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와 소통하기
크리스텔 프티콜랭 지음 | 나무생각
내 아이와 소통하기
크리스텔 프티콜랭 지음
나무생각 / 2015년 11월 / 184쪽 / 12,800원
1장 부모와 아이의 소통을 막는 장애물
완벽한 부모에 대한 환상
왜 완벽한 부모를 꿈꾸는가: 부모라는 직업은 이론 교육과 실제가 전혀 다른 유일한 직업이다. 부모들은 현장에서 피부로 부딪히며 이 부모라는 직업의 ‘업무 수행 방식’을 터득해야 하고, 늘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양육 방식을 조절함으로써 내 아이에게 맞는 적절한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부모로서의 과업이 다 끝났을 때, 다시 말해 아이가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성인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부모는 자신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이 사회는 언제 어디서든 혼자 힘으로 그 즉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부모를 기대하는 동시에, 부모가 자녀 앞에서 본능적으로 바른 자세와 태도를 보임으로써 자녀의 성장과 사회화에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요컨대 이 사회는 모든 부모들에게 모든 면에서 완벽한 부모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부모라고 해도 이 사회에서는 어딘가 잘못한 부모가 되고 만다.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어머니와 나쁜 어머니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좋은 어머니라 함은 아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금세 알아챌 수 있는 어머니를 말한다. 좋은 어머니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아이를 돌보고, 이로부터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낀다. 자기 자신을 구속하거나 강요할 필요도 없다. 좋은 어머니에게 아이를 돌보는 일은 전혀 짜증 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전혀 감정의 기복 없이 차분하고 침착하게 아이를 돌보며 환한 미소를 유지하고, 아이가 지켜야 할 선도 분명히 그어주며, 동시에 실질적인 위협이 될 만한 요소로부터 아이를 안전하게 지켜낸다. 아이에 대한 헌신과 아이를 돌보며 느끼는 즐거움에는 언제나 흔들림이 없다.
그에 반해 나쁜 어머니는 아이에게 금세 싫증을 내고, 아이가 편안하게 잘 있는지의 여부에는 무관심하다. 이런 어머니는 너무도 이기적이어서 자신의 아이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아이의 욕구를 자각하지 못하고, 아이의 감정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며, 종종 아이를 자신의 심리적 만족감을 채우기 위한 존재로 이용한다. 자기 때문에 아이가 힘들어해도 왜 그러는지, 뭐가 잘못된 것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행동의 개선도 기대할 수 없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어머니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헌신하는 게 ‘당연’하며, 24시간 내내 아이 곁에서 대기 상태로 있어야 하고,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한 아이의 어머니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완벽한’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부모도 짜증과 싫증이 날 수 있음을 일러주는 육아 매뉴얼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으며, 솔직히 다시 아이가 없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는 걸 말해주는 책도 없고, 잠시나마 그런 마음을 가진다고 해서 그렇게 매정하거나 비정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해주는 데도 없다. 오히려 아이를 위해 조금 더 노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 신경 쓸 수 있는지만 읊어댄다. 완벽주의를 바라는 이 같은 시각은 황당한 발상에 가깝다. 좋은 어머니와 나쁜 어머니라고 하는 건 어머니라는 한 역할을 두 가지 측면으로 단순화한 것일 뿐이며, 나아가 모든 부모를 천사와 악마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완벽주의의 위험성: 완벽한 부모에 대한 환상, 즉 아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고, 아이 앞에서 끝없는 인내심을 발휘하는 모범생 부모에 대한 환상은 두 가지 유형의 불균형을 야기한다.
[유형 1 - 지나친 부담과 압박을 주는 부모] 부모 스스로가 완벽해지려고 할 때, 아이는 부모의 움직이는 성적표가 된다. 교육자로서 부모의 역량이 아이의 행동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모가 스스로 그려놓은 이상대로 자신이 완벽한 부모라는 점을 세상에 보여주고자 한다면, 이 부모의 아이는 완벽한 부모가 실시한 완벽한 교육에 부합하는 완벽한 아이여야 한다.
만일 아이가 완벽하지 않다면 이는 곧 부모의 교육법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이에 따라 그 부모 또한 완벽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부모가 스스로 완벽한 부모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그 자신도 완벽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아이는 짊어져야 할 짐이 보통 무거운 게 아니다.
[유형 2 -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부모] 어떤 부모가 모두의 무의식적 상상 속에 존재하는 그런 완벽한 부모라면 그는 모르는 것도 없고, 한 번 한 약속은 다 지키며, 결코 거짓말도 하지 않는 데다, 화내는 일도, 피로해 지치는 일도, 아픈 일도 없어야 한다.
늘 아이 곁에서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며, 인내심으로 모든 상황을 감내하고, 아이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줄 것이다. 사랑해 마지않는 아이의 뜻을 거스르는 일 따위는 결코 없다. 아이가 늘 만족하고 행복해하며 한껏 자신의 나래를 펼쳐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이가 살아가는 가정 바깥의 세상 또한 완벽한 곳이어야 한다. 비현실적으로 긍정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던 아이는 삶이란 분명 쉽고 유쾌하며 재미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 아이가 실제로 부딪히게 되는 세상은 아이에게 실망과 좌절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실제 현실은 아이가 살아오던 환경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2장 내 아이를 지켜주는 화법
안내자이자 지지자로서의 부모
상당히 긴 코스의 등산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워낙 신중한 성격이다 보니 자격증을 갖춘 산악 전문 가이드를 대동하기로 결심한다. 이 산악 가이드는 내가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내 곁을 지켜줄 것이고, 이 사람이 그동안 쌓아온 다년간의 경험은 내게 귀중한 가르침을 줄 것이다. 이 사람의 도움을 바탕으로 나는 최적의 환경 속에서 안전하고 무사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산악 가이드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장비를 점검해 주고 배낭 안 준비물을 점검해 주며, 출발하기 전 옷가지와 식량을 제대로 챙겼는지 확인해주는 것이다. 신발은 어떤 게 낫다거나 스웨터를 하나 더 챙기라는 등의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어도 좋겠다.
이 산악 가이드는 등정 행로에 대한 포괄적인 그림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산행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지, 야영 장소는 어디이며, 산행 기간의 기상 상태는 어떨지 대략 알고 있어야 한다. 만일 그가 이런 부분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면, 과연 이 가이드를 전문가로 믿고 따르며 산에 오를 수 있을까?
또 다음 날 정오 무렵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새벽 4시쯤 베이스캠프를 출발해야 하는 상황을 알고 있다면 산악 가이드가 저녁 8시에 잠자리에 들라고 단호히 말하더라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다음 날 일정을 전혀 이야기해주지 않은 채 내가 밤에 잠을 자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가이드에 대한 불만이나 불신이 점점 커질 것이다.
그런데 이 산악 가이드가 출발 직후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물어온다. 다음번 휴식은 언제 어디에서 취할 것이냐, 어느 쪽 길로 갈 것이냐, 등정 코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날씨는 어떨 것 같으냐 등등 이것저것 시시콜콜 묻는다. 혼자서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은 채 “당신이 내 고객이니 모든 결정권이 당신에게 있다.”며 무조건 내 의견만 구한다.
여전히 함께 산을 오르고 있는데, 그가 산에 대해 나보다 더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우쳤다면, 이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겁을 먹고 있으며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때 내 기분은 어떨까? 상당히 당혹스럽지 않을까? 반대로 산에 대해 정통한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그의 안내에 따라 산에 오를 수 있다면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느끼며 마음 편히 산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바도 정확히 이와 같다. 자신의 부모가 자기보다 더 강하고 능력 있는 존재라 느끼면서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동반자가 되어주길 바라는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의 성장에 안내자 같은 존재다. 만일 아이를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하거나 아이에게 무한 봉사하는 역할만 계속한다면, 삶의 안내자로서 부모의 위치는 무너진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안내자가 필요하고, 또 아이들은 응당 그런 안내자를 가질 권리가 있다.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해 시시콜콜 아이의 의견을 묻는 것이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아이의 생각을 모두 고려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결과 아이들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겁을 먹고 당황한다.
아이에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으면, 건강을 생각하는 영양사가 아닌 이상 아이는 감자튀김이나 초콜릿을 먹고 싶다고 할 것이다. 아이가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대충 그렇게 대답해버린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 부모는 다른 접근법을 시도한다. “토마토 같은 채소도 먹어야 하지 않겠니?” 그러면 아이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은 토마토가 아냐!’ 이에 아이는 단호하게 반박한다. “싫어! 초콜릿이 먹고 싶다고!” 그러면 상황이 복잡하게 꼬여간다. 어떻게든 아이의 식단에 토마토를 집어넣기 위해서는 아이가 거부감 없이 이를 먹을 수 있도록 묘수를 짜내야 되기 때문이다.
옷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 어떤 신발을 신고 싶은지 물으면 아이들은, 바깥 날씨가 어떤지도 모르고 단순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대답할 뿐이다. “뭐? 이 겨울에 샌들을 신고 싶다고? 지금 밖에 눈이 오고 있어. 샌들이 말이 돼?” 하고 소리치며 아이가 원하는 것을 막는다.어쩌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의 키를 훌쩍 넘기는 힘든 결정을 강요하면 그 앞에서 아이들은 굉장히 불안해한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삶의 안내자 같은 존재다. 안내자로서 부모는 아이들이 자기 주변 환경에 대한 믿음의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충분히 보호해 주어야 한다. 유아기에서 아동기로 넘어가면서 아이는 수차례 부딪히고 긁히고 넘어지면서 상처를 입고, 뜨거운 걸 마시다가 입천장이 데기도 한다. 이 때문에 심각한 상처가 생기지는 않더라도 아이의 잠재의식 속에서는 조금씩 불안감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아이에게 두려움을 전가하는 것과 아이를 보호해 주는 것의 구분이 매우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가에서 놀아. 물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면 큰일 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이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전가하는 화법이다. “물에 들어갈 때는 팔에 튜브를 끼면 돼, 엄마가 옆에서 지켜봐줄게.” 이는 보호 차원의 화법이다.
아이에게 부모의 걱정을 전가하면 이 걱정은 곧 예언으로 발전한다. “뛰지 마! 넘어져!”라고 말했는데 아이가 넘어지면 그 뒤에 곧 “그것 봐라. 내가 뭐랬어? 내 말 듣지 않더니 그렇게 됐잖아.” 하는 식의 화법이 이어지는 것이다.
3장 내 아이를 위한 훈육법
한계선의 필요성
아이들이 행동에 한계선을 찾으려는 이유는 그 선이 그어져 있어야 그 안에서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해진 한계선은 아이의 정체성 구축에도 도움이 된다. 한계선은 심리적 울타리처럼 아이들을 둘러싸주고, 지표가 되어 아이들의 영역을 설정해준다.
불안감과 두려움은 대개 그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했을 때 생겨나는데, 아이의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하지 못했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가 야자수나 오아시스 하나 없이 온통 모래 언덕으로만 둘러싸인 사막 한가운데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찾지 못했을 때의 느낌과도 비슷하다. 한계에 부딪혔을 때의 좌절감을 잘 극복해낼 수 있으면 폭력으로 발전하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좌절감을 다스리는 방법은 어떻게 터득되는 것일까? 이는 한계선이 정해지고 “지금은 안 돼.”라는 말을 들음으로써 깨우쳐진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한계’하는 것이 별로 없다. 잡지를 펼치고 TV를 켜는 순간, 또래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순간, 아이들은 끝없는 광고와 유행에 노출되고 소비 사회의 온갖 유혹에 시달린다. 따라서 한계선을 긋고 아이에게 좌절감을 느끼게 할 상황이 더 많아진 부모들은 점점 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만큼 아이들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하거나 유혹을 이겨내는 법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고, 이는 더더욱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가 됐다. 그러니 어려워 말고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라. 이는 부모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이기도 한다.
부모의 역할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그중 첫 번째는 아이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존재로서의 역할이다. 뽀뽀하고 안아주고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를 편안하게 해주는 등 아이의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엄마-아빠’가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의 역할은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존재와는 확연히 거리가 멀다. 아이에게 좌절감을 맛보게 하고, 금지와 처벌을 행하는 ‘어머니-아버지’로서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한계가 필요하다. 따라서 아이들은 이를 발견할 때까지 계속해서 행동의 한계선을 찾으려 애를 쓴다. 이 한계선의 발견과 더불어 아이에게는 판단 능력이 생긴다. 안타깝게도 아이가 현실에서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는 점점 더 많이 생기는데, 좌절의 상황에서 아이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어주고 아이가 거절과 거부의 상황도 참고 견딜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바로 부모의 역할이다. 원하는 것을 조금 늦게 손에 넣더라도 이를 참고 기다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내 아이에게 “안 돼!”, “멈춰!”, “그만.”, “지금은 안 돼.”, “나중에 해줄게.”라는 말을 망설임 없이 할 줄 알아야 한다. 심지어 “엄마가 전에 그렇게 말한 적은 있었지만, 엄마 생각이 바뀌었어.”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과의 약속은 부모가 정신없는 틈을 타서 아이들이 다소 일방적으로 받아내는 경우가 많고, 다른 일에 집중하느라 무심결에 “알았어, 알았어. 해줄게.”라고 말한 것이 아이들과의 약속이 된 경우도 많다. 이때, 생각을 번복할 수 없게 되면 우리는 아이들의 농간에 말려들게 마련이다.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여지가 많을수록 부모가 아이들에게 조종당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말로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은 아이들이 앞으로 커가는 동안에도 수없이 겪게 될 일이다. 아이가 어른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는 점도 가르쳐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약속에 대해 의심할 줄도 알아야 하고, 약속의 가치에 대해 의심할 줄도 알아야 하고, 약속의 가치에 대해서도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부모가 아이와 한 약속을 100% 다 지켜준다면, 아이는 계속해서 순진함을 유지하게 되며, 잠재적으로는 남에게 조종당할 수도 있다.
아이들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고, 삶이란 아침부터 저녁까지 놀기만 하는 놀이공원이 아니라는 점도 일깨워주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권리와 자유가 있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의무와 과제 또한 짊어지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부모가 될 수도 있고, 아이를 주의 깊게 살펴주고 지켜주는 존재가 될 수도 있으나, 의무와 과제에 관한 한 아이들에게 끌려다닐 수만은 없다.
아이들에게 선을 그어주는 일은 처음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나 장기적으로 보면 그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아이들 스스로 식탁을 차리고 이를 닦을 수 있도록 하려면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순서를 일깨워주며 단호하게 지시해야 한다.
부모가 죄책감을 크게 느끼지 않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단호한 훈육법이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소리 지를 필요도 협박을 할 필요도 없다. 이럴 경우 단호하고 차분하며 효과적인 화법이 가능하며, 아이들도 부모의 단호한 의지를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물론 당연히 툴툴거리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할 건 한다. 만약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해도 그에 대해 죄의식을 갖지 마라. 아이에게 부모의 감정을 보여줄 필요도 있다. 부모도 실수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더없이 부족한 자기 자신을 허용하고 받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