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흔적을 걷다
정명섭, 신효승, 조현경, 김민재, 박성준 지음 | 더난출판
일제의 흔적을 걷다
정명섭 외 지음
더난출판 / 2016년 8월 / 403쪽 / 15,000원
1장. 이곳에 역사가 있었지
일본과 미국, 우리 안의 낯선 땅 - 용산 미군기지
용들이 사는 땅: ‘용산’이라는 지명은 말 그대로 용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어졌다. 그 이름처럼 용산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우리 역사를 향해 용처럼 불을 뿜었다. 용산은 한성의 배후지로서 한강을 거쳐 한성으로 들어오는 관문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자연스레 이곳에는 곡식들을 보관하는 창고들이 들어섰다. 평화롭던 이곳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은 구한말의 개항 때문이었다. 외부인들이 보기에도 용산은 한성의 문을 활짝 열어젖힐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무엇보다 넓은 평야였기 때문에 한성으로의 이동이 편하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1884년 조선 정부는 일본을 비롯한 외국 정부의 요구대로 용산을 개항장으로 지정했다. 5년 뒤 1899년에는 용산역이 세워지고 1900년에는 경인선이 완공되었다. 또 같은 해에 한성까지 연결된 전차가 놓였다. 근대화라고 부를 만한 변화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을 집어삼키고자 하는 열강, 특히 일본의 야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용산의 결정적인 변화 역시 일본에 의해 일어났다.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게 된 일본은 조선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그중에는 일본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지역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진해를 시작으로 전국의 섬과 포구, 토지를 점거했다. 용산도 그중 하나였다. 그들은 러일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에도 그곳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일본이 이렇게 점거한 땅은 전국적으로 975만 평에 달했다. 이로써 수많은 주민이 졸지에 생활 터전을 잃고 말았다. 일본은 헐값을 지불하고 이 땅을 계속 점유할 뜻을 비쳤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주민들은 조정에 몰려가 해결을 요구했지만 무력한 정부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중에는 용산 지역의 땅 300만 평도 있었다. 용산에는 1,000여 채의 가옥이 있었고, 농토는 물론 조상을 모신 무덤들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일방적으로 토지를 점거하고 무덤을 파헤치며 군사기지 건설을 강행했다.
주민들의 계속된 반발과 외국의 눈길을 의식한 일본은 점거한 땅의 일부를 반환하면서 생색을 냈지만, 용산 지역은 여전히 100만 평 넘게 차지하고 돌려주지 않았다. 한성 남쪽의 개화지였던 데다 경인선과 경부선이 지나는 곳이기에 한반도는 물론 대륙에 진출할 때도 요충지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은 이곳에 철도역뿐 아니라 대규모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병영과 보급창을 설치했다. 그리고 한반도에 주둔하는 두 사단 중 하나인 제 20사단과 조선주둔군 사령부를 설치했다. 조선을 무력으로 지배하기 위한 군사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용산은 이후 일본이 대륙을 침략할 때 중간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일본이 물러난 그 땅을 미군이 고스란히 차지했다. 일제가 사라졌지만 한반도, 특히 서울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장점은 여전했다. 1948년, 미군이 철수하면서 잠시 우리 곁에 돌아왔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미군에 의해 점유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부가 반환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군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용산 기지를 거의 대부분 사용 중이다. 이후 미군 주둔지 주변으로 도로가 깔리고 전철역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조성되었지만, 여전히 용산의 그 땅은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없는 곳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우리 손을 떠나면서 일본이 만들어놓은 각종 시설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게 되었다. 2013년 5월 13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용산 기지 유적의 재발견’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현재 용산 기지 내에는 132동의 일본군 관련 건축물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조사하지 못한 곳이 많기 때문에 수효가 늘어날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인지 복잡한 출입 절차를 걸쳐 미군 부대가 된 용산 안으로 들어갔을 때 대한민국 국토라는 느낌은 거의 받지 못했다.
용산의 일본군: 용산을 차지한 일본은 이곳에 총독관저를 비롯한 각종 시설을 집중적으로 건설했다. 경리과와 임시건축과를 설치하고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기지 건설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었다. 1단계 공사는 1913년에 종료되었고, 이후 두 개 사단이 한반도에 주둔했다. 그리고 그중 한 개 사단이 용산에 머물기로 결정된 1915년부터 2단계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마치 바이러스를 퍼뜨리듯 용산 곳곳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출입 절차를 마치고 용산 미군기지로 들어가서 맨 처음 만난 것은 주한미군이 사용 중인 야전병원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병원은 본래 조선을 통치하는 총독의 관저가 있던 자리였다. 러일전쟁을 치르고 남은 전비로 올린 2층 저택은 너무나 화려하고 거창해서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결국 당초 군사령관 관저로 만들어진 이 저택은 이후 조선 총독의 관저로 용도가 바뀌었다. 하지만 용산은 경성 시내와 많이 떨어져 있고, 전기세를 비롯한 관리비가 많이 들어 실제로 관저로 사용되지 않고 일본이나 외국에서 귀빈이 왔을 때 연회장으로 사용되는 정도가 전부였다. 결국 비용을 낭비했다는 비난을 또 받으며 세간의 기억 속에서 잊히다가 한국전쟁 때 파괴되면서 건물 또한 사라졌다.
1910년,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당연하다는 듯 조선에 주둔하는 군대의 수를 증강했다. 그러면서 이곳은 조선주둔군 사령부로 바뀌었다. 주둔군 사령관은 조선총독과 더불어 조선을 통치하는 데 쌍두마차 역할을 맡았다. 조선주둔군 사령관은 일본군 내부에서도 상당한 요직으로, 두 개 사단을 지휘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상당수의 헌병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는 자리였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은 만주와 중국에 대해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내며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은 대륙으로 향하는 통로 역할을 했으며, 조선주둔군 사령관은 본국 내각의 명령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서 중국을 침략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 모든 일이 이뤄지고 결정되었던 사령부 관저 역시 사라졌지만, 관저가 있던 근처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곳에는 총독관저와 사령부 관저를 연결하는 방공호 터널로 추정되는 시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공습에 대비하여 방공호 건설에 매달렸다. 군사기지인 용산에도 방공호를 건설했다.
용산 일대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간 후에도 이 지역에는 민간인의 마을이 남아 있었다. 쓸모없는 구릉지라고 생각해서 놔둔 것이다. 하지만 둔지리라고 불리는 이 마을은 1915년부터 시작된 2단계 기지 공사로 인해 사라졌다. 용산에 사단 병력을 영구 주둔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장교들이 머물 관사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둔지리 주민들은 지금의 보광동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관사들이 1915년에 세워졌다면 한 세기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외부는 벽돌로 만들었지만, 지붕에는 기와를 깔고 실내에는 다다미를 까는 등 일본인의 생활 습관에 맞도록 설계되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장소는 두꺼운 화강암으로 기단을 올리고 붉은 건물을 5미터 높이로 쌓은 위수감옥이었다. 1909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일본군 죄수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죄수들을 수용하는 감방과 간수들의 사무실 등이 만들어졌는데, 현재 미군은 병원으로 이용 중이다. 내부의 건물들은 대부분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미군의 건물들이 세워졌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는 간수들이 사용하던 청사와 감방, 그리고 병든 죄수들을 치료하는 병원 건물이 있었다. 특히 병원은 2층 목조건물로 서양 건축양식을 흉내 내서 만드는 등 굉장히 신경을 써서 지은 건물이었다. 이곳은 한때 헌병보조원이었다가 의병에 투신해서 맹활약한 뒤 체포된 의병장 강기동이 1911년 4월 17일 처형된 장소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 남한단독선거를 반대했던 백범 김구를 암살한 육군 소위 안두희가 1949년 8월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 수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안두희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육군에 복귀하면서 이곳에서 나오게 되었다.
여기까지 둘러보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사실은 전체 면적의 10분의 1도 돌지 못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적잖이 파괴되었고, 미군이 부순 것도 꽤 되었을 텐데 이렇게 많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지나온 역사의 무게감을 새삼 느꼈다.
일본과 미국, 그리고 우리: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제20사단의 핵심은 보병 제 78연대와 제79연대였다. 일본군 보병연대는 예하에 3개 대대가 있었고, 각 대대는 4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나란히 자리 잡은 두 개 연대는 각각 6개의 보병영과 연병장 그리고 부속건물들로 이뤄졌다. 한 개의 보병영에는 두 개 중대가 수용되었다. 보병영은 두 개 연대 모두 붉은 벽돌로 만든 2층짜리 건물이다. 나중에 지어진 제79연대 보병영의 난방설비가 보강되면서 굴뚝이 많아진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동일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제78연대 보병영은 현재도 형태가 잘 남아 있어 미군들이 사무실로 사용 중이다. 반면 제79연대 보병영은 해당 토지가 반환되면서 전쟁기념관이 들어서는 바람에 사라지고 한 개 동만 남았다.
제79연대 보병영 옆에는 미군이 세운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두 건물 너머로 전쟁기념관의 원형 돔이 보였다. 우리 땅이지만 오랫동안 우리 땅이 아니었던 지금 용산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의미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구도였다. 격동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곳에 서보니 역사가 단지 과거의 유물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용산은 미군기지로 사용되면서 시간이 멈춰버린 듯 했다. 그들이 무심하게 사용한 건물들은 우리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우리로 하여금 그 역사를 지금까지 기억하게 만들었다. 청나라가 탐을 냈고 일본이 차지했던 용산에는 이제 미군이 자리 잡고 있다. 달러로 결제해야 하고, 우편번호와 전화번호 모두 캘리포니아의 것을 사용하고 있는 이곳은 우리 근대사의 혼란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미군은 현재 평택에 새로운 기지를 건설 중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용산에서 벗어날 것이다. 한국에 반환될 이 땅을 앞으로 어떻게 보존해야 할지 논의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학계의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우리 근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이곳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앞서 반환된 지역에 있던 건물들을 부수고 전쟁기념관을 세운 우리의 모습을 보면 과연 미군이 돌려준 이 지역의 건축물들을 제대로 보존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역사에도 빛과 어둠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의식적으로 빛만을 기억하려고 한다. 새로 만들어질 국정교과서에서도 부정적인 서술이 사라진다고 했으니 근대사는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살던 땅에 일본에 세운 벽돌 담장이 있고, 여기에 분단을 초래한 전쟁의 기억이 얹힌 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일본이 만들어놓은 건물과 길들은 미국이 이어받아서 고스란히 사용 중이다. 용을 닮은 이 땅이 온전히 우리 것이 되는 날, 과연 우리는 아픈 기억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
들판 곳곳에 남아 있는 기억들
농민들의 피땀 위에 세우다 - 동척 목포 지점
식민지를 개척하다: 일본 영사관이었던 목포근대역사관에서 내려와 반듯하게 조성된 유달동 거리를 걸었다. 목포가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이 거류지로 삼았던 곳이어서인지 곳곳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동안 버려졌다가 목포근대역사관 별관으로 재탄생한 동양척식주식회사, 줄여서 동척의 목포 지점이었다. 이 건물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1908년 경성에서 설립된 이 회사의 목적은 이름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척식’은 식민지를 개척한다는 뜻으로,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단어다. 이 회사의 목적은 조만간 식민지가 될 조선을 경제적으로 수탈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을 불법적으로 위임통치하고 있던 통감부는 조선 정부를 압박해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창립위원에 조선인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친일 매국노들이었다. 그나마도 형식적인 선임에 불과해 모든 결정권은 일본이 행사했다. 창립자금은 주식 판매로 충당했는데, 일본에서는 큰 인기를 끈 반면 조선에서는 외면당했다. 일본에서 동척의 주식이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향후 조선의 토지를 장악할 회사였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척은 일본이 주도한 조선의 토지조사사업에서 발생한 막대한 국유지들을 무상이나 헐값으로 불하받았다. 이때 개인이 가지고 있던 사유지 역시 번거로움과 미비한 홍보로 인해 국유지로 편입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동척은 불법과 편법으로 얻은 막대한 토지를 조선으로 이민 오는 일본인들에게 분양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인들과 결탁한 소수의 지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농민들이 자기 땅을 빼앗기거나 토지 소유주가 바뀌는 일이 벌어졌다. 특히 이런 피해는 농경지가 집중되어 있던 삼남지방, 그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던 전라도에 집중되었다. 하루아침에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떠나야 했다.
일본이 조선을 넘어 만주와 중국으로 침략의 손길을 넓히자 동척도 그에 발맞춰 만주와 중국에 지점을 냈다. 그러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런 동척이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의 공격 목표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1926년 12월 28일,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조선에 잠입한 나석주는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곧장 지금의 을지로 2가 길가에 있는 동척으로 향했다. 수위를 총으로 쏴서 쓰러뜨리고 2층으로 올라간 그는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되고 말았다. 밖으로 나온 나석주는 추격해온 일본 경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 남은 탄환으로 자결했다.이처럼 동척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었으며, 농민들에게는 자신들의 고혈을 빨아 가는 대표적인 수탈 기관이었다. 경성에 있던 동척 본점은 일본으로 옮겨졌고, 한반도에는 경성을 비롯하여 아홉 개 지점이 생겼다. 일본인들과 친일 매국노들은 이를 성과와 성장이라고 포장했지만, 그것은 수많은 농민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수탈이었다. 동척은 불하받은 토지를 경작시키면서 막대한 소작료를 걷었고, 토지와 임야를 담보로 한 대부업에도 손을 뻗었다. 목포 지점은 전국의 동척 지점 중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걷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수탈을 하며 원성을 샀는지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마침내 1932년 10월 24일, 목포 지점에 50여 명의 농민들이 밀어닥쳤다. 전남 무안군 박곡면 주민들이 40리를 걸어온 것이었다. 이들은 동척이 자신들이 경작하던 땅을 빼앗고 다른 곳에 경작지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항의하러 방문한 것이었다. 목포 동척 지점은 봉명리에 수리조합의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공사를 진행 중이었는데, 이 농민들은 그 와중에 생활 터전을 잃고 말았었다. 또 같은 해 4월에는 100여 명의 주민들이 몰아닥친 적이 있었다. 애처로운 항의 방문은 12월에도 이어졌다. 항의 방문 이후 몇 가지가 합의되긴 했지만, 동척 목포 지점은 소액의 거주이전비만 지급하고는 이들을 외면했다. 농민들은 동척 목포 지점 앞에서 항의 시위를 이어갔지만, 차마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한 모습으로 시위는 끝나고 말았다. 그 사연을 알고 나서인지, 서구의 건축양식으로 지었다는 동척 목포 지점의 화려한 출입문을 보고 있자니 그 앞에서 울면서 항의하던 이름 없는 농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척 목포 지점을 먼발치에서 보며 가장 먼저 느낀 점은 단단하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이 된 조선은행 본점과 인천에 세워진 일본 은행들의 지점 건물에서 느꼈던 첫인상과 비슷했다. 돈이 오가는 금융기관이기 때문에 외관을 통해 견고하다는 느낌을 방문객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가혹한 수탈을 당한 농민들에게는 어떤 일에도 끄떡없는 철옹성으로 보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