 그런데 나는 이 열망이 미국 리버럴들의 ‘대통령직에 대한 집착’과 공화당의 ‘의회 장악에 대한 집착’이라는 전략적 선택에 대한 반작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현상이라고 본다. 샌더스는 1%에 대한 99%의 강력한 저항에 의해 탄생한 뉴딜 민주주의 정치 질서로 돌아가고자 한다. 비록 루스벨트의 진보주의가 사회민주주의로까지 발전하지 못한 것을 두고 좌파 일각에서는 비판하고 나섰지만, 이후 트루먼, 케네디, 존슨 등으로 이어지는 뉴딜 민주주의와 시민 민주주의 시기는 미국 리버럴들에게는 영광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1968년 닉슨의 집권 이후 리버럴들은 비록 의회에서는 주도권을 가졌지만 대통령 선거에서는 그리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닉슨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지미 카터가 잠시 집권했을 뿐, 허버트 험프리(1968년 대선), 조지 맥거번(1972년 대선), 월터 먼데일(1984년 대선), 마이클 듀카키스(1988년 대선) 등 수많은 대선 패배자들을 낳았다.
대선에서 소수당이 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 민주당은 고투했고, 그 과정에서 네오 리버럴 세력들이 탄생했다. 이들이 바로 빌 클린턴, 엘 고어 등으로 대표되는 혁신 세력으로, 이들은 시장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결국 클린턴 등 네오 리버럴들이 선택한 길은 시장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버린 제3의 길이었다. 199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인기를 끈 제3의 길은 정부가 복자 개혁에서 시장의 역동성을 활용하여 진보주의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결국 클린턴을 필두로 한 네오 리버럴 세력은 이 제3의 길을 통해 과거 운동권 정당을 탈피하고, 훨씬 더 매력적이고 집권 가능한 정당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여기에 과학적 선거 마케팅이 결합하여 민주당은 과학적인 선거 전문가 정당으로 진화한다. 이로써 1992년, 마침내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하던 불임 정당의 시대를 마감한다.
하지만 이 혁신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시장에 우호적인 네오 리버럴 진영은 이윤율이 저하된 자본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제조업 중심에서 금융자본주의로 변모해가는 흐름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라구람 라잔이 『폴트 라인』에서 지적하였듯, 2008년 금융위기의 직접적 원인으로 거론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결국 그 맹아는 클린턴 시절의 대출 규제 완화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선거 전문가 정당으로의 완성은 민주당의 원래 정신인 운동권 정당의 혼을 잃어버리고, 오직 집권과 지지율 유지에 매달리는 문화를 낳게 된다. 샌더스 등 좌파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비난하지만, 전통적 리버럴들로서는 제조업이 퇴조해가는 자본의 위기를 돌파하고 진보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집권할 수 있도록 고민한 결과였을 뿐이다.
민주당이 이렇게 동시대 정당으로 진화하는 것에 샌더스보다 먼저 강하게 경고한 첫 번째 주자는 버몬트 주의 하워드 딘 주지사였다. 그는 민주당의 중도적 성향, 선거 전문가 정당 경향에 맞서 진보적인 풀뿌리 시민정치운동을 시도했고, 이는 이후 오바마 열풍의 토대가 된다. 그런데 하워드 딘과 오바마가 풀뿌리 정당으로 민주당을 혁신해야 한다고 이슈를 제기한 정도라면, 샌더스는 아예 미국 민주당의 현대적 진화 자체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샌더스는 20세기 초 뉴딜 민주주의 시대의 정신을 오늘날로 불러오고자 한다. 이는 곧 아르마니 양복을 말쑥이 차려입은 금융 자본가와 선거 전문가의 민주당이 아니라,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 대중과 풀뿌리 운동가들의 진보 정당이다.
샌더스가 동시대 리버럴들의 대통령직 장악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불러온 부작용에 대한 좌파의 저항이라면, 트럼프는 우파의 그에 대한 반응이 낳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우파는 리버럴의 대통령 장악에 맞서 자신들의 공고한 성채를 의회에 쌓고자 집착했다. 트럼프 현상은 이 집착이 야기한 부작용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토머스 샬러에 따르면, 공화당은 1994년에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기치 아래 강경한 보수주의 아젠다를 내걸고 의회를 장악한다. 일명 ‘깅그리치 혁명’이라 불리는 의회 장악 이래로 공화당은 점차 대선 대신에 의회 중심의 정당, 특히 하원 중심 정당으로 변모하였다. 그런데 이는 우연이 아니라 의원들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이다.
한편 의회를 장악했음에도 대선에서 연이어 패배해 붙임 정당이 되면서 공화당 인사이더들은 2013년에 「성장과 기회 프로젝트」를 발간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대선에서 붙임 정당 이미지를 쇄신하고 주지사 출신의 통합적 리더가 당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주지사들은 깅그리치 하원의장 등 의회 내 강경파와 달리 중도적인 지지층까지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 예비경선에서 공화당 주지사들은 대부분 조기에 몰락해버렸다.
오늘날 리버럴과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조차 통제하기 힘든 샌더스와 트럼프의 등장에 짜증을 내거나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반면에 많은 유권자들은 이 권태로운 동시대 정치에 맞서 리얼한 모습, 진짜 욕망을 드러내는 이들에게 환호성을 지른다. 이 급진적인 샌더스와 트럼프의 복고적 현상의 시대에 중도주의자에 불과한 오바마의 신드롬은 도대체 또 무엇인가? 거대한 전환을 제대로 감지하기 위해서는 레임덕을 불식시킨 오바마 신드롬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레임덕이 없는 대통령? : 오바마의 기사회생
“나는 간디가 아니다” - 오바마의 오판과 추락, 그리고 놀라운 선언: 오바마의 집권 1기는 클린턴의 중도적 관리 노선을 연상시켰다. 이에 반해 국제 노선에서 리버럴들은 오바마에게서 악몽 같은 부시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이 아니라 마치 국제연합(UN) 사무총장 같은 행보를 보였다. 오바마는 지구적 상호 공존ㆍ공영의 레토릭을 실제 기존 적성국과의 수교를 통해 구현하려고 했다. 대표적인 정책이 소위 악의 축인 이란을 대상으로 한 평화번영 정책이다. 그의 다음 행보는 쿠바로 향했고, 역대 어느 대통령도 성공하지 못한 쿠바와의 관계 회복도 임기 말에 가서 성공한다. 이제 이란에 이어 쿠바도 서방의 자본주의적 네트워크에 포함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화번영 정책의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임기의 대부분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실제로 그는 부시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드론 공격을 늘렸다. 민간인 살상이라는 ‘부수적 피해’를 야기하는 위험천만의 공격 방식을 말이다. 심지어 그는 미국의 민권운동가 앞에서 ‘예방적 검거’의 필요성을 이야기함으로써 마치 부시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이런 충격의 결정판은 적성국가 지도자 암살의 부활이었다. 오바마는 국제법을 어기면서까지 파키스탄 영공을 비밀리에 넘어 오사마 빈 라덴을 암살하고, 그를 아무도 모르게 바다 속에 수장시켰다. 이제 집권 2기를 앞둔 시점에서 진보 아젠다도, 심지어 재선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다.
기사회생 이후 자본과 기술, 리버럴의 놀라운 혁신연합: 이러한 상황에서 오바마의 재선은, 그것도 여유 있는 승리는 이해하기 힘든 기적과도 같았다. 이 예상치 못한 낙승은 오바마 진영의 효과적 선거 전략 및 가공할 만한 기술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들은 당시 선거 구도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기반해 선거 전략을 짰고, 최첨단 기술로 그것을 구현했다. 다시 말해 오바마는 비록 그의 성과에 대해 의문을 느끼는 지지층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도 극단적으로 복고에 기운 공화당의 과거 지향성을 활용하였다. 그들은 2012년 대선을 ‘과거로의 퇴행 대 미래로의 전진’이라는 적절한 구도로 전개했다.
위대한 배우의 부활: 왜 여전히 50%가 넘는 미국인들은 임기 말 레임덕 시절에도 오바마에 대해 변함없는 지지를 보낼까? 캠페인 과정에서 오바마의 유세를 본 어느 시민의 다음과 같은 반응은 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오바마에게는 무언가가 있어요. 그가 나의 마음속 깊숙이 파고들었답니다.’ 그런 점에서 오바마의 부활을 단지 정책 아젠다들의 놀라운 혁신으로만 이해한다면 반을 놓치는 셈이다. 우리는 그의 퍼포먼스가 가지는 탁월한 위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긴 논리적 연설이든, 한 컷의 사진용 미소이든, 퍼포먼스는 상징을 사용하여 설득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오바마는 특히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찔러야 하는 소셜미디어 시대의 소통에 매우 능하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논할 때, 흔히 평범한 정치가는 폴 크루그먼의 경제학적 논리나 어떤 현학적인 근거를 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바마는 가치를 담으면서도 트위터 시대의 호흡에 맞게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표현한다. “Go Try!” 굳이 우리말로 풀자면 “너희도 한번 최저임금으로 살아봐라!”라는 뜻의 이 한마디는 고단한 미국 국민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준다. 오바마 최고의 퍼포먼스는 단연 ‘어메이징 그레이스’ 연설이다.
연이은 총기 사망 사건에 분노하고 좌절한 미국인들에게 오바마는 이성주의적 정책 설교 대신에 갈기갈기 찢긴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잠시 침묵의 순간에 이어 놀랍게도 그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추도식에 모인 이들이 함께 합창으로 공명했다. 이 장면은 그 어느 할리우도 영화보다 극적이다. 그리고 오바마의 퍼포먼스에서 풍기는 진한 인간적 매력과 함께 주목할 점은 우아한 태도이다.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우아하고 진중한 오바마의 태도는 그가 펼치는 퍼포먼스의 위력을 배가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