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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강준만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강준만, 강지원 지음

인물과 사상사 / 2016년 7월 / 268쪽 / 13,000원



“빠순이 발로 차지 마라”: 빠순이에 대한 전 사회적 배은망덕



빠순이는 세대차별과 성차별 문제다: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라는 말이 있다. 미국에서 소파에 앉아 TV만 보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가리킨다. 카우치 포테이토는 TV시청이 취미인 사람들을 비하해 부르는 말일 뿐, 결코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이런 풍토에 저항하겠다는 듯, 미국에서 1980년대 역으로 카우치 포테이토라는 말을 긍정적 의미로 쓰면서 TV시청 취미를 옹호하는 집단적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TV시청을 나쁘고 해로운 습관처럼 여기는 것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누구 못지않게 TV를 열심히 시청해줌으로써 TV라는 사회제도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경멸만 당하는 카우치 포테이토들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했듯이, 취향은 계급이건만, 우리는 계급 비판은 금기시해도 취향 비판은 비교적 자유롭게 하는 경향이 있다. 계급적 경멸을 취향에 대한 경멸로 대체함으로써 사실상 대부분의 카우치 포테이토가 속한 낮은 계급에 대한 경멸을 하는 셈이다.

카우치 포테이토에 대한 경멸은 주로 계급의 문제지만, 빠순이는 주로 세대와 성의 문제다. 물론 계급의 문제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빠순이로 활약하는 10대 소녀들 가운데 20대 들어 빠순이 과정을 졸업하는 이가 많은 것에 대해 기성세대는 “철이 들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각 개인의 특성, 몰입의 정도, 처해 있는 상황 등에 따라 빠질을 계속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죽을 때까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집단 외부에서 사용하는 빠순이의 의미는, 명백한 비하와 조롱을 담고 있다. 빠순이라는 이름에서 추출할 수 있는 두 가지의 특성은 ‘어린 여자’인데, 이때 어리다는 것은 실제의 나이를 뜻한다기보다 개념적 정의다. 애초에 ‘오빠!’를 부르짖는다고 해서 탄생한 이름이지만, 빠순이의 연령대 스펙트럼은 비-빠순이들의 상상보다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오프라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빠순이들은 대체로 10~30대의, 객관적으로 젊은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사람들에게도 빠순이 하면 젊은 여성들만 보이는 법이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냐면, 우리 사회의 오랜 관습인 빠순이 혐오와, 요즘 들어 더더욱 기승을 부리는 여성 혐오는 상동관계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그렇다. 빠순이의 문제는 곧 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취향에 급을 매기려 드는 남성은 여성 수용자에 의해 흥행 성공을 거둔 대중문화를 폄하하면서 여성 폄하까지 곁들이는 일을 자주 한다. 호주 출신 방송인 샘 해밍턴은 한 힙합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길어야 2년밖에 음악을 듣지 않을 여성 팬들을 잡기 위해 힙합이 변질되고 있다”고 한탄했는데, 해밍턴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이런 식의 생각은 남성들 사이에서 ‘상식’처럼 자주 표현된다. 2013년 6월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관객 600만 명을 돌파했을 때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여성 관객이 김수현 얼굴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는 식의 평가가 난무했다.

이와 관련,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 김수아는 자신의 SNS에 ‘여성 팬들은 왜 그리 자주, 그리고 쉽게 무시당하는가’라는 글을 올렸다. “특히 남성적인 장르에 진입한 여성 팬들에게는 비난이 쏟아진다. 야구를 보는 여자는 얼빠(얼굴만 좋아하는 팬)임이 분명하고 룰에는 관심이 없으며, 힙합을 좋아하는 어린 여자들은 그저 래퍼 얼굴에 빠졌으리라는 확신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흥행에서 보듯 20, 30대 여성은 지금 대중문화 소비층의 거의 전부인데도, 그것에 대해 남자들이 뭐라 말하는 구도가 형성돼 있다.”

“넌 누구 닮아서 그 모양이니?” : 소속되고 싶은 열망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팬덤 공동체: 팬덤(fandom)은 팬(fan)과 ‘영지ㆍ나라’ 등을 뜻하는 접미사 ‘덤(dom)’의 합성어로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또는 그러한 문화 현상을 가리킨다. fan은 fanatic(광신자, 열광자)을 줄여서 쓴 말이다. fanatic은 temple(사원)을 뜻하는 라틴어 fanum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 종교적 개념이었다. 미국에서 fan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건 1889년으로 당시에는 스포츠팬만을 가리켰다. 그러다가 이후 배우, 가수 등에 열광하는 대중문화 팬으로 옮겨 갔다. 사실 팬은 결코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팬덤’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팬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관계의 문제다.

특정 스타를 혼자서만 좋아할 수 있는가? 그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열광의 경지에까지 도달하긴 어렵다. 열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스타에 대한 애정과 열광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중요하다. 이는 2015년 12월에 타계한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 메커니즘과 비슷한 이치다. 앤더슨은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 보았는데, 이는 민족을 머릿속에서 마음대로 상상하거나 꾸민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구성되고 의미가 부여된 역사적 공동체라는 뜻이다.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 공동체이다. 민족은 가장 작은 민족의 성원들도 대부분의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 친교의 이미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다.”

앤더슨은 민족의 구성과 의미 부여에 이른바 ‘인쇄자본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인쇄자본주의는 빠르게 늘어나는 사람들이 심오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연결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앤더슨은 특히 신문의 역할에 주목했다. 오늘날 ‘인쇄자본주의’는 ‘사이버자본주의’로 바뀌었지만, 친교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법은 같다. 팬질의 대부분이 스타의 생산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는 동시에 스타와 스타를 따르는 사람들의 언행에 관한 이야기를 생산하고 해석하고 공유하고 전파하는 것이 아니던가. 스타는 팬덤 공동체의 교주이지만, 근접할 수 없는 교주이기 때문에, 스타를 매개로 공동체 성원들 간의 관계가 중요해진다.

물론 ‘민족’과 ‘팬덤’이라는 구성단위가 작동 방식의 차이 때문에 팬덤은 친교의 이미지는 물론 실질적인 친교를 많이 나누기도 하지만,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다른 팬들과의 연대와 결속은 ‘상상의 공동체’ 모델로 설명할 수 있다. 손승혜의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의 초국가적 온라인 팬덤: 2PM 팬포럼 Wild2Day 회원 인터뷰의 근거 이론적 분석』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온라인 팬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느끼는 공동체로서의 심리적 속성들을 소속감, 심리적 유대감, 의식적 정체성, 공유된 가치, 영향력 등 모든 분야에서 기존의 지리적 ‘이웃’에 대해 느끼는 심리적 속성들과 유사한 차원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그 정도는 온라인 팬 공동체가 지리적 이웃보다 일관되게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황영찬ㆍ임준수의 「소셜TV 몰입 동기가 스포츠 방송 충성도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TV를 보면서 온라인으로 다른 시청자ㆍ제작진과 소통하는 행위가 해당 방송에 대한 몰입도ㆍ호감도를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황영찬은 “시청자들이 TV를 홀로 보면서도 SNS로 다른 시청자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가상적인 느낌을 받길 원한다는 것”이라며 “같은 결론이 예능 등 다른 장르 프로그램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스타가 아니라 모여 있는 우리들이다” : 팬덤의 창발



“우리들끼리 모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학교 공동체는 오직 성적순이고, 명문대를 진학해야 공동체의 영웅이 되는 메커니즘인 반면, 팬덤 공동체는 열정과 그 열정에 따른 노력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공동체다. 아니 인정을 받지 않아도 좋다. 내가 가진 열정과 같은 열정을 가진 또래들과 더불어 열정을 발산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양성희 기자가 2008년 연말 골든 디스크 시상식을 묘사한 칼럼은 그런 풍경을 더할 나위 없이 잘 그려냈다. 동방신기가 무대 위에 등장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공연을 보던 이군의 팬들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천운’이 따라주지 않아 공연장에 오지 못한 다른 ‘캉’들에게 시시각각 공연을 생중계하는 것이다. 그 ‘디지털 수다’ 속에 공연에 대한 도취감은 더욱 커지는 듯했다. 어쩌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연 못지않게, 공연의 열기를 다른 캉들과 공유한다는 집단 체험 아닐까. 동방신기에 열광한다는 것은 동방신기 자체에 열광하는 것에 더해 팬들 간의 강렬한 연대감에 매혹된다는 뜻일 수 있다.”

동방신기의 공식 팬클럽인 카시오페아가 서로를 ‘캉’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그들이 동방신기를 매개로 해서 세운 팬덤 공동체의 존속과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이 점을 날카롭게 포착한 양성희는 “팬 혹은 팬클럽의 세계는 현존하는 그 어떤 집단과도 다르다. 종교적 열정에 비견될 정도의 순수하고 맹목적인 열정 공동체다. 내부에 좀 더 ‘고수’, ‘열혈팬’이 존재하기는 해도, 실제 현실 속 계층ㆍ연령ㆍ지역ㆍ이념 등은 무화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적대적 현실 논리가 사라지고 자발성과 헌신과 우애가 앞서는, 공통된 취향과 애호의 세계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팬클럽이나 팬 문화를 팬과 스타의 관계로 한정해 보는 것은 반쪽짜리 이해라 할 수 있다. 팬덤은 스타에 대한 열광과 팬들 간의 연대에 의존해 구축된 그 무언가다. 현실의 무한경쟁 논리가 비켜가 타산적 관계에 지친 이들의 탈출구가 돼줄만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인간관계다. 여기에는 부모도 없고 교사도 없다. 여기서만큼은 자신들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사회적 고정관념과 질서를 강요하는 어떤 힘으로부터 벗어나, 같은 취향과 같은 욕구를 가진 ‘우리’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스타가 아니라 모여 있는 우리들이라는 것이다.”

“스타는 바뀌어도 ‘팬질’은 못 그만둔다”: “스타는 바뀌어도 ‘팬질’은 못 그만둔다”는 말처럼 추종대상을 어떤 스타에서 다른 스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스타’보다는 ‘우리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예외도 많을 것이기에 무난하게 표현한다면, “스타도 중요하지만 모여 있는 우리들도 중요하다”가 되겠지만, ‘모여 있는 우리들’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스타가 아니라 모여 있는 우리들”이라는 도발적인 표현이 필요하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데이비드 맥밀런과 데이비드 체이스는 이미 1986년 『공동체심리학저널』에 발표한 「SF 팬덤의 공동체 의식」이라는 논문에서 팬덤은 ‘소속감을 고취시키는 멤버십’, ‘멤버들의 개인적 생활을 통제하고 있다는 영향력’,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보상을 통한 결속력’, ‘다양한 상호작용과 강력한 결속력’, ‘공동체 의식을 통한 공유된 감정’ 등 4가지 측면에서 만족감을 얻음으로써 지속된다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 손승혜는 “결국 팬덤은 멤버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해가는 하나의 매개체이기 때문에 팬들은 언제든 다른 혹은 새로운 스타로 그들의 관심을 옮겨갈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스타는 하나의 매개체라는 점에 주목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적 현상에 대해서도 이해는 물론 공감의 정도도 높일 수 있다. 예컨대, 공연을 하는 가수의 노래를 일제히 열정적으로 따라 부르는, 한국 특유의 ‘떼창’은 어떤가? 많은 전문가들이 떼창의 이유를 한국의 집단주의에서 찾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떼창 역시 떼창을 하는 이들의 상호작용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떼창을 하는 이들의 그런 동질감과 연대의식은 잃어버렸거나 제대로 구경도 해보지 못한 채 막연히 그리워하는 공동체에 대한 향수나 욕구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집단주의와는 다르다. 떼창을 하는 일부 서양인들이 무슨 집단주의라서 떼창에 열성을 보이는 건 아닐 게다. 공동체라는 단어가 거슬린다면, 그 어떤 집단 소속에 대한 욕구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내가 우리 오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 팬덤 공동체 내부의 인정투쟁



왜 팬클럽은 수십 개로 나뉘어 존재하는가?: 스타라는 개념의 탄생 이래로 스타의 인기도는 곧잘 몇 개의 팬클럽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에 의해 결정되었다. 할리우드 스타사를 보면, 1930년대에 화려한 활약을 했던 클라크 게이블은 팬클럽이 70여 개에 이르렀다는 등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팬클럽을 하나로 합치면 훨씬 더 효율적일 텐데, 왜 70여 개나 난립했던 걸까?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이 질문이야말로 팬덤 공동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른바 ‘스타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혼잡비용’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김호석은 『스타 시스템』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팬클럽은 규모상 효용을 극대화하는 적정 규모를 넘어서면, 혼잡 비용이 증가하여 회원 수를 제약할 수밖에 없다. 팬클럽의 초기에는 회원 수의 증가에 따라 회비의 전체량이 많아져 팬클럽의 자금 사정이 좋아지고, 공유할 정보의 양도 많아져 효용이 증가하지만, 회원 수가 많아지면 혼잡으로 인한 편익의 감소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최적의 규모를 넘어서면 팬클럽의 회원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 대신, 동일 스타의 또 다른 팬클럽이 형성된다.” 그래서 슈퍼스타는 팬클럽이 단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로 분산되어 존재한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이는 팬덤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이 중요하다는 우리의 관점에선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소규모 그룹들의 핵심적인 특징은 서로 더 밀접하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에 따라 인정투쟁의 밀도도 높아진다. 물론 이 경우의 인정투쟁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친목을 중시한다. 팬들은 바로 그 점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클레이 셔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규모 그룹보다 소규모 그룹일 때, 사회적 밀도를 유지하기 더 쉽다. …… 작은 그룹은 큰 그룹보다 더 좋은 대화 환경이며, 모두가 한 가지 관점에 동의하게 되는 수렴적 사고에 더 쉽게 동참하게 된다.……합의와 인식의 공유를 이끌어내고 유지하는 데는 작은 그룹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던바의 수’의 원리에 따른 팬덤의 분화: 영국 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인류학적인 문헌을 통해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에 대해 ‘150이라는 숫자가 진정으로 사회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개인적인 숫자를 나타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런 종류의 관계는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우리와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는 그런 관계이다. 예를 들어 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을 때 초대받지 않은 술자리에 동석해도 당혹스러워 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 숫자이다.” 이 150이라는 수를 가리켜 ‘던바의 수’라고 한다.

던바는 조직에서 집단을 관리할 때 150명이 최적이며, 그 이상이 되면 2개로 나누는 것이 더 낫다고 했는데, 사실 대부분의 인간 집단이 150명 정도로 구성되었다는 수많은 증거가 있다. 대부분 군대도 약 150명의 병사를 기본 단위로 편성한다. 로마 군대가 그랬고, 오늘날의 군대도 그렇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육군 전투 중대의 규모는 150명에 근접했다. 던바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페이스북 친구가 1,000명이 넘는 파워 유저조차도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사람은 150명 정도이며, 그 중에서도 끈끈하게 소통하는 사람은 채 20명이 되지 않는다. 이 원리는 ‘넓고 얕은’ 온라인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소수의 지인들끼리만 메시지를 주고받는 ‘폐쇄형 SNS’에서도 원용되고 있다. 2011년 미국에서 등장한 폐쇄형 SNS인 패스(Path)는 인간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치가 150명이라는 이론에 근거해 인맥의 범위를 150명으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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