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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 답사기 3: 경주 편

이종호 지음 | 북카라반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 답사기 3: 경주 편



이종호 지음

북카라반 / 2015년 7월 / 356쪽 / 18,000원





대릉원지구



황남동에 있는 고분 중에서 대표적인 적석목곽분(덧널 위에 돌무지와 봉토를 덮어 봉분을 만든 무덤 양식)은 황남대총이다. 대릉원에서 규모가 가장 큰 황남대총은 형태상 쌍분, 즉 부부 묘로 표형분이라고도 불리는데 남분(남자)을 먼저 축조하고 북분(여자)을 잇대어 만든 것이다. 황남대총 발굴은 1973년 7월에서 1975년 10월까지 2년 4개월이 소요되었는데 이는 국내 고분 발굴 사상 단일 무덤으로서 최장 조사 기간이다. 발굴에 동원된 인원만 총 3만 3,000여 명이었으며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무덤의 규모답게 순금 금관, 비단벌레 장식의 안장틀과 발걸이, 말띠드리개, 유리병 등 유물이 무려 7만여 점이나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신라 최대의 이 고분에는 당연히 신라에서 최고 권력을 자랑하던 왕과 왕비가 매장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여자 무덤인 북문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었고 남자 무덤인 남분에서는 금관 대신 왕관 형식상 유례가 없는 은관 1점, 은관과 같은 형식의 금동관 1점 외에 동제 금도금의 금동제 수목관 5점이 출토되었다. 권삼윤은 여자의 금관이 더 화려한 이유를 신라 금관의 주인공이 정치 권력자가 아니라 샤먼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제정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샤먼의 중요도는 누구보다도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여자의 무덤에서 더 화려하고 우수한 부장품이 나왔다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설명을 따르면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허리띠도 남자는 7줄인데 여자는 13줄이라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라와 가야의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은 모두 7점(가야 1점)이다. 이 중에서 교동 금관을 제외한 황남대총 북분ㆍ금관총ㆍ서봉총ㆍ금령총ㆍ천마총 금관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학자들은 경주 일원에만 150여 기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중 발굴된 것은 약 30여 기에 불과하므로 앞으로 발굴 여하에 따라 훨씬 많은 금관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추정한다.

금관은 고고학자들에게 큰 고민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국내에서 출토된 금관 중 천마총 금관의 직경이 20센티미터, 금관총 금관이 19센티미터, 서봉총 금관이 18.4센티미터, 황남대총 금관이 17센티미터, 금령총 금관이 16.4센티미터,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동관이 16.1센티미터, 복천동 금관이 15.9센티미터로 중간 값을 황남대총 금관이고 둘레는 53.4센티미터다. 이 크기는 12살짜리 남자 어린아이의 머리 둘레에 해당한다.

또한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버팀력이 약하고 지나치게 장식이 많아 어른이 사용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므로 금관은 생존 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라 사망자의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품, 즉 죽은 자를 위한 일종의 데스마스크(death mask)로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는 해석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은 금관의 착용자가 인공 변형된 두개골인 ‘편두(扁頭)’라면 쉽게 해결된다. 편두란 외압에 의해서 두개골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하며 편두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에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긴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납작하게 했다. 그래서 진한(辰韓)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편두다.”

기록 속의 진한은 3세기 중엽의 진한과 변한, 즉 김해 지역의 가야인에 해당한다. 편두 풍습은 일반적으로 유목민(코카서스 북부, 터키 등)에게 많이 나타난다. 고조선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편두 풍속이 있었다. 지금도 산둥성과 장쑤성 북부에서는 아이 머리 밑에 책 같은 딱딱한 물건을 받쳐놓아 뒤통수를 납작하게 한다. 이들은 이렇게 해서 머리 모양이 사방형이 되면 아이가 똑똑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헌강왕 11년(885), 왕은 최치원에게 882년에 입적한 지증대사탐비 건립을 위해 비문을 짓게 했다. 지증대사는 824년에 출생해 9세인 832년에 부석사에서 출가했고 경문왕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초청했으나 거절할 정도로 교화 활동에 힘썼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는 현재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으며 귀부와 이수 및 비좌 조각이 뛰어나 2010년 1월 보물 제138호에서 국보 제315호로 재지정되었다. 비문 서두에서는 신라 법흥왕이 만년에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신라왕의 두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성(姓)마다 석가의 종족에 참여해 편두인 국왕 같은 분이 삭발하기도 했으며, 언어가 범어(梵語)를 답습해 혀를 굴리면 불경의 글자가 되었다.”



남산지구



남산지구 문화유산의 백미라고 볼 수 있는 용장마을에서 삼릉계곡으로 내려오는 대장정 등산로에 도전한다. 남산의 계곡은 40여 개소, 등산로는 60여 곳이나 된다고 알려졌으며 용장마을부터 등산로를 잡은 이유는 김시습 유적지를 비롯해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87호),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제186호)은 물론 남산의 절경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용장사의 압권은 석조여래좌상으로부터 약 10미터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이다. 용장사의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래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중 새김 셋이 있는 위 기단을 설치해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천연의 조건에 인공적 요소를 가미해 석탑을 만든 신라인들의 재주를 엿볼 수 있다. 층마다 몸돌 하나에 지붕돌을 하나씩 쌓았으며 별도의 석재로 조성했다.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든다. 지붕돌은 밑면의 층급 받침이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들려 있다. 윗부분이 사라져 탑의 높이는 4.5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자연과의 조화미가 돋보여 통일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수작으로 꼽힌다. 현재의 탑은 1922년에 흩어진 돌을 모아 재건한 것으로 당시에는 2층 몸돌 상부에 한 변이 15센티미터 정도인 방형 사리공이 있었다고 한다.

탑을 뒤로하고 금오봉(468미터)을 향한다. 타원형으로 이루어졌으며, 금거북이가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편하게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남산의 어느 코스를 답사하더라도 금오봉이 기준이 되므로 남산 답사를 많이 할수록 금오봉도 여러 번 오르게 된다. 현재는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금오봉 정상의 전망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동쪽 기슭은 남산순환도로와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 조금 내려서면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명활산성지구



기림사를 떠나 골굴사로 향한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라고 전한다. 혈사는 곧 굴[穴]로 된 절[寺]이므로 원효가 골굴사에 머물렀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원효가 죽자 아들 설총이 아버지를 기려 골굴사에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골굴암은 한반도에서는 매우 희귀한 형태다. 한반도에는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 석굴이 생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골굴암의 거대한 석회암 바위 꼭대기에는 자연적으로 생겨난 큰 바위 군데군데 12개의 석굴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미루어볼 때 창건 당시 인도의 사원 양식과 비슷한 석굴사원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일 높은 곳의 석굴 벽면에 있는 골굴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이 돋보인다. 높이 4미터, 폭 2.2미터 정도의 불상은 얼굴만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머리 위에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얼굴 윤곽이 뚜렷하며 타원형의 두 눈썹 사이로 백호를 상감했던 자리가 둥글게 파여 있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가는 눈에는 잔잔한 웃음이 머무르고 굳게 닫힌 입술에는 단호한 의지가 서려 있다. 머리 뒤에는 연꽃이, 후광에는 가늘게 타오르는 불길이 새겨져 있으며 옷 주름은 물결치듯 한 방향으로 조각되었다. 입체감이 뚜렷한 얼굴에 비해 신체는 다소 평면적이다. 왼손 엄지와 검지를 짚어 배 앞에 놓았는데 석회질 암석의 재질이 좋지 않아 오른쪽 손과 무릎 아래 부분은 닳아 없어졌다. 조성 시기는 7세기에서 9세기 사이로 보이며 사찰측에서는 9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골굴사는 석굴암의 전면에 건물이 있느냐 없느냐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결정적인 증거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겸재 정선이 남긴 〈골굴석굴도〉에는 목조건물이 나온다. 숙종 12년(1686) 정시한은 『산중일기』에 “여러 채의 목조 와가로 지어진 전실을 연결하는 회랑이 있고 단청을 한 석굴사원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병풍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라고 묘사했다. 이들 자료가 기초가 되어 석굴암 전면에 목조 건물을 세운 것이다. 골굴사는 불교 무술인 선무도의 본도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선무도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 지관 수행법과 신라 화랑들에게 전수된 심신 수련법으로 고려ㆍ조선시대 외침에 항거했던 승려들의 무예가 전승된 전통문화로 알려져 있다.

골굴암을 거친 다음, 문무대왕릉(사전 제158호)으로 향한다. 봉길리해수욕장이 들어선 이곳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은 4개의 큰 암초 덩어리가 외곽을 둘러싸고 안쪽에 바닷물이 차 있는 특이한 구조다. 중앙에 거북등 모양의 거대한 바위가 물속에 잠겨 있으며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 모양의 물길이 나 있어 문무대왕릉 안으로 항상 바닷물이 흘러든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쪽과 서쪽은 바닷물이 들어가고 빠지는 수로 역할을 한다.

1967년 7월 24일 문무대왕릉이 경상북도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대서특필되었다. 토함산의 석굴암으로부터 일직선상에 있는 수중에 십자형 암석이 석관 형태로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석관은 주위의 돌과도 판이하게 다른 데다가 동해의 맑은 물이 30센티미터 정도로 덮여 있어 물 밖에서도 잘 보인다. 조사단의 결론을 토대로 문무대왕릉은 곧바로 사적 제158호에 지정되었다. 조사단의 발표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681년 문무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서 장사지냈다. 바위는 둘레가 200미터쯤 되는 천연 암초인데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물길을 인공적으로 터놓아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게 했다. 가운데 못에 깔려 있는 거북이 등 모양의 큰 돌은 길이 3.7미터, 두께 1.45미터, 너비 2.6미터로서 그 밑에 문무왕의 납골을 모신 용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바위의 안쪽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물길을 낸 것은 사리를 보관하는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세계에서도 드문 수중릉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수많은 전설이 깃들어 있는 문무대왕릉이 수중릉이라는 주장이 발표되자 문무대왕릉은 문무왕의 수중릉이 아니고 문무왕을 화장한 후 유골을 바다에 뿌린 산골처라는 주장이 곧바로 제기되었다. 바위가 인공석이 아니라 천연석으로 보인다는 주장이 가장 큰 주안점이었다.

그들은 능침의 복개석으로 주장된 돌은 사리 장치를 덮은 인공적인 석관 덮개가 아니고 자연석임이 틀림없다고 재차 확인했다. 복개석의 밑바닥은 돌과의 사이에 공간이 뜨고 일부분만 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무대왕릉이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장소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능침은 아니며 일대의 바다에는 문무대왕릉에 버금갈 전설과 신비에 싸인 바위가 많다고 주장했다. 수중릉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물론 당시에 인공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1,3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파도 때문에 마모되어 천연석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반박했지만 산골처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문무왕 비문에 “나무를 쌓아 장사 지내다[葬以積薪]”, “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硏骨鯨津]” 등이 『삼국사기』와 똑같이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91년 ‘기후 변화의 환경 및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국제회의’는 지구의 해수면이 과거 100년 동안 연평균 1.0~1.5밀리미터의 속도로 상승하고 있으며 최근 50년간 상승 속도가 가속되어 1년에 2.4밀리미터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한국에서도 서울대학교 박용안 교수가 탄소동위원소 연대 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빙하기 직후인 7,000년 전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6.5미터, 4,000년 전에는 3미터, 2,000년 전에는 2.5미터 낮았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를 볼 때 문무대왕릉이 수중릉이라면 지난 1,300년 동안 수심이 적어도 2미터가량 높아졌으므로 현재 수중릉으로 알려진 덮개석을 덮고 있는 수심은 최소한 2~2.5미터는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석관 위 물의 깊이는 3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즉 현재 수면의 높이로 판단해볼 때 당시의 석관이라고 주장하는 덮개석은 수면보다 최소한 2미터 이상 높은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문무대왕릉이 세계 유일의 수중릉이라는 것은 후세 사람의 욕심에서 나온 근거 없는 희망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문무대왕릉이 문무대왕의 호국 의지를 담았다는 것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석굴암



석굴암은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 문화유산이다.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산자락 해발 565미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신라의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735년에 세웠다고 한다. 석굴암은 원래 석불사(石佛寺)라는 이름의 독립된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암(石佛庵) 대신 석굴암(石窟庵)이라고 불렀다.

석굴암이 세계적으로 우수함을 인정받는 것은 신라 사람들의 지혜와 재능이 잘 녹아 있는 종합적인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석굴암은 화강석을 다듬어 석굴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인공 석굴로 자연석을 뚫고 굴을 만든 고대 인도나 중국의 석굴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중국과 인도의 것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조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라의 석굴암은 명백히 건축물인 것이다. 인공으로 구축된 석암에 예술적으로 조각된 불상들이 배치되어 있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 오직 석굴암뿐이다. 고도의 축조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석굴암에는 본존불을 포함해 40구의 불상이 있었지만 좌우 첫 번째 감실 2곳의 불상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반출되었기 때문에 없다. 그러므로 현재 석굴암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은 38구다. 원래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약 500년 동안은 불상이 조성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원후 1세기경,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더대왕이 인도를 원정할 때 페샤와르(현 파키스탄 북부)를 중심으로 간다라 지방에 정착하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헬레니즘 문화를 기반으로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간다라 미술의 탄생이다. 그러므로 간다라 미술은 한마디로 헬레니즘 미술 양식과 수법으로 불교의 주제를 표현한 조각 위주의 그리스풍 불교 미술이다. 이러한 영향은 석굴암의 불상에서도 면면히 엿볼 수 있다.

석굴암의 평면은 전실, 통로, 주실로 이루어져 있다. 방형 공간인 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있고 사천왕상이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 돔형 천장을 이고 있는 원형 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주실 중앙에는 본존불을 모셨다. 전실 벽면에 있는 8구의 팔부신중은 무사의 성격을 띠고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가지 모습의 신이다.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 또한 불법을 수호하는 한 쌍의 수문장이다. 주실로 들어가는 통로 좌우에는 두 발로 악귀를 밟아 항복시키는 사천왕이 있다. 이들은 동서남북 사방을 다스리는 수호신으로 온 몸을 화려하게 무장한 채 무기를 들고 있다.

천계를 상징하는 주실로 들어가면 원형부 중앙 뒤쪽에 대좌가 있고, 그 위에 본존불이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다. 벽 전체는 약 89센티미터 높이의 하단부가 홍석으로 둘러져 있으며 그 위로 폭 약 1.19미터, 높이 2.67미터인 판석 29개가 주벽 중간 부분을 이루고 있다.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범천, 제석,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십대제자가 대칭을 이루도록 조각되어 있다. ‘범(梵)’은 원래 우주의 최고 진리를 말하며 범천은 이것을 신격화한 것이다. 제석은 천둥과 번개의 신으로 비를 내려 농사가 잘되고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도록 해주기 때문에 가장 무서우면서도 자비로운 신으로 숭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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