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6년 5월 / 357쪽 / 16,000원
이민과 사회통합
미국은 누구를 위한 땅이었나?_ ‘자유의 여신상’과 ‘헤이마켓 사건’
‘세계를 밝혀주는 자유의 상’: ‘자유를 열망하는 모든 이의 어머니’인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뒤 1886년 10월 28일 뉴욕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신상의 공식 명칭은 ‘세계를 밝혀주는 자유의 상’이었다. 고대 의상 차림에 횃불을 높이 든 여신상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에서 기증한 것으로 무게는 225톤, 지면에서 횃불까지의 높이는 93.5미터에 이fms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정치인 에두아르 르네 드 라불라예의 주도로 만들어졌고, 설계는 프랑스 유명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맡았다. 바르톨디는 고대 이집트의 사라진 유적 ‘알렉산드리아 등대’와 로마제국의 리베르타스(자유의 여신)상 같은 거대하고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기고 싶어 했다. 그의 꿈을 이뤄준 것이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입상은 1884년에 완성되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파리에 서있었다. 여신상을 분해해 배에 싣는 데도 엄청난 기술과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해체와 분해, 재조립을 맡은 사람은 5년 후 에펠탑을 건축하게 되는 알렉상드르 구스타브 에펠이었다.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항에 들어왔을 때부터 1902년까지 항구의 등대로 쓰였다. 당시 여신상 꼭대기의 불빛은 40킬로미터 밖 바다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미국 최초의 ‘전기를 사용한 등대’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여신상은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중국인에게는 기회가 전혀 없다: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것처럼, 미국은 과연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땅이었던가? 1880년대엔 550만 명의 이민자가, 1890년대에는 400만 명의 이민자가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왔지만, 모든 이민자가 ‘자유의 여신상’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베들로섬 근처의 엘리스섬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 있는 에인절섬과 설리번섬에 관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 정부가 교과서에서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 엘리스섬에 도착한 유럽계 이민자들은 간단한 입국절차를 마치고 곧 자유의 도시 뉴욕에 도착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1910년 문을 연 에인절섬 검문소는 아시아인 이민을 억제하기 위한 일종의 이민자수용소였다. 최고 3년까지 이곳에 갇혀 지내야만 했기 때문에 사실상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흑인 노예들은 설리번섬에 노예로 팔려왔다. 엘리스섬이 자유를 상징한다면, 에인절섬과 설리번섬은 수탈과 압박과 노예제도를 의미한다.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자유, 평등, 평화, 민주주의 등은 백인만을 위한 것이었다.
1880년 경 중국인 이민자들이 30만 명으로 늘어나 캘리포니아 인구의 10분의 1을 차지하자, 1882년 미 의회는 ‘중국인 배척법’을 만들어 중국인의 노동 이민을 금지했다. 이 법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자율 정부 구성에 필요한 동기를 제공할 두뇌의 용적이 부족하다’와 같은 중국인 비하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로도 중국인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백인들이 중국이 마을을 습격하여 단지 그들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살해하고 마을에서 내쫒았다. 법정에서는 중국인들의 정당방위권조차 용납하지 않았고, “기회가 전혀 없다(He doesn't have a Chinaman's chance))'는 서부 특유의 표현이 생겨날 정도였다.
백인들 중에서도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이를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전국 총파업 사건이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에 도착한 1886년에는 노동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1886년 5월 1일,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총파업이 전국 1만 1,500여 곳에서 약 35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는 당시로선 놀라운 사건이었다. 5월 1일이 메이데이(노동절)가 된 이유다. 시카고에서만 4만 여명이 파업에 동참했고, 5월 3일에는 경찰이 노동자들에게 발포해 6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날 헤이마켓 광장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해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시위 주동자에게 책임을 돌렸다. 아나키스트에 대한 공포가 전국을 휩쓸었다. 수개월 내로 아나키스트 파업 주동자 여러 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선고를 받았고, 4명은 교수형, 다른 사람들에겐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헤이마켓 사건이다.
제국주의의 혁신주의
왜 혁신주의는 제국주의가 되었는가?_ 필리핀 전쟁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역사상 가장 부도덕했던 전쟁: “1899년 2월 4일 토요일 저녁, 로버트 그레이슨이라는 미국병사가 산후안 다리를 건너고 있던 어느 필리핀 군인을 쏴 숨지게 했다. 이 정당한 이유가 없는 발포로 필리핀 독립전쟁에 불이 붙었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이 전쟁을 필리핀의 ‘반란’이라고 불렀다.” 필리핀 교과서는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대항해 싸웠던 필리핀인들은 이제 미국을 상대로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지도하에 독립을 위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인 아서 맥아더는 1900년 초에 “나는 내키지 않지만 필리핀 민중이 아기날도와 그가 이끄는 정부에 대해 충성하고 있다고 믿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썼다. 그래서 더 가혹한 대응이 필요했던 걸까? 포로로 잡힌 게릴라들은 전쟁 포로가 아니라 살인자로 취급되어 즉결 처형을 당했다. 어떤 섬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미군의 잔인성은 미군 장성들의 발언을 통해서도 입증되었다. 제이컴 스미스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10세 이상은 모두 죽이고 불태우고, (사마르섬을) 무시무시한 야만의 상태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또한 윌리엄 섀프터 장군은 필리핀 인구의 절반을 죽여야 나머지 절반에게 ‘완벽한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모든 전쟁이 부도덕하지만 필리핀 전쟁은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었다. 필리핀으로 건너간 미국인들은 필리핀을 새로운 프런티어(지금까지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미개척지)로 여겼으며, 필리핀인들을 과거 북아메리카의 인디언처럼 다루었다. 필리핀은 군정 통치, 민정총독정치, 공화국 체제로 단계적 변신을 거듭한 끝에 1946년 7월 4일에서야 독립하게 된다.
루스벨트, ‘혁신주의 시대’를 이끌다: “말은 부드럽게 하되 방망이를 갖고 다녀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루스벨트는 이 말을 즐겨 썼으며,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루스벨트는 이른바 ‘혁신주의 시대’를 이끈 혁신주의자였다. 혁신주의 시대는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01년 말부터 미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1917년 4월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시기에 기업의 독점화와 도시화로 인한 제반문제에 대한 개혁 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루스벨트는 “연방정부는 어떤 특별한 세력의 대변자가 아니다. 바로 공익의 조정자가 돼야만 한다. 또한 대통령은 바로 이 같은 조정자의 중심인물이 되어야 마땅하다.”며 대기업들의 부당행위를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그 결과를 국민들에게 공개할 수 있는 힘을 정부가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선 악명 은 몇몇 기업의 통합을 해체하는 데 주력했다. 루스벨트가 처음으로 방망이를 휘두른 사건은 1902년 5월 14만 명의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는 군대를 투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사실 그의 방망이는 광산회사들을 향했고, 결국 광부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다.
또한 그는 강화된 셔먼 트러스트 금지법을 이용해 ‘불량 트러스트들’에게 방망이를 과시하는 등 여러 개혁 조치를 취했다. 그 첫 대상은 철도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던 북부증권회사였다. 당시 미 최대의 금융가 존 피어몬트 모건과 철도업자 제임스 힐이 공동으로 만든 이 회사에 손을 댄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과감하게 법무부에 이 회사에 대한 셔먼 트러스트 금지법 위반 여부 조사를 명령했다. 모건과 힐이 강력히 반발했으나, 이미 ‘트러스트 파괴자’라는 별명을 얻은 루스벨트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결국 2년 후 대법원의 판결로 해산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트러스트 해체에 나섰으며 반발하는 기업인들에게 “만일 대기업들이 정부가 불법이라고 간주한 무엇인가를 행해왔다면 나는 그것을 끝까지 척결해버릴 것이다.”, “부패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부패 기업들에게도 칼이 필요하다.”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혁신주의는 더욱 강력하고 위대한 미국을 만들려는 계획이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와 동전의 양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두 가지를 몸소 실천한 루스벨트는 외교 문제에선 방망이를 더욱 세차게 휘둘렀다. 그 나름의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그는 1893년 미국 정부가 하와이 합병을 주저하는 것에 대해 “백인 문명화에 역행하는 범죄”라고 비난했으며, 해군사관학교 학생들에게 “모든 위대한 민족은 전투적 종족이었으며 평화적 승리는 어떤 경우라도 전쟁을 통한 승리만큼 위대하지는 못하다”고 말했다.
루스벨트의 그런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루스벨트는 1888년부터 쓰기 시작해 1896년에 완성한 『서부의 정복』에서 서부 영토 확장을 이데올로기적 체제 대결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미국인의 서부 진출은 총을 든 서부인의 진출과 자치주의 이식 -> 연방정부의 외교적 개입 -> 연방군을 통한 질서 회복 -> 연방 편입 등의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가 연방 제도의 탄생지를 서부로 본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원리를 전 세계에 적용하면 미국의 안전을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다는 논리, 즉 ‘세계 연방’을 구성하기 위한 외연 확장을 해야 한다는 게 루스벨트의 논지였다.
대통령이 되기 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그 어떤 전쟁도 환영할 생각이네. 이 나라에는 전쟁이 필요하기 때문이지.”라고 말했던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은 거의 전쟁광의 경지에 이르렀다. 루스벨트는 “미국 정부가 야만적인 민족들과 전쟁을 한 것은 평화를 깨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류 행복을 위하여 슬프지만 꼭 해야 할 국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대
‘세계 민주주의의 안전’을 위해서였나?_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유럽의 화약고’가 폭발하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자동차를 타고 가던 중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저격을 받아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사라예보는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서 대치하던 ‘유럽의 화약고’였다.
황태자 부부 피살 사건 한 달 뒤인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고, 다음날 베오그라드를 폭격했다.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과 터키, 불가리아 등의 나라들이 한편이 되고, 세르비아를 지지하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루마니아 등의 나라들이 다른 편이 되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다. 발칸반도 등의 재분할 문제를 둘러싼 국가 간 탐욕의 대충돌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위험’에서 멀리 떨어지려는 정책을 완강히 고수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민족 구성상 불가피 한 결정이었다. 미국의 민족 구성이 매우 다양해졌기 때문에 참전할 경우 미국 내 민족 간 갈등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왜 참전했는가? 대통령 선거가 벌어지고 있던 1916년 7월 미국은 자유의 여신상 부근에 있는 블랙 톰 무기 공장의 대폭발과 함께 독일 스파이들에 의한 간첩 행위와 태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밖에선 독일군이 미국 배를 비롯한 모든 상선에 대해 무차별적인 잠수함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1917년 2월 3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독일과의 외교를 단절한 배경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른바 ‘치머만의 전보’ 사건이 일어나면서 미국은 점차 제 1차 세계대전 참전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는 독일의 외무장관 아르투어 치머만이 멕시코 외무장관에게 보낸 1917년 1월 16일자 전문에서 멕시코가 독일과 동맹을 맺으면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으로, 멕시코와 미국 간의 전쟁을 일으키려던 독일 측의 음모가 발각된 사건이다. 영국은 2월말 미국에 이 전문을 넘겨주었다.
비록 멕시코 정부가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윌슨은 이 전문을 미국의 안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치머만의 전문을 통보받은 다음날, 윌슨은 미국 상선들을 무장시킬 수 있는 권한을 의회에 요청했으며, 이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언론에 치머만 전문을 공개했다. 그러나 반전파 상원의원 로버트 라폴레트와 조지 노리스의 의사 방해로 윌슨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일은 미국의 참전을 원했던 걸까? 3월 16일부터 18일까지 독일의 잠수함들은 멤피시스호, 일리노이호, 비질란시아호 등 미국 선박들을 계속 격침시켰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건 전쟁을 총 지휘한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의 잘못된 계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이런 생각을 했다. “더 이상 전쟁터에서는 승리할 수 없지만 잠수함으로는 승리가 가능하다. 늦어도 6개월 안에 영국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대규모 병력 수송선을 보내오려면 1년이 더 걸린다. 그들이 오기 전에 독일은 승리할 것이며 그들이 더 일찍 오지 못하게 하는 데에도 잠수함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계산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희망했던 시간 내에 영국이 무너지지 않았으며 미국의 파병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졌다. 윌슨은 4월 2일 저녁 상하 양원 합동회의 연설을 통해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하면서 ‘세계의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잠수함을 사용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는 인류에 대한 전쟁을 의미한다.”며, 독일정부를 ‘인간 생활의 근원’을 공격하는 위협적인 괴물로 규정했다. 결국 미국은 1917년 4월 6일 대 독일 참전을 개시했으며, 최초의 미군이 6월 26일 프랑스에 상륙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참전의 명분은 화려했지만, 실속은 영 딴판이었다.l 도무지 자원 입대자가 나타나질 않았다. 100만 명의 군인이 필요했지만 처음 6주 동안 자원한 사람은 7만 3,000명에 불과했다. 결국 의회는 징병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으로 20세에서 30세까지, 나중에는 18세에서 45세에 이르는 모든 남성이 지역 징병위원회에 등록해야 했다. 징병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전쟁 프로파간다 기구로 공공정보위원회가 발족했다. 월스트리트에서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할리우드 스타인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메리 픽버드 등이 동원되어 일반 투자자들을 상대로 정부 채권 마케팅이 실시되었다. 1917년 4월에 출범한 공공정보위원회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연방선전 기관으로 위원장의 이름이 조지 크릴이어서 ‘크릴위원회’로 불렸다. 저널리스트 출신인 크릴은 보도자료를 발간해 언론 보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15만 명을 선전 요원으로 동원해 호전적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등 탁월한 성과를 올렸다. 크릴위원회는 연설가 7만 5,000명을 지원했는데, 이들은 5,000개의 도시와 마을에서 4분 연설을 75만 회나 실시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크릴의 구호는 거의 모든 언론에 의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뉴딜과 제2차 세계대전
과연 ‘인간의 얼굴을 가진 파시즘’이었나?_ 루스벨트의 뉴딜 혁명
미국적 삶의 혁명이 시작되다: 대공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의회에 비상 임기 의회 개회를 요청한 뒤 1933년 3월부터 6월까지 100일간에 걸쳐 일련의 놀라운 법령을 제정해나갔다. 이른바 ‘뉴딜정책’이다. 구제 ? 부흥 ? 개혁을 내세운 뉴딜정책은 ‘미국적 삶의 방식에 일대 변화를 몰고 온 혁명’이었다. 1933년 3월 9일 발표된 비상은행 구제법은 대통령에게 신용?통화?금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5월 27일 루스벨트는 미국 증권시장 사상 최초의 증시 규제 법안인 ‘연방 증권법’을 발효시켰다. 이 법에 따라 모든 신주는 일정 기간 공사를 해야 발행될 수 있었고, 발행된 신주는 정부 기관에 등록해야 했다. 6월 5일 의회는 금본위체제를 정지시키고, 6월 16일에는 미국 금융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법인 ‘글라스 스티걸법’을 통과시켰다. 공식적으로 ‘1933년 은행법’으로 불리는 이 법에 따라 5,000달러 이하의 예금을 정부가 지급 보증하는 방법으로 은행 파산을 진정시키기 위해 연방예금보험공사가 발족했다. 또한 이 법은 모든 은행이 여?수신 전문 은행과 투자은행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