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레이만 시대의 오스만 제국
앙드레 클로 지음 | W미디어
술레이만 시대의 오스만 제국
앙드레 클로 지음
W미디어 / 2016년 2월 / 575쪽 / 24,900원
제1부 술탄들의 술탄
파디샤의 첫 승리: [아버지의 그늘] 유럽인들에겐 화려한 왕으로, 터키인들에겐 입법자로 불리던 술레이만 1세는 1494년 11월 6일, 흑해 바닷가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장차 술탄으로 즉위할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아무도 그의 부친(셀림)을 왕위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술레이만의 어린 시절은 당시 오스만 왕가의 다른 왕자들 및 상류층 자제들 대부분의 유년기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다. 생후 몇 년 간은 어머니와 시중을 드는 하녀들의 손에서만 길러진 뒤, 일곱 살부터는 아버지가 개인적으로 교육 방향을 잡아주었을 것이다.
15세가 되었을 때, 조부인 술탄 바예지드는 그를 지방 총독 ‘산작베이’로 임명한다. 이는 당시 오스만 제국 왕자들에게 통상 주어지던 관직이었다. 카라히사르 지역이 그의 관할 하에 들어갔으나, 왕위 후계자로 내정된 삼촌 아흐메드는 이곳이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아마시아에 가까이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여 술레이만을 볼루로 보낸다. 하지만 술레이만은 다시 한 번 다른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야 했다.
[형제 살해법]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지자, 바예지드의 살아있는 다섯 아들들은 모두 왕좌를 원했다. 장자인 아흐메드는 정치적 수완이 좋고 국민들의 사랑도 받았으나, 예니체리 - janissary, 오스만투르크의 상비(常備)ㆍ유급(有給)의 보병군단 - 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이어 코르쿠드 역시 예니체리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반면 셀림은 이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사파비조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셀림 1세의 군사적 재능과 호전적 성향은 예니체리의 환심을 샀다. 나머지 두 아들은 곧 세상을 떠났고, 이에 왕위 계승 전쟁은 세 아들 간의 싸움으로 압축된다.
셀림이 술탄 자리를 쥐기까지는 3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 했다. 코르쿠드는 아시아 대륙 쪽에서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 셀림은 유럽 대륙 쪽에서 부친에 대항했는데, 에디르네에서 패하여 크리미아로 몸을 피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흐메드가 세 번째로 항전을 벌이고, 이에 술탄은 셀림에게 지원 요청을 하고, 셀림은 곧 대대적으로 예니체리를 끌어들여 바예지드로부터 왕좌를 물려받는다.
술탄이 된 셀림은 코르쿠드와 다른 형제와 자식들을 강하게 압박한다. 그리고 일련의 처형 과정이 마무리된 후, 오스만 왕가에는 술탄과 그 자식들만 남았다. 술탄의 여러 딸들 가운데 하나는 대재상 뤼트피 파샤와 결혼했고, 다른 하나는 재상 무스타파 파샤와 혼인했으며, 나머지 하나인 하디스는 (술레이만 시대에 대재상이 되는) 리브라힘 파샤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남은 유일한 아들 하나가 술레이만이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셀림의 다른 아들들은 모두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술레이만이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셀림은 그를 우선 이스탄불의 총독 ‘카임마캄’으로 임명하고, 이어 에게 해 연안의 사루칸 총독에 봉한다. 그리고 1520년 나이 스물여섯 살에 술탄으로 즉위한다.
[술레이만의 관용책] 셀림 1세가 통치하던 8년은 공포의 시기였다. 하지만 신임 술탄 술레이만은 부친의 명으로 이스탄불에 감금된 이집트 상인 및 명사들 600명을 석방시키고, 찰디란 전투 이후 터키로 압송된 페르시아 장인과 상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했다. 이란과의 교역도 다시 자유로워졌다. 신임 술탄 술레이만은 독실한 무슬림이었으나, 광신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아파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적어도 집권 초기에는 그랬으며, 무슬림의 종교에서 지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기독교인에 대해서도 관대했던 술레이만은 이들에게 다만 조세의 의무 같은 의무 조항만 지켜주길 요구했다. 그 외 무슬림이 아닌 신하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무심하게 넘어갔다.
술레이만이 정권을 잡았을 때, 오스만 제국은 엄청난 부를 누리면서 동시에 이슬람 세계에서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맘루크 제국은 제압됐고, 시리아와 이집트는 병합됐으며, 칼리프이자 성지의 수호자로서 오스만 제국의 황제 ‘파디샤’가 누리던 특권은 어마어마했다. 카이로 지역 술탄들의 금고와 이곳에서 거둬들이는 수입은 이제 모두 오스만 황제의 차지였다.
[정적 카를 5세] 1512~1517년까지 열린 라트란 공의회에서는 차기 십자군 원정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고, 교황 레오 10세는 칙서에서 각국 군주 및 국왕들에게 터키족에 대항하여 성전을 준비하라고 권고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에스파냐와 두 시칠리아 왕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의 왕좌를 거머쥔 카를 5세는 타협을 모르는 완강한 기독교인으로, 자신의 첫 과제가 군주들의 힘을 모아 이교도에 대한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1520년 무렵, 기독교 세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시작된 싸움은 세기 말까지 계속됐으며, 전 유럽과 중동이 싸움터에서 서로 뒤섞인다.
[베오그라드 정복] 14세기 말 세르비아 및 불가리아 제국들이 멸망하고, 이어 15세기 비잔틴 제국이 사라진 뒤, 동유럽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실질적인 적수는 헝가리 왕국으로, 헝가리는 오스만의 공격을 막는 방어선 역할을 해주었다. 술탄의 파샤와 헝가리 국왕의 봉신들 사이에서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 같은 도화선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술레이만이 강화조약을 갱신하는 조건으로 제안했던 연례 조공 납부를 촉구하러 온 콘스탄티노플 특사를 헝가리 사람들이 죽인 것이다. 이에 술탄은 불같이 화를 내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1520년 내내 전쟁 준비가 이어진다.
마침내 1521년 2월 6일, 술레이만은 이스탄불을 떠나 자신의 첫 출정길에 올랐다. 사바 강에서는 아흐메드 파샤가 이끄는 대대가 사박으로 향하고, 다른 대대는 트란실바니아를 표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대재상 피리 파샤가 지휘하는 세 번째 대대는 곧장 베오그라드를 공격한다. 이후 대재상 피리 파샤가 베오그라드 성벽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술레이만이 나머지 군대와 함께 여기에 합류한다.
오스만의 통상적인 전술에 따라 포대는 멈추지 않고 성채를 폭격하고, 몇 주 간 공격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술레이만은 프랑스인 혹은 이탈리아인으로 보이는 어느 변절자의 조언에 따라 요새의 가장 큰 탑을 폭파하라고 지시한다. 요새를 지키던 수백 명의 헝가리인 및 세르비아인들은 용감하게 항전을 지속했으나, (한 쪽은 가톨릭 교도였고, 다른 한 쪽은 동방정교회 교도였으므로) 결국 ‘종교적 반감’에 따라 세르비아인들이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항복을 하고 만다. 헝가리인들 대부분은 몰살됐고, 세르비아인들은 콘스탄티노플로 호송되어 도시 주변에 거주했다.
오스만 군대의 승전보는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베네치아, 러시아, 라구사에서는 특사를 파견하여 술탄을 알현한 뒤, 축하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동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중 하나가 함락되면서 ‘헝가리 관문’이라는 기독교 성벽이 무너지자, 기독교 세계에서는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이 팽배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술레이만은 다시금 다뉴브 지역으로 향한다. 기독교 세력은 또 한 번 분열의 극치를 보여주고, 이에 다시 한 번 패배의 쓴맛을 보았으며, 이어 헝가리가 멸망한다.
[로도스 섬에서 추방된 성(聖) 요한 기사단] 정복자 메흐메드 2세는 1480년에 성 요한 기사단이 지키던 로도스 섬 앞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후, 술레이만이 지중해에서 가톨릭 기사단을 장악해야 할 명분은 전보다 더 늘어났다. 13세기 말, 아크레 함락 후 이곳을 떠나 로도스 섬에 정착한 이 수도승 전사들은 이곳을 막강한 군사기지로 만들고, 인근 해역에서 해적질을 했다. 반면 기독교 사나포선은 이곳을 피난처로 삼으며 기사단을 도왔다. 심지어 카이로에서 가잘리의 반란이 있었을 때에도, 기사단은 여기까지 건너와 가잘리에게 힘을 보태주었다. 이에 술레이만은 소아시아 연안의 수만 명에게 항구적 위협이 되는 이 강적과 결판을 내기로 결심한다.
그 즈음은 로도스 섬을 지키기 위해 자기 나라의 사람이나 선박을 희생시킬 의향이 있는 기독교 진영의 국가가 하나도 없었다. 프랑수아 1세 정도만이 가능하면 로도스 섬을 구하려는 의지가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번번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에 술레이만은 1522년 6월 1일, 릴 아당 기사단장에게 항복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내고, 나흘 후 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무스타파 파샤는 함대를 이끌고 이스탄불을 떠나, 7월 28일 로도스 바로 앞인 마르마리스 항구에 도착했다.
이후 8월 1일 전투를 개시되어 서로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치열한 전투를 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12월초 술레이만은 성 요한 기사단장에게 협상을 제안한다. 사흘 안에 로도스 섬을 넘겨주면 주둔군이 자유롭게 퇴각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성 요한 기사단장은 결국 항복을 하고, 생존자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기사 200명과 병사 1,600명이 채 안 되는 규모였다. 몇 년 후, 기사단은 카를 5세가 내어준 몰타 섬에 정착한다.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 이들은 그곳에서 머문다. 로도스 섬의 함락 소식은 유럽 전역에 비통함과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투르크 제국의 포대] 오스만 제국이 다른 이슬람 권역 국가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데는 포병대의 힘이 컸다. 대 투르크 제국의 포격을 견뎌낼 수 있는 요새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예니체리 보병부대와 사파히 기병중대를 당해낼 군대도 없었다.
[술탄의 총애를 받던 미남자 이브라힘 / 제국의 새로운 분란] 로도스 섬에서 돌아온 몇 달 후, 술레이만은 그동안 오랜 우의를 다져온 그리스 출신 이브라힘을 대재상에 봉한다. 당대 최고로 막강한 제국에서 서른 살도 안 되어 최고위직에 오른 그는 술탄의 여동생과 혼인을 하며 거의 술탄에 준하는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최고의 권세를 누리게 된 그 시점에 죄인으로 전락한 이브라힘은 술탄궁 벙어리 시종의 손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진다. 한편 이브라힘이 대재상의 직위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사실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술레이만의 화려한 업적: 이브라힘이 이스탄불로 돌아왔을 때, 이스탄불 내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술래이만이 이제 막 예니체리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였기 때문이다. 반란을 진압한 후 술래이만은 자신의 손으로 세 주동자를 숙청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원래 자리로 되돌렸다. 이어 술레이만은 돈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처벌은 엄중히 이루어졌다. 이후 예니체리들은 술레이만의 통치 기간이 끝날 때까지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제 파디샤의 칼날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페르시아일까, 헝가리일까? 이번에 그의 군대가 노리는 곳은 헝가리였다.
[모하치 전투에서의 대승] 1526년 4월 21일 월요일, 술탄은 10만 병력과 대포 300문을 이끌고 이스탄불을 떠나 베오그라드로 진격했다. 술레이만의 원정은 다뉴브 강을 따라 계속 이어지며 부다를 향했다. 도중에 도시 일록(Ilok)을 정벌하고, 에셱(Eszek)도 손에 넣었는데, 술레이만은 이곳에 드라바 강을 건너기 위한 다리를 짓도록 했다. 길이 280자(약 332m)에 폭 2자(2.40m)인 이 다리의 공사는 단 5일 만에 완료됐다. 그리고 군대가 다리를 건너면, 술레이만은 다리를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려 퇴로를 차단했다. 이어 오스만 군대는 늪지대와 이탄지를 지나 모하치 평원에 도달했다. 헝가리 국왕 로요슈 2세는 부다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 바로 이곳에서 술레이만을 기다렸다.
전투가 일어나기 전날 정오 무렵, 술레이만은 전시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국경 지역 주둔군인 아킨지 대장은 중무장을 한 기독교 진영 기병대와의 정면 공격을 피하고, 대오를 벌려 이들이 지나가도록 내버려둔 뒤, 이어 측면에서 습격하자는 작전을 제안했다. 술레이만은 이 같은 전략을 승인했고, 바로 이 작전이 전투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헝가리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대개는 습지로 파고들었다. 이 가운데 헝가리 국왕도 끼어 있었다. 술레이만의 완벽한 승리였다.
[술레이만, 헝가리 국왕을 임명하다] 헝가리 국왕 로요슈는 처형되고, 기병대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으며, 부다는 불에 탔다. 나라 안은 폐허가 됐고, 이 모든 불행에 더해 헝가리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까지 겪는다. 이 일은 약 20여 년 후 왕국이 독립적 지위를 잃어버리는 데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세계 최고의 절대군주] “타고난 군주에 하늘같은 위엄을 보이며 화려한 궁궐 한가운데에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이던 술레이만은 베오그라드와 로도스 섬, 모하치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고, 기독교 세력의 유럽 중심부까지 원정대를 이끌고 감으로써 사람들의 머릿속에 당대 최고의 군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즉위한 직후부터 그는 대대적인 건설 정책을 실시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모습을 달라지게 만들었고, 제국의 모든 대도시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또 연회나 의식 또한 성대하게 열었다. 술레이만은 화려하고 반짝이는 건 뭐든지 다 좋아했고, 금으로 수를 놓은 천이나 보석들도 무척 좋아했다.
다뉴브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계속되는 정복 전쟁: [바그다드 정복] 수니파의 오스만 술탄과 시아파의 이란 샤 사이의 반목은 아주 오래 전으로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1533년 가을, 오랜 준비 과정을 마친 끝에 이브라힘은 군대의 총사령관인 세라스케르 자격으로 비틀리스 및 이란령 아제르바이잔으로 출정을 떠났다. 하지만 크게 싸울 일은 별로 없었다. 이브라힘이 (지금의 터키 남부) 코니아에 당도하기도 전에 과거 타흐마스프를 배신한 아제르바이잔 총독이 비틀리스 반란군 총독의 머리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얼마 후, 반(Van) 호수 지역 사파비조 요새의 지휘관들은 술탄에게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왔다. 이브라힘과 그의 군대는 알레포로 방향을 잡고, 이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봄이 오자, 오스만 군대는 이란 서북부 타브리즈 지역으로 향했다. 그러자 족장들과 사파비조 주둔군 사령관들은 하나둘 항복 의사를 표해왔고, 1534년 7월 16일, 이브라힘은 타흐마스프가 이제 막 포기하고 떠난 사파비조 왕국의 수도 타브리즈에 입성했다. 이브라힘은 이곳에 요새 하나를 세우고, 주둔군도 정착시켰다. 두 달 후엔 술레이만도 이곳으로 합류했다. 술레이만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아제르바이잔으로 개선 행군을 했으며, 백성들은 저 멀리서 그에게 경의를 표해왔다. 타브리즈에서 길란과 키르반의 수장들도 술탄에게 무릎을 꿇었다. 키르반의 아들은 타브리즈의 총독으로 임명됐고, 이어 술탄의 군대와 이브라힘의 군대는 남쪽, 바그다드로 향했다. 며칠 후인 1534년 술탄이 도시에 입성했다.
제국의 쇠락기: [헝가리 전쟁] 1547년 콘스탄티노플 조약 이후 중부 유럽 문제는 뒤로 밀려나 있었다. 오스만도,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가도 다시 전쟁을 개시하는 것 말고도 다른 걱정거리가 많았다. 무스타파 왕자와 바예지드 왕자의 비참한 죽음 이후 술레이만은 페르시아와의 전쟁 문제로 꽤 정신이 없는 편이었고, 이에 따라 그에게는 다뉴브 유역에서 새로운 영토 정복에 매진할 여유가 없었다. 술레이만은 그저 주요 거점의 요새 강화에만 주력하는 정도로 그친다. 유럽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카롤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 서명한 후 얼마 안 가 1556년 아들에게 왕좌를 양위한다. 독일 내 신교도를 없애버리겠다는 그의 노력은 실패했고, 그는 아들인 펠리페 2세와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자신의 영토를 나누어주었다. 페르디난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 뒤, 페르디난트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은 막시밀리안은 술레이만이 이제 나이 들고 병약해졌다는 걸 알았다. 그는 독일 의회와 교황, 펠리페 2세로부터 받은 인적ㆍ물적 자원을 이용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노쇠한 술탄에게 패배의 쓴 맛을 안겨줌으로써 오래 전부터 유럽이 꿈꿔온 숙원을 풀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군대가 탄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보다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