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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저울

김경집 지음 | 더숲



고장난 저울

김경집 지음

더숲 / 2015년 9월 / 203쪽 / 12,000원





서장 - 1997년이 남긴 ‘지금’



1997년 이후 무슨 일이 있었나

1997년 대한민국은 엄청난 질곡을 겪었다. 외환위기, 즉 IMF사태다. 사실 그 위기에 대한 경고가 있었지만 현실에 안주한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우리는 산업화 시대를 겪으면서 ‘하면 된다’는 신화에 빠졌고 경제 성장은 그런 믿음을 확고하게 했다. 오일쇼크도 넘겼고 베트남 전쟁 전후 자주국방을 토대로 한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이라는 도박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그동안 모든 것이 이익의 극대화와 승자독식의 방식으로 변화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경제의 득세가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계화를 말로만 떠들었지 정작 세계의 흐름과 방향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고 무지했다. 그 결과 1997년 대한민국의 경제는 충격적인 상황에 빠져들고 말았다.

여기서 불편한 진실 두 가지를 짚고 가자. 하나는 과연 그 위기에 대처하지 못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라는 물음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이 일을 태만하게 해서일까?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른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날 갑자기 대량해고를 당해야 했다. 그에 반해 정부나 기업의 최고책임자들은 고스란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력과 부는 오히려 더 공고해졌고 거대해졌다. 두 번째의 불편한 진실은 첫 번째 것의 연장선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집안의 패물들을 다 꺼내 팔아 나라의 금고에 외환을 채워주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진실은 다시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그것은 분명 위대한 행동이었다. 나라의 외환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의 패물을 내다 판 나라는 전 세계에서 전무하다. 국민들은 제2의 국채보상운동 정신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대한민국과 국민의 저력을 보여준 위대한 일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대한민국이 그 극적인 드라마에 너무 함몰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우선 그 패물을 사들인 것은 정부가 아니라 위탁 받은 민간 기업이었고 국민들에게 싸게 사서 제값에 외국으로 내다 팔아 얻은 차액의 상당 부분을 그 기업들이 차지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감동 드라마 덕택에 책임져야 할 당사자들이 모두 그 드라마의 커튼 뒤로 숨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장관이나 실무자, 기업의 회장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 면피의 조건을 혹시 금 모으기 운동이 만들어준 것은 아닐까. 결국 금 모으기에 참여한 서민들만 그 고통과 책임을 떠안았다.

그렇다면 정작 책임을 져야 할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당시 600원대 중후반을 넘나들던 환율이 갑자기 세 배 넘게 폭등했고 유가 또한 치솟았다. 일자리에서 쫓겨나거나 남아 있는 사람들도 월급이 동결되었으니 가계 상황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부동산 가격은 1/3로 폭락했으니 안팎으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그렇게 추락한 부동산 사냥에 조용히 나섰다. 그리고 나중에 위기를 넘긴 후 부동산 가격이 오르자 그 이익을 고스란히 누렸다. 게다가 IMF체제를 졸업하자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경험자라며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거나 혹은 화려하게 컴백해서 자리를 차지했다. IMF사태 이후 그들의 이익구조는 그렇게 완벽하게 강고해졌다. 반면 중산층은 붕괴되고 구조조정의 미명으로 해고된 이들의 삶은 추락했으며 이른바 아웃소싱의 여파로 온갖 비정규직이 양산되었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적 문제의 뿌리는 이 시기에서 비롯되었다.

IMF체제가 시작되면서 구조조정의 짐은 대부분 하부구조가 고스란히 떠안았다. 위기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고, 회사가 살아야 한다고 눈물을 머금고 떠났다. 다시 돌아갈 기약도 없이. 그렇게 엄청난 출혈을 겪으며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그럼 그다음은 상부구조에도 구조조정의 본격적 메스가 가해져야 했다. 그런데 딱 그 타이밍에 IMF체제를 졸업한 것이다. 그 핑계로 상부의 구조조정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총체적 구조조정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물론 상부의 출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부에서 겪은 것과 비교할 수 없으며, 그 이후 회복과 성장을 통해 기업은 오히려 IMF 이전보다 훨씬 더 성장했다. 그리고 그 성과는 모두 상부의 소수가 차지했다.

지금 대한민국이 소수의 부자와 절대다수의 빈자로 양분된 것은 이러한 프레임이 굳어지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제는 많은 경제학자들도 3년 만에 IMF체제를 졸업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고 차라리 5년쯤으로 연장되어 상부구조까지 개혁했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지금 건국 이래 최고의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투자에는 인색하고 고용은 꺼린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철저한 탐구나 이해의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늘 그렇게 살아오면서 온갖 혜택을 다 누리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만 기업을 운영하는 데 이미 길들여진 까닭이다.



제1장 정치보다 경제에서 유린되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경제적이다!

이명박정부에 대한 평가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4대강 문제다. 처음에는 한반도대운하로 시작해서 반대가 거세지고 촛불집회 이후 여론이 악화되자 4대강 개발로 전환했다. 사실 그가 4대강에 몰입한 것은 아마도 청계천 효과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울시장 재직 당시 청계천을 복구(?)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자 대통령 선거 때 한반도대운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한반도대운하 혹은 4대강 문제는 청계천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문제다. 엄청난 비용이 들고 이후의 유지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생태를 파괴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과연 그것을 결정한 과정이 정당했는지를 처음부터 다시 따져야 한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일을 도대체 왜 그렇게 빨리,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한꺼번에 했어야 했는가? 그러니 토목의 리베이트 비용을 탐해서 그랬다는 비아냥거림이 나오는 것이다.

절차도 숙고도 없이 일사천리로 몰아쳤다. 시급한 문제라서 그랬다고? 토론하고 따지면 언제 하냐고? 그러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그런 주장은 민주주의 자체를 모르거나 부인하는 자들의 변명일 뿐이다. 민주적 토론을 통한 절차와 과정은 그 과정 속에서 걸러질 것을 찾아내고 보다 합리적 대안을 찾는 것이니 그것만큼 경제적인 일은 없다. 민주주의는 경제적이다! 4대강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환경부는 환경을 파괴하는 데 앞장서며 이 무모한 토목 탐욕에 면죄부를 제공했고, 문화재청은 문화재를 보호하기는커녕 파괴와 훼손마저 묵인했다.

선거 당시 이명박후보는 이 공사로 30여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21세기 뉴딜정책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그런 사고는 20세기에나 통할 일이다. 요즘 건설이나 토목공사 현장을 보라. 대부분 사람이 아니라 기계로 진행된다. 4대강을 위해 치른 엄청난 대가와 비용에 비하면 일자리 창출 효과는 미미할 따름이다. 민주주의가 망가지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경제와 민주주의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모든 정치가들은 제1의 과제로 일자리 창출에 몰두한다. 그만큼 경제가 어렵고 일자리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좋은 일자리’여야 하고 ‘지속가능한 일자리’여야 한다는 점이다. 4대강 사업 같은 대규모 토목사업의 경우 그 조건에 해당되는 게 전혀 없다는 점을 주목했어야 했다. 그럼 어디에 투자했어야 할까?

우리는 지난 2000년을 전후해서 심각한 ‘IT 버블’을 겪었다. 너도 나도 벤처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곧 거품이 빠지며 벤처사업은 몰락했다. IT, 컴퓨터, 정보 등의 사업은 분명 미래지향적 사업이지만 모두들 대박의 꿈만 안고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겁 없이 뛰어들었기 때문에 그 실패는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건 어차피 치러야 할 과정이고 대가였다. 그런데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외면하고 엉뚱하게 토목사업으로 일자리를 만들겠다니 그게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그것도 천문학적 예산을 탕진하면서.

벤처사업이라는 게 성공할 확률이 매우 낮은 건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성공률 5%만 돼도 훌륭한 것이다. 그럼 그 5%만 살아남을까? 아니다. 성공하지 못한 벤처사업 종사자들은 이미 훌륭한 인력자원이다. 운이 따르지 않았거나 결정적인 아이템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버티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성공한 벤처사업은 엄청난 이익을 얻고, 큰 파장을 일으킨다. 성공한 벤처사업은 급속히 신장하면서 더 많은 직원을 필요로 한다. 그럴 때 누가 필요하겠는가. 바로 이미 실패를 경험한 벤처사업 종사자들이다.

만약 진짜 좋은 일자리, 특히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를 마련해줄 것이라면, 이들에게 창업자금을 지원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이른바 인큐베이션 투자다. 아이디어와 지식만 가지고 있는 청년들에게는 창업 자금조차 버겁다. 이들의 아이디어를 엄격하고 정밀하게 판단하여 1억 원 미만의 자금을 지원해주고 필요한 기술은 전문가를 파견하여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관리하고 성장시켰어야 했다. 만약 성공하면 실패한 벤처 종사자들을 비롯해 일정 비율의 채용을 의무화하는 식의 옵션을 달면 어땠을까? 벤처사업은 성공한 5%가 200%를 먹여 살리는 구조를 갖는다. 실패했던 이들의 경험도 중요한 자산이다. 그것을 살려내게 하는 것이 성공한 벤처의 몫이다. 그게 서로에게 이로운 시너지 효과를 만든다.

이명박정부가 환경도 망치고 홍수와 가뭄을 크게 줄이지도 못하면서 천문학적 돈만 낭비하는 4대강 사업 대신, 매년 2조 원가량의 창업자금을 청년들에게 지원하고 자생할 수 있도록 힘썼더라면 양질의 일자리가 엄청나게 생겨나 지금의 취업난을 크게 줄였을 것이고 미래 산업으로 진일보했을 것이다. 절차적 합리성도 설득 과정도 없이 일사천리로 4대강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예산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시급한 청년 실업 문제를 외면했고, 지금도 이 문제는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퇴행을 묵인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막연하게 부를 동경했기 때문에 빚은 참사다. 민생 정치니 경제 살리기를 운운하며 독선과 아집에 빠져 민주적 절차와 토론을 무시한 채 밀어붙이기에만 매달린 정치는 결국 경제를 망쳤고 미래를 파괴했다. 그리고 통제되지 않은 탐욕의 경제는 정치의 타락을 가속시켰다.

왜 보수가 집권하면 자살률이 증가할까

흔히 보수는 부패하기 쉽지만 유능하다고, 특히 경제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여긴다. 물론 모든 보수가 다 경제에 능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1992년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빌 클린턴이 현직 대통령인 조지 부시를 누르고 당선된 것은 당시 미국 사회의 심각한 경기 침체와 후퇴, 그에 따른 실업률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을 제대로 공략했기 때문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그때 클린턴의 선거 구호가 바로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이었다. 대부분의 보수는 경제를 살려내겠다는 슬로건으로 선거를 치른다.

뉴욕대 정신과 교수인 제임스 길리건은 자살률과 살인율에 대한 통계를 분석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자살률과 살인율을 살펴보았더니 그 등락의 리듬이 비슷했던 것이다. 그 까닭이 궁금했던 길리건 교수는 마침내 그 변화의 주기가 정권 교체기와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을 알아냈다. 그는 보수정당, 즉 공화당 출신이 대통령이 될 때마다 자살과 살인의 비율이 크게 증가한다는 통계를 분석하여 ‘치명적 전염성 폭력’ 증가의 원인이 무엇인지 연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00년 동안 어느 정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자살과 살인의 비율이 달라지는 까닭을 찾아냈다.

제임스 길리건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공화당을 지지하는 세력은 미국의 재계와 중산층 그리고 백인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보수적이다. 선거에 드는 엄청난 비용은 정치헌금 등으로 충당되는데 많은 기업들이 공화당을 지지한다. 그리고 미국은 로비스트의 천국이다. 자신들이 후원하고 지지한 보수 후보가 당선되면 이들은 먼저 규제 철폐를 요구한다. 총기 소지 제한과 같은 민감한 문제도 이들에 의해 번번이 좌절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보수 후보였던 대통령은 그들의 요구에 따라 규제를 풀어준다. 물론 명분은 있다. 시장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함이고 그것이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큰 가치의 명분이기 때문이다. 그 규제 철폐의 대표적 사항이 ‘노동유연성’ 혹은 ‘노동시장 환경의 유연화’인데, 이것은 사실상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규모 해고가 이루어진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지 못한 해고자들은 하루아침에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면서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끝내 삶을 포기한다. 그렇다고 이들의 일자리를 젊은이들에게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일단은 고용을 줄여 고정비를 삭감하는 식으로 이익구조를 만들기 때문에 신규 고용도 줄어든다. 그러면 젊은이들도 좌절해서 삶을 포기한다. 그래서 자살이 증가한다. 총기의 자유화는 폭력과 살인의 증가에 한몫한다.

보수 정당인 공화당이 집권할 때는 미국의 자살률과 살인율이 증가하고 진보 정당인 민주당이 집권할 때는 감소한다는 것은, 1900년부터 2007년까지 107년 동안 미국 정부가 발표한 통계 자료를 토대로 증명된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연의 탓이라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컸으며, 전쟁과 공황 같은 역사적 격변이나 다른 변수들을 뛰어넘을 만큼 강력한 일관성을 보였다. 물론 이것은 미국의 상황이기에 다른 나라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본적 성향은 비슷하다. 보수 정당과 진보 정당의 정책에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제임스 길리건이 던지는 물음은 이렇다. “보수는 경제에 강하고, 진보는 경제에 약한가?” 우리가 선거에서 정치인이나 정당을 선택할 때 대개 그렇게 판단한다. 조금 부패했지만 그래도 경제는 보수가 살려낼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화당은 경제를 성장시키는 당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반면, 민주당은 과도한 규제와 복지 정책 탓에 경제를 성장시키는 데는 소질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료를 분석한 결과는 이러한 통념과는 정반대다. 보수가 집권하면 실업, 빈곤, 불평등, 불황이 더 심해진다는 이러한 분석에 대해 과연 대한민국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길리건이 던지는 의문은 이것이다. “왜 99퍼센트의 못 가진 사람들이 1퍼센트를 위한 정당에 표를 줄까?” 길리건은 불평등과 폭력을 키우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공화당이 이기는 데 도움을 준다는 모순된 구조를 밝혀낸다. 범죄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면 미국인은 인권과 복지를 중시하는 진보적 정책을 비난하고 보수 성향의 후보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똑같은 논리가 반복된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종북’이니 하는 신 매카시즘의 형태로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퇴행적이다. 문제는 저소득층에게 복지 혜택을 ‘거저 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품는 건 부자들인데, 왜 가난한 사람들까지 거기에 편승하는가 하는 물음이 길리건의 의문이다. 길리건에 따르면 공화당은 중상류층과 중하류층이 최하류층을 미워하게 만드는 ‘분할 정복’ 전략을 발판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계급배반형 투표’가 성행하는 것은 길리건의 분석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오히려 베블렌의 지적과 비판이 우리에게 딱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유한계급론에 따르면, 부자들이 굳이 기존의 제도와 생활양식을 바꿀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 보수적인 것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적이 되는 까닭은 가난한 하위 소득계층은 현 제도와 생활양식 속에서 당장의 일상과 생활에 급급해 변화와 대안을 생각할 틈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빨리 적응할 수 있는 기존의 방식에 순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엉뚱하게 보수적이고, 부자의 ‘꿈’을 안기는 이미지에 주저하지 않고 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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