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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에리히 프롬, 라이너 풍크 지음 | 나무생각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에리히 프롬 지음

나무생각 / 2016년 8월 / 207쪽 / 13,000원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가치와 규범이 보편적, 객관적, 일반적 타당성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입장은 정반대다. 나는 인류의 모든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들이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대체로 동의하였던 삶의 기본 규범과 가치가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이런 가치는 모든 인간에게 타당하며, 인간의 본성 자체와 실존의 조건에서 정당성의 근거를 찾는다.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만 살지 않는다.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문제를 떠안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할까? 내가 아는 한 이것들은 다 한 가지 질문이며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소수의 대답들이 인류 역사를 거치며 다른 시대, 장소에서 되풀이되어 왔고, 때로는 이런 형태, 때로는 저런 형태로 개념화되었던 것이다. 사실 종교와 철학의 역사는 이런 몇 안 되는 대답들의 역사나 시스템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는 대답을 해야 하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우리가 내놓는 대답에 좌우된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내가 하려는 말을 설명해 보겠다. 인간은 주변 사람들 및 자연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띨 수 있다. 전형적인 형태가 복종이나 권력 행사 혹은 마케팅 지향일 것이다. 사랑하는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이 방식은 인간의 본성을 고려할 때 유일하게 만족을 주는 방식이다. 사랑이란 그 사랑에 관여한 사람들의 온전함과 현실을 둘 다 보존하는 유일한 형태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복종하거나 그에게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사랑’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사람은 자신의 온전함과 독립이라는 인간의 기본 특성을 상실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에서는 타인과의 연관성과 자신의 온전함이 보존된다.

앞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윤리가 모든 인간에게 항상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윤리는 특정 국가나 특정 연령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각자가 살아가는 서로 다르고 특수한 상황이 있고, 그로 인해 동일한 윤리 문제의 다양한 측면들이 생겨날 뿐이다. 내가 여기서 다루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 세대 혹은 지난 세기의 윤리 문제를 되돌아보고, 과거의 악덕과 죄를 바라보며, 우리가 이 악덕과 죄를 뛰어넘어서 기쁘다고 단언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윤리 문제도 대부분 해결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지금도 과거와 모습만 다를 뿐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은 윤리 문제에 봉착해 있다.

요약해보자. 세상은 변했다. 19세기의 모든 악덕은 사라지면서 현재의 악덕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무엇이 더 나쁜지 비교해 보는 질문은 필요치 않다. 우리는 월계관에 취해 손을 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윤리 문제를 인식하며 전투를 다시 시작하여 반드시 승부를 가려야 할 것이다. 시선을 19세기의 윤리 문제로 돌리게 되면 현재 우리의 문제를 소홀히 할 것이고 그릇된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인간의 본성’ 혹은 ‘인간의 본질’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상대적으로 새로운 한 이론이 이 문제의 해결을 수월하게 하는 동시에 다시 어렵게 만드는 듯하다. 키르케고르, 카를 마르크스에서 윌리엄 제임스, 앙리 베르그송, 테야르 드샤르댕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는 사실, 인간이 자기 역사의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옛사람들은 우리의 삶은 창조에서 우주의 종말까지 닿아 있으며, 인간은 삶의 어느 순간에 구원을 얻거나 벌을 받기 위해 그 세계에 끌려 들어갔다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철학과 심리학에서는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부단히 흐르는 과정으로 파악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개인이자 인간 종으로의 자신을 창조한다고 보았다. 제임스는 정신의 생명은 ‘의식의 흐름’이라고 주장했다. 베그르송은 영혼의 깊은 밑바닥에서 생명이란 ‘지속’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다시 말해 개인적이고 비가역적으로 산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실존주의자들은 우리의 본질은 없으며 우리는 일차적 실존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인간이 역사적이고 시간에 묶여 있다면, 또한 시간과 더불어 시간 안에서 변하고 수정되는 만큼 스스로를 설계하고 만들어간다면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본질’은 거론할 수 없다. 이 경우 인간은 더 이상 이성을 갖춘 존재가 아니다. 사회적이지 않고 사회적이 될 것이며, 종교적이지 않고 종교적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본성은 어떻게 될까? 그래도 인간의 본성을 거론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나는 하나의 대답을 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는 인간의 본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 중에서 가장 현실에 맞는 대답인 것 같다. 이 대답은 또 두 입장이 극단적으로 갈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도 적합하다. 확정된 불변의 인간 본성이 있다는 입장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은 몇 가지 본질적인 속성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대답을 상수와 변수라는 수학적 개념을 이용해 설명할 것이다. 인류가 존재한 이후 인간에게는 변치 않고 동일하게 남는 것, 즉 본성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에게는 새로운 업적, 창의성, 생산성, 진보를 가능케 하는 다수의 가변적 요인이 있다. (나는 진보라는 말을 점점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의식의 꾸준한 성장으로 이해한다.)

나 자신은 인간의 본질이나 본성이 어느 정도는 - 동물의 실존과 달리 - 인간의 실존에 내재하는 모순에 처해 있다고 본다. 인간은 동물이지만 동물과 달리 본능이 그의 행동을 주관할 정도는 아니다. 인간은 지능을 넘어 - 지능은 동물도 갖고 있다 - 자신을 자각하지만 자연의 명령으로부터 달아나지는 못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기에 ‘자연의 변덕’이다. 이런 모순은 갈등과 두려움을, 더 나은 균형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불균형을 불러온다. 하지만 설사 균형을 찾았다 해도 그 균형에 도달하자마자 새로운 모순이 등장하고, 인간은 다시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된다. 인간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는 중요한 의견 일치를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인간이란 현존으로 인한 온갖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서 특수한 심리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에 끌려 들어온 육체적 존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자각하였고,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의식을 꾸준히 키웠으며, 삶을 목표를 가진 열린 길로 만드는 새로운 물질적, 영적 능력의 발전 가능성을 자기 안에 품은 유일한 피조물이다.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자신을 자각하고 자신과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진술하는 능력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능력이 인간 본성의 기본 요인이다.

한편 인간은 사물이 아니고 누구에게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한다고 했을 때, 현대 산업사회처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시대는 없다. 이 사회는 이성을 이용해 100년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방식으로 자연 지배를 끝마쳤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기술력을 통해 고무된 인간은 전 에너지를 물건의 생산과 소비에 집중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를 기계를 조작하고 그 기계에 조작 당하는 사물로 느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착취당하지 않는 그만큼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그러느라 자신이 인간임을 망각할 위험에 처한다. 따라서 인간 본질을 바라보는 전통적 시각을 새롭게 고민하기가 지금보다 어려운 때가 없었으며, 지금보다 시급한 때도 없었다.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유를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 비합리적 열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실제 두 개념은 상호보완적이다. 자유롭고 싶은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며, 둘은 - 칸트의 말대로 - 자기 목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자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신의 활동은 적합한 이념에서만 탄생한다. 반대로 고통의 상태는 그저 부적합한 이념 탓이다.”

여기서 ‘적합한 이념’이란 명확하게 명료한 이념일 뿐 아니라 그 기원을 아는 이념이다. 첫 번째의 자유는 의지에 따른 결정을 내포하며, 두 번째의 자유는 의식적 인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내적 해방이라는 의식적 인식이 아닌 의지의 자유를 거의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구체적으로 자유로운지, 얼마나 자유로운지의 문제이다. 따라서 자유는 사실이라기보다 가능성이다. 자유는 장애와 조건과 투쟁하여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 마르크스, 스피노자, 베르그송, 칸트, 프로이트, 밀까지도 자유를 쟁취한다고 했다.

자유의 이념은 인간의 사고 그 자체만큼 오래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자유를 잘 표현한 것이 플라톤의 동굴 비유가 아닌가 한다. 자기 발의 족쇄를 끊고 아무리 힘들어도 참으며 동굴의 가파른 벽을 기어올라 마침내 정의의 태양을 보겠다는 노력이 없다면 자유가 존재할까?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말했듯 - 인간 존엄성의 발견, 혹은 인간 본질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 유한성으로 인한 장애, 제약,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편 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든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아의 실현이란 무슨 뜻일까? 관념론의 철학자들은 지적 통찰을 통해서만 자아실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인간의 인격이 본성과 이성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이성은 본성을 억누르고 감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인격을 나눈 결과, 인간의 감정과 지적 능력은 제 역할을 못하게 되었다. 이성이 자신의 포로가 된 본성을 감시함으로써 스스로 포로가 되었고 그로 인해 인격이 두 측면 - 이성과 감정 - 이 모두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자아실현이 사고 행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인격의 실현을 통해, 모든 감정적 가능성과 지적 가능성이 활발하게 표현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가능성은 모두에게 깃들어 있지만, 겉으로 표현하는 만큼만 실현된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 자유는 통합된 전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심리학의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에 도달한다. 바로 자발성의 문제이다. 자발적 활동(spontaneous activity)이란 라틴어 어원 sponte의 뜻 그대로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을 말한다. 활동은 ‘어떤 것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활동이란 감정의 영역은 물론이고 지적, 감각적, 의지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지는 인간의 창의적 활동을 말한다. 한편 자발성의 전제 조건은 인격을 전제로 받아들이고 ‘이성’과 ‘본성’으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자아의 본질적 부분들을 억압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에게 명료해질 때, 삶의 다양한 영역을 근본적으로 통합시켰을 때에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발적 활동이 어떻게 자유에 대한 질문에 해답이 될까? 어떤 것으로부터의 해방인 소극적 자유만 있다면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되고 만다. 불신에 가득 차서, 연약하고 항상 위태로운 자아를 가진 채 세상과 멀리 떨어진 존재가 된다.

자발적 활동은 자아의 온전함을 희생하지 않고도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자아의 자발적 실현을 통해 인간은 새롭게 세상 - 인간, 자연, 자기 자신 - 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발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사랑이다. 하지만 자아가 다른 사람 속으로 녹아버리는 그런 사랑이나 다른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랑은 아니다. 그 사랑은 개인의 자아를 보존하며,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그런 사랑이다.

자발성의 다른 요인은 노동이다. 여기에서의 노동은 고독에서 도피할 목적의 강제적 활동이 아니며, 한편으로는 자연을 지배하려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만든 생산물을 우상화하거나 이 생산물의 노예가 되는 활동도 아니다. 인간이 창조의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노동이다. 자발적 활동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이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 개인은 더 이상 고립된 원자가 아니다. 그와 세상은 질서정연한 전체의 부분이 되고, 그는 세상에서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얻게 되며, 그럼으로써 자신과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도 사라질 것이다.

개인이 자신과 세상 속에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의혹을 극복하고 자발적 체험의 행위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면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면, 개체로서 힘을 얻을 뿐 아니라 안전도 확보된다. 여기에서의 안전은 -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가 최초의 애착과 구분되듯 - 개인주의 전 단계의 특징인 안전과 구분된다. 이 새로운 안전은 외부에 존재하는 더 높은 힘의 보호에서 나오지 않는다. 새로운 안전은 역동적이다. 타인의 보호가 아니라 자신의 자발적 활동에 근거를 둔다.

두 유기체가 생리학적으로 다른 것처럼 두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개인적 토대 역시 동일하지 않다. 진정한 자아의 발전은 이런 특수한 토대를 바탕으로 한 성장이다. 이 한 사람에게 고유한, 이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씨앗의 발아, 유기적 성장인데, 유기적 성장은 타인의 자아가 가진 특수성을 자신의 자아가 가진 특수성 못지않게 최대로 존중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위험에 처해있다.

자발적 활동을 억압하여 진정한 개성이 발전하지 못하도록 침해하는 행위는 아주 일찍부터 시작된다. 실제 어린아이에 대한 첫 교육적 조치부터가 이미 그런 행위이다. 우리 문화에서는 교육이 빈번하게 자발성의 말살로 이어진다. 그래서 독창적인 정신 활동들이 다른 종류의 감정, 생각, 소망으로 뒤덮인다. (여기서 ‘독창적’이라는 말은 어떤 생각을 그전에 다른 누구도 해본 적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각의 기원이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약간 자의적이지만 거부감과 적대감 같은 감정들이 아주 일찍부터 억압된다는 사실에서 한 가지 예를 찾을 수 있다. 일단 대부분의 아이들은 주변 세계와의 갈등을 통해 일정 정도의 적대감과 반항심을 표출하는데, 주변 세계가 아이의 팽창 욕구를 저지하려 하고, 아이들은 보통 - 더 힘이 약한 존재이기에 - 순응할 수밖에 없다. 교육과정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이런 적대적 충동의 제거이다. ‘독창성’의 결핍은 감정과 사고뿐 아니라 소망에도 해당된다.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인간은 상품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팔면서 스스로를 상품으로 느낀다. 육체노동자는 육체의 힘을 팔고 상인과 의사, 사무직 노동자는 자신의 ‘인격’을 판다.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려면 ‘하나의 인격’이 되어야만 한다. 이 인격은 상냥해야 하지만, 인격의 주인은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기대들을 더 충족시켜야 한다. 에너지와 솔선수범의 정신도 갖추어야 하고, 그밖에 그의 특수한 위치가 요구하는 것들도 구비해야 한다.

다른 상품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기서도 이런 인간의 속성이 가진 가치는 시장이 결정한다. 심지어 그 속성의 존재까지도 시장이 결정한다. 한 인간이 제공할 수 있는 속성에 대해 수요가 없을 경우 그 속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사용가치가 있다고 해도 무가치한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자신감’, ‘자존감’ 역시 타인들이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암시에 불과하다. 인기나 시장에서의 성공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는 것은 ‘그’가 아니다. 수요가 있는 경우 그는 ‘누군가’이지만 인기가 없으면 그 누구도 아니다. 이렇듯 인격의 성공 여부에 자존감이 달려 있으므로 현대인에게 인기는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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