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에서 정치를 걷다
허균 지음 | 깊은나무
옛 그림에서 정치를 걷다
허균 지음
깊은나무 / 2015년 12월 / 256쪽 / 16,000원
미(美)를 통해 세상의 부조리함과 맞선 지식인들
권력투쟁 중에 꿈꾼 이상 세계 -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이 측근 조신(朝臣)들과 함께 도원(桃園)을 거닌 꿈을 꾼 것은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해인 1447년 4월 20일의 일이다. 이 시기는 사실상 권력의 공백기로, 이 틈을 타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이 암암리에 왕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안평대군은 박팽년, 최항, 신숙주 등의 문인과 학자들을 규합하여 수양대군 측을 경계했고, 수양대군은 무인들과 권람, 한명회 같은 일부 문신들과 손을 잡고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평대군은 깊은 잠에 빠져들어 박팽년 등 세 사람과 함께 도원을 거니는 꿈을 꾸었다. 안평대군은 그때의 추억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화원 안견으로 하여금 꿈에 본 도원경을 그리게 하니, 그것이 꿈꾼 지 사흘 만인 1447년 4월 23일에 완성된 〈몽유도원도〉다. 그러나 〈몽유도원도〉는 널리 공개되어 칭송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왕권을 두고 벌인 싸움은 수양대군의 승리로 끝났고, 안평대군은 결국 대역 죄인이 되어 강화도에서 사사(賜死)되는 비운을 맞았으며, 그 후로 정가에서는 안평대군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입에 담는 것을 꺼려했고, 그의 서화를 품평하거나 감상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오직 정치적 이유 하나 때문에 희대의 예술 작품이 빛을 못 본 것이다.
꿈속에서 도원을 거닐다: 안평대군의 ‘도원의 꿈’은 동진(東晋) 도연명(365~427년)의 『도화원기』의 세계가 문득 꿈속의 환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도화원기』의 내용과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비교해보면 다소 차이가 난다. 『도화원기』에서는 도원을 찾은 주인공이 어부다. 그런데 안평대군의 꿈속에서는 안평 자신과 박팽년, 최항, 신숙주 등 측근의 권신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도연명의 도원몽(桃原夢)을 자기화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환(幻)이란 깨어 있을 때의 꿈이고, 꿈이란 잠들었을 때의 환상(幻想)이다. 안평대군의 ‘몽유도원’은 낮과 밤을 관통한 꿈이자 환상이다.
〈몽유도원도〉의 발문과 찬시: 현재 일본의 천리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몽유도원도〉는 발문, 찬시를 포함한 두루마리로 표구돼 있다. 전체 길이가 20여 미터에 달하며, 그림 부분의 크기는 38.6 x 106.2센티미터다. 두루마리를 펼치면 제일 먼저 안평대군이 직접 쓴 ‘夢遊桃源圖’라는 활달한 필체의 제목이 나타난다. 그리고 자작시에 이어 그림 부분이 전개된다.
그림의 내용은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되는데 크게 현실 세계를 묘사한 부분, 도화원으로 진입하는 단계의 경치를 그린 부분, 도화원 전경을 그린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현실 세계는 야산과 평탄한 지형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진입 단계의 경치는 험하고 기괴한 형태의 암산과 시냇물, 폭포 등으로 묘사돼 있다. 이것은 도원이 현실 세계와 차단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묘책이다. 그리고 이 그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도원은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붉은 복숭아꽃이 안개 속에 만발해 있다. 그 사이로 집이 몇 채 보이지만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화려함 속의 적막감, 환상 속의 그윽함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참고로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발문에 이어 꿈속에서 함께 거닐었던 박팽년, 최항, 신숙주를 비롯해서 이개, 하연, 송처관, 김담, 고득종, 강석덕, 정인지, 박연, 김종서, 이적, 최환, 윤자운, 이예, 이현로, 서거정, 성삼문, 김수온, 천봉, 최수 등 당시의 쟁쟁한 조신들과 문사들의 찬시가 보태졌다. 찬시는 작가가 어떤 대상과 감정적으로 소통한 결과를 주관화하여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의 경우에는 대개 그 내용이나 화가의 인격, 인생관, 미의식 등이 찬미와 칭송의 대상이 된다. 〈몽유도원도〉에 찬시를 쓰는 행위는 안평대군과 감정과 정서, 나아가서는 정치적 이상까지도 공유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측면도 강하다.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의 권력 암투: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완성한 당시는 세종이 병석에 눕고 문종이 대리청정하던 시기로 사실상 권력의 공백기였다. 그리고 1450년 세종을 이어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안평대군은 황표정사(黃票政事)를 활용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황표정사란 그들 자신이 추천하는 인물의 명단을 왕에게 올리면, 왕은 그중에서 적임자를 골라 노란색 표시를 하여 임명을 허락하는 변칙적인 인재 등용 방법이었다. 인사행정은 원칙적으로 이조의 소관이지만, 안평대군은 황표정사를 통해 인사에 관여하면서 점차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뜨자 단종이 즉위하고, 황보인, 남지, 김종서 등이 측근에서 단종을 보필했고, 과거 세종으로부터 단종을 보호해줄 것을 부탁받은 집현전 학사 출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이개, 유성원 등도 보좌했다. 이들 문인 세력들은 안평대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수양대군 측에서 볼 때는 조정이 온통 안평대군 세력에 의해 장악된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한다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제거하기 위한 묘안을 찾아 나섰고, 이로부터 양자 간에 왕권 쟁탈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1447년 4월 20일 밤 꿈에 도원을 유람한 안평대군은 5년 후인 1452년, 꿈에서 본 도원의 풍경과 비슷한 분위기를 간직한 창의문 밖 경치 좋은 터에 선공부정(繕工副正) 이명민으로 하여금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짓게 한다. 안평대군은 새로 지은 무계정사에서 당대에 내로라하는 시인 묵객, 조신들과 모임을 자주 가졌다. 또한 용산의 한강변에 담담정을 지어 이곳을 오가며 글 잘하는 선비들과 함께 시문을 즐기기도 했다. 무계정사에서의 모임은 시서화를 즐기며 예술 세계를 공유하는 풍류 아회(雅懷)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임에 참여하는 조신들의 입장에서는 커가는 권력자 안평대군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왕실과 결속하여 권세와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무계정사에서의 모임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 사람들이 있었으니 단종 측근의 인물과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 등이다. 혜빈 양씨는 후궁 신분이어서 왕이 죽으면 궐 밖에 나가 살아야 했지만 단종을 어릴 때부터 보살펴온 터라 세종이 죽은 후에도 궐내에 머물러 있었다. 안평대군의 정치적 야심을 우려한 혜빈은 어린 단종에게 간언한다. “안평대군 스스로 무계정사에 사는 이유를 ‘산수를 좋아하고 홍진(紅塵)을 싫어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지만, 그 터가 『비기(秘記)』에 이른바, ‘명당이 장손에 이롭고 만대에 왕이 일어난다’는 땅이므로 그곳에 정사를 지은 것은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응분의 조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궁궐과 떨어진 곳에서 이현로, 이승윤, 이개, 박팽년, 성삼문 등 조신들과 자주 만나 모임을 갖는 것도 의심 가는 일이라고 했다. 더구나 조신들이 안평대군에게 글을 올릴 때마다 용비(龍飛), 봉상(鳳翔), 부익(附翼), 계운(啓運), 개치(開治)처럼 왕에게만 쓰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들의 저의를 꿰뚫어볼 수 있는 증거라 주장했다.
혜빈뿐만 아니라 수양대군 측에서도 역시 무계정사에서의 안평대군과 조신들의 모임을 매의 눈초리로 경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양대군 거사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김종서가 1452년 6월에 안평대군에게 올린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시다. ‘큰 하늘은 본래 고요하고 공허하니, 현묘한 조화를 누구에게 물으랴. 사람의 일이 진실로 어그러지지 않으면 비 오고 볕 나는 것이 그로 말미암아 순응한다. 바람이 도리(桃李)에 닿으면 화사하게 꽃소식을 재촉하고, 촉촉한 윤기가 보리밭을 적시면 온 땅이 고르게 윤택해지리.’ 안평대군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수양대군 측은 이 시를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에게 인심을 모아 반역을 꾀하자고 재촉하는 의미로 해석했다.
권람, 한명회 등 수양대군 측은 김종서, 황보인 일당이 안평대군과 합세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서 수양대군에게 이들을 속히 제거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평소에 안평대군의 행적을 의심하고 있던 수양대군은 이들의 요청을 즉시 받아들여 안평대군과 외호 세력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이 내세운 거사의 명분은 안평대군이 이현로, 황보인, 김종서 등과 결탁해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하려는 역모를 저지한다는 것이었다.
반역의 직접적인 증거로 제시한 것이 앞서 말한 김종서가 안평대군에게 올린 시다. 수양대군은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 및 우의정 정분, 병조 판서 조극관, 이조 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을 살해하고 그들의 형제와 자식까지 모두 죽였다. 여자 식구들은 측근들에게 종으로 나눠 주었고, 1455년 6월에는 금성대군을 유배지로 보냈다. 이것으로써 위협이 될 만한 인물들은 모두 제거된 셈이었다. 이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이고, 그것은 사실상 단종 폐위와 세조 즉위를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계유정난이 끝난 뒤인 10월 12일, 사간원에서는 무계정사를 철거할 것을 세조에게 건의했고, 무계정사는 즉시 철거되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꾼 꿈의 내용을 그린 〈몽유도원도〉는 다행히도 후세로 전해 내려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다.
〈몽유도원도〉는 한국 회화사에서 막중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그림이다.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안평대군이라는 일국의 왕자가 꾼 꿈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과, 그것이 가진 회화(繪畵) 외적인 의미와 가치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이 그린 것이지만 발문과 제시가 그림에 덧붙여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띤 작품으로 변신했다. 그림에 덧붙여진 찬시는 안평대군이 꾼 꿈에 대한 찬미와 그의 삶과 행적에 대한 공감의 표시라 할 수 있다. 이를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찬시를 쓴 것은 조신들의 입장에서는 왕위를 꿈꾸는 안평대군을 향한 충성 맹세일 수도 있고, 안평대군에게는 정치적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인재를 확보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몽유도원도〉는 꿈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지만 단순한 꿈의 기록화이기 전에 안평대군의 정치적 야망이 반영된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배후를 가진 그림이기에 계유정난 이후에 세조 치하의 조정 문신들은 〈몽유도원도〉를 금기시했다. 희대의 예술작품이라도 정치 상황에 따라 평가와 대접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한 폭의 그림으로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다
왕도 정치의 이상 실현을 위한 수신 - 왕실 감계화
왕의 마음은 만 가지 징조가 연유하는 곳이자 백 가지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왕의 자리는 각종 욕심이 공격하고 온갖 간사함이 다투어 침해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은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방종해서는 안 된다. 왕이 성스럽게 되려면 좌우에서 보필하는 현신(賢臣)들이 옳은 도리와 이치로써 간하면 물 흐르듯 따르고, 왕 스스로도 수신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조선의 임금들은 교훈을 담은 그림과 좌우명을 어좌 가까이에 두고 수신과 감계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 근본 목적은 옛 성왕의 선례를 따라 스스로 삼가고 경계하여 바른 정치를 베풀고자 함에 있었다.
선정을 위한 다짐, 좌우명과 의기(?器): 중국 은나라의 탕왕은 “참으로 하루 새로워졌으면 나날이 새로워져야 하고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면서 날마다 마음의 때를 씻어 스스로 덕을 새롭게 할 것을 다짐했다. 그는 이 경구를 새긴 대야를 앉은 자리 오른쪽에 두었는데, ‘좌우명(座右銘)’이라는 말이 이로부터 생겨났다. 한편 조선을 창업한 후 태조는 자신의 침실 네 벽에 본받을 만한 훈계의 말을 적어놓기 위해 정도전에게 명하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의 좋은 경구를 모아 올리게 했다(『태조실록』 4년 9월 22일). 그것은 탕왕의 선례를 따르려는 상고주의(尙古主義) 정신의 발로이자 현실 정치에서 선정을 베풀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세종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써 마음을 깨우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유익하다”(『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 8월 13일)라고 했는데, 이것은 ‘탕왕의 관반명(?槃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생활의 지혜와 자경의 의미가 담긴 경구는 그것을 새긴 물건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불렸다. 예로 탕왕의 경우처럼 대야에 새긴 것은 관반명이라 했다. 한편 글로써 표현된 경구가 아닌 특수하게 제작된 그릇을 교훈의 대상으로 삼은 예가 있는데, 이를 의기라 했다. 이 그릇은 속이 비어 있을 때에는 조금 기울어지고, 물이 가득 차면 뒤집어지며, 물이 절반 정도 찰 때 비로소 바르게 선다고 한다. 군주들이 이 의기를 자경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중용(中庸)의 도를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참고로 조선의 성석린은 왕(정종)이 중용의 도를 실천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의기도(?器圖)〉를 그려 올렸다. 왕이 경연에 임해 이 그림을 신하들에게 보여주니 이서란 자가 이 그릇이 암시하는 중용의 도를 설명하여 임금을 기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국조보감』 정종 1년 1월 1일). 왕뿐만 아니라 사대부들도 〈의기도〉를 앉은 자리 오른쪽에 두고 그 의미를 새기며 수신의 계기로 삼았다. 조선 전기의 문신 안숭선은 〈의기도〉를 얻어 벽에 걸어놓고 드나들 때마다 주시하며 마음을 다스렸고(『세종실록』 세종 15년 8월 13일), 단종 때의 선비 손순효도 항상 깨끗한 방에 〈의기도〉를 걸어두고 출입할 때마다 관성(觀省)했다(『해동잡록』 본조 손순효). 이처럼 의기는 군주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교훈과 자경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그릇으로 인식되었다.
사왕(嗣王)에게 준 애민(愛民)의 교훈시, 빈풍칠월편: 왕권 국가에서 특히 중요시했던 직책은 사관인데, 사관의 임무는 왕의 언동과 시정의 잘잘못, 그리고 그때그때의 정치 상황을 숨김없이 기록하는 일이다. 이 제도를 둔 가장 큰 목적은 현왕(現王)이 전조(前朝)의 선정과 실정(失政)을 거울삼아 덕을 쌓고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 같은 목적에서 조선의 역대 왕들은 전조의 가권가계(可勸可戒) 사적(事蹟)을 서병(書屛) 또는 그림병풍으로 제작하여 측근에 비치해놓고 스스로를 경계함은 물론 장차 왕이 될 세자가 선정을 베푸는 데 교훈으로 삼도록 배려했다. 가장 많이 활용되었던 것이 『시경』 빈풍 편에 있는 〈칠월(七月)〉이다. 〈칠월〉은 빈땅(기산의 북쪽 들, 지금의 섬서성 서북)에서 농사지으며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를 지은 주공은 예악과 법도를 제정하는 등 이상적인 문물제도를 창시해 후대 군주들의 칭송과 귀감의 대상이 된 인물이다. 주공이 〈칠월〉을 지은 이유는 나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성왕이 백성들의 노고를 알아 올바른 정치를 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칠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월에는 빙고에 얼음 넣기와 보습 손질, 2월의 밭 갈기, 6월의 아가위와 머루 따기, 7월의 아욱ㆍ콩 삶기와 햇뽕 따기, 흰 쑥 뜯기, 8월의 대추 따기와 오이 먹기, 박 타기, 갈 베기, 베 짜기, 추수하기, 9월의 삼씨 줍기와 씀바귀 뜯기, 10월의 벼 베기 등이 있다. 농사일 외에 각 계절에 해야 하는 일도 열거돼 있다. 9월의 겨울옷 마련, 10월의 마당 치우기, 11월의 담비ㆍ여우ㆍ살쾡이ㆍ돼지 사냥, 쥐구멍 막기, 북창 바르기, 문짝 흙칠하기, 12월의 새끼 꼬기 등 백성들의 생활상이 언급돼 있다. 세종은 집현전에 명하여 시 〈칠월〉의 선례를 따라 우리나라 풍속을 채집하고 백성들이 논밭 갈고 추수하는 내용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왕실의 자손들이 농사일의 수고로움과 소중함을 알도록 했다. 더불어 납세, 부과금, 부역, 농업, 잠업 등에 관한 것도 널리 채집해서 실상을 그림으로 그리고 찬시를 덧붙여 칠월시(七月詩)를 만들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