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분기
케네스 포메란츠 지음 | 에코리브르
대분기
케네스 포메란츠 지음
에코리브르 / 2016년 3월 / 686쪽 / 38,000원
1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무수한 닮은 점
유럽이 아시아보다 앞섰는가 - 인구, 자본 축적과 기술 측면에서 본 유럽의 발전에 대한 해석
근대 사회과학은 대부분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유럽인이 서유럽 경제의 발전 과정을 독특하게 만든 요소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학자들 간에 일치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에릭 존스의 『유럽의 기적』이 현재 ‘주류’의 입장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저서일 것인데, 그에 의하면, 유럽이 “산업화 이전”에 유사한 조짐을 보였고 16~18세기에 이미 물리적 및 인적 자본을 축적했기 때문에 나머지 다른 지역을 앞질렀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의 중심 사상은 다양한 관행(늦은 결혼, 결혼하지 않는 성직자 등) 덕분에 유럽의 출생률 억제가 보편적인 ‘전 근대적 출산 제도’에서 탈피함으로써 일반적 생산량 증가가 인구 증가율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유럽은 유례없이 힘든 시기에도 출산율을 조절하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1인당 자본이 증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평범한 농민, 장인, 상인의 인구적 및 경제적 행동 방식의 차이가 더 많은 비농업인을 부양할 수 있는 유럽을 만들었고, 이런 유럽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좋은 도구를 갖추게 했을 뿐 아니라, 영양 상태가 훨씬 좋고, 한층 건강하며, 생산성도 높게 만들었다. 따라서 생필품 이외의 상품을 거래할 수 있는 더 큰 시장이 등장했다.
그러나 사실상 1800년 이전 서유럽이 다른 구세계보다 자본을 더 많이 보유했다거나, 유럽이 자본 축적에서 상당한 우위를 점하게끔 만든 일련의 항구적인 환경 - 인구통계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다른 것이든 - 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 유럽인이 두드러지게 더 건강했거나(예를 들면 인적 자본 측면에서 유리한), 생산성이 더 높았다거나, 아니면 더 발전한 아시아 일부 지역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축적한 이점을 물려받았을 가능성도 높지 않다. 총자본으로 구현한 기술을 비교해보면, 유럽이 우위를 점한 분야 중 상당수가 산업혁명 이전 2세기 혹은 3세기 동안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유럽에는 여전히 낙후한 분야가 있었다. 유럽의 취약점은 토지 운용과 특정 토지 집약적 생산물(특히 연료로 사용하는 땔감)의 비효율적 사용 등 농업 분야에 집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세한 유럽의 몇몇 지역은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 중요했던 반면, 기술적으로 앞서 있던 사회임에도 특정 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다른 사회 공동체보다 유럽을 훨씬 자유롭게 해준 변화가 없었다면, 유럽이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을 주도했을지라도 비약적인 자립 성장을 이루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뒤떨어진 여러 가지 토지 절약형 기술을 따라잡은 결과였고, 식민지에서 획득한 지식 덕분에 크게 촉진되었다. 아울러 어느 정도는 아주 중요한 특정 자원(주로 삼림 보존에 기여한 석탄)의 발견이라는 뜻밖의 행운 덕택에 가능했다. 또한 이는 부분적으로 세계적 연관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적 연관성이라는 것도 결국 유럽인이 이룬 성과(대부분 폭력으로 획득한), 계속된 행운 그리고 독자적 발전이 결합해 형성된 것이다. (독자적인 발전의 한 가지 예로 중국이 은 경제로 전환한 것을 들 수 있다. 그 덕분에 ‘신세계’의 광산들은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었고, 유럽인은 수출할 만한 다른 상품이 나올 때까지 오랫동안 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세계적 연관성 덕분에 서유럽 사람들은 막대한 양의 토지 집약적 자원을 추가로 이용할 수 있었다. 또 19세기의 인구 및 1인당 자원 사용량 급증 현상이 도래하기 이전에 이미 심각한 압박을 받던 유럽 생태계의 숨통을 틔워줄 자원을 확보했다. 결과적으로 유럽은 다양한 노동 집약적 활동에 막대한 노동력을 투입하지 않고도 생태 환경을 지속적으로 보존하는 가운데, 생산량을 늘리는 방향으로 토지를 운용할 수 있었다. 이런 ‘부수적’ 요인이 없었다면, 유럽의 발명품만으로는 18세기 중국과 인도 및 다른 국가에서 꾸준히 이룩해온 주변적 기술 향상보다 사회ㆍ경제적으로 더 혁명적인 충격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시장 경제
1부 결론 - 근대 초기 세계 경제의 다중 핵심과 공통적 제약: 19세기 중반 이전 내적으로 생성된 유럽 생산력의 장점을 강조하는 다양한 주장을 검토해본 결과, 그러한 주장 모두가 모호하다는 게 드러났다. 서유럽의 인구통계학적 결혼 제도가 독특하긴 했어도 출산율을 통제하는 효과적 수단은 되지 못했으며, 서유럽인을 다수의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더 장수하게끔 만들지도 못했다. 또한 서유럽의 총자본이 월등하게 크지도 않았고, 산업 전반에 걸쳐 결정적으로 구현해낸 탁월한 기술력도 거의 없었다. 서유럽의 토지와 노동 시장 요소들이 스미스 이론의 자유 개념에 근접하지도, 중국보다 효율적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그런 요소들이 그다지 많았던 것 같지도 않다. 더욱이 혹독한 비난을 받아온 중국의 가족 노동력 활용 방식은 - 자세히 검토해본 결과 - 변화하는 경제 상황에 대한 대응책이자 북서부 유럽에서 이뤄진 것과 같은 가격 신호(price signal, 생산품에 부과되는 가격 정보를 생산지와 소비자에게 전달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독특하지는 않지만 서유럽의 가장 발전한 지역들은 인구가 밀집한 유라시아의 다른 핵심 지역과 중대한 경제적 요소-상업화, 제품의 상품화, 토지와 노동, 시장 주도 성장, 출산율과 경제 동향에 따른 노동력 할당 조절-를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형태의 발전이 어느 곳에서든 ‘자연적으로’ 산업의 획기적 혁신을 이끌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대신 이 모든 핵심 지역은 시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기술적ㆍ생태적 제약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대부분 증가한 노동력의 분화를 통해 적절하게 1인당 성장률을 달성했다. 다음에는 물리적 생존 및 재생산과 동떨어진 활동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2부 새로운 흐름에서 새로운 경제로 - 소비, 투자와 자본주의
서론
우리는 보편적인 일련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 주장들은 서유럽이 일찌감치 산업 성장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1800년 이전의 제도를 이용했다. 그러나 최근의 관련 문헌을 검토한 결과,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음이 밝혀졌다. 요컨대 1750년, 심지어 1800년까지도 동시대 구세계의 다양한 인구 밀집 지역보다 서유럽이 더 생산적이었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거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토지와 노동의 요소 시장을 바탕으로 발견한 중국의 경제 제도는 정말 놀랍게도 최소한 1800년 이전의 서유럽만큼 신고전주의적인 효율적 경제제도 개념에 부합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이제 생활 경제 - 자원, 기술, 제도 그리고 다수의 주요 생필품 생산, 구매 및 판매를 통한 활동 - 발달의 수준과 경향이 서유럽과 유사했던 근대 초기의 다양한 핵심 지역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서유럽의 어떤 이점도 19세기 산업화, 나아가 유럽 제국주의의 성공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어떤 지역도 ‘당연하게’ 산업화라는 급격한 변화의 길로 나아갔던 것은 아니며, 어떤 지역도 당시 공유했던 자원 제약이라는 문제와 ‘세계의 공장’이라는 역할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사회경제적 층차(hierarchy)에 대해 살펴보겠다. 여기서는 전반적인 경제 상황, 즉 이제까지 언급했던 자본 축적, 자원 재배치, 시장 수요 그리고 절대 다수 가정에서의 결정에 영향을 준 제도에 대해 다룰 것이다. 이러한 영역에서 중요한 차이가 없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어쩌면 부유한 가정의 몇몇 힘 있는 사람들의 능력과 성향에 영향을 준 차이점은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차이점이 존재했다면, 이는 그들이 구입하고자 하는 물품을 변화시켜 결과적으로 자본을 축적하거나 경제 변혁의 자극제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치품 소비와 자본주의의 탄생
생존을 위한 활동에서 벗어나 새로운 종류의 소비 수요, 여기에 동반된 문화적 및 제도적 변화 그리고 수요의 차이가 생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면, 중국, 일본 그리고 서유럽과 다른 지역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그 각각의 차이는 미미했다. 이들 사회에서 이용할 수 있는 상품의 양과 ‘소비지상주의적’ 태도 모두 별다른 차이가 없고 지향점도 불분명했다. (예로, 18세기 중반, 중국인은 유럽인보다 더 많은 설탕을 소비했고, 양쯔 강 하류 핵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영국인이 1800년에야 이룬 1인당 직물 생산량을 1750년에 이미 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모든 핵심 지역 사회의 제도가 일상적 수요를 창출했지만, 늘어난 수요가 공급을 창출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결국 유럽에 유리했던 소비 행태의 차이점은 유럽 외의 부가적 요소들 - 예를 들면, 신세계 은의 채굴과 유럽에 색다른 ‘이국적’ 상품을 끌어들인 아시아의 은에 대한 수요, 그리고 신세계의 농장과 노예로 구축한 생산 체계 - 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특정한 금융 자산이 유럽에서(혹은 적어도 영국이나 네덜란드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한층 잘 규정되고 안전했다 해도, 그러한 차이점은 극히 미미해서 페르낭 브로델, 초두리 그리고 더글러스 노스 같은 여러 학자도 그런 논지를 설명하기는 부담스러웠던 듯하다. 게다가 이는 심지어 유럽의 초기 산업혁명과 연결시키기도 어렵다. 절대적 자본 집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몇몇 거대 기업은 분명 철도 이전 시대의 중요한 기술 혁신을 실행할 만한 대규모 자본을 모았다.
한편 서유럽의 이자율은 아마도 인도나 일본 또는 중국보다 낮았던 것 같다. 그러나 상대적 이자율 차이가 농업과 상업 또는 원공업 분야의 확장에 중요한 차이를 초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울러 초기 기계화 산업의 부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18세기 유럽의 월등한 상업 조직이 무력 사용 없이 다른 구세계의 상인들과 경쟁했던 곳에서는 실적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부채로 자금을 조달한 국가 경쟁 체제에 의해 성장한 유럽의 금융 기관은 오직 해외 식민지화와 무력에 기초한 교역에서만 결정적 우위를 차지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브로델 자신이 강조한 것처럼 18세기 자본은 특별히 희귀한 생산 요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에너지와 궁극적으로는 토지의 양과 관련한 제약(특히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핵심 지역 삼림 자원의 축소)이 더욱더 심각하게 다가오는 성장의 걸림돌이었다. 산업 발전의 본질인 노동과 자본 모두 토지에 비해 좀 더 풍부했지만, 생존에 곡 필요한 맬서스의 네 가지 요소 - 음식, 섬유(의류), 연료 그리고 건축 재료 - 중 어느 것이라도 생산하려면 여전히 토지가 필요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자본과 노동이 더 많은 토지를 생성하거나(개간을 통해) 혹은 관개 시설과 거름 주기, 아니면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 제초 작업으로 더 많은 식량과 섬유를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19세기 후반 화학 산업이 토지의 생산성 증대에 기여한 성과에 비하면 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화석 연료를 대량 사용하기 이전에 연료와 건축 재료를 생산할 때는 노동과 자본이 토지를 대체할 가능성은 제한적이었다. 이와 같이 심지어 유럽이 투자 자본을 축적해 우위를 점했다 해도 이는 대부분의 모든 ‘선진’ 원공업 지역에서 직면한 생태적 병목 현상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막대한 자본 축적과 불확실한 산업화로의 이행과 관련해 분명 유럽 내에서도 뒤늦게 산업화한 지역임에도 자본이 풍부했던 사례가 많다. 상업 경제가 고도로 발달해 자본은 풍부했지만 뒤늦게 산업화한 이탈리아 북부와 네덜란드가 확실히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또 다른 예로는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경제에 막대한 은이 유입되면서 성장 지체를 경험한 에스파냐를 들 수 있다.
브로델은 1800년 이전 유럽의 우위를 설명하는 데 영향을 줄 수도 있는 비교적 풍부한 자본에 관해 체계적으로 탐구하지 못했다. 대신 유럽의 자산이 좀 더 안정적이었다는 입증되지 않은 주장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그러나 브로델학파의 논지는 우리로 하여금 원거리 무역과 그에 따른 현상 - 국가, 식민지 개척 그리고 비상업적 수탈 - 에 관심을 기울이게 했으며, 최근의 연구를 통해 이런 것들이 유럽이 돌파구를 찾는 데 한층 큰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필자는 근대 초기 유럽의 새로운 재산 형태(예를 들면 주식회사와 미래 현금 흐름에 대한 다양한 담보 청구권), 그리고 경쟁과 재정난에 처한 국가들이 1800년 이전 유럽의 생산 활동에 결정적으로 더 나은 환경을 조성하지 못한 결과 국가 간 해외 경쟁 구도가 중요해졌다고 주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식회사와 허가받은 독점 기업들은 무력을 동원한 원거리 무역 추구와 수출 지향적 식민지 건설 - 이러한 활동은 당분간 수익을 거둘 때까지 비교적 오랜 시간을 기다릴 의사가 있는 예외적인 대규모 자본을 필요로 했다 - 에서 특별한 혜택을 누린 것으로 드러났다. 유럽이 국가와 무력 사용에 대한 권리를 연계하고 중요한 시장을 선점했다는 이러한 유럽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에 발달한 시장 경제가 도처에서 생태적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는 인식을 접목하면, 유럽의 가장 결정적 차이점이 드러나는 새로운 그림이 나온다.
눈에 보이는 손 - 유럽과 아시아의 기업 구조, 사회ㆍ정치 구조 및 ‘자본주의’
2부 결론 - 유사성과 차이점의 의미: 18세기 중반까지도 서유럽이 특별히 생산적이거나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 않았음이 드러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세계의 다른 많은 지역이 서유럽만큼 번성했고 ‘원공업(原工業)’이나 ‘초기 자본주의’가 존재했다는 결론으로 곧장 건너뛸 수는 없다. 일부 학자들의 지나치게 사실적인 주장에 의하면, 어떤 아시아 사회에서는 산업적 돌파구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만주족이나 영국 침략자들이 ‘자본주의의 싹’을 짓밟았다. 좀 더 가능성 있는 주장은 세계 어느 지역도 필연적으로 그러한 산업적 돌파구를 지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심지어 유럽에서도 18세기 후반 주요 경제 사상가들이 도래하고 있는 세상을 전혀 내다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구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충분하고’(즉 이용 가능한 기술을 사용하는 토지 수용력에 비해 인구 밀도가 조밀하고)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역 모두가 일반적인 ‘원공업화(proto-industrialization)’의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노동력의 투입이 꾸준히 증가하고 잘 알려진 생산 방식이 확산하고 상업화가 늘어나면서 더욱 효율적인 노동 분배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생산량은 인구 증가에 비해 약간 앞서 있는 정도였다. 이런 지역이 막연히 계속 앞서 있었는지 - 스기하라 가오루가 노동 집약을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성장의 “동아시아 기적”이라고 칭한 것의 유럽 복사판을 만들어낸 - 아니면 뒤로 후퇴해 실제 맬서스 이론이 난관에 부딪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결과 중 어느 것도 자본 및 에너지 집약적이고, 토지를 독식한 ‘유럽 기적’의 실제와 아주 유사하지는 않았다. 직물의 생산과 소비 증가는 그 상황 자체만으로는 산업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곤경에 처한 상태를 해결하는 방책을 제시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식량, 섬유, 연료, 건축 자재와 관련한 모든 생산 체계가 점점 부족해지는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 실제로 섬유 작물을 심기 위해 삼림을 없앴기 때문에(또는 훨씬 더 상황이 나빠진 예로 양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양털실은 파운드당 매우 많은 토지를 필요로 했다) 운송이나 중공업에서 좀 더 기초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게 더욱더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