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 평전
나채훈 지음 | 북오션
사마의 평전
나채훈 지음
북오션 / 2015년 12월 / 247쪽 / 14,000원
현대적인 시각으로 다시 보는 사마의 - 가기의방(可欺宜方)
[역사는 움직이는 것이다] 삼국 시대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주는 『삼국지연의』는 어리석고 무모한 황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민중이 새로운 체제를 갈망하며 일으킨 봉기 이야기로 시작한다. 봉기의 모양새나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봤을 때, 이는 분명히 반란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 봉기는 암울한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 백성이 강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위책이었다. 이렇듯 시대의 상황 그리고 변화하는 시대의 시각에 따라 역사의 평가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삼국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역사적 이미지를 비틀어버린 가장 큰 역할은 소설 『삼국지연의』가 했다. 이 소설은 원말(元末)에서 명초(明初) 사이의 시기에 나관중이란 작가가 쓴 흥미 만점의 픽션인데, 당시 집권층이나 한(漢) 민족에게 필요한 교훈과 사상 그리고 재미를 위하여 많은 이야기가 가감되었고, 진실을 뒤바꿔 입맛에 맞게 꾸며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가공한 이야기로 읽힌 것이 아니라 역사서처럼 읽혔다. 소설을 역사로 받아들인 사람의 잘못일지는 모르지만, 이 때문에 역사를 살아간 인물이 잘못된 잣대에 의해 선과 악으로 나뉘고 평가받는 것은 분명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왜 사마의인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란 앞서 말했듯이 정사 『삼국지』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다. 『삼국지연의』는 소설이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인상을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묘사했는데, 그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사람이 바로 조조를 비롯한 그의 일파들이고, 그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사마의다. 소설은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거의 신격화시킨 제갈량을 칭송하기 위해서 그의 말년에 경쟁자 구도를 이어간 사마의를 의도적으로 깔아뭉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마의는 난세의 거센 흐름을 역류하는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항상 자신을 일깨우고 소심하다고 여길 정도로 주변 정황을 살피며 인생을 살아가려 했던 인물이었다. 『삼국지연의』는 그의 이런 현실 인식에 대해 치졸하거나 음흉한 계략으로 묘사했고, 국가를 위한 결단은 권력 찬탈을 꾀하는 권모술수로 그렸다. 심지어 사마의는 제갈량으로부터 자신의 조국을 지킨 승전 장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장에게 농락당하다가 운이 좋아서 가까스로 이기게 된 멍청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인물을 조조가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서 강제로 끌고 오라고까지 했을까?
그리고 사마의는 어떤 일이건 간에 앞장선 인물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제갈량처럼 세상에 나서자마자 주군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일약 최고의 벼슬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요즘으로 보면 40대에 대기업의 과장급 정도로 발탁된 모습으로 보면 될까. 뛰어난 능력을 갖고도 눈에 띄지 않는, 아니 다른 이들의 눈에 띄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는 40대처럼 책임을 지고 앞에 나서는 존재보다 뒤에서 받쳐주는 존재로서의 등장이랄까. 따라서 은연중에 자신의 가치를 발하는 그런 존재로서의 사마의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40대가 자신을 투영해보기에 적절한 존재가 아닌가 싶다.
청춘, 세상을 바라보다 - 은인자중(隱忍自重)
[거짓 명분을 뼈저리게 느끼다] 사마의가 1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세상은 원리원칙에 의한 사회구조가 아니라, 약육강식 형태의 빼앗고 빼앗기며, 힘센 자는 정의롭지 못하고 약한 자는 죽어 나자빠지는 세상이 펼쳐졌다. 한편 사마의는 어릴 때부터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고, 그의 집안은 오래전부터 고위 관료를 배출했으므로 그 역시 장차 벼슬길에 나갈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세상 형편을 보면서 벼슬길을 포기했다. 자신이 올바르게 일할 세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야망을 한편으로 미뤄두고 본질을 생각하다] 사마의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동탁의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끌려갔던 헌제가 도망쳐 나와 조조를 등에 업고 허도에서 새로운 조정을 열었고, 사마의의 형 사마랑은 조조 진영에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여기에 몸을 담았다. 그런데 사마의는 그로부터 12년 세월이 흘러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은거에 가까운 고향 생활을 계속하였다. 사마의가 고향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인물로 떠올랐던 동탁과 원술, 원소는 난세의 효웅으로 생을 마감했고, 그 이후 연부역강한 실력을 소유하고 두각을 나타내면서 천하의 대권을 꿈꾸는 모습을 보여준 인물은 조조를 위시하여 유비, 손권 정도로 압축되어 있었다. 특히 사마의가 스물세 살이 되던 서기 201년, 그의 고향에서 멀지 않은 관도에서 조조가 원소를 격파하고, 북중국의 지배자로 등장하는, 역사의 분기점이 되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조조는 수하에 순욱, 순유, 곽가, 가후 등 세상이 놀랄 정도의 뛰어난 책사들뿐만 아니라, 하후돈, 장합, 조홍, 장료 같은 명장을 거느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조는 수완이 좋은 지도자로 백성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이를 정책화하여 실천에 옮길 줄 아는 영웅의 길을 걷고 있었다. 사마의는 분명 이런 사실을 빠짐없이 직시하고 있었다. 또 그 무렵에 사마의의 형 사마랑도 조조 진영에 출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마의의 입장에서 하나의 길을 택한다면, 조조 이외의 대안은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마의는 적당한 기회를 노려서 조조 진영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이 점은 사마의가 결코 출세에 눈먼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조조에게 출사 제의를 받다] 기록에 의하면, 조조에게 온현 땅에 사마의라는 젊은 인재가 있으니 발탁하라고 추천한 사람은 순욱이다. 순욱의 천거를 받자, 조조는 사마랑에게 전해서 사마의에게 허도로 올라와 자신을 찾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즉시 사자를 사마의가 있는 온현 땅으로 파견했다. 그런데 사마의는 사신에게 병 때문에 허도로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댔다. 사마의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조로부터 첫 번째 부름에 응하지 않았을 때, 조조는 편입된 북방 4개 주 평정에 더하여 국경 너머까지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마의에 대한 일은 다음 순위로 넘어갔다.
[출사 이후에도 묵묵히 맡은 일만 하다] 사마의가 허도정권에 응하지 않았다 해서 세상 일에 무관심하여 그저 말단 관리에 만족해 지낸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하내군 태수부의 상계연으로 근무를 시작한 시기는 건안 6년(서기 201년) 그의 나이 스물세 살이 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조조가 그를 처음에 불렀을 때와 크게 차이나지 않으니 벼슬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조용히 시골 고향의 지방 관리로 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후 조조는 오환정벌을 마치고 돌아와서 허도 근처에 현무지라는 큰 저수지를 만들어 수군 훈련을 시작했다. 수군을 훈련시킨다는 것은 남정(南征), 즉 장강 부근의 형주(유표)와 강동(손권)까지 정벌하겠다는 의욕을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조조가 남정에 나설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직전 조조 진영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전국적으로 인재를 불러 모으고 남정 이전에 허도의 권력 체제를 바꾸어 내치를 정비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쟁 반대론자의 대표 격인 공융을 처형하여 일사불란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일이었다. 그 일환으로 조조는 지난번에 사마의가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사자에게 ‘이번에도 그가 병을 핑계로 삼거든 꽁꽁 묶어서 데려오라’고 강경히 지시했다. 사마의가 두 번째 부름을 받았을 당시는 상황이 많이 변해 있었다. 사마의가 함부로 부름을 거절할 수 없었던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마의는 마치 끌려가듯이 허도로 가서 승상부의 문학연 자리에 임명되었다. 문학연은 교육ㆍ문화 등을 담당하는 요직이었다.
이때는 유비가 제갈량을 군사로 영입한 삼고초려가 이루어진 이듬해였다. 시기적으로 보아서 사마의가 조조 진영에 가담한 것과 제갈량이 유비 진영에 가담한 것이 몇 개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후 역사적인 사건이 계속 전개되는 동안에 사마의의 흔적은 제갈량과 달리 거의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사마의가 출사하여 조조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첫 계책을 내놓은 때가 한중(漢中)을 공략한 서기 215년,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로 조조 진영에 가담한 지 무려 7년이 지난 후였다.
깊이 생각하여 판단하다 - 심사숙고(深思熟考)
[첫 계책과 연관된 고사 ‘득롱망촉’] 사마의가 허도의 조정에 출사한 지 7년 만에 내놓은 첫 번째 계책은 조조가 장로의 항복을 받아 한중을 점령했을 때 나왔다. 당시의 모습을 『자치통감』과 『삼국지연의』 등에서 득롱망촉(得?望蜀)이란 고사와 함께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중의 지배자 장로가 지킬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항복하니 조조는 크게 만족하였다. 이때 주부 벼슬에 있는 사마의가 고했다. “유비가 지금 유장을 몰아내고 파촉 땅을 차지했으나 아직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주공께서 한중을 얻었으니 이 소식을 들은 성도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파촉으로 나아가 일거에 몰아친다면 그들은 무너집니다. 이 시기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 말을 들은 조조가 탄식하기를 “인생이 괴로운 것은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내 이미 농서 땅을 모두 얻었는데 다시 파촉 땅까지 바랄 게 있겠는가?(득롱망촉)”라며 군사를 이끌고 나아갈 뜻이 없음을 밝혔다. 유엽이 재차 고했다. “중달의 말이 옳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유비 진영이 튼튼해집니다. 우리는 다시 그들을 칠 기회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군사들이 먼 길을 와서 노고가 많으니 또한 휴식을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사마의가 제안한 파촉 진격은 실현가능성이 있는 제안이었다. 조조에게 어떤 복잡한 사안이 달려 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마의의 판단력이 정확했음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황실인가, 조조인가?] 사마의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조조가 한중에서 돌아온 이후 유비 진영은 파촉을 중심으로 세력 확대에 온 힘을 쏟았고, 그 무렵 조조 진영과 손권 진영은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손권 진영이 해마다 허도의 조정에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화평이 이루어졌다. 이후 허도의 문무고관들이 조조를 위공의 신분에서 위왕(魏王)으로 높이자는 공론을 일으켰고, 한중 땅에 대한 관심도 무뎌져 끝내는 이 지역을 유비에게 빼앗기게 된다. 한편 조조는 예의상 헌제에게 글을 올려 세 번 사양하고 나서야 위왕에 올랐다. 조조는 위왕에 오르자 변부인이 낳은 아들 가운데 장자인 조비를 후계자로 삼고, 조휴를 어림군 총독, 종요를 위왕국의 상국, 화흠을 어사대부로 삼아 체재를 갖춰 업군(?郡)에 왕궁을 세웠다. 위왕국을 세우면서 조조는 평소 능력이나 경륜을 높이 평가하고 인재들을 깍듯이 대접하였다. 조조는 이 무렵 무장으로서는 자신과 일족인 하후돈과 조홍을 가장 믿었고, 책사로서는 가후, 사마의를 장차 국가의 기둥으로 여기고 있었다. 실제로 위왕국 성립 4년 후 임종을 맞을 때 조조는 이들 4인을 불러 조비로서 후사를 잇게 하는 부탁을 한다.
[‘허도를 지키는 계책’을 내놓다] 책사로서 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두 번째 계책을 진언한 것은 촉한의 명장인 관우가 번성을 포위하고, 구원군으로 보낸 조조 진영의 우금과 방덕을 제압했을 때 나왔다. 조조는 관우군이 계속 북진하여 허도를 위협할까 봐 겁이 나서 주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군사의 사기는 다 꺾인 셈이다. 만일 관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허도를 향해 북진해 온다면 어찌할꼬. 과인은 도읍을 딴 곳으로 옮기고 그의 예봉을 피할 생각이다.” 도열하고 있던 문무백관들에게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할 만큼 침울한 분위기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사마의가 분연히 일어나 강경한 어조로 고했다. 이때 그의 벼슬은 승상부의 군사마(총리실의 군작전담당관에 해당)였다.
“지금 우리가 다소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만 우금군이 홍수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이지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손권 진영과 관우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대왕께서는 손권에게 사람을 보내 그들을 이해(利害)로써 타이르되, 손권이 몰래 군사를 일으켜 관우의 배후를 쳐서 형주를 평정하면 그 땅을 손권과 함께 나누겠다고 약속하십시오. 그러면 손권군에 위협을 느낀 관우는 형주의 위기를 내버려 둘 수 없어 번성의 포위를 풀고 철수하게 될 테니 위기는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사마의의 계책을 듣고 조조는 사신을 강동으로 파견하여 손권과 동맹을 맺었다. 이 사실을 탐지한 유비 진영 역시 즉각 대책을 강구하였는데, 그때 제갈량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번성을 치라고 하십시오. 적군이 크게 혼이 나면 이 일은 자연 풀릴 것입니다.”라며 관우의 선공책을 유비에게 진언했다. 관우는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출전하여 초반에 조인군을 격파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결국 조조와 손권 양쪽의 협공을 받았다. 그리고 성도로부터 후속 지원을 받지 못한 관우는 육손에게 당하고 끝내는 손권에게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결국 사마의와 제갈량의 일 차 지략 대결은 번성에서의 일이었고, 사마의가 유비 측의 관우를 패망시켰으니 이는 제갈량의 첫 패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에서도 냉철히 판단하다 - 강목팔목(岡目八目)
[사마의와 제갈량의 입장 차이] 사마의와 제갈량, 이 숙명적인 맞수가 본격적으로 맞붙기 시작한 것은 북벌 이전, 조비가 황제로 등극하고, 유비 사후에 있었던 위제국이 오로군(五路軍)을 이용한 촉한 협공 전략을 세웠을 때이다. 수세 쪽의 제갈량은 고심했으나 적절히 대응하여 위기를 넘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로군을 이용한 촉한 침공 계책을 내놓은 사마의와 이를 무산시키려는 제갈량의 방책을 통해 결국에는 제갈량의 뛰어남을 한층 더 확인시킴으로써,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심중을 후련하게 해준다. 하지만 그때까지 제갈량에 비해 ‘등장하는 횟수나 분량’에서 거의 100분의 1에 불과한 사마의가 어떤 사정에 있었는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사마의에게는 계책만 있었고, 제갈량에게는 계책과 스스로 집행할 권한이 있었다. 모든 방면에서 그랬다. 제갈량은 설령 국가재정이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낭비가 된다고 할지라도 정책으로 결정하여 집행할 권력이 있었고, 사마의는 군사배치는커녕 소소한 낭비조차 불가능한 입장이었다. 개인과 개인의 기량을 비교할 때는 양측을 공평한 입장에 두고 비교해야 한다.
[제갈량이 쓴 유일한 모략전의 대상] 제갈량은 오로군 침공 계책을 좌절시킨 후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남만에 원정하여 남만왕 맹획을 사로잡았다가 일부러 풀어주기를 반복한다. 이른바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고사다. 제갈량은 남만에서 북벌(위나라를 쳐부수어 천하 통일을 하려는 계획)에 필요한 상당한 자원을 마련한 후에 성도로 귀환했다. 얼마 후 이번에는 위제국을 세운 조비가 죽고 어린 아들 조예가 즉위했는데, 그가 명제다. 이때 사마의는 표기대장군을 자원하여 서북 지방인 옹주와 양주 두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는 사령관으로 부임해 있었다. 사마의가 왜 그런 변방을 택해 마치 조정에서 은퇴하듯 물러섰을까? 오로군 실패처럼 조정에 앉아 구름 같은 계책이나 세우고 남들의 힘을 믿는 것보다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하겠다는 전략적인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조비가 사망하면 사마의의 진가를 십분 이해하고 지지해주던 실질적인 지지기반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권력투쟁이 일어나기 쉬운 중앙에 있는 것보다, 외곽에서 실질적인 힘을 키우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제갈량은 남만 원정을 성공리에 끝내고 귀국하여 그 자신이 계획한 건곤일척의 승부수, 북벌을 준비하다가 사마의가 지방에서 군사를 키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다. 강력한 위군이 옹주, 양주 땅에 존재한다는 것은 북벌 자체에 중대한 변수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우선 사마의를 거세해야만 북벌이 가능하다는 걸 절감하게 되고, 마속이 제안한 모략전을 전개하여 ‘사마의가 반역할 준비를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간세(간첩)를 시켜 거짓 방문을 낙양거리 곳곳에 은밀히 붙여 놓는, 이른바 반간계가 여기서 일어난다. 이 방문이 낙양거리에 붙자 황제 조예가 대경실색하여 급히 문무백관을 소집하여 상의했고, 결국 제갈량의 반간계가 위나라 대신들에게 먹혀들어 사마의는 옹양 땅 군사 지휘권을 조휴에게 넘기고, 형주와 예주 지방의 업무를 관장하는 한직으로 좌천되어 완성으로 내려가게 되니, 군사에 관한 한 완전히 실각한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