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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움직이는 시진핑 리커창

샹장위 지음 | 린



중국을 움직이는 시진핑 리커창

샹장위 지음

린 / 2014년 5월 / 403쪽 / 22,000원





용은 용을 낳고 봉황은 봉황을 낳는다

시진핑은 1953년에, 리커창은 1955년에 출생하여 시진핑이 두 살 많다. 시진핑의 부친인 시중쉰은 32세 때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본부장이 되었고, 신중국의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원로 지도자다. 마오쩌둥도 시중쉰을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상대적으로 리커창의 부친은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리커창의 부친도 일반 서민은 아니었다. 그 역시 중국공산당이 집권하기 전에 혁명에 참가했으며, 신중국 초기에는 현장(懸長)으로 일했다. 리커창 역시 간부 가정에서 출생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성지인 ‘옌안’과 제왕의 고향 ‘펑양’

시진핑과 리커창의 학창 시절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문화대혁명 시기였다. 시진핑이 다닌 곳은 붉은 귀족학교(紅色學校)였고, 리커창도 현지의 명문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중학교 정규 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시진핑은 반동 학생으로 몰려 학교에서 쫓겨났고, 리커창은 중퇴하고 독학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학창 시절이 비슷하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시진핑은 부친이 고위 관료였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고, 리커창은 어지러운 시대에 국학의 대가였던 스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시진핑과 리커창은 모두 ‘위대한 지도자 동지인 마오 주석의 호소’에 부응하여 벽지 농촌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많은 일을 해냈다. 궁벽한 농촌에서 보여준 그들의 활약상이 현지 당 조직의 인정을 받아 각각 중국공산당에 입당, 그 후 수년간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시진핑은 우리 량자허(梁家河) 사람입니다”: 옌안 시에서 210번 국도를 따라 북동쪽으로 7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원안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다시 원안이에서 산간지역으로 몇 킬로미터를 더 가면 량자허 촌이 나온다. 1969년 이 외딴 산촌에 베이징의 지식청년(1950년대에서 문화대혁명이 끝날 때까지 자발적 혹은 강제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보내져 노동에 참여한 청년 남녀)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똥 더미와 석탄을 메고 제방을 쌓고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퇀즈(주먹밥)’를 나눠 먹었다. 30여 년이 지나자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현지에서 평범한 노동자가 되었고, 일부는 고향인 베이징으로 돌아갔으며, 지도 간부가 된 사람도 있다. 그중에는 현재 국가주석인 시진핑도 있었다.

‘산시에서 배출한 국가 지도자’라는 인터넷 기사를 보면, 1969년 16세였던 앳된 시진핑이 산베이 농촌생산대에 왔고, 소박한 마을 사람들과 막역하게 지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산시 방송국과 산시 라오싼제 기업집단이 공동 제작한 다큐멘터리 <라오싼제(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1966년~1968년에 졸업한 중고등학생) 이야기>에서 시진핑을 소개했는데, 다큐멘터리를 보면 시진핑은 이 지역 사람들과 무척 가깝게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훗날 시진핑이 지부의 추천을 받아 대학에 입학하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를 다음과 같이 배웅했다고 한다. “그가 떠나던 날, 우리 량자허 사람들은 길가에 죽 늘어서서 시진핑을 떠나보냈지요. 어떤 사람은 경운기에 태워 마을 어귀까지 데려다 주었어요.” 그 후 1973년에 시진핑은 량자허 촌에서 처음으로 입당신청서를 제출하고, 1974년 1월에 별문제 없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산대대 당 지부의 서기가 되었다.

‘제왕의 고향’ 펑양 현에서 호평을 받은 리커창: 1974년, 리커창을 포함한 학생들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버스에 올랐다. 이들은 평양 현에 있는 다먀오 공사의 둥링 대대에 합류했다. 생산대 시절에 리커창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여 농민들에게 과학적으로 경작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품종이 우수한 벼를 보급했다. 그러자 현지 농민에게 지지를 얻고 (인민)공사의 당 위원에게 호평을 받게 되었다. 1976년, 리커창은 공산당에 입당했고, 얼마 후 진카오 공사의 다먀오대대로 옮겨갔고, 곧바로 당 지부 서기가 되었다. 참고로 생산대로 하방하는 것에서부터 농촌에서의 공산당 입당, 대대의 당 지부 서기가 되기까지, 그리고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한 안후이 성의 우수 인물’로 뽑히기까지 이 모든 것은 부친인 리펑싼이 리커창의 앞날을 위해 주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리커창은 시대의 거대한 변화에 뒤처지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중국공산당의 중심축이 이동하자, 아버지가 제안한 지방관 자리를 마다하고 베이징대학교 법학과에 시험을 거쳐 입학했다.



칭화대학교와 베이징대학교

시진핑은 칭화대학교, 리커창은 베이징대학교를 졸업했다. 두 사람 모두 최고의 대학을 졸업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시진핑은 농촌에서 추천을 받은 공농병 학생(1970년부터 1976년까지 시험을 거치지 않고 추천으로 대학교와 전문대학의 입학 전형에 합격한 노동자, 농민, 해방군, 지방의 지식청년)이었고, 리커창은 정규 대학입시를 거쳐 입학했다. 시진핑의 재학 시절 관련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리커창의 베이징대학교 시절 활약상과 학업 성적 자료는 많이 남아 있다. 대학에 다닐 때 리커창은 생각이 자유롭고 성적도 우수했지만, 시진핑은 칭화대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서로 다른 경로로 정계에 입문한 두 사람

일약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에 들어간 시진핑: 1979년 4월 시진핑은 칭화대학교 공정화학과 보통반을 졸업한 후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에 배치되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및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장이며, 훗날 국방부장(장관급)을 역임한 겅뱌오의 비서가 되었다. 시진핑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중앙군사위원회에 들어가 겅뱌오의 비서가 된 것에 대해 수많은 내부 관계자와 평론가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요지는 그가 만일 태자당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버지의 후광이 없었다면 어떻게 졸업하자마자 벼락출세나 다름없는 중앙군사위원회에 들어갈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당시 시진핑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재무장하기 위해 기층으로 내려간 시진핑: 시진핑은 중앙군사위원회의 판공청에서 3년간 근무한 후 1982년에 갑자기 허베이 성 정당 현으로 갔고, 현위원회의 부서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풍문이 있다. 하나는 부정적인 언론을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압력이 점점 커진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진핑이 국방부장인 겅뱌오에게 지방의 기층으로 내려가 스스로 재무장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중국은 영국과 홍콩 반환 협상을 시작했는데, 이때 겅뱌오가 홍콩에 중국군이 주둔하는 문제를 두고 덩샤오핑과 의견 충돌을 빚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겅뱌오는 시진핑에게 이제 자신은 앞날을 확신할 수 없으니 다른 자리를 알아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두 가지 풍문에 대해 중국 전문가들은 후자가 더 사실에 가깝다고 말했다.

리커창 - 유학을 포기하고 모교에 남다: 1982년 봄 ‘황포 1기’로 불렸던 베이징대 법학과 77학번이 졸업했다. 졸업 전날, 리커창은 인생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미국 유학이었다. 그러나 베이징대학교 당위원회 부서기인 마스장이 리커창의 정치적 재능과 침착한 성격을 알아보고 십여 차례나 찾아와 모교에 남아 공청단 베이징대학교 위원회 서기를 맡아 약 1만여 명의 학교 소속 공청단원을 지도하라고 권유했다. 여러 차례 마스장의 권고를 듣고 리커창은 결국 모교에 남기로 결심했다. 이후 리커창은 베이징대 공청단에서 크게 활약했다.

정계 입문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리커창: 1982년 12월, 중국 공청단 제11차 전국대표대회가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공청단 제11차 1중전회에서는 열일곱 명으로 구성된 상무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왕자오궈는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 후진타오는 서기처 상무서기, 리커창은 공청단 중앙상무위원이 되었다. 일부에서는 여기서부터 리커창이 정계의 엘리트 코스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허베이에 ‘대관원(大觀園)’을 조성한 시진핑: 시진핑은 허베이 성 정딩 현으로 내려가 3년간 일했다. 당시 30세 남짓한 시진핑은 현위원회 부서기로 있다가 얼마 후 서기로 승진했다. 중국의 홍색여행망(www.crt.com.cn)에 실린 글에 따르면, 정딩 현에서 재직 기간 동안 시진핑은 청렴하고 성실했으며 강한 추진력으로 일에 임했다고 한다.

시진핑 공직 생활의 전환점이 된 푸젠(福建) 남하: 중국 정부에서 공개한 시진핑에 대한 자료를 보면, 1985년 시진핑이 푸젠 성으로 간 것이 그의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해 시진핑은 샤먼(아모이) 시위원회 서기, 난징군구 닝더군관구 당위원회 제1서기와 푸저우 시위원회 서기, 푸저우 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푸젠 성위원회 상무위원, 성위원회 부서기, 부성장, 성장 대리, 성장 등 다양한 보직을 거쳤다. 시진핑은 푸젠 성에서 무려 17년간 근무했다.

‘인생의 기회 잡기’, 리커창의 보수화 정치 행로: 1984년 4월, ‘국제 청년의 해’ 중국 조직위원회의 회원 명단에 리커창의 이름이 당당히 올라왔다. 이 조직의 주임 위원은 후진타오, 부주임 위원은 류옌둥이었으며, 이때 중화전국청년연합회 부주석 겸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에 부임한 리커창 역시 부주임 위원으로 명단에 올랐다. 당시에 그는 중화전국학생연합회 비서장을 겸임했다.



푸젠 성 대사건, 허난 성 대화재

시진핑이 푸젠 성장, 리커창이 허난 성의 성장을 지내는 동안 다양한 사건과 난제가 연이어 발생했다. 푸젠 성에서는 대형 사건이 연일 터졌고, 허난 성에서는 화재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1980년대에 두 인물에 대한 평가는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지만, 1990년대에도 관운이나 개인적인 능력 면에서 누가 낫다고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경쟁 관계가 팽팽했다.



‘저장 모델’과 ‘랴오닝 성의 경험’

2000년대에 들어와 시진핑과 리커창은 관운이 매우 좋아 모두 중국공산당 5세대 후계자 대열에 들어섰다. 2002년 10월, 푸젠 성장이었던 시진핑은 저장 성장을 거쳐 성위원회 서기에 올랐다. 그는 저장 성에서 4년 반 동안 경제 발전을 선도하고 사회 발전의 토대를 닦아 여러 분야에서 저장 성을 전국적으로 풍요로운 곳으로 이끌었다.

한편 2004년 12월, 리커창 허난 성위원회 서기는 갑자기 랴오닝성위원회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랴오닝 성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푸신 시 쑨자완에서 214명이 사망하는 초대형 탄광 사고가 발생했으며, 창하이 현에서는 배가 침몰하여 19명이 사망하고, 푸신우룽 탄광 사고로 32명이 사망했다. 또한 푸순라오후타이 탄광 사고로 29명이 사망하고, 톄링 특수철강공장에서 쇳물 바가지가 떨어지면서 32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의 선전 기관은 실세를 보호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리커창이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가기 전에 부정적인 뉴스가 퍼지는 것을 경계했다. 따라서 리커창과 관련된 부정적인 기사는 적극적으로 막았다. 홍콩 언론이 리커창을 ‘언론의 탄압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공산당의 5세대 후계자는 이러한 피아(彼我)가 경쟁하는 국면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저장 모델’이 사실상 ‘언론의 탄압자’를 이겼으며, 나중에 낙하산 인사로 상하이로 발령 난 시진핑이 리커창을 누르고 중국의 새로운 리더가 된 것이다.



후발 주자의 추월

오랜 공직 경력에서 리커창은 시진핑을 앞서 나갔다. 리커창이 1999년에 성장이 되었지만 시진핑은 2000년에 성장이 되었고, 리커창이 2002년에 성위원회 서기로 올라갔지만 시진핑은 2003년에 성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또 리커창이 제15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시진핑은 중앙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시진핑이 리커창을 추월했다. 시진핑이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가 되었는데, 역대로 이 직위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의미한다.

천량위의 낙마와 상하이를 장악한 시진핑: 2006년 7월 5일부터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관계 부처와 함께 상하이 시 노동 및 사회보장국의 사회보장기금 불법 운영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 과정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인 천량위가 이 사건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것을 알아냈고, 9월 24일, 당 중앙정치국은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제출한 「천량위 문제에 대한 1차 조사 보고서」를 심의하여 천량위의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 상무위원, 위원 직무를 박탈하고, 그가 맡고 있는 당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위원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고위층은 치열한 권력 투쟁을 거쳐 2007년 3월, 저장 성위원회 서기인 시진핑을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로 임명했다.

천량위가 낙마하자 중국공산당의 각 파벌은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예로 2005년 8월, 로이터통신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하며 후진타오의 측근이자 안후이 성위원회 서기인 궈진풍이 상하이 시장이 될 것이 유력하다고 했다. 또 양회 기간 동안 후진타오의 심복인 류옌둥이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가 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2주 만에 상하이탄(상하이의 별칭)의 권력은 태자당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 자리를 두고 권력 투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중국의 태자당은 이미 거대 특권층이 되어 당ㆍ정ㆍ군의 수많은 요직을 통제하고 있는데, 홍콩 잡지인 《쟁명》에 따르면, 중국의 청국급 간부 87%와 처급 간부의 90%가 고위 간부의 자제라고 한다. 한편 전문가들은 시진핑이 화려한 집안 배경이 있지만 정치 경력 면에서는 밑바닥에서부터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와 지방의 고위 관료가 되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시진핑의 상하이 입성과 세 가지 약속: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가 된 시진핑은 ‘기존의 토대에서 책임 있는 중책을 맡아 직무에 충실하게 임하며 내실 있는 성과를 거두겠다’고 밝히면서 세 가지 측면에 중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첫째, 덩샤오핑 이론과 ‘3개 대표 이론(중국공산당이 ‘선진 생산력의 발전 요구,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는 말)’, 『장쩌민 문선』, 과학적인 발전관 등 중요한 전략 사상을 학습한다. 둘째, 국민을 위해 일한다. 상하이 시민을 위해 실용적으로 일하고 잘해낼 것이다. 자율과 청렴한 태도를 유지하고 요구 기준을 엄격하게 준수하여 자발적으로 감독을 받으며, 다방면의 감독을 환영한다. 셋째, 민주집중제(중국공산당의 민주집중제는 소수의 다수에 대한 복종, 개인의 집단에 대한 복종, 하부의 상부에 대한 복종, 전당(全黨)의 중앙에 대한 복종이라는 네 가지 원칙을 포함하며, ‘집중 지도하의 민주와 민주를 바탕으로 한 집중’이 기본 정신이다)의 원칙을 관철시키고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각급 지도층과 간부의 전문성을 강화한다. 당보(黨報)에서 높이 평가받은 시진핑의 상하이 정풍(整風): 2007년 5월, 시진핑이 상하이를 장악한 지 2개월 후 중국공산당 상하이 시 제9차 대표대회가 개막했다. 시위원회 서기인 시진핑은 회의에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기치를 높이 받들고 천량위 사건에 대해 비판과 반성을 하는 한편, 상하이의 미래 발전을 위해서는 후진타오 총서기가 제기한 상하이 전략이 반드시 정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년 만에 두 단계 승진한 시진핑: 제17차 당 대회가 개최되기 전에 베이징 당국이 시진핑을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로 발령 낸 뉴스를 특종 보도한 《둬웨이신문사》는 2007년 9월 22일에 시진핑이 제17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고, 5년 후 당ㆍ정ㆍ군을 장악하는 가장 유력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홍콩에서 발행되는 《둬웨이 월간》 2007년 10월호인 ‘제17차 당대회 특별호’에서는 제17차 당 대회 정치국 상무위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정치국 상무위원은 아홉 명으로 구성되며, 새로운 인물인 시진핑은 서기처를 주관하고, 리커창은 상무 부총리, 허궈창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저우융캉은 정법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정치국 상무위원의 서열은 후진타오, 우방궈, 원자바오, 자칭린, 리창춘, 시진핑, 리커창, 허궈창, 저우융캉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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