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 실록에서 배우는 리더의 자격
석산 지음 | 북오션
고려왕조 실록에서 배우는 리더의 자격
석산 지음
북오션 / 2015년 5월 / 328쪽 / 15,000원
4대 광종 - 거침없는 결단력
준비된 리더, 리바이어던: 광종光宗(재위 949~975)은 창업 군주 태조의 아들로 수성에 성공한 왕이다. 광종은 선대왕 정종의 서글픈 운명을 지켜보았다. 이복형 혜종이 병사로 기록되었으나 독살이나 암살당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동복형 정종도 병사했다. 두 왕이 나라를 다스린 6년 동안 고려는 왕실과 호족이 뒤엉켜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광종이 등극했다. 그의 통치술은 두 형과 확연히 달랐다. 그는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등장하는 ‘리바이어던’이었다. 홉스는 사회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전개되는 것으로, 리바이어던 같은 리더가 투쟁에 매몰된 인간들을 통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리바이어던형 리더가 성공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흐름을 잘 탄다. 태조가 건조한 고려는 2대 혜종, 3대 정종 대를 지나며 완전히 표류했다. 그러나 이들의 뒤를 이은 광종은 전혀 달랐다. 정종처럼 서두르지도 않았지만 혜종처럼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미래로 항해하기 위해 먼저 현재 주변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고 어떤 항로로 나아가야 할지를 파악했다. 사실 고려는 일종의 지방자치제로 통일국가를 세운 태조는 창업 군주로서 위엄과 책략으로 드센 호족들을 지배했으나 혜종과 정종은 독자적 세력 기반을 만들지 못했다. 왕은 상징적 존재였고 실질 권력은 호족들이 행사했다. 그래서 강력한 왕권을 바라는 민심이 있었는데, 광종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둘째, 필요할 때 속전속결로 ‘올인’하는 근성이 있다. 자신이 나설 상황이 아닌데도 앞장서서 설치기 좋아하는 사람은 리더의 자격이 없다. 아직 자신이 나설 상황이 아닐 때 속마음을 감추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기회는 온다. 광종은 어릴 적부터 대단히 치밀했다.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은 충분한 예측과 계산에서 나왔다. 그리고 일단 전략이 서면 머뭇거림 없이 실행했다.
셋째, 리바이어던형 리더는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광종의 별명은 ‘핏빛 군주’다. 완벽한 기회만 조성된다면 광종은 등 뒤에서 누가 무슨 욕을 하든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고려 초기 왕위 계승권을 놓고 다투는 호족들을 내버려두어서는 결코 왕권이 안정될 수 없었다. 이들은 고려의 미래나 서민의 삶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들에게 칭송받으려 할 때 리더는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조직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부류에게 비난받는 것도 성공하는 리더의 덕목이다.
준비하는 리더의 롤 모델, 당 태종 정관의 치: 광종의 성공여부는 호족세력을 약하게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선대 두 왕의 실패를 지켜본 광종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처음엔 오히려 호족의 기득권을 인정해주었다. 즉위하자 독자적 연호로 ‘광덕光德’을 사용했다. 이는 중국과 대등한 고려 군왕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즉위 첫해에 대광 박수경에게 국가 유공자 목록을 작성하게 했다. 당시 가장 유력한 호족은 충주 유씨와 박수경의 평산 박씨였다. 유공자 등급을 4등급으로 나누어, 1등급부터 차례로 쌀 25석, 20석, 15석, 12석을 내려주었으며 이것을 ‘봉록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 함께 주ㆍ현에서 걷는 세금의 기준을 정해주었다. 그동안 호족들이 징세했던 것을 중앙에서 정한 것인데 지방 호족이 크게 반발하지 않는 선에서 통제하려는 조치의 일환이었다. 세액을 정해줌으로써 지방 호족을 통제할 기초 자료를 확보하고 조정의 수입을 크게 늘렸다. 즉위 초에 이 정도 정책을 펼치고 7년 동안 호족들을 우대하며 겉으로나마 태평한 나날을 보냈다.
이 시기 광종은 자기 함양에 온 힘을 기울였다. 수성 군주에게 필요한 지혜를 배우고자 당 태종의 《정관정요》를 거듭 읽어 외우다시피 했다. 당의 창업 군주인 당고조 이연의 둘째 아들인 태종 이세민은 뛰어난 전략가이자 정치인이었다.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인 그의 치세를 ‘정관의 치’라 한다. 당나라 300년 체제를 확고히 한 당 태종은 즉위 이듬해 연호를 ‘정관’이라 정했다. 이후 23년간 명신들을 곁에 두고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당 태종과 명신들이 문답식으로 나눈 대화를 역사가 오긍이 집대성한 책이 《정관정요》다. 광종은 당 태종 이세민을 롤 모델로 삼아 수성에 성공해 신생 왕조인 고려를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외국인 쌍기를 등용하다: 집권 초반기(949~956)에 광종은 정중동의 자세로 조용히 고려의 국가 체제를 ‘호족 연합국가’에서 ‘왕권 중앙집권 체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광종은 이 기간 동안 정국 주도권을 호족들이 행사해도 이를 지켜보면서 명분 있는 정책을 펼쳐 정치적 기반을 닦았다. 즉위하면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대내외적으로 고려 군주의 권위를 높였으나 이듬해 거란이 호시탐탐 침략하려 하자 952년 중원의 맹주로 부상한 후주의 연호를 사용해 거란을 견제했다. 전쟁 위험에서 벗어나자 백성들이 점차 광종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민심이 곧 왕의 힘이며, 민심을 얻지 못한 왕은 측근에게 이용당한다는 것을 선대왕들의 실패를 통해 체득한 광종은 호족을 약화시키며 민심을 흡인할 정책을 찾는 데 주력했다.
955년에 마침 후주의 제2대 왕 세종이 즉위할 때 귀화인 왕용을 사절로 보냈는데, 그를 통해 광종은 후주의 상황이 고려와 유사함을 알았다. 이듬해 후주의 세종이 답례로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 쌍기가 수행원으로 따라왔다. 쌍기는 병에 걸리는 바람에 귀국하지 못하고 고려에 남았다. 이즈음 광종은 고려 개조 작업에 필요한 인재를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쌍기는 후주의 왕권 강화 작업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광종은 후주 세종에게 양해를 구하고 쌍기를 원보한림학사에 임명했다. 이후 광종의 개혁은 쌍기의 개혁 이론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광종은 쌍기를 원보한림학사에 임명한 지 1년도 채 되기 전에 문한文翰에 전권이 있는 직책인 문병文炳을 맡겼다. 그러자 지나친 특혜라는 공론이 일었음에도 불구하고 쌍기에 대한 광종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광종은 7년간 정국을 관망하면서 자신과 함께 목숨을 던져 개혁할 만한 의지와 아이디어를 가진 인물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었다. 당시 관료들은 왕실 주변에 가득한 공신과 호족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때 광종이 흔들리면 관료들이 기득권을 지키려고 유력해 보이는 왕족과 호족에게 줄을 서며 사생결단의 투쟁을 시작할 것이다. 조정에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어야만 비로소 과감한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광종은 신료들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쌍기를 전폭적으로 후원했고 세 단계로 고려 개조를 시작했다.
민심 확보와 기득권 견제의 묘수, 호족들에게 떨어진 날벼락: 첫 단계는 956년 전격적으로 공표된 노비안검법으로 이 법안은 전쟁 포로 또는 부채 등으로 인해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해주는 일종의 노비 해방법이다. 광종은 호족의 세도를 가능하게 했던 노예 수를 획기적으로 줄여야 호족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호족이 거느리는 많은 노비 중 상당수가 삼한 통일 전쟁 중 포로가 된 양인이거나 호족이 강제로 노비로 만든 사람들이었다. 이들만 노비에서 풀어준다면 대호족의 광활한 농장을 가꿀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사병 수도 감소하기 때문에 호족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허물어지는 셈이다. 이와 달리 중앙정부는 노비가 해방되면 양민이 늘어나므로 국세 증가와 군사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된다. 광종으로선 일석삼조였다.
호족들은 지난 7년간 그처럼 부드럽게 대해주던 광종이 갑자기 노예해방을 들고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닌 밤에 홍두깨’ 식의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들은 크게 반발하며 광종에게 노비안검법 중단을 요청했으나 때는 늦었다. 호족들이 날뛸수록 광종은 흔들림 없이 노비안검법을 더 강력히 시행했다. 그 결과 공신과 호족의 세력이 상당히 약해졌다. 물론 신분 질서가 무질서해지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노비가 양민이 되기 위해 주인을 거짓으로 모함하는 일들이 수없이 발생했지만 광종은 일시적 무질서를 감내하고 호족의 권력 기반을 제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공정 인재 등용책을 내놓고 피의 숙청을 하다: 호족의 힘이 크게 약해지자 광종은 두 번째 변혁안을 내놓았다. 958년(광종 9년) 쌍기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도입한 것이다. 당시 공신은 삼한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무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동안 벼슬은 공신 호족이나 그들의 후손들에게 전리품처럼 나누어졌다. 과거제는 무신 자제들의 정계 진출을 막는 장치였고, 이런 관습은 과거제도 앞에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주요 내용은 유교의 충효 사상이라 왕권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를 통해 호족 세력 대신 신진 세력이 집권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2년 뒤인 960년, 세 번째 조치로 백관의 공복公服제도를 내놓았다. 이는 관리들에게 직위에 따라 세 가지 색의 옷을 입도록 하는 제도다. 관리 입장에서는 숨 막힐 일이었지만 왕을 중심으로 군신 관계와 관리의 상하 관계가 명확해져 질서가 잡혔다. 이는 더 이상 고려가 호족 연합국이 아닌 왕권국가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같은 해에 ‘준풍’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 개경을 황도皇都로, 서경을 서도西都로 지정한다. 이때 노비안검법, 과거제 실시, 공복 제도 등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은 호족이 조직적 반발을 하며 심지어 반역까지 도모했다. 광종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피의 숙청’을 감행한다. 광종은 호족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며, 조카인 흥화군(혜종의 아들)과 경춘원군(정종의 아들)도 처형했다. 심지어 자기 아들인 세자 왕주(경종)까지도 의심해 멀리했다.
이런 가운데 광종은 민심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내놓았다. 왕성과 주요 지방 길거리에서 떡, 쌀, 땔감을 꾸준히 나눠주고, 왕실의 고기도 시장에서 직접 구입했다. 그리고 972년(광종 23년)에는 대사령을 내리며, 이해부터 974년까지 연이어 3년간 과거를 실시했다. 973년에는 빈농을 보호하는 공사전조법을 만들었다. 이 법은 공전과 사전의 조組를 줄여주고, 황무지를 개간할 경우, 그 토지가 사전일지라도 개간자가 첫 수학을 모두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 공사전조법과 노비안검법, 과거제도가 광종의 3대 정책이다. 이런 과감한 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반기인 광종 11년 이후 15년은 지속된 공포정치 때문에 나라가 핏빛으로 얼룩졌다. 단명했던 선대왕과 달리 광종은 26년간 통치한 후 975년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수백 명의 조정 대신 중 광종의 대대적 숙청에서 살아남은 자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6대 성종 - 성군이 현명한 신하를 부린다
인문학적 소양이 풍성했다: 광종은 피바람을 일으키며 비로소 강력한 왕권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성종成宗(재위 981~997)은 고려의 문물제도를 정비한다. 후세는 고려 왕조 34명의 왕 가운데 태조 왕건을 제외한 최고의 명군으로 성종을 꼽는다. 성종은 22세에 왕이 되었다. 성종은 민감한 10대 때 광종이 벌인 피의 숙청을 경험했다. 십 대 후반인 경종 시기에 ‘복수극’도 보았다. 민감한 나이에 두 번의 참상을 보면서도 성종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유교적 교육 덕분이었다. 당시 유교는 현대판 인문학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종이 자라지 않았다면 선대 두 왕 때 겪은 경험이 내재되어 잔인한 왕이 될 수도 있었다.
성장기에 성종은 지속적으로 교육받으며 당대 최고의 인문학인 유교의 여러 경전과 역사에 익숙해졌고 이런 관점으로 고려를 통치했다. 성종이 즉위할 즈음, 고려는 경종 때 시작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불교 국가이기는 했으나 정치적 통치 이데올로기는 공백 상태였다.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국가 운영 구조를 합리적 유교 사회로 개편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즉위 원년(982년) 정5품 이상의 모든 관리에게 체제 개혁에 대한 봉사封事(밀봉한 상소문)를 올리라 했다. 이때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채택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폈다. 조부 태조가 <훈요십조>에서 중시하라고 한 팔관회를 축소했다가 987년(성종 6년)에 완전히 폐지했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다 - 내치 최승로, 외교 서희: 좋은 리더는 좋은 인재를 알아본다. 성종은 능력 있는 인재를 활용해 어수선한 고려를 정비했다. 내치內治는 최승로를, 외치外治는 서희를 통해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당시 56세였던 최승로는 선대 5명의 왕에 대한 평가와 함께 장장 28개항에 달하는 장문의 방책을 내놓았는데 이것이 <시무 28조>이다. 성종은 선왕에 관한 평가를 보며 무엇이 올바른 리더십인지를 알고 있는 최승로야말로 최고의 인재임을 확신했다.
원래 최승로는 927년 신라 경주 출생으로 육두품이었다. 신라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항복하자 고려 조정으로 들어왔다. 사서삼경 중 특히 《논어》에 밝았다. 광종의 통치 동안에도 학문적 명성이 높은 신진 관료였지만 주로 비정치 분야에 머물러 있었다. 경종 재위가 짧게 끝난 후 성종이 등용하자 드디어 완숙한 경지에 이른 역량을 펼치기 시작했다. 성종은 최승로를 문하시랑평장에 임명해 국가 정치 이념을 구체화하도록 한다. 국내 통치의 틀은 최승로가 담당했고, 외교는 서희가 담당했다.
고려 시대에는 특히 외침이 잦았다. 이 가운데 거란이 고려를 가장 괴롭혔다. 태조는 초기 거란과 통교했으나 고려의 형제국 발해를 멸망시키자 단교했는데 거란은 요를 세우고 중원까지 넘보며 송과 각축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북진정책을 추구하는 고려가 송과 교류하자, 거란 입장에서도 배후의 고려를 확실히 꺾어놓아야 했다. 993년 5월 거란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고려 조정이 거절하자 10월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몰고 침략했다. 금세 국경의 봉산군(청천강 이북)이 함락되었고, 고려 선봉 부대를 이끌던 장군 윤서안을 비롯해 수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중군사 서희는 고려군을 이끌고 달려와 거란군과 대치했다.
거란은 계속해서 고려의 항복을 종용했다. 서희는 거란이 더 이상 침략하지 않고 반복해서 항복만 권유하는 것으로 보아 속셈이 점령보다는 화친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정세 분석을 조정에 피력하니 어전에서 회의가 열렸다. 다수의 신하들이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넘겨주고 화친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을 주장했다. 성종도 찬성하며 서경 창고의 쌀을 미리 백성들에게 모두 나눠 주고, 그래도 남는 쌀은 거란이 군량미로 쓰지 못하도록 대동강에 버리라 했다. 이때 서희가 정면으로 반대했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의 수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식량이 넉넉하니 충분히 성을 지킬 수 있고, 또 승리할 수 있습니다. 거란의 요구대로 서경 이북 땅을 내놓으면, 이후 거란이 본래 고구려 땅인 삼각산 이북을 또 내놓으라 강요했을 때 어찌하시렵니까? 태조 이래 우리 영토를 다른 나라에 단 한 번도 내준 일이 없었건만, 이제 와 굴복하면 만세에 치욕입니다.” 이때 민관어사 이지백이 서희를 지지하며 고구려 옛 땅을 내어줄 수 없다고 했다. 두 사람의 간언으로 성종이 대동강에 쌀을 버리라는 어명을 취소하자 할지론도 잠잠해졌다.
고구려 땅을 내줄 수 없다: 한편 고려의 항복만을 기다리던 거란은 고려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자 안융진(평남 안주)을 보복 공격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거란은 고려군에게 대패했다. 뜻밖의 패배를 당한 거란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항복을 종용하는 문서를 계속 보내며 회담을 요구했다. 성종은 대신 중 한 사람이 자원해 나서기를 바랐으나 모두가 겁을 먹고 꺼렸다. 이때 서희가 나섰다.
회담장에서 소손녕은 서희에게 먼저 두 가지 요구를 했다. “고려는 신라의 후계자다. 따라서 고려가 차지한 고구려의 옛 땅을 거란에게 내놓아라. 더불어 국경을 마주한 요를 섬기지 않고 하필 바다 건너 저 멀리 송나라를 섬기느냐? 여기에 대해 해명하라.”
그러자 서희가 의연하게 반박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국도로 정하고 있다. 오히려 거란의 동경(요양)이 고구려 땅이므로 고려가 다스려야 한다. 따라서 굳이 양국이 지리적 경계를 따질 필요는 없다. 또한 고려가 거란과 교섭하지 못한 것은 두 나라 사이에 여진이 끼어 있어 바다를 건너기보다 어려운 탓이었다. 그러므로 여진을 강동 6주에서 쫓아내고 그 땅에 고려가 성을 쌓고 길을 열게 도와주면 어찌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