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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쿨

유니 홍 지음 | 원더박스



코리안 쿨

유니 홍 지음

원더박스 / 2015년 10월 / 320쪽 / 14,800원





미래의 과거 - 1980년대의 한국은 하나도 근사하지 않았다

해외 유학파를 불러들이다: 우리 가족이 한국으로 이사 온 1985년, 한국은 아직 개발도상국이었다. 그나마 정상 참작할 만한 요소는 우리가 살 곳이 그냥 강남이 아니라, 최고 학군인 압구정 지역인 데다 최상류 계층의 주거지인 현대아파트였다는 사실이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 정부는 1950년대부터 진행된 인재 유출로 골머리를 앓으며 이 문제를 바로잡을 방법을 강구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바로 그 절박한 계획의 수혜자였고, 그 집은 아버지가 다닐 연구소에서 무상으로 제공해 주었다.

사회적 격변기와 함께한 유년기: 비교적 최근인 1991년 전까지 대한민국 여성은 한 가정의 호주가 되기 어려웠다. 그때로부터 20년이 흐른 2012년, 대한민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 박근혜가 등장했다. 고작 30여 년 만에 한 국가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이토록 과감하게 변모한 것일까? 그간 한국은 다른 수많은 신흥 부국들이 이룰 수 없었던 것, 즉 사회적ㆍ문화적ㆍ정신적인 변화를 계획하고 밀어붙여 왔다. 성공했을까? 글쎄, 뭔가 틀림없이 달라지긴 했다. 일단, 풍자와 유머가 출현했다.



풍자의 탄생 - ‘강남 스타일’이 등장하기까지

풍자도 맥도날드도 없던 시절: 2012년 발표된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2013년에 나온 후속곡 <젠틀맨>은 대한민국에 풍자와 유머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는 곧 한국이 현대화의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는 의미였다. 내가 처음 한국에 갔을 때에는 풍자라는 게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맥도날드도 없던 시절이었다(1988년에 처음 생겼다. 물론 강남에).

유머 감각과 유교 사상을 겸비한 슈퍼스타: 한국인들은 한류를 서구 세계로 몰고 갈 사내가 바로 한국 음악계의 골 때리는 광대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털투성이 겨드랑이를 의도적으로 과시하는 통감자 몸매에, 지저분하고 저급한 농담을 곁들인 노래를 부르며, 라스베이거스의 마술사가 골라 준 듯한 의상을 차려입은 사내가 그런 존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싸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벌어지는 와중에 이를 한 번 더 뒤집은 존재다. 그가 꽤 얼떨떨할 정도의 명성을 얻은 과정은 지난 몇십 년 사이에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 사회에 일어난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나 다름없다.

서구 언론은 싸이가 보스턴 대학교와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점을 자주 언급하는데(그가 학위를 받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싸이의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서 밤낮으로 재생되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의외다. 그에 비해 한국 언론은 싸이에 관한 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다. 그렇다면 그 상세한 정보들이 왜 서구에는 전해지지 않았을까? 이유인즉슨 싸이의 유년기가 한국의 문화적 맥락 바깥에선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중매체는 그가 수많은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부모님과의 불화, 특히 악명 높은 부자(父子)간의 불화에 집중했다. 싸이는 분명 그 점을 대단히 창피해한다. 모든 덕이 효심에서 비롯된다는 유교적 신념이 두루 퍼져 있는 한국에서 부모 자식 간에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여간 큰일이 아니다. 하지만 서구 매체는 아무리 뉴스거리가 없어도 이런 이야기는 싣지 않을 것이다. 몇몇 한국 기자와 블로거는 다음 일화를 자세히 들려주면서 어쩜 싸이는 이렇게 불효막심하냐며 하나같이 충격을 표했다. 분명 싸이가 아직 부모님과 한집에 살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싸이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일렀다. 싸이는 “아버지부터 먼저 끊으시죠!”라고 대답했다. 자, 이 대화가 교훈적이고 가족 중심적인 어느 미국 시트콤의 에피소드에 나왔다면 싸이의 되바라진 한마디 뒤에 이런 장면이 나왔을 것이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거, 있잖냐. 네 말이 맞다. 나부터 본을 보여야겠구나.”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적어도 예전에는) 싸이처럼 말대꾸를 했다간 냉큼 종아리 걷으라는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다 2001년에 대마초 흡연으로 입건되었을 때에야말로 싸이의 반항이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싸이는 2012년 방영된 토크쇼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경찰서에서 보통 어머니들은 ‘우리 애가 원래는 착한데….’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우리 어머니는 ‘이놈 이럴 줄 알았어요.’라는 반응을 보이셨고, 아버지께서는 악수를 건네며 ‘이참에 담배나 끊으라우.’라며 경찰서를 나가셨다. 의외의 반응에 경찰들도 황당해했지만 아버지와 악수하는 그 손에서 울음 같은 게 느껴졌다.” 이제는 싸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신세를 갚았다고 볼 수 있다. <강남스타일>이 발매되고 채 두 달도 안 되었을 때 싸이 아버지의 회사 주가가 두 배로 뛰었다. 입증하기는 힘들지만, 아마 투자자들은 그렇게 잘나가는 아들의 아버지라면 분명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간다고 보았을 것이다.

싸이의 노래 대부분은 편한 마음으로 즐길 만한 곡이지만 진지한 노래가 딱 하나 있다. 그의 레퍼토리 중 하나인 <아버지>다. 이 가슴 절절한 고백을 통해 그는 온 가족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았던 아버지의 삶을 헤아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노래한다. 이처럼 싸이의 이력과 음악은 과거의 한국과 새로운 한국 모두를 상징하는 표본으로 적합하다. 그와 내가 자라난 한 세대 만에 한국이 어떻게 변모했는지가 그를 통해 잘 드러난다. 그토록 급격하게 변했기 때문에 인터넷 세상을 호령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유교적 효를 표현하는 <아버지> 같은 가슴 찡한 노래도 만드는 연예인이 탄생할 수 있었다. 싸이는 21세기의 진정한 1호 연예인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한’이라는 운명적 분노 - 성공의 요인은 동시에 불행의 요인이다

한 나라를 부국으로 만들고자 박차를 가한 추진력을 이해하려면, 한국이 장장 5000년 동안 운명의 희생양이었다는 점을 알아 둬야 한다. 역사상 한반도는 무려 400여 차례 침략당한 반면, 베트남전 참전을 고려하지 않는 한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렇게 지독히 시달린 결과는 문화적으로 고유하며 극단적으로 정제된 분노인 한(恨)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한국인은 한을 결점으로 여기지 않는다. 한국인이 스스로를 평가할 때 바꾸고 싶어 하는 특질 중에 한은 없다. 나는 한을 생각하면 칼 융이 말한 ‘집단 기억(racial memory)’이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이는 한 민족의 집단적인 경험이 대대로 전해진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의 기억이 한국인의 유전자나 무의식 속에 암호화되어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책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는 동안 깜짝 놀랐던 부분은 수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의 성공을 바로 ‘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줄기차게 위협당해 온 민족은 오히려 어떻게든 살아남는 법이다.



왜 대중문화인가 - 위기를 넘어 산업 패러다임을 전환하다

위기의 국가를 홍보하다: 어째서 한국이 국제적인 성공을 위해 대중문화에 집중하는지 의아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한반도가 영어권 세계와 거의 무관한 지역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한국의 문화적 야심이 당돌하기만 한 건 아니다. 그런 포부는 난데없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것은 ‘필요’가 낳은 산물이었다. 부족함, 다시 말해 수치심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나라가 힘을 모아 수십 년간 노력해 경제 호황을 누리는가 싶다가, 1997년에 아시아 금융 위기 속에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 위기가 없었다면 한류도 없었을 것이다. 수출에 제동이 걸린 외환위기 상황에서 문화 산업을 비롯한 여러 산업은 손실을 메우기 위해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아시아 국가들에 한국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음악을 팔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김대중의 승부수, IT와 대중문화: 한국은 위기를 기회 삼아 몇 가지 훌륭한 판단을 내렸다. 현재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정보통신기술, 대중가요, 드라마, 영화, 게임 등의 산업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기회이자 모험을 건 시도였다. 먼저 김대중 대통령은 정보통신기술 분야를 지원했다. 이 분야는 진입 지점도 확실하고 진입 장벽도 낮았다. 필요한 건 컴퓨터 프로그래머뿐이다. 또한 김 대통령은 대중문화를 공략 분야로 정했다. 한국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 최보근의 말에 따르면 김 대통령은 미국과 영국이 각각 영화와 뮤지컬을 통해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리는지를 알고 경탄했다. 그래서 한국이 대중문화 산업을 일으킬 수 있도록 두 나라를 벤치마킹하기로 했다.

케이컬처는 강력한 외교적 도구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남과 북이 정치가 아니라 한류로 하나가 되리라던 고 김대중 대통령의 말이 사실로 입증될 것이라 확신한다. 예로 북한의 암거래 상인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의 영화와 드라마 복사본을 밀수입한다. 2009년에 한국으로 넘어온 어느 북한이탈주민은 《타임》을 통해 북한에 밀수된 미국 영화 DVD가 암시장에서 35센트(약 400원)에 팔리는 데 반해, 한국 드라마 등의 DVD는 3.75달러(약 4400원)에 팔린다고 증언했다. 한국 영화 밀수로 잡힐 경우 훨씬 더 무거운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쿨한 문화부: 가상현실과 초현실주의 테크놀로지에 매진하는 최고 수뇌부의 정부 기관을 상상해 보라. 전쟁이나 첩보 활동이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는 완전히 뿅 가게 만드는 콘서트 경험을 선사하는 게 목적이다. 그게 바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착수한 프로젝트 중 하나다. 홀로그램이 뭐 그리 대단한가? “공연예술에서 홀로그램은 아주 중요합니다.” 대중문화사업과장이라는 직함을 단 최보근의 말이다(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콘텐츠산업실 ‘콘텐츠정책관’이다). 회색 양복 차림에 안경을 낀 중앙정부의 고급 인력에게서 들으리라 예상하지 못한 설명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집중하는 분야는 한국의 대중음악, 패션, 대중오락, 만화책, 웹툰이다.

최보근이 몸담은 부서는 최첨단 문화기술 연구 및 개발을 촉진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는 문화기술이란 용어를 난생처음 들었는데, 최보근의 말에 따르면 한류는 문화기술에 달려 있기 때문에 정부가 여기에 엄청나게 투자한다고 한다. 홀로그램은 무대 공연의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케이팝 그룹이 물리적으로 그 자리에 있진 않지만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유사 라이브 공연을 할 수 있다. CGI(컴퓨터 생성 화상)를 사용하지 않고 한국의 전통 문양 등을 만들어 가며 자유자재로 모양을 조직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인공 무지개나 불꽃놀이도 준비 중이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위업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과 협력한 결과다. 한국의 문화기술에 전념하는 연구 및 개발 실험실인 ‘한국문화기술연구소’도 최보근의 팀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 대한민국 정부는 특수효과 전문회사인 ILM(Industrial Light and Magic) 같은 기관을 지방 곳곳에 마련해 두었다. 그런데 내가 한국 정부를 뒤에서 한류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하자 최보근은 그렇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류는 한국 정부가 주도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조정 기능만 수행할 뿐입니다.” 한편 최보근의 말에 따르면 문화 산업의 수출 시장 규모를 현재의 두 배가 넘는 100억 달러(약 11조 원 이상)까지 늘리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나는 최보근에게 한류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진 않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실용주의적인 시각을 잘 드러냈다. “아뇨, 투자자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다. 사람들이 뭔가에 돈을 쏟아붓는다면 그건 계속 살아 있게 마련이다. 그는 정부의 역할이 협력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는 한류의 미래가 “전적으로 한국 국민, 즉 민간 부문에 달려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 달려 있는 게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케이팝의 뿌리를 찾아서 - 한국 대중음악에 독창성이 부족한 이유

국가에서 로큰롤을 금지했을 때: 케이팝의 특징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중문화 평론가 이문원은 깜짝 놀랄 만큼 솔직한 발언을 했다. “한국인은 창의력 면에선 젬병입니다.” 나는 그에게 자세히 말해 달라고 했다. “한국인은 패키징과 마케팅에 능합니다. 삼성을 보면 잘 아시겠죠. 케이팝을 만드는 작곡가들은 한국인이 아니에요. 유럽인들이죠. 편집하는 사람들은 미국에서 공부했고요. 다국적으로 작업이 이뤄집니다. 안무가들도 세계 여기저기에서 오고요. 말하자면 하나의 공장입니다.”

한국 국내에서 만든 독창적인 사운드가 부족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음악적 재능과 창조성을 억압한 검열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 대중음악에서 중요한 시기인 1970년대에 한국에서는 록음악이 금지 대상이었다. 그 결과 한국 대중음악은 클래식록, 펑크, 그램록, 초기 헤비메탈 등 1970년대에서 쭉 이어져 온 록음악의 역사에서 어떤 영향도 받지 못했다.

최초의 한류 시장, 미군부대: 서울의 미군 기지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들 중에 김시스터즈(애자, 미아, 수)가 있었다. 지금 이 3인조 가수에 대해 들어 본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1950~1960년대에는 랫 팩(Rat Pack, 본래 ‘친구들’을 가리키는 뉴욕 등지의 속어로, 1950년대 중반 험프리 보가트를 중심으로 한 스타 배우들의 사교 모임)에 버금가는 거물급 라스베이거스 그룹이었다. <에드 설리번 쇼>에 처음으로 김시스터즈가 출연했던 1959년에 아시아계 미국인이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상상해 보라.



스타 제조 시스템 - 케이팝 스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코피 터지게 공부할 것인가, 팝스타가 될 것인가: 케이팝 스타의 제조 과정은 서구 언론으로부터 온갖 돌팔매질과 화살을 맞은 바 있다. 현대판 노예제라는 말까지 들었다. 케이팝이라는 상표가 어린 예비 스타들을 모집해서 장장 13년짜리 엄격한 계약에 묶어 두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이 대중음악계를 구축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말콤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에서 비틀스를 예로 들어 ‘1만 시간의 법칙’을 설명한다. 이 법칙은 뛰어난 성과를 낸 사람과 그저 아주 잘하기만 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데, 전자는 자신의 솜씨를 갈고닦는 데 최소 1만 시간을 투자해 연습한다는 것이다. 글래드웰은 비틀스가 매카트니와 레논이 처음 만난 1957년부터 미국에서 데뷔한 1964년 사이에 1만 시간 넘게 어울렸으며, 그사이에 1200차례나 공연했다고 주장했다.

훌륭한 밴드가 되기까지 정말로 1만 시간이 걸린다면 7년에서 13년에 이르는 케이팝의 계약 관습은 전적으로 합리적이다. 특히나 그 기간의 절반은 예비 스타들이 대중 앞에 나서기 전에 트레이닝을 하며 보내기 때문이다. 이문원은 한국 가요계에 스타 제조 시스템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이런 의견을 덧붙였다. “미국 인구가 3억인데 한국 인구는 5000만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도 한국에 있는 가수 수는 미국의 가수 수와 맞먹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에는 스타 지망생이 충분히 많기 때문에 정상에 오르는 스타의 선별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만, 한국의 음반 회사는 미래의 스타가 자기들한테 오기를 앉아서 기다리는 호사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문원은 이렇게 덧붙인다. “한국의 ‘인력 풀’이 좁습니다. 그러니 적은 인력으로 국제 경쟁력을 갖출 방법을 강구해야 하죠.”

거대 복합 기업의 효자 상품: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음악 방송국 엠넷은 CJ E&M(이하 씨제이이앤엠) 소유다. 그리고 한국의 최대 문화 콘텐츠 기업인 이 씨제이이앤엠은 CJ그룹(이하 씨제이)의 자회사다. 씨제이이앤엠은 모든 부서가 고효율ㆍ고수익을 추구하며 상호작용하는 완벽한 통합적 생태계를 구성한다. 이 전형적인 한국식 대기업의 계열사가 차지한 분야에는 음악 방송(엠넷), 영화 배급, 공연(중국 무대에 뮤지컬 <맘마미아>를 올렸다), 게임, 그리고 ‘스마트 미디어’가 있다. 마지막 분야는 앞서 말한 모든 분야를 마케팅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소셜미디어 웹2.0 플랫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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