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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부

로널드 핀들레이, 케빈 H. 오루크 지음 | 에코리브르



권력과 부



로널드 핀들레이, 케빈 H. 오루크 지음

에코리브르 / 2015년 7월 / 896쪽 / 42,000원



1000년 전후의 세계 경제



이 장에서는 지리적ㆍ정치적ㆍ문화적 특성을 실용적으로 혼합한 기준에 따라 아프리카-유라시아 문명을 서유럽, 동유럽,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중앙(내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7개 지경으로 구분하여 각 지역이 역사적ㆍ제도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7개 지역 중 다른 모든 지역 그리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과도 ‘직접’ 정기적으로 교류한 지역은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의 이슬람 세계가 유일하다. 서유럽의 이슬람교도와 로마가톨릭교도는 서로 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교역을 했다. 요컨대 이슬람교도는 소금과 직물을 서아프리카의 금과 교환했다. 아울러 중앙아시아를 침략하거나 유목 스텝 민족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안에도 광범위한 무역을 하며 선교 활동을 병행했다. 그러다 마침내 이슬람교도와 당나라 군대가 중앙아시아에서 충돌해 탈라스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칼리프는 당의 수도에 대사를 파견했고, 이슬람교도 상인들은 중국 남부 지방에서 꽤 넓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슬람의 황금시대: 아랍은 비잔틴제국의 속국이던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북아프리카, 메소포타미아, 이란에 이르는 영토를 모두 통일했다. 이슬람 세력과 아랍어는 이 지역을 거대한 하나의 공간으로 통일했고, 그에 따라 동-서 지역 간에 사람, 물건, 기술, 사상 등이 이동하는 경로가 열렸다. 이슬람 세계는 무역로로 연결된 일련의 도시 섬들처럼 보였다. 귀금속의 공급과 함께 재화와 생산요소가 무역로를 따라 원활하게 이동하는 동안 이러한 도시 섬들은 모두 ‘구매력의 중심’이거나 소비의 중심이었다. 특히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는 제국 전역에서 온 사람들로 넘쳐났고, 인구의 급속한 증가와 함께 국고는 사방에서 유입된 부로 나날이 팽창했다.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파티마 왕조는 지속적으로 무역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고 인도양 향신료 무역의 중심을 페르시아 만에서 홍해로 바꿔놓았다. 이를 통해 지중해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독점 지대의 원천에 접근했고, 이러한 이익을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와 같은 이탈리아의 신생 상업 도시국가와 공유했다. 파티마 왕조는 고품질 리넨, 설탕, 종이 등의 가공품 수출과 향신료 중개무역 외에도 목화나 명반(염색이나 피혁공업용 물질) 같은 산업 원료를 이탈리아처럼 떠오르는 직물 산업 국가에 수출했다. 이러한 수출품에 대한 대가로 받은 은은 후추와 같은 향신료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고 향신료는 다시 동쪽 지역으로 재수출되었다. 파티마 왕조는 서아프리카의 금 생산과 홍해에 접근할 권한을 통제함으로써 강력한 군대와 화려한 궁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

1000∼1500년의 세계 무역: 칭기즈 칸이 경제에 미친 영향



1000∼1500년의 기간 동안 유라시아 경제사의 결정적 특징은 2개의 커다란 충격, 곧 지정학적 및 생물학적 충격이다. 첫 번째 충격은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이 유라시아 대다수 지역을 통일한 것이다. 두 번째 충격은 몽골제국이 분열하던 즈음에 흑사병이 가져온 재앙이다. 그리고 유라시아 주변부에서 상대적으로 고립되었던 서유럽이 서서히 중앙무대에 등장했다. 서유럽은 이 시기부터 팽창하기 시작해 500년 후에는 세계적인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다.

팍스 몽골리카와 육상 무역(1000~1350년): 13세기 초반 동아시아의 스텝 지대에서 목가적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인들 중에서 테무진이라는 출중한 인물이 등장해 효율적으로 집중화된 조직을 새롭게 구축했다. 그가 바로 1206년 스스로 ‘보편적 통치자’라고 선포한 칭기즈 칸이다. 칭기즈 칸과 그의 후손은 서쪽의 이라크, 이란, 러시아에서부터 동쪽의 중국에 이르는 유라시아 전체를 정복함으로써 팍스 몽골리카를 이루었다. 몽골은 1215년 송나라의 베이징을 함락했고, 1234년 여진족의 금나라를 제압했다. 몽골 정복의 다음 차례는 서하를 비롯해 서쪽의 화레즘이었는데 칭기즈 칸은 이 정복 전쟁을 수행하던 중인 1227년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몽골의 수도를 카라코룸에 정한 후 이란과 이라크, 러시아를 공격했다. 몽골은 1240년 키예프를 정복한 후 1241년에는 헝가리를 정복했다. 이때 오고타이 칸이 사망함으로써 유럽의 서쪽 절반을 마저 침략하겠다는 몽골의 계획도 연기되었다. 유럽으로서는 운이 좋았던 셈이다.

1279년에는 쿠빌라이 칸이 남송을 정복해 중국 영토 전체를 손에 넣었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의 기존 제후국 또는 속국들에 대해 새로운 원 왕조의 권위를 공고히 할 방안을 모색했다. 쿠빌라이 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중국에 원 왕조를 세운 뒤, 중국 문명과 행정부를 대부분 그대로 둔 채 다스렸다. 하지만 군사, 행정, 재정 분야의 최고위직에는 외부 전문가를 광범위하게 기용했다. 또한 몽골은 항상 무역을 장려했으며,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는 무역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고 번화했다. 1250년부터 1350년까지 팍스 몽골리카 시대의 비(非)패권주의적인, 즉 수평으로 연결된 ‘세계 체계’는 7개 지역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요컨대 서쪽의 에스파냐에서부터 동쪽의 한국 그리고 일본까지, 북쪽의 베르겐에서 남쪽의 인도네시아 군도에 이르는 전 지역을 연속적 단계로 연결한다. 팍스 몽골리카 시대에 이러한 교역을 지원하는 물리적ㆍ제도적 하부구조 역시 수송이나 신용 제도 같은 형태로 잘 발달했다.

상품뿐만 아니라 사람과 기술 그리고 사상 역시 세계 각지를 거치며 최초로 자유롭게 이동했다. 마르코 폴로 같은 여행자, 교황의 여러 사절들은 이 거대한 지역을 오가는 일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쉽고 안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팍스 몽골리카가 이룩한 국제적 통합에 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 중 하나로 이탈리아에서 팔린 중국산 비단 가격이 중국 산지 가격의 3배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화’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떤 개념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한 가지 강력한 설명은 세계화가 몽골의 유라시아 중앙부 통일에서 비롯되었고, 반(反)세계화는 몽골의 정복에 대한 정주 문명의 대응이었다.

흑사병: 팍스 몽골리카가 이룩한 통합은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팍스 몽골리카는 단지 경제적 통일과 개념적 통일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통일도 가져왔다. 특정 지역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인간과 동물의 이동에 따라 멀리까지 퍼져 유행했다. 한 번 퍼지기 시작한 흑사병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348~1351년 유럽 총인구 8,000만 명 중에서 2,5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흑사병이 가져온 경제적 결과를 분석해보면, 총생산은 급격히 감소했지만 1인당 실질 소득과 부는 분명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흑사병이 토지와 물적 자본은 변화시키지 않은 데다 가축 또한 큰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구 감소에 따른 노동력 부족은 노동절약적 기술의 진보를 가져왔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책 수요를 더욱 효율적으로 충족시켰고 화약은 군인들에게 들어가는 상대적으로 비싼 자본을 대체했다. 이로 인해 비극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흑사병은 기존 봉건경제가 빠져 있던 저수준의 균형 함정에서 높은 성장 경로로의 이행을 촉발함으로써 장기적 측면에서 서유럽에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육상 무역(1350~1500년): 팍스 몽골리카의 여파: 1368년 원 왕조가 한족이 세운 명 왕조에 의해 패망함으로써 팍스 몽골리카는 결국 해체되었다. 팍스 몽골리카의 종말은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유럽 상인들이 누리던 상대적 편의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을 추방했고, 페르시아와 투르키스탄 등의 지역에서는 유럽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위대한 정복자 티무르가 등장해 주변 지역을 완전히 파괴하고 엄청난 전리품을 챙겼다.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를 비롯해 여러 도시가 이러한 정복 이익의 수혜를 받았다. 티무르가 파괴 활동을 자행한 것은 사실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는 상품들의 원산지를 정복하기 위함이었으며 이 밖에도 다분히 경제적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 유럽인들의 눈에 비친 티무르는 ‘자신이 정복한 거대한 영토 내에서 파괴를 통해 평화를, 평화를 통해 상업을 복원하려 한 새로운 칭기즈 칸 중 하나’였다. 그러나 1405년 티무르가 사망함으로써 평화와 무역을 복원하고자 했던 티무르의 꿈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발전과 함께 유럽-아시아 무역은 전통적인 해상무역으로 회귀했다.

1500∼1650년의 세계 무역: 구세계의 무역과 신세계의 은



애덤 스미스는 일찍이 “아메리카의 발견과 희망봉을 지나 동인도로 가는 항로의 발견은 인류 역사에 기록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세계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으로서 아프로-유라시아 문명이라는 구세계로부터 격리되어 있던 아메리카의 고립에 종지부를 찍었다. 15세기의 마지막 10년간에 이루어진 콜럼버스와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는 1521년 마젤란의 세계일주로 완성되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지나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물건을 교환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이처럼 획기적인 사건을 주도한 이들이 왜 상업적으로 한층 앞섰던 이탈리아 도시국가 또는 프랑스가 아니라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같은 이베리아 국가들이었을까? 이베리아 국가들이 미지의 세계로 항해하는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려 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포르투갈, 대서양과 인도양: 포르투갈인은 바다가 제약이 아니라 인류를 이어주는 보편적 수로라는 사실을 이해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에 포위당해 대서양을 제외하고는 들썩이는 귀족들의 에너지와 야망을 분출할 곳이 없었다. 1497년 당대 최고의 항해지식을 갖춘 바스쿠 다 가마가 국왕 동 마누엘 1세의 후원 아래 리스본을 출발했다. 다 가마의 목표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1498년 5월 마침내 주요 항구이자 거대한 집산지인 인도의 코지코드에 도착했다. 코지코드는 후배지에서 생산되는 후추와 생강이 주요 직수출품목이었지만 향신료와 도자기, 페르시아의 말, 염료와 면직물 등 모든 재화가 어느 곳으로든 재수출될 수 있었다. 부두와 창고 등 무역에 필요한 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대출, 금융 등의 서비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으며, 엄밀하고 공정한 법률체계와 상대적으로 낮은 수수료와 관세제도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다 가마가 귀환한 후 동 마누엘은 스스로를 ‘에티오피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의 정복 탐험 상업의 제왕’이라고 칭했는데, 포르투갈인들은 이 말을 동쪽 바다에서 특히 향신료 무역을 포함한 모든 운송과 상업을 독점하고 규제하는 권리로 해석했다. 포르투갈은 ‘카르타즈(cartaz)’라 일컫는 면허를 발급받지 않은 경우 적 또는 몰수와 파괴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포르투갈은 이처럼 터무니없는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동쪽의 벨라카에서 서쪽의 호르무즈와 아덴에 이르는 인도양 전역에서 방위 거점을 요새화하고 하나의 고리처럼 연결하려 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은 고아, 멜라카, 호르무즈를 차례로 점령했다. 16세기 포르투갈 인구가 125만 명 정도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이 동양의 바다에서 이처럼 놀라운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화약 무기, 특히 원양선에 설치한 대포 덕분이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그리고 신세계: 1492년 에스파냐의 여왕 이사벨라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그 후 1521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장정 600명, 말 16마리 그리고 동맹을 맺은 다수의 인디언 전사와 함께 아스텍 제국을 점령했다. 그리고 1530년대 페루 지역의 잉카 제국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정복했다. 신세계에서는 에스파냐인들이 가져온 말, 소, 양, 돼지 등의 가축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그 수가 급증했다. 반대로 신세계에서는 옥수수, 담배, 감자를 유럽에 수출했다. ‘콜럼버스의 교환’이라고 불리는 이 교환이 구세계에 가져온 변화는 가축 수입이 신세계에 가져온 변화와 같은 정도의 중요성을 지녔다. 밀, 사탕수수, 면화는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수입된 상품이지만, 이후 다시 구세계로 대량 수출되어 중요한 경제적 결과를 가져왔다. 신세계에서 대량 수확된 작물들은 마침내 저 멀리 중국과 아일랜드에서도 인구 팽창을 가져왔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에스파냐는 처음 20년 동안은 토착민을 전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했다. 인디언이 소유한 금을 빼앗고 토착민이 멸종될 때까지 약탈과 파괴는 계속되었다. 1540년대에 멕시코와 페루에서 대량의 은이 발견되자 광산 노동자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세계로 건너갔고, 에스파냐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에스파냐와 신세계 간의 무역은 세비야 상인조합이 독점했다. 또한 모든 교역상품에 대해서는 상품 가치의 5분의 1에 달하는 왕실 세금을 비롯하여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선박과 선원들에 대해서도 엄격한 규제가 가해졌다. 이처럼 무거운 세금과 엄격한 규제로 인해 네덜란드와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은 적극적으로 밀거래에 나섰다.

한편 포르투갈의 신세계 입성은 뜻밖이었다. 1500년 포르투갈의 지휘관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은 인도로 항해하는 동안 오늘날 우리가 브라질로 알고 있는 곳에 상륙했다. 브라질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곳에서 귀한 염료의 재료인 브라질우드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사탕수수 경작이 이 지역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고 유럽의 수요 급증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 결과 1585년에 브라질에는 3만여 명의 백인과 120개의 설탕공장이 운영되었다. 사탕수수 경작에 필요한 노동력은 대부분 아프리카 남서 해안의 앙골라에서 수입한 노예들로 채워졌다.

태평양과 동아시아: 포르투갈의 전역 군인이었던 마젤란은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이 택한 경로와는 반대방향, 즉 태평양을 건너 향료 제도(인도네시아 부근의 말라카 제도)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519년 4척의 배와 장정 237명을 태우고 출항한 마젤란 선단은 3년 만인 1522년 세비아로 귀환했다. 마젤란은 필리핀 세부에서 벌어진 원주민들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젤란의 항해 이후 거의 200년 동안 태평양은 에스파냐의 호수였다. 에스파냐 제국은 보물과 향신료 그리고 진정한 믿음으로 개종하는 영혼을 찾아 광활한 바다를 누볐다. 수 세기 동안 높은 수익을 가져다줄 기회는 아메리카의 금과 은을 중국의 비단과 교환하는 무역이었다. 그 밖의 물품도 에스파냐의 식민지인 필리핀 제도의 마닐라를 통해 대량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한편 이 무렵 중국의 명나라는 정화가 대항해를 했던 15세기의 첫 번째 10년 동안 이루어진 대외교류에 대한 개방성은 오랜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와 중국 간 무역에서 얻을 수 있는 잠재적 이득이 매우 컸으므로 포르투갈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중국과 효과적인 타협을 이끌어 냈다. 당시 중국은 일본인이 중국에 발을 들이는 것을 극도로 꺼렸으며 중국인이 일본에 가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중국과 일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중-일 무역 중개라는 황금 광맥을 잡았다. 그리고 1557년 포르투갈은 중국으로부터 마카오를 할양 받아 중개무역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또한 포르투갈 선박은 인도의 섬유를 싣고 멜라카로 가서 향신료와 백단향 등과 교환한 후 마카오로 가져와 중국의 비단과 바꾸었다. 그런 다음 일본으로 가서 비단을 팔고 받은 은을 다시 마카오로 가져왔다. 중-일 무역에서 발생한 이윤은 최후의 순간까지 실로 막대했다.

일본은 1543년 난파한 포르투갈인들이 무장했던 조총의 우수성을 보고 즉시 이 무기를 도입했다. 영주들은 군사력 강화를 위해 경쟁적으로 조총 생산에 열을 올렸고 조총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포르투갈이 일본에 가져온 또 다른 수입품은 기독교와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봉건 영주들 중 가장 먼저 기독교로 개종한 규수의 영주 오무라 수미타다는 1571년 포르투갈에 나가사키 항을 내주었다. 에스파냐가 마닐라에 기반을 닦은 것과 같은 해이다. 마카오-나가사키 항해를 통해 높은 수익을 누려왔던 포르투갈은 1630년대 도쿠가와 바쿠후가 쇄국 정책을 수립하고 기독교 선교사를 전부 추방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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