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 답사기 2: 전통 마을 1편
이종호 지음 | 북카라반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 답사기 2: 전통 마을 1편
이종호 지음
북카라반 / 2014년 5월 / 312쪽 / 17,000원
도래마을 - 전남 나주시 다도면
광주시에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다도면에 있는 도래마을은 조선 시대 사대부 가옥이 많이 남아 있는 전형적인 한옥 마을로, 가구 수가 거의 100여 호나 될 만큼 규모가 크다. 또한 마을지(誌)인 『도천동지』를 만들 만큼 오랜 역사와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의 뒷산인 감태봉(140미터)의 양쪽 계곡에서 내려온 맑은 물은 세 갈래로 나뉘어 마을을 통과해 전면 농경지로 유입된다. 주거지는 세 줄기의 수로를 중심으로 후곡, 동녘, 내촌(내곡)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도래마을은 ‘도천마을’로 부르기도 하는데 마을의 수맥이 세 갈래로 갈라져 내 천 자 형국을 이루는 까닭이다. 천(川)의 우리말이 ‘내’인 까닭에 도내가 되었고, 도래로 굳어졌다고 한다.
도래마을은 마을의 동북쪽에 있는 풍악산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는 산지의 서쪽 사면에 조성되어 전면으로 지형이 낮아져 농경지가 있고, 후면으로 산림이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이다. 마을 뒤쪽에 있는 주산은 조선의 모든 군사가 사흘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다 해서 식산(食山)이라 부른다. 도래마을의 특성 중 하나는 방풍림이다. 마을의 오른쪽 전면, 주거지와 다소 동떨어진 곳에 높이 10여 미터의 소나무들이 방풍림을 이루고 있다. 특히 후곡 뒤에는 높이 10여 미터의 대나무와 20∼30미터의 소나무가 섞여 띠 모양의 방풍림을 이룬다. 이렇게 다른 수종을 섞어 심으면 밀폐도가 높아져 방풍 효과가 높아진다.
전통 마을에 찾아가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 좋은 자리에서는 중요 건물들을 남향으로 건설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전통 마을에 들어서면 생각보다 남향집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은 방향만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 마을에서는 자신이 사는 건물보다 마을에 맞는 흐름에 순응해 집을 지었다.
도래마을은 고려 시대에 남평 문씨들이 형성했고, 이후 조선 초기에 강화 최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조선조에 성천 부사를 지낸 풍산 홍씨 홍수가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화를 입자 아버지인 홍이가 남평 현령을 지낸 인연이 있는 나주로 피신했다. 처음에는 노안면 금안동 반송마을에 터를 잡았으나, 홍수의 증손인 홍한의가 이웃인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의 강화 최씨에게 장가들면서 정착했다. 도래마을은 이처럼 점차 풍산 홍씨의 집성촌이 된 동성 마을, 다시 말해 씨족 마을이다.
도래마을은 원래 홍씨가 80퍼센트 이상이었지만 현재는 외성이 많이 들어와 약 6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화재로 지정된 유산들은 모두 홍씨와 관련된다. 홍기응 가옥(중요 민속자료 151호), 홍기헌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165호), 홍기창 가옥(전라남도 민속자료 제9호)은 모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지어졌다.
홍기응 가옥
도래마을의 특징은 씨족 마을임에도 종가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원천적으로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갓집은 현재 집터만 남아 있고 풍산 홍씨의 홍기응 가옥에서 풍산 홍씨 석계공파의 차종손이 종가를 대신하고 있다.
마을 안쪽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상량문의 기록으로는 안채는 1892년, 사랑채는 1904년 건축되었는데 당대의 도래마을에서 가장 큰 부잣집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곧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고 한다. 건물은 서향이며 직선 축으로 놓여 있다. 안쪽에 ㅡ자형 안채가 가로로 놓이고 안마당 사이로 ㄱ자형 사랑채가 배치되었는데, 축을 맞추면서도 직각으로 틀어서 남향이다. ㄱ자형은 도래마을 전체 주택에서 유일한 구조이며 대청마루를 서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이는 오후의 강한 서쪽 태양빛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앞쪽에는 솟을대문을 갖춘 행랑채가 배치되었는데 대문에 문고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남도 양반 주택의 공간 구성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 각각의 건물에 돌담을 만들어 독립적이지만 작은 문을 만들어 이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게 했다.
다른 양반집에 비하면 사랑채 앞마당과 안채와의 간격이 좁은 것이 흠이지만 일반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서책을 보관할 수 있는 장서각으로 사랑채에 서고가 있다는 것은 주인이 항상 책 읽기를 기본으로 했다는 뜻이다.
이 가옥에서 흥미 있는 것은 곳간에 음식과 종자를 서늘하게 보관할 수 있는 지하 저장고가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 냉장고 같은 개념인데 다른 마을에서는 비교적 보이지 않는다. 또한 장독대를 담으로 쌓아 보호하고 있다. 먹을거리의 기본인 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정원 시설은 전통적인 조경의 멋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랑 마당의 담장 쪽에 있으며 상징성을 살려 나무를 심었다. 가운데에는 자손의 번영을 상징하는 석류나무, 동쪽 끝에는 절개와 옛 벗을 상징하는 매화나무, 서쪽 끝에는 부귀와 영화를 바라는 배롱나무를 심었다. 또한 석류나무 옆에 괴석을 두고 선비의 기상을 상징하는 동백나무와 목련을 심었다. 나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집안이 잘되기를 바라는 주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집의 또 다른 매력은 매우 큰 단풍나무인데 놀랍게도 연리지다. 연리지는 두 나무가 가지를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므로 부부 간이나 연인 간의 사랑을 비유해 사랑나무라고도 한다. 또한 성장이 좋은 나무와 발육이 부진한 나무가 서로 양분을 지원해주므로 나눔의 지혜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 집에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다. 사랑채와 행랑 마당 사이 담장에 수키와를 마주 엎어 만든 구멍이 그것이다. 사랑마루에서 대문간에 들어서는 사람을 확인하려는 것으로 오늘날 현관문에 설치하는 보안경이다. 선조들은 강도가 달려와도 갈지자로 걸을 정도로 양반의 체통을 중요시했지만 다른 사람의 사생활만은 철저하게 보호했다. 그럼에도 보안경이란 아이디어를 낸 것은 당대에 신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와 세태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기창 가옥
1918년 건축되었으며 원래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를 갖추고 있었지만 현재는 안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비교적 규모가 커서 필요한 생활 공간을 확보했으며, 각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어 외부와의 연결이 편리하도록 했다.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안마당이 있으며, 안마당 남쪽에는 최근에 지은 아래채가 있다. 담장은 사랑채 터와 안채 뒤까지 크게 막고 있으며 예전의 중문을 지금까지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채의 구조는 2고주 7량가로 전면과 우측면만 민흘림이 있는 원형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한식 기와를 사용한 합각지붕이다. 원형 기둥은 영광 바닷물에 3년간 담갔던 비자나무를 사용했고, 대청마루는 검은빛을 띠는 먹감나무로 말 오줌에 2년간 담갔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부와 권리를 과시하려던 당시 부농 주거의 특성이 배어 있는 것이다.
도래마을이 씨족 마을이라는 것은 집과 집 사이의 연계로 알 수 있다. 원래 마을은 집들이 밀집 배치되지만 개인 프라이버시도 중요하므로 집촌을 이루더라도 주택 사이는 분리해 건축한다. 그러나 씨족으로 구성된 경우 주민 대부분이 친척 간이므로 이웃 사이에 일상적인 왕래가 잦다. 분리와 연결이라는 모순된 속성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다. 도래마을 집 사이에 이런 이중적인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몇몇 집들이 각각 대문과 담장으로 독립된 주거 영역을 형성하면서도 인접한 주거로 왕래할 수 있는 샛문을 두어 서로 연결했다. 이들 거주자들은 남다른 혈연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일상생활에서 긴밀한 유대감을 유지하기 위한 물리적 장치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 마을에서 주민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마당이 제대로 조성되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마을 길을 조금 넓힌 곳이 마당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도래마을에서는 세 부분의 주거지 모두 안길이 주거지 안쪽에서 몇 갈래로 분기하는 지점에 마당이라고 할 만한 공간을 두고 있다. 동녘에서는 홍기응 가옥 앞의 바깥마당이 마을 마당 역할을 했으며, 내촌과 후곡에는 좀 더 넓은 마을 마당이 조성되어 있다.
도래마을에는 여러 정자가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우산각이다. 우산각은 전라도 지역에서 마을 입구나 마을 주거지와 들판 사이에 세워진 정자다. 원래 공동으로 집회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지만 오늘날은 주로 마을의 할머니들이 사용하고 있다. 우산각은 주로 여름철에 사용되므로 대체로 마루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온돌방 두 칸, 마루 네 칸, 부엌 두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전면과 측면이 2 대 1 비율을 가진 평면 비례는 전라도 지방 모정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반면 내촌 입구의 시멘트 기와를 얹은 괴고정은 과거에 콘크리트 구조로 건설되었는데, 최근 역사적 건물을 복원하는 시류에 따라 전통 한옥풍인 도천정으로 탈바꿈했다. 도천정 옆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데 여타 마을들과 같이 상징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마을에 사람들이 집결할 수 있는 중심 공간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도래마을에서는 세 갈래의 안길이 모이는 곳에 있는 양벽정이 그 역할을 한다. 조선 중기 선공감역, 성균사업 등의 관직을 지낸 홍징이 1587년 능주현 화포(현재 화순군)에 세운 것을 1948년 후손들이 이전한 것이다. 양벽정과 마을 뒤 감태봉을 잇는 선은 도래마을 전체의 중심축으로 마을 공간을 구성하는 기준이다. 양벽정의 입구는 목탑과 마찬가지로 2층으로 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옆에 작은 화장실이 있다.
양벽정은 도래마을의 중심 시설일 뿐 아니라 풍산리를 이루는 다섯 마을에서 함께 사용하는 공동 시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섯 마을 주민들은 음력 정월 초사일 음식을 추렴해 새해를 축하하고 공동으로 세배한다. 이때 전해에 수확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음식을 낸다고 한다.
도래마을이 속한 나주는 천년 고도로 이중환이 『택지리』에서 “금성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영산강이 흐르니 도시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고, 예부터 이름난 인재가 많이 난 곳”이라고 적었다. 세종 때 한글 창제를 도운 신숙주, 거북선을 발명한 나대용 등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과 조선 성종 때 중국 3대 기행문 중 하나인 『표해록』을 지은 최부 등이 이곳 출신이다.
매년 유채꽃과 더불어 영산강변에서 영산포 홍어 축제가 열려 식도락가들을 즐겁게 한다. 10월에는 금성관 일대에서 나주 영산강 문화축제가 열리는데 마한의 추수 감사제인 ‘소도제’를 시작으로 왕건과 장화왕후 궁중 혼례, 삼현 육각 공연, 나주 목사 부임 행사 등이 성대하게 꾸려지므로 우리 역사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인근에 불회사 대웅전(보물 제1310호), 운흥사(중요 민속자료 제12호),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 도갑사, 쌍봉사, 보성차밭 등이 있어 수많은 사람의 발길을 재촉한다.
강골마을 - 전남 보성군 득량면
보성이라면 많은 사람이 차밭과 영화 <서편제>를 떠올릴 것이다. 서편제의 비조 박유진의 뒤를 이어 오늘날 조상현, 성창순 등 판소리 명창을 길러낸 송계 정응민이 보성군 회천면 도강마을 태생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보성에서 과거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강골마을이 이번 목적지다.
강골마을은 조선 시대 한옥의 참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마을 가운데 하나다. 39개 가옥에 지나지 않지만 3개의 가옥과 1개의 정자가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금재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157호), 이용욱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159호), 이식래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160호), 열화정(중요 민속자료 제162호)이 그것이다.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집성촌으로 원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유명하지만 여타 전통 마을처럼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더욱 매력적이다. 강골마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국도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관광 코스에서 비켜난 데다 한반도 남쪽의 끝자락에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변이 대숲으로 둘러싸여 가까이 다가가도 마을의 전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은닉되어 있다. 대나무가 많은 이유는 마을이 해변에 접해 있으므로 방풍림으로 심었기 때문이다.
오봉산을 배경으로 한 강골마을 앞에는 간척 사업에 의한 광활한 논이 펼쳐져 있으며 이렇게 주거지와 농경지가 맞물린 모습은 우리의 전통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강골마을에는 돌담, 탱자나무 산울타리, 죽책, 흙 돌담, 죽책과 산울타리의 복합 형태, 흙 돌담과 산울타리의 복합 형태 등 다양한 담장이 존재한다. 이 담장들이 마을의 아름다운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며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강골에는 11세기 중엽 양천 허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원주 이씨를 거쳐 16세기 말에 경기도 광주에 뿌리를 둔 광주 이씨가 들어왔다. 광원군 이극돈은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추후에 영의정으로 추존되었는데, 그의 손자 대가 보성으로 들어온 후 그의 증손인 이유빈이 처가가 있는 강골마을에 정착해 광주 이씨 광원군파 집성촌이 되었다. 현재 광주 이씨들은 서울, 경기 다음으로 전라도에 많이 거주한다.
강골마을은 다른 전통 마을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방조제로 인한 현대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전통 마을에서는 종가를 비롯해 크고 격식을 갖춘 집들이 마을 주거지의 뒤쪽, 즉 위계가 높은 지점에 위치한다. 그러나 강골마을에서는 위계가 있는 집들이 마을 앞쪽 중앙부를 차지한다. 씨족 사회의 딱딱한 규범 안에서 은연중 자신들의 위세를 발휘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강골마을의 또 다른 특징은 주거지의 밀집 현상이다. 일반적인 전통 한옥에서는 문간채의 긴 면을 보면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데 반해 박준균 가옥은 문간채 박공 방향, 즉 마구리 방향으로 진입한다. 또한 문간채를 따라 담장이 바싹 설치되어 있다. 길과 가까워 바깥마당을 둘 여유가 없을 정도로 공간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용욱 가옥
마을 중앙에 있는 이용욱 가옥은 이곳의 종가 집안으로 헌종 1년(1836) 건설되었으며, 강골마을에서 유일하게 솟을대문을 갖고 있다. 강골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 전형적인 남도식 평면 구조이며 담장으로 막아서 사랑 마당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다. 특히 안채, 사랑채, 곳간채, 행랑채 중간문채, 사당 등을 모두 갖춘 사대부 집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솟을대문을 세운 이유가 흥미롭다. 원래 현재의 중간채가 정문이고 사랑채 오른쪽에 연못이 있었는데, 이 집에서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나오자 연못을 메우고 중간채 앞에 현재의 솟을대문을 세웠다는 것이다. 당대 과거 급제자의 위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팔작지붕으로 된 사랑채로 가는 길은 두 개의 계단을 올라 온돌방 앞에 하나, 대청마루에 하나 놓인 섬돌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격식을 강조하는 사당이나 관청 건물의 기단 같은 규율이 느껴진다. 넓은 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솟을대문 위쪽 오봉산 정상으로 책을 보며 앉아 있는 듯한 형상의 바위가 보인다. 따라서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이곳에 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동쪽에 부엌을 두었고 다음이 큰방, 중앙 2칸은 대청, 맨 끝이 작은방이다. 안채 오른쪽에는 ‘연암’, ‘원암’이라는 현판과 ‘효제충신’ 등 다양한 주련이 걸려 있는 사당 겸 서재 건물이 있다. 이 가옥에서 집주인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관리하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집이다. 일반 사당과는 달리 방이 두 개인데, 오른쪽 방은 불천지위로 모시는 분이 없으므로 4대 봉사를 위한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정통 사대부 집안의 예다. 왼쪽 방은 부엌도 있는데 그 용도가 놀랍다.
과거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동안 묘를 지키는 것이 자손의 도리였다. 그런데 묘지 옆에서 3년을 지낸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묘지 옆에 초막을 지어 잠자리를 확보한다 해도 양반 신분에 직접 밥을 짓지도 않으니 먹을거리를 해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3년 동안 묘를 지킨다는 것은 집안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산소가 집에서 멀다면 묘를 지키는 양반을 위해 매일 식사 등 생필품을 전달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