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중난하이로 가는 길

김정계, 전영란 지음 | 린



중난하이로 가는 길

김정계, 전영란 지음

린 / 2014년 5월 / 327쪽 / 22,000원





중국정치의 네트워크

연고우선주의는 중국을 포함한 유교문화권 국가의 전통적인 정치행태 중 하나다. 특히 일당독재체제하의 중국정치에서는 모든 정책결정이 계파 간 흥정과 연합에 의해서 결정되며, 그 계파는 비공식적 인간관계인 연고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은 계파 형성의 원인을 ‘권력투쟁’, ‘정책대립’, ‘관료조직의 이익’ 등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먼저 권력투쟁 모델에 의하면 계파는 지도자 간의 권력투쟁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권력분배는 계파 간 투쟁의 결정적 요소이며, 정책은 정쟁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는데, 루시안 파이는 권력이 바로 중국 계파 정치의 결정적 요소라고 보았다. 정책대립 모델은 계파의 출현을 지도자 간의 정책대립과 유관하다고 보는 분석으로, 중국의 계파정치는 권력분배 못지않게 정책노선의 대립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관료조직 이익모델은 서구 관료정치의 관점에 근거한 분석으로, 중국의 계파 갈등은 권력투쟁이나 정책대립과도 유관하지만 관료들의 이익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관료들의 경력 경로는 계파 결성의 주요 원인이 된다고 보겠다.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도자는 자신이 맡고 있는 부처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결국 소속 관료조직의 이익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정치엘리트 간의 정책대립이나 권력투쟁은 실제적으로는 각 부처조직의 이익 충돌에서 비롯된다는 관점이다. 이상과 같은 계파형성의 공식적 요인들에 덧붙여 동향ㆍ동창ㆍ친족ㆍ같은 직장 등 비공식적 인간관계 역시 중국정치의 계파 결성에 상당한 작용을 하고 있다. 즉 지연, 학연, 혈연, 업연 등은 계파결성의 주요 지원세력이 되었다.

참고로 마오쩌둥 시대에는 물론 개혁개방 이후에도 정치엘리트들은 정책의 노선 및 속도와 범위를 놓고 이해득실을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계파를 형성하였고,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격렬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예로 마오쩌둥과 류사오치 간의 노선 대립이나 덩샤오핑과 화궈펑의 노선투쟁 및 덩샤오핑과 천윈의 정책 갈등 등은 격렬한 권력투쟁을 유발하였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노인정치의 종말 및 새로운 정치세대의 등장과 더불어 노선투쟁도, 보ㆍ혁 간의 정책대립도, 신ㆍ구 엘리트 간의 갈등도 아닌 새로운 비공식적 배경이 중국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배경은 먼저 세대 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즉 동일한 시대, 동일한 정치적 경험을 공유한 세대의 특성이 엘리트의 정치적 태도를 결정짓는 주요 배경이다. 물론 이때에도 지연, 혈연, 학연, 업연 등으로 맺어진 비공식 집단의 영향력이 중국정치에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예로 정치적 성장 지역(지연)을 통해 형성된 상하이방, 공동운명(혈연)을 통해 연계된 태자당, 학연을 중심으로 한 인적 네트워크인 칭화방, 그리고 경력을 통해 맺어진 공청단 등이 그것이다.

중국의 정치세대: 일반적으로 중국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사용하는 ‘정치세대’라는 용어는 ‘정치엘리트세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재미 중국인 학자 리청은 중국공산당 엘리트의 특별한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사건을 중심으로 중국의 정치세대를 다음과 같이 5세대로 구분하고 있다. 제1정치세대는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대장정(1934~1935) 혁명1세대이고, 제2정치세대는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항일전쟁(1937~1945) 그룹이며, 제3정치세대는 장쩌민처럼 건국 전후로부터 1950년대 초 사회주의 전이 시기에 입당한 연령층이다. 그리고 제4정치세대는 후진타오 중심의 문화대혁명기에 청년시기를 보낸 대략 1941년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출생한 그룹이다. 제5정치세대는 1980년대 경제개혁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그룹으로, 시진핑이 이끄는 현 중국지도부가 이에 해당된다.

중국정치의 비공식적 네트워크: 일반적으로 오늘날 중국정치체계에 많이 거론되는 비공식적 연고 네트워크로는 정치적 성장지역을 통해 형성된 ‘상하이방’, 학연을 통한 인맥인 ‘칭화방’, 경력을 통한 관시망인 ‘공청단’, 그리고 공동운명(혈연)을 통해 연계된 ‘태자당’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 비공식적 조직은 과거의 정치 계파만큼 결속력이 강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중국공산당 최고 지도층의 비공식적 배경은 과거의 정치 계파와는 달리 그 구성원이 상당히 중복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비공식적 조직을 중심으로 최고 지도층이 구성되고, 이들 조직을 통하여 정책 의제들이 제출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그 중요성은 높다고 보겠다. 특히 이들 제 세력은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성에 의해 친화적인 집단 간에 제휴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바로 칭화방ㆍ공청단 출신 간의 제휴와, 상하이방ㆍ태자당 출신 간의 제휴가 그것이다. 리청이라는 학자는 전자를 ‘대중연합’이라 하고, 후자를 ‘엘리트 연합’이라 명명하였다. 또 그들은 자연스럽게 상이한 정책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



시진핑은 어떤 인물인가 - 출신성분 및 계파와 경력을 중심으로

시진핑은 2007년 제17차 당 대회 이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가 부주석에 올랐고, 2010년 10월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에 앉으면서 이미 ‘후계자’의 입지를 굳혔다. 그리고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제18기 전국대표대회 제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약칭: 18대1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2013년 3월에 열린 제18기 전국 인민대표대회(약칭: 전인대)에서 국가주석 겸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임되었다.

이렇게 시진핑은 중국의 새로운 정치지도자로 등장했다. 당ㆍ정ㆍ군의 최고 지도자가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권력의 최정상에 오른 것이다. 2002년 11월 후진타오가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2013년 3월)을 장쩌민으로부터 넘겨받았지만, 2004년 9월에 가서야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승계한 점과 비교할 때 시진핑의 권력 승계는 단숨에 이루어졌다. 이변이 없는 한 시진핑은 2020년대 초반까지 향후 10년간 최고 지도자로서 중국의 미래를 좌우하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시진핑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180cm의 키에 100kg의 몸무게를 가진 거구로 둥그런 얼굴, 가늘고 긴 눈, 큼직한 코 등이 아버지 시중쉰을 매우 닮았다. 가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독특한 기운은 사람들을 압도한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느끼지 못하지만, 직접 대면하면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경험과 식견이 응축된 카리스마적 기운에 정치지도자들은 압도당하곤 한다. 이러한 카리스마적 기운은 상대를 동지로 끌어들이는 매력이 되며 적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진핑을 만나면 첫인상이 따스하고 평온하며 신비한 대범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는 것이 일반적 평이다.

한마디로 시진핑의 인상은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대인’을 보는 느낌이다. 시진핑에게는 마오쩌둥과 같은 위압적인 권위도, 저우언라이처럼 지적 매력도, 덩샤오핑과 같은 역정이 응축된 노련함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장쩌민처럼 좌고우면하는 엉거주춤함도, 후진타오와 같이 분출하는 욕망을 삼키는 듯한 인상도 느낄 수 없다. 시진핑의 얼굴에서는 중국 사회주의혁명의 역정을 느낄 수 없고, 문화대혁명의 재앙을 읽을 수도 없다. 그저 티 없이 성장한 태평스러운 부잣집 귀공자 타입일 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문화대혁명 때 아버지가 숙청당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단련한 담력과 응축된 권모술수의 기술이 감추어져 있다. ‘난득호도(難得糊塗)’의 카리스마라고 할까?

현역병으로 중앙군사위원회에 근무하다: 시진핑은 고위 간부인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남부럽지 않게 보냈다. 시진핑은 당시 고위 간부의 자제들만이 다닐 수 있는 베이징 81학교에 다녔다. 한편 아버지가 뤄양으로 하방될 때 시진핑은 아홉 살이었는데, 시진핑은 1968년까지 이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이 학교는 문화대혁명 중 ‘고위 간부 자제의 학교’라는 이유로 폐교되었고, 시진핑은 인근 베이징 제25중학교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시진핑은 문화대혁명으로 ‘반동집안의 자식’이라는 비판과 멸시를 받아야 했다. 한편 시진핑이 중학을 졸업할 즈음, 중국에서는 모든 대학이 문을 닫았고, 지식청년들은 하방되어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시진핑은 중학을 마친 1969년(만 15세)에 지식청년으로 산시의 오지 량자허라는 산촌에 배치되었다. 이후 7년 동안 이곳에서 농민과 함께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시진핑은 몸이 아플 때를 제외하고는 1년 365일을 거의 노동에 종사했다. 땅굴 같은 집에서 풀을 베고 가축을 돌보고 들에서 양을 방목했다. 이로 인해 시진핑은 고위간부 자제이면서도 서민적 정서를 갖고 되었으며, 자신이 다른 고위간부 자제와 비교되는 것을 싫어했다. 한편 그는 당시 하방된 베이징 지식청년 가운데에서는 처음으로 농촌대대 서기가 되는 등 두각을 나타냈고, 몇 차례 퇴짜를 맞기는 했지만 1974년 공산당에 입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5년 22세 때 시진핑은 약 7년간의 하방생활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공농병(노동자, 농부, 병사) 학생 신분으로 칭화 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입학은 필기시험이 아닌 추천에 의한 것이었는데, 시진핑은 아버지의 상사이자 동료로 일한 지덩구이(당시 부총리)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1978년 들어 덩샤오핑이 집권하여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시진핑의 아버지는 복권되었고, 시진핑은 1979년 칭화 대학을 졸업했다. 칭화 대학 졸업 후, 시진핑은 당시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장이었던 겅뱌오의 비서로 취직이 되어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에 근무했다. 그는 현역병 신분이었다. 당시 고위 간부의 비서가 된다는 것은 특혜였다. 그것도 현역병으로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의 비서라는 것은 대단한 자리였다. 비서로 재직하는 동안 시진핑은 업무 스케줄 잡기, 내빈 접대, 연설문 초안 작성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또 당시 국가계획위원회 주임 위추리의 비서였던 쩡칭훙, 류사오치의 아들 류위안(현역 해방군 상장) 등 고위 간부 자제 출신 비서들과 교분을 다지기도 했다.

시진핑은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실에 근무하는 동안 군부의 간부들과 인맥을 다졌고, 국방관리의 기초지식을 익혔다. 참고로 현직 당 중앙 최고 지도층 가운데, 군 대표 현역 장성을 제외한 문민정치인 중 군대 경험을 가진 지도자는 오직 시진핑뿐이다. 중국정치에서 군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가를 볼 때, 이는 시진핑만이 가진 큰 정치적 자산이며 힘이다. 1982년 시진핑은 제대했다. 제대 후 허베이성 정당 현 부서기를 시작으로 20여 년간 지방만을 돌며 기층 경험을 쌓았다. 중국의 “최고 간부가 되려면 지방정부의 당정 업무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코스다.”라고 한 아버지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개방지역 지도자 경험을 통해 개혁의지를 다지다: 1985년 시진핑은 개방전초 기지인 푸젠성 샤먼 시로 옮겨 가 1988년까지 당위원회 상무위원 겸 부시장으로 근무했다. 샤먼 시는 개혁개방 초기에 개방된 중국의 4개 경제특구 가운데 하나로, 시진핑은 이곳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끈 일은 그가 기획하여 수립한 ‘2000년 샤먼 시 경제사회 발전전략’으로, 그 개혁 방안은 각 분야의 호평을 받았다.

1988년 시진핑은 푸젠성 닝더 지구 당위 서기에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불과 36세였다. 닝더지구는 빈곤하고 낙후된 지역인 데다가 간부들은 부패해 있었다. 이에 시진핑은 부임 후, 부패퇴치를 주요 시정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인민일보》가 ‘한 가지 일을 하여, 만인의 마음을 얻다’라는 제목으로 시진핑의 이러한 부패척결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시진핑의 이 일전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90년 5월 시진핑은 푸젠성 푸저우 시 당위원회 서기에 임명되었다. 푸저우 당위 서기는 부(副)성급 간부에 해당한다. 이후 2000년까지 푸저우 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푸젠성 부서기, 부성장, 성장대리를 거쳐 성장으로 승진하는 등 주로 푸젠성에서 30~40대를 보냈는데, 1997년에 당 제15기 중앙후보위원에 선출되어 중앙 진출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푸젠성에서 5년 더 근무하며 계획된 업무를 완료한 후 새로운 직위를 맡기를 희망했다. 한편 시진핑은 푸저우를 위해 ‘하나의 중점’, ‘두 개의 선’, ‘세 개의 단계’, ‘네 개의 발전’이라는 방침을 세워 밀고 나갔다.

‘하나의 중점’이란 민강을 중점으로 하여 인근 지역을 전면적으로 개발함으로써 민강 어귀 개발을 추진한 것이었다. ‘두 개의 선’은 푸저우-마웨이와 푸저우-샤먼 간의 도로를 확장하여 대외개방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세 개의 단계’는 마웨이 개방구와 민강 어귀 투자구-푸저우의 구시가지-교외의 8개 현을 연계시키고 상호 발전을 촉진시키는 단계를 거쳐, 이 지역 전체를 전면 개방한다는 내용이었다. ‘네 개의 발전’은 외자를 끌어들이고, 기술을 도입하고, 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고, 투자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전략이었다.

제1 경제도시 상하이 서기로 중앙 진출의 디딤돌을 마련하다: 시진핑은 2002년 푸젠성 성장에서 저장성 부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저장성은 상하이와 인접해 있는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성 가운데 하나로, 정쩌민 전 주석을 대표로 하는 상하이방의 본거지 중 한 곳이다. 여기서 시진핑은 부성장과 대리성장을 거쳐 2002년 11월 저장성 당위 서기로 승진하였다. 이 점으로 보아 그는 푸젠에서 밀려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방지역의 경험을 더욱 넓히면서 더 좋은 인맥과 연계되어 그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저장성 당위 서기가 된다는 것은 중앙의 영향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 당 총서기가 태자당이며 상하이방인 장쩌민이었다. 그는 저장성 서기로 재직하는 5년 동안 저장성을 전국에서 민간기업의 비율이 가장 높은 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저장성 수도 항저우를 세계적인 그린 시티로 조성하고,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등 환경과 문화 행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2007년 봄 천량위 상하이 서기가 부정에 연루되어 숙청당하자 시진핑은 중국 제1의 경제도시 상하이 시 당위 서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름으로써 포스트 후진타오 시대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이는 2002년 제16기 중앙위원에서 일약 두 단계나 승진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중앙정치국 위원을 거치지 않고, 바로 상무위원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쩡칭흥에 이어 중앙서기처 상무서기직과 중앙당교 교장직까지 겸임하게 되었고, 국가 부주석 자리까지 올랐다. 나아가 2010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까지 겸임함으로써 후진타오가 걸었던 것과 꼭 같은 후계자의 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제8차 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당선되었고,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후진타오로부터 승계하였다.

2013년 3월 시진핑은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 겸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승계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에 당선된 시진핑은, 총 투표자 2,956명 가운데 찬성 2,952명, 반대 1명, 기권 3명으로 99.86%의 지지를 받았다. 시진핑은 덩샤오핑 이후 군부 내 영향력이 가장 큰 지도자로 평가된다. 혁명원로의 아들인 데다 겅뱌오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의 비서로 공직을 시작해 군부 내 인맥을 충실히 쌓아왔기 때문이다. 또 인민해방군 소장이자 가수인 부인 펑리위안의 내조도 한몫하고 있다.



시진핑 정권의 권력구조

현대 중국의 권력구조는 횡적으로는 당과 국가 및 이를 지탱해주는 집권화된 군사조직, 그리고 이들 권력조직과 인민 간의 연계를 제공하는 대중(群衆) 조직 단위로 조직되어 있으며, 종적으로는 이들 조직이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의해 중앙-지방-기층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