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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홍길동’에 대한 연구

김광주 지음 | 상상나무



‘ㄱ홍길동’에 대한 연구

김광주 지음

상상나무 / 2015년 9월 / 296쪽 / 14,000원





1장 관계 전쟁 - 내 안의 ‘ㄱ홍길동’



혹시 당신도 ‘ㄱ홍길동’ 님이십니까?

이름 앞에 ㄱ을 넣은 이들, “누구냐 넌?”: 몇 해 전, 우연한 모임에서 명함을 주고받은 사람이 내 카카오톡 친구 추천에 떴다. 그런데 분명 이름은 그 사람인데, 앞에 ‘ㄱ’이 붙어 있었다. 순간 실수로 이름 앞에 ‘ㄱ’이 잘못 입력되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지나쳤다. 나중에 그는 내게 카카오스토리 친구신청도 했다. 물론 이름 앞엔 여전히 ‘ㄱ’이 붙어 있었지만, 그때도 카카오톡에 잘못 입력되면 카카오스토리도 똑같이 뜨는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나를 카카오톡 단체톡 방에 끌어들였다.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초대한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서 본능적인 ‘눈팅’으로 분위기를 살피게 된다. 그러던 중 이상한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자신의 이름 앞에 ‘ㄱ’이 붙어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는 게 아닌가? 처음엔 ‘그런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무심코 회원 창을 눌러본 나는 깜짝 놀랐다. 맨 위에서부터 자신의 이름 앞에 ‘ㄱ’을 붙인 사람들이 나오는데 세어보니 23명이나 되었다. 순간 ‘아, 이건 실수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궁금증이 일었다. 그들은 왜 자신의 이름 앞에 ‘ㄱ’을 붙였을까? 그러나 그 이유를 알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름 앞의 ‘ㄱ’, 타고난 성씨로 줄서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카카오톡은 친구 리스트를 ‘가나다’ 순서로 나열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 앞에 ‘ㄱ’을 붙여두면 노출이 빠르다. 어쨌든 그때부터 나는 자신의 이름 앞에 ‘ㄱ’을 붙여놓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 앞에 ‘ㄱ’을 붙인 사람들을 나는 ‘ㄱ홍길동’님이라고 부른다.

솔직히 ‘ㄱ홍길동’님에 대한 내 호기심의 절반쯤은 비호감이었다. 다른 사람이 가진 스마트폰에 저장된 카카오친구 리스트에서 상위 순서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 앞에 스스로 ‘ㄱ’을 붙여놓았다는 사실이 어이없기도 하고 또 한편 허탈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다른 사람보다 먼저 노출되고 싶어 하는 생각이 유치하게 느껴졌고 또 모두가 자기 이름 앞에 ‘ㄱ’을 붙여버리면 그런 표식 자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ㄱ홍길동’님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내 이름 앞에 붙여진 성씨는 내 뜻이 아니라 순전히 조상 탓이다. 그게 평생을 간다. 그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내가 조상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런 불공평을 스스로 극복하려는 노력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딴엔 일리가 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항상 좋은 것만 고집하기도 한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고집 말이다. 특히 누구든 상관없이 서로 간의 평등한 소통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하는 소셜 네트워크 공간에서 ‘ㄱ홍길동’님을 보는 순간, 마치 똑같이 줄지어 선 출발선에서 슬그머니 한 발짝 먼저 내밀고 있는 어긋난 승리욕과 집착이 느껴지면서 참다운 소통을 위해 당연한 전제로 생각되었던 공유와 협력보다 경쟁과 순위를 우선시하는 사람 같아 보여 마음이 허탈했다.

부러움과 시샘을 넘나드는 ‘ㄱ홍길동’ 의 매력: 연구는 그래서 시작되었다. 정말 ‘ㄱ홍길동’님은 공유와 협력의 마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일까? 단지 자신의 이름 앞에 ‘ㄱ’을 붙여놓았다는 것으로 내가 그들을 그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 누구나 자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이 아닐까?

비록 ‘ㄱ홍길동’님을 처음 발견하게 된 것은 카카오톡이었지만, 그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카카오톡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그리고 블로그, 카페, 홈페이지 등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공간에서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알다시피 거의 모든 SNS는 이런저런 링크를 타고 서로 쉽게 연결되기 때문에 한 공간에서 알게 되면 다른 SNS 공간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ㄱ홍길동’님이 카카오톡 기반 SNS가 아닌 다른 SNS 공간에서는 자신의 이름 앞에 ‘ㄱ’을 붙여놓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물론 간단하다. 다른 SNS 공간에서 친구 리스트가 나열되는 순서는 가나다라 기준이 아니므로 그가 굳이 그렇게 애써야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착수한 연구가 무슨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카카오톡이나 카카오스토리를 열 때마다 노출되는 수많은 ‘ㄱ홍길동’님들이 눈에 띄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그의 다른 SNS 공간을 포함하여 그들이 올리는 글, 특정 주제에 대한 반응,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 등을 분석하는 정도였다.

적극적인 성향의 ‘ㄱ홍길동’님: 내가 관찰한 ‘ㄱ홍길동’님은 적극적인 사람이다. 어떤 일이든, 어디에서든 다른 사람보다 단 1cm라도 앞서고 싶은 마음에서 이름 앞에 ‘ㄱ’을 붙였다. 어떻게 보면 이건 분명 새치기인데 그것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SNS 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몇 번째로 나오는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하지만 ‘ㄱ홍길동’님은 그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연히 적극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특히 그는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연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 같은 연고로 맺어진 인맥관계에서는 그들 사이의 줄을 매우 중요한 질서로 인정하고 있는 듯했다. 예를 들어 선후배 사이에서의 서열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그런 관계가 아니어도 짧은 시간에 ‘형님, 동생’ 하는 끈끈한 관계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즉 평소의 그는 질서를 존중하며 순응하고 또한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유독 다른 사람의 SNS 친구 리스트에서 노출되는 질서만큼은 순순히 인정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가 질서에 관한 다소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바꿀 수 없는 질서에는 순응하되 바꿀 수 있는 질서라면 거부하는. 당연히 그는 이미 공고하게 뿌리박힌 어떤 사회적 질서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 않다. 그건 개인이 나선다 해도 바꿀 수 없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ㄱ홍길동’님의 정치적 성향은 대체로 보수적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같은 성향을 잘 드러내지는 않는 편이며, 자칫 이편저편으로 갈리기 쉬운 사회적 논쟁에 끼어드는 일도 드물다. 이처럼 명백한 입장표명을 꺼리고 편 가름을 즐기지 않는 ‘ㄱ홍길동’님이 툭 한 마디 던진다. “인생 뭐 있어? 좋은 것이 좋은 것이야.”

SNS를 점령한 1%

‘Social’시대에 판치는 ‘Personal’: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ㄱ홍길동’ 이 자라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을 나는 1%의 정신이 SNS를 점령한 때문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1%란 우리가 흔히 일컫는 상위 1%의 기득권층을 뜻한다. SNS는 한 마디로 사회적 인맥 만들기를 도와주는 시스템이며, 그로 인해 사람들은 이제 엄청나게 빨리 훨씬 많은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SNS는 분명 기술이다. 또한, 그 기술이 의도하는 목적은 ‘네트워크’ (Network), 즉 ‘연결’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이때의 ‘연결’은 형식적으로는 PC나 모바일 등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컴퓨터를 서로 촘촘히 연결하는 ‘망’에서 출발하지만, 그 실체적 종착점은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다. 그런데 그 연결이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보다 그때까지 전혀 몰랐던 사람을 주된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Social’이다.

그런 ‘Social’(사회적)과 대비되는 단어는 ‘Personal’(개인적)이며, 그러한 개인의 연대가 곧 ‘Social’이지만, 그렇다고 ‘Social’이 개인들의 단순한 합은 아니며 그 둘은 사실상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다. 단적으로 ‘Personal’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지만, ‘Social’은 개인의 서로 다른 능력이 결합하여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개인에게 재분배하는 방식이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Personal’ 시대의 정신이 경쟁과 순위였다면, ‘Social’ 시대의 그것은 공유를 통한 상호협력과 연대이다. ‘Personal’을 강조하는 세상이 상위 1% 혹은 0.1%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Social’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삶을 지향한다.

SNS 세상에 넘실대는 ‘자본’의 향기: 그렇다면 ‘Social’을 통한 새로운 시너지란 무엇일까? ‘Social’, 즉 개인과 개인 간의 연대가 강화되고 서로 다른 능력이 결합하면 갈등비용이 감소할 수 있고 부의 불균형으로 표현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완화되면서 상호신뢰지수가 높아지고 사회적 효용가치 역시 올라갈 것이다. 또한, 경쟁비용도 줄일 수 있다. SNS를 통해 이제 우리는 지역, 국적, 성별, 나이, 계층, 직업, 등 지극히 개인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그동안 전혀 몰랐던 사람들과의 연결이 가능해졌고, 그로 인해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획기적인 시너지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SNS가 아니면 충청도 산골짝에서 사과밭을 하는 농부가 서울 압구정에 사는 부잣집까지 잘 익은 사과를 직거래할 수도 없고, SNS가 아니면 가수 싸이가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SNS가 아니면 세상의 모든 ‘을’들의 가슴팍에 겹겹이 쌓여있는 시커먼 숯덩어리들을 뱉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공유와 상호협력이라는 SNS 본래의 순기능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NS 세상에는 이면의 ‘비틀어진 얼굴’이 있다. 오프라인 세상을 지배하는 ‘Personal’의 가치, 즉 경쟁과 순위매기기가 SNS 세상에도 깊이 침투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시공간을 초월한 공유가 일반화된 시대에 소외 은둔형 외톨이가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SNS로 인해 수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수익보다 비용이 늘어나며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 현상은 또 어떻게 생각할까? 소위 1%, 심지어 0.1%로 상징되는 부의 불균형이, 공유를 통한 상호협력과 연대라는 SNS 시대에 더욱 가속화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같은 모순된 현상을 나는 SNS의 기업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때의 ‘기업’이란 첫째,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의 기업들이다. 페이스북이나 다음카카오와 같이 SNS 자체가 수익기반인 기업들은 물론, 모든 기업이 SNS를 통해 시장, 즉 고객들과 소통하고 있으며 당연히 판매와 이윤을 목적으로 SNS를 운용한다. 우리가 무심코 SNS를 드나드는 사이 데이터비용이나 이모티콘, 기프티콘이나 게임, 영화 등과 같은 문화콘텐츠 혹은 음식, 쇼핑 등의 상품구매 등으로 내 통장의 돈이 기업으로 옮겨진다.

둘째, 기업화된 개인이다. ‘1인 기업’처럼 이제 누구라든지 SNS를 활용하면 자기상표를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내 손안의 컴퓨터인 모바일을 통해 언제든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하여 유튜브에 올린 다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나 카카오, 블로그, 카페 등을 통해 잘 공유하기만 해도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2012년 어느 날 인터넷에 등장한 ‘뚱한 고양이’는 세계적인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영화배우 니콜 키드먼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

이 같은 현상들은 당장에 기업적 행동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조차 자신도 모르게 기업화된 SNS 활동을 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국내 토종 SNS 기업인 카카오만 하더라도 카카오톡의 계정 꾸미기를 기본으로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 채널 등과 같이 더욱 적극적으로 노출이 가능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애초의 가벼운 자기표현을 넘어 ‘좋아요’와 댓글, 공유 등과 맞물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극, 광고, 선전, 과시의 단계로 빠져들게 된다. 덕분에 SNS에서는 누가 기업인지 누가 개인인지의 경계가 갈수록 옅어지면서 영리 기업들의 활동이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있고, 끝없는 경쟁을 통한 이윤 추구의 ‘Personal’적인 가치는 SNS 시대를 점차 지배해 가고 있다.



2장 관계 정리 - 적이 없으면 친구도 없다



내 통장을 갉아먹는 우리 안의 ‘ㄱ홍길동’

무한불신시대, 비용을 낳다: 현대경제연구원이 2014년 5월 25일 발표한 대한민국의 사회적 신뢰지수는 OECD 32개국 가운데 29위였으며 특히 친척, 친구에 대한 신뢰(31위)가 타인에 대한 신뢰(22위)보다 순위가 훨씬 낮았다. 친척이나 친구들보다 타인, 예컨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SNS등을 통해 쉽고 빠르게 맺어진 사람들을 더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 전반에 불신의 풍조가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정부 및 기업들로부터 비롯된 불신이 개인의 관계로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공적 관계의 부패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사적 관계의 불신 또한 결코 나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다. 불신은 이처럼 사람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우리 모두를 가두어버렸다.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은 실로 큰 비용을 초래한다. 예컨대 식당의 모든 음식에는 원산지 표기가 붙어 있지만 가끔 원산지를 속인 식당을 적발했다는 뉴스를 몇 번씩 보다 보면 어느덧 식당의 모든 원산지 표기가 다 가짜라는 의심이 일반화된다. 밥을 사 먹더라도 조금씩은 꺼림칙한 기분으로 먹게 된다. 비싼 식당들은 사람들의 그런 불편한 심리를 이용하여 가격을 올리고 ‘싼 게 비지떡, 비싼 것은 뭐가 달라도 달라’ 와 같은 선전으로 유혹하여 사람들의 지갑을 얇게 만든다.

동아일보의 ‘미래세대까지 불신의 늪’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서울 시내 중고등학생 129명에게“한국 사회를 신뢰하느냐?” 고 물었더니 신뢰한다고 응답한 학생은 단 16명(12.4%)에 그쳤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치는 내용이나 교과서에 쓰여 있는 것들이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학교에서는 분명 자유와 정의와 평등의 가치를 배웠는데, 막상 세상에 나와 보니 자유롭지도 정의롭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자유롭게 하다가는 결혼조차 할 수 없고 분명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받는 돈은 전혀 평등하지 않다. 결국 각 학교를 비롯한 모든 공교육제도를 운영하는 데 쓰이는 비용조차 사실상 신뢰비용으로 낭비되고 있는 셈이다.

막말로 뜨면 막말로 망한다

‘감정터널’이 있어야 욕설도 먹힌다: SNS 는 그동안의 집단주의에 가려져 왔던 개인의 재능을 마음껏 드러내고 누구나 평등한 공간에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순기능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SNS의 본질적 기능을 해치는 요소로 ‘욕설’이 있다. SNS 시대정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 상대방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나 거침없는 욕설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리학에서는 ‘욕설’을 충동이 억압된 상태의 ‘감정적 욕구’ 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욕설도 목적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고 욕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때다. 판소리에 자주 등장하는 걸쭉한 욕설이나 김홍도의 그림에 등장했던 양반, 농민 등의 익살스러운 동작이나 표정묘사 그리고 70, 80년대의 저항시, 민중가요들도 같은 구실을 했다. 그래서 욕설도 우리의 전통예술이나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해학과 풍자처럼 예술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욕설’을 통해 서로의 동질감을 확인하고 불만과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대리만족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가 있다. 그것을 심리학자들은 ‘감정터널’이라 한다. 감정터널은 오랜 관계를 통해 서로 사랑과 신뢰가 형성되는 상태를 뜻하는데, 부모와 자식 사이, 형제자매 사이,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동기 등과 같이 오랜 친구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의 첫인사가 질퍽한 욕지거리인 경우에도 화내기는커녕 다른 쌍욕으로 맞받아치며 끌어안고 반가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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