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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유창선 지음 | 새빛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유창선 지음

새빛 / 2016년 4월 / 256쪽 / 16,000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우리의 삶은 이미 한계상황에 도달한 지 오래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죽도록 경쟁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되어버렸다. 입시생들은 스펙을 쌓아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대학생들은 취업 전쟁에서 전사하지 않으려고, 가장들은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숨 가쁜 경주를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경주는 달리고 달려도 끝이 없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 속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 지가 꽤 오래되었다. 내 얼굴은 옛날 그대로인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제는 찌들고 적당히 비겁해진 낯선 얼굴이 거울에 비쳐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물론 나도 정신없이 살면서 문득문득 ‘이게 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달리던 자전거가 갑자기 멈추면 넘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는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를 갖기 어려웠다. 그러니 사는 게 달라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한 것은 아닐 게다. 나에게도 꿈은 있었다. 더 멋있고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고 싶었던 나만의 꿈이 있었다. 내 마음의 심연 속에 아직도 그 꿈이 간직되어 있다면, 언젠가는 심연에서 빠져나와 다시 고개를 들지 모를 일이니 이제라도 나를 들여다보지 않겠는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시대: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나와 가족을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았건만 사는 것은 나아지지 않고, 더구나 앞날은 보이지 않는다. 짙은 연기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든 문을 찾아 빠져나가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찾아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벽을 내 손으로 무너뜨리고 나가기에는 이 시대의 벽이 이미 너무 높고 단단해졌다. 그 벽 안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미쳐버렸다. 경쟁에 목숨을 걸고, 왜 사는지를 더 이상 묻지 않으려 한다. 아니, 왜 사느냐고 묻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나도 함께 미치든지, 아니면 기꺼이 낙오를 선택하든지, 그 두 가지 길밖에 안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두 가지 길 가운데 어느 것도 내가 사는 이유라고 말하기에는 떳떳하지 못하다. 그래서 이것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님을 다들 알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대안이 없다. 그 벽을 넘어설 힘도 없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고 비관적 전망만 가득하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버틸 수 있단 말인가. 비관스러워도 절망할 수는 없는 일. 오늘과 내일이 어려울 것이라 해서 마냥 고개를 숙이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럴수록 인간다운 삶을 지키려는 노력은 소중하다. 몸은 벽 안에 갇혀있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내 스스로의 힘을 기르는 것. 그리하여 상황이 더 나빠지지는 않도록 삶의 참호를 파고 진지전을 벌여나가는 것.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견뎌야 할 시간이 앞으로도 길다는 것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삶의 비극성을 넘어설 용기를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이 시대 속에서 지쳐가는 사람들과 손을 맞잡는 것. 이 시대의 인문학은 그 등대가 되어야 한다.

굳이 인문학을 읽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 속에 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인문학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결코 철학의 “밖에” 서 있지 않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우리는 이미 철학 안에 들어서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철학에 대해 설혹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인간으로 살고 있는 한, 이미 철학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철학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다. 철학은 지식이 아니라 삶의 체험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삶의 철학을 하고 있다. 다만 나의 체험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비로소 언어화된 형태로, 그 근본을 발견하면서 깨달을 뿐이다.

동굴 밖으로 나갈 용기가 있는가: 플라톤의 『국가』 제7권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진리를 찾는 문제를 던져준다. 지하 동굴 속에 죄수들이 묶여있다. 이들은 앞만 보도록 되어있고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 자신들 맞은편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벽면에서 보는 그림자들을 실물로 알고 있다. 그것만이 진짜 세상인줄 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가파른 오르막길을 통해 동굴 밖으로 나와 빛을 보고 세상의 진짜 실물들을 보게 되었다. 놀랍게도 동굴 밖 세상에는 해도 있고, 새도 있고, 나무도 있었다. 자신은 행복했지만 동료 죄수들을 불쌍히 여긴 이 사람은 다시 동굴로 내려갔다. 그러나 동굴 밖 세상 이야기를 전해 들은 동료 죄수들은 그가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가지고 왔다면서 비웃었다. 자기들을 풀어주고 인도해가려는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동굴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했다. 이것이 유명한 ‘동굴의 비유’이다.

여기서 동굴 밖 세상은 영원불변의 이데아이고, 동굴 밖 세상의 놀라운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려주려고 다시 동굴로 들어간 사람은 철학자이다. 동굴 밖 세상을 보게 된 철학자는 그 감격과 기쁨을 혼자 누리며 살 수 있었다. 다시는 그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가 포박될지 모르는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철학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동굴 안에서 포박되어 있는 동료들도 태양을 보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며, 밤에는 달도 볼 수 있는 삶을 살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동굴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러나 철학자의 노력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실재라고 굳게 믿는, 그래서 동굴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 어리석은 동료들로부터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포박 당한 죄수들은 다른 세상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으며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믿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우리 삶의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두 가지 삶 가운데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이 진짜 세상인 줄 알고,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으면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포박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와 지성의 눈으로 진짜 세상을 보려 할 것인가. 동굴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을 포기한 채 나를 위해 돌아온 동료를 비웃으며 그가 내민 손을 뿌리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본 진짜 세상으로 동료들도 데려오기 위해 기꺼이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 동굴 안으로 다시 들어온 철학자의 삶까지는 어렵다 해도 적어도 그를 비웃는 일 없이 내민 손을 잡아주는 삶 정도는 살아야 하지 않을까? ‘동굴의 비유’는 시간을 초월해서 오늘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나의 소중한 삶, 어떻게 살 것인가: 역사학자 폴 벤느의 말처럼 우리는 어쩌면 투명한 어항과도 같은 담론 속에 갇혀있는지 모른다. 어항 속에 갇혀있는 이 시대의 인간들은 이 어항이 어떤 것인지, 심지어 거기에 어항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항 속에서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실은 특정한 진실만을 말하도록 구축된 주체들이다. 이 주체는 오로지 어항 안의 진실을 사유하고 말할 수 있을 뿐이며,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도 어항 속을 벗어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어항과도 같은 존재가 권력인 것이다. 플라톤이 동굴 밖의 세계를 말했다면, 폴 벤느는 어항 바깥에 진실이 있음을 말한다. 나의 존재를 돌아보는 일은, 나와 연결된 세상을 바라보는 일로 연결된다.

동굴 밖 세상을 알려고 하고 어항 밖의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은,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불과는 무관한 일인가. 먹고살기조차 버거운 세상에서 ‘생존’이 아닌 ‘삶’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눈물 젖은 빵을 입에 물고 있는 사람에게는 배고픈 설움으로부터의 탈출이 급한 것이지 삶 전체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하지만 내가 처한 당장의 문제들이 아무리 다급하게 여겨져도, 우리가 그냥 오늘만 생각하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불로 여겨지는 현실적 문제들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다.

생의 행로를 길게 보고 어떤 것이 과연 길게 사는 것의 태도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시작해서, 나는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무엇이 행복한 삶인지, 이 세상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묻고 또 물으며 인생의 행로에 나서야 한다. 스스로에게 성실하게 묻고 진심으로 답해나간다면 어느덧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삶의 근육이 단련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는 길이 험할 때 그저 넘어지지 않고 가는 데만 온 신경이 향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정작 내가 그 길을 왜 가고 있는가를 잊게 될 수 있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습관으로 살아가게 된다.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이 길에 왜 들어섰던가 하는 물음이다. ‘어떻게 해야 나는 내 모습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나는 내가 되는가?’ 긴 삶의 여정에서 결코 놓을 수 없는 질문이다. 내가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세상의 주연은 아니지만, 나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나의 귀중한 삶,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각자가 소중하고 의미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자신을 향해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던가를 질문할 책임이 나에게는 있다.

우리는 왜 불안한가



탐욕은 우리를 불안의 굴레에 가둔다: 불안이라는 것이 나에게 어떤 것인지는 결국 자기의 마음에 달려 있다. 자신의 처지나 앞길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은 인간의 본성적 정서라 할 수 있지만, 외부의 시선만을 의식하며 지나친 열등감과 자기비하에 빠지면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알랭 드 보통은 “큰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단지 더 크고 더 다채로운 기획의 한 특정한 영역에서 실패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부와 가난을 개인의 도덕성의 핵심적인 표지로 읽는가?”라고 반문한다. 삶에 대한 평가의 잣대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 높은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그 가운데 하나일 뿐,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한 삶이라고 말할 일은 전혀 아니다. 부와 지위 말고도 인간의 삶에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 자기의 재능을 살리는 것,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가족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 사회의 이웃과 공익을 위해 일하는 것 등 의미 있는 삶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반대로 탐욕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지만 끝내 만족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진맥진한다. 이기적인 사람은 항상 불안하게 자신을 걱정하지만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안절부절못하며, 뭔가를 놓치거나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탐욕은 우리를 불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하이데거는 불안이란 “진정한 자기를 상실하고 살면서 다른 인간과 경쟁하는 가운데 세상 사람으로서의 삶이 허망하다고 느껴지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세속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과 경쟁하며 살지만, 진정한 의미의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고 허망함만이 남게 된다. 이것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비본래적인 실존’이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피하지 말고 흔쾌히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대신 자신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잃게 만드는 세속적 가치에 대한 집착을 끊을 것을 우리에게 권고한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페르소나 뒤에 숨어있는 내 얼굴: 요하네스 검프의 작품 <자화상>은 ‘나를 볼 수 없는 불안’을 표현하고 있다. 철학자 장-뤽 낭시의 설명이다. 그림에서 나는 거울을 보면서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에는 세 명의 내가 등장한다. 뒷모습만 나오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 거울 속에 옆모습이 비친 나, 캔버스 위에 그려지고 있는 나, 그런데 나는 진짜 나를 볼 수가 없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보는 것은 실제의 내가 아니라 거울 속에 비친 나이다. 그래서 내가 캔버스 위에 그리고 있는 것은 진짜 내가 아니라 거울에 있는 나이다. 또한 내가 캔버스 위에 붓을 움직일 때 이미 고개는 거울 방향에서 떠났기에, 그것은 기억에 의존하는 나일 수밖에 없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그리면서, 그것도 내가 표현하고 싶은 나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게 된다. 결국 실제의 나, 거울 속의 나, 캔버스 위의 나는 각기 존재하게 된다. 나는 자화상을 그렸지만 캔버스에 그려진 나는 아직 내가 아니고, 내가 보는 것은 모방된 나일 뿐이다. 실제의 나와 캔버스에 그려진 나 사이의 균열, 즉 주체의 균열이 여기서 발생하게 된다.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 여러 개의 내가 있는 가운데서,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사실 우리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살아간다. 자기의 얼굴을 숨기기도 한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페르소나를 낳는다. 원래 페르소나는 그리스의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것인데, 심리학자 융이 만든 이론에 쓰이는 심리학적 용어가 되었다. 융은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간다’고 설명한다. 페르소나를 통해 개인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반영할 수 있고 자기 주변 세계와 상호관계를 성립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 속에서 어느 정도의 페르소나를 갖고 살아간다. 아무 눈치 볼 것 없는 가족에게 보여주던 모습 그대로 직장이나 학교에 가서 행동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차림새도 신경 쓰고 말투도 달라지고, 타인에게 예의와 품격을 갖춘 태도를 보이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페르소나가 너무 강해지면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페르소나를 조절하지 못하면 나는 세상에 나가서 연기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끝없는 연기를 하다가 지쳐버리게 된다. 내가 타인을 의식해서 언제까지 이렇게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와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고, 그것이 폭발했을 때 내가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문득문득 페르소나 뒤에 있는 진정한 나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 바로 나를 들여다보려 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톨스토이는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했다.

구두 수선공 시몬은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져 있던 미하일을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와 구두 만드는 일을 가르친다. 나중에야 미하일은 자신이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천사라는 사실을 밝히고, 하느님이 답을 찾을 때까지 사람들 속에 가있으라 했던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미하일은 인간세계로 온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시몬과 그 부인의 모습을 보고는‘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음’을 깨달았다. 둘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미하일은 귀족 신사가 튼튼한 구두를 주문했지만 그가 곧 죽을 것을 알았기에 구두 대신 슬리퍼를 만들었다. 하지만 시몬이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을 보고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임을 미하일은 깨달았다. 셋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미하일은 엄마를 잃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는 부인을 보고는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미하일은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깨달음을 전해준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자기만을 생각하고 걱정한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살아가는 것”임을 의미한다.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그리고 더불어 사는 것은 믿음을 전제한다. 이 믿음은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그가 사람이라는 믿음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조건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는다. 부자라고 해서 더 주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덜 주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넓은 묘역에 묻히는 재벌 회장의 죽음만 슬픈 것이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의 죽음 역시 그만큼 슬프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을 똑같이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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