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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5년 9월 / 216쪽 / 12,000원





제1장 정치에 침을 퉤퉤 뱉어놓고 독식하려는 사람들



수많은 잉여가 아귀다툼을 하는 ‘잉여사회’

독일 철학자 페터 비에리는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2013)에서 “일 없이는 존엄도 없다!”라며 일은 존엄의 문제라고 역설한다. “노동은 물질적 자립이라는 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 어떤 노동이라도 노동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 그러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립의 여부 말고도 또 있다.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능력을 통해 자신이 무언가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지당한 말씀이지만, 한국의 청년들, 특히 500만 알바족에겐 꿈같은 이야기다. 자립조차 어려우니 자부심이 나올 리 만무하다. 따라서 존엄은 그림의 떡이다. 물론 처음부터 늘 그랬던 건 아니다. 희망이 있던 시절도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청춘에게 미칠 것을 요구하거나 권하는 책이 많이 쏟아져 나와도 모두들 진지했다. 『컴퓨터 의사 안철수 네 꿈에 미쳐라』, 『스무살 청춘 A+보다 꿈에 미쳐라』,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서른살 꿈에 미쳐라』,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 『20대, 자기계발에 미쳐라』, 『부자가 되려면 채권에 미쳐라』.

이렇듯 미치라고 외치던 때가 있었지만, 아무리 미쳐도 안 되더라는 걸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어떤 미침으로도 이른바 ‘잉여사회’라는 구조를 뛰어넘을 순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섭은 잉여사회를 “수많은 잉여가 아귀다툼을 하고, 그중 몇몇이 이기지만 결국 착취당할 기회를 갖게 되는 종류의 사회”라고 정의한다. “우리 시대의 잉여는 풍요가 아니라 양극화로 대변되는 격차와 집중의 산물이고, 무너지고 있는 중간층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것이며, 좌절한 이상주의자이기는커녕 이상이라는 것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 잔해와 폐허 위에서 자립의 가능성을 박탈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라고 윽박지르는 이상한 마케팅이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기승을 부리고 있다. ‘미쳐라’는 말은 좀 사라졌을망정, 자부심은 ‘열정’이란 말로 대체되어 “당신의 열정을 보여달라”라거나 “좀 더 열정을 가지고 일해라”라는 주문이 난무한다. 그리고 열정은 어느덧 착취의 언어가 되었고 제도화되었다. 오늘날 면접관들은 열정을 ‘측정’한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답변은 간단하다. 악조건들을 얼마나 버텨내는지 확인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춘들은 ‘모욕 스터디’를 한다. 대학생들은 취업 준비의 일환으로 면접관의 압박 면접에 대비하면서 “외모 때문에 고생 좀 하겠어요”, “그 나이가 되도록 뭐 했어요” 등 가상의 인신공격을 주고받으면서 모욕에 대한 저항력을 키운다.

“어떻게 정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 우리는 지금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라고 정치가 있는 게 아닌가? 도대체 정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15년 7월 《한겨레》에 실린, 이진순이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 대변인 임미애를 인터뷰한 기사가 정치의 현주소를 드라마틱하게 말해주고 있다. “50대 아줌마 둘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울었다. 그것도 여의도 한복판에서 정치 얘기를 하다가 …… 휴지를 찾아서 코를 풀며 멋쩍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수습했지만 안타까움과 서러움과 분노가 치받쳐 자꾸 목이 메어왔다. 요즘 정치는 눈물이 날 만큼 비통하다.” 맞다. 울어야 마땅하다.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조성주는 낙선 인사에서 “진보정치는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고 위로여야 한다”라며 “어떻게 정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말로 그 마땅함을 역설했다.

그러나 우리는 울지도 않거니와 정치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이젠 정치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조차 드물다. 아예 고개를 돌려버린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선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그 무력감의 근원 중 하나는 정치에 대한 우리의 당위적 접근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봄직하다.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에 대해 최선의 정의를 내리고 나서 정치를 보면 정치에 대한 좌절과 환멸은 불가피하다. 반면 최악의 정의를 내려놓고 정치를 보면 정치인들에 대해 한결 너그러워지고, 정치 개혁은 ‘머리싸움’이며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정치인들은 어떤 이념과 노선을 표방하건 우선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정치인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천에서 탈락하거나 선거에서 패배하면 남을 위해 일할 기회도 사라지니 그런 이타적 행위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승리와 이익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 점에선 이타적 정치인도 이기적 정치인과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정치혐오가 나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정치인들에겐 매우 좋은 것이다. 정치혐오 덕분에 유력한 경쟁자의 수가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에게 “정치는 절대 하지 마!”라는 말이 애정 어린 덕담으로 건네지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정치혐오는 정치인들의 기득권을 보호해주는 철벽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늘 정치혐오를 증폭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과거 국회에서 몸싸움이라든가 지금도 심심하면 터지는 ‘막말 파동’을 수반한 정치인들 사이의 이전투구와 계파 이익을 위한 권모술수 등은 대중의 정치혐오를 키움으로써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해준다. 과거 과자가 귀하던 시절 어린애들이 과자에 침을 퉤퉤 뱉어놓음으로써 자기 소유권임을 분명히 해놓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고원은 새정치민주연합이 “탈권위, 소통, 참여라는 청년세대의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정작 정치적 동력으로 유인하지는 않는다”라고 했다. 왜 그럴까? 원기왕성하고 유능한 젊은 유권자들이 대거 입당해 잠재적 경쟁자들이 크게 늘어나는 걸 두려워하는 정치인들의 의식 또는 무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실제로 기존 정치인들의 ‘사다리 걷어차기’는 악명이 높다.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김용철은 “정치인들이 경쟁 상대를 견제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공천을 줄 때도 가장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 주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한다. 사정이 그와 같다면, 정당 개혁은 정당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시스템 개조를 통해 내부 ‘시장기능’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기성 정치권의 무관심과 무능으로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들이 대거 정당에 쳐들어가 정치를 원 없이 사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제2장 ‘바리케이드와 짱돌’에 중독된 진보좌파



‘세대전쟁’은 보수의 음모인가?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보자. 유럽 전역에선 고령 인구를 자신들이 부양해야 한다는 데 큰 부담을 느낀 젊은 근로자들이 이른바 ‘세대 정의(generational justice)’ 구현을 위한 조직을 만들고 있다. 2003년 프랑스 파리에서 젊은이 3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부모 세대에게 제공되는 보조금이 지나치게 많다며 시위를 벌인 이래로 수많은 세대갈등이 벌어졌고, 이젠 ‘세대전쟁(generational warfare)’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프랑스 소르본 대학 교수 베르나르 스피츠는 『세대 간의 전쟁』(2009)에서 “다수 선진국의 젊은이들은 노년층의 인질극에 사로잡혀 있다. 이제 상황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여 노년층은 자녀들에게 외상을 지고 살게 되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랑스 젊은이들 그리고 아마도 서울의 젊은이들에게도 예정된 미래는 간단히 말해서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무장 강도 행위이다. 이는 자신을 희생하기는 했지만 책임은 지지 않은 과거 수세대가 젊은이들에게 하는 약탈행위이다. …… 사회가 청년층을 외면한 채 발전하고 청년층은 이를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미국 역시 다를 게 없다. 미국 보스턴 대학 경제학 교수 로런스 코틀리코프는 1984년 ‘세대 회계(generational accounting)’를 제안했는데, 이는 정부 정책이 노인층, 중년층, 청년층, 미래 세대에게 각각 얼마만큼의 부담을 안겨줄 것인지를 측정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코틀리코프는 『다가올 세대의 거대한 폭풍』(2004)에서 세대 회계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어른들이 빠른 시일 안에 아주 큰 희생을 감내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것보다 두 배나 더 높은 순세율(net tax rates)을 일생에 걸쳐 부담하게 될 것이다.” 코틀리코프는 『세대 충돌』(2012)에선 더 격한 어조로 미국의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으며, 이를 감추기 위해 행정부는 물론 공화당과 민주당이 똑같이 거짓말을 한다고 단언한다. “각 세대는 자신들이 부담해야 할 세금의 상당 부분을 미래 세대에게 떠넘기고 있다. 매년 아니 수십 년 동안 젊은이들로부터 돈을 빨아내 노인들에게 거금을 안겨주면서, 미국 행정부는 사실상 거대한 폰지 사기(ponzi scheme; 피라미드 사기) 행각을 벌여왔다.”

고령화 사회에선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정치권은 투표율이 높은 노인층을 염두에 둔 정략으로 흐르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와 관련, 박종훈은 『지상최대의 경제사기극, 세대전쟁』(2013)에서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세대전쟁의 거친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다”라며 ‘지금 대한민국은 세대전쟁 전야’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 세대전쟁을 넘어설 수 있는 시간이 5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2010년대 후반이 되면 고령화가 더욱 진전되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다. 더구나 재정적자가 더 크게 불어나 세대 간 화합을 위한 경제정책의 재원을 마련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세대전쟁을 끝내고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합리적 균형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일본이 겪었던 장기불황보다 더욱 심각한 위기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권과 정치권에 미래는 없다. 그들이 특별히 나쁘거나 사악해서가 아니다. 그게 바로 정치의 속성이다. 정권의 시야는 4년, 국회의원의 시야는 4년까지다. 그들은 지금 당장 표를 얻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미래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물론 입으로야 미래를 팔아먹는 ‘미래 마케팅’을 엄청 해대지만, 그건 결코 정책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한 현재의 고통을 요구하거나 감내하다간 자신들의 정치 생명이 날아간다고 믿기 때문이며, 유권자들 역시 현재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88만원 세대』라는 책의 표지엔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물론 본문의 내용에서 나온 슬로건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88만원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만의 바리케이드와 그들이 한 발이라도 자신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필요한 짱돌이지, 토플이나 GRE 점수는 결코 아니다. …… 도대체 바리케이드와 짱돌 없이 어떻게 최소한의 자신들의 자존심과 존재감이라도 지킬 수 있겠는가?”

‘바리케이드와 짱돌’에 대해선 칼럼니스트 한윤형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적절하다. “사실 지금의 청년층은 미계몽되었다기보다는 과계몽된 상태다. 그들은 ‘부모 세대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런 상황을 운동으로도 반전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 이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 지식인의 조언은 상당히 기괴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말한다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사춘기’에 가능했던 저항의 형식을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등록금’, ‘청년 실업’, ‘20대 탈정치화’를 ‘절망의 트라이앵글’로 부른 조성주 역시 ‘짱돌’을 들기보다는 아픔에 공감하고 소통하고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진 ‘바리케이드와 짱돌’을 역설하기 전에 그간 청년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좀 더 정교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조성주는 “2002년까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대학생들(20대 전반)이 2002년에서 2007년 사이에 정치에 환멸과 냉소를 보이는 세대로 바뀌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03년부터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결국 내수경제 붕괴와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추진은 2007년에 이르러 청년 실업 100만 시대를 만들어버렸다. 또한 대학 등록금이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대학 등록금 문제가 대학 사회 최대의 갈등으로 등장했다. 따라서 2002년에서 2007년까지 대학생들은 청년 실업 100만 명 시대, 대학 등록금 1,000만 원 시대가 도래하면서 계속해서 고통받았다. …… 상황을 이렇게 놓고 보면 대학생들을 급격하게 탈정치화로 몰고 간 것은 바로 386세대들이 주도했던 노무현 정권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20대는 ‘기권’한 것이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지난 10여 년, 짧게는 지난 5년간 그들의 문제를 외면했던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임에 투표한 것이다. 20대의 보수화니 탈정치화니 하는 허황된 담론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사회 전체에 대해 보이는 환멸이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안지 못하는 사회구조와 정치세력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원은 「청년세대에 바통을 넘겨라」라는 칼럼에서 “이들은 아직까지 정당ㆍ의회 영역에서 자신의 정치적 대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1980년대 운동적 열정의 폭발에 의해 정치세력화된 586세대와 달리 청년세대들은 일상적 삶의 실질적 문제로부터 정치세력화의 토대를 닦아야 하기에 그 속도는 느리고 더딜 수밖에 없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국가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하려거든 청년정치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 지금까지처럼 그들을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국 정치의 주도자로 나서도록 제도적 기반을 정비하고 그들에게 아직은 부족한 지혜와 경륜과 자원을 빌려줘야 한다. 그리하여 청년층을 선두로 비정규직과 공동체 시민들이 굳건하게 연대하는 새로운 정치세력 기반이 만들어져야 한다. 전쟁 및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에 형성되어 고착된 낡은 보수와 진보의 세력 기반을 파괴하고 대체하는 세력 교체야말로 진정한 혁신의 본질이자 완성인 것이다.”

기존 진보는 이 말에 서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자신들의 사고방식과 행태부터 돌아볼 일이다. 교체 대상이라는 점에선 둘 다 똑같지만, 실력과 영악함에선 보수가 진보보다 한 수 위라는 점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이 점에서 진보가 보수의 수준에 근접하려면, ‘짱돌’ 타령부터 그만두어야 한다. 그래야 공부를 하게 될 게 아닌가. 굳이 짱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종이 짱돌(paper stone)’, 즉 투표로 승부를 보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와 관련, 다음 장에서 한국에서 통용되는, 보수가 진보를 이기는 비법을 하나 소개하겠다.



제3장 “청년은 진보와의 결별도 불사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의 신파극에 놀아나는 야당

한국에선 보수가 진보를 이기는 비법이 하나 있다. 그건 보수가 50퍼센트의 정당성을 가진 주장을 100퍼센트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보는 신바람을 내면서 그 주장이 100퍼센트 정당하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이때에 진보가 중독된 흑백 이분법이 독약으로 작용한다. 진보는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도 버리는 일을 상습적으로 저지르고 있다. 자기들 내부적으로 딜레마 비슷한, 고민을 많이 해야 할 사안에 대해서도 보수가 어떤 주장을 세게 치고 나가면 그 딜레마는 저절로 해결된다. 보수의 주장에 전면 반대하는 것이 답이 되는 것이다. 진보 내부의 딜레마 문제는 늘 보수가 해결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년 일자리 문제 등을 비롯한 주요 문제들에 대해 어찌 그리 일관된 행동 패턴을 보이는지 놀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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