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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 답사기 1: 조선 왕릉 편

이종호 지음 | 북카라반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 답사기 1: 조선 왕릉 편

이종호 지음

북카라반 / 2014년 5월 / 372쪽 / 19,000원





사릉 - 정순왕후



사릉은 비운의 왕인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 씨(1440-1521)의 능이다. 사릉은 왕릉보다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 사업소 묘포장으로 유명하다. 과거에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적이 있으나 방문객이 적어 비공개 왕릉으로 분리되었다가 2013년 1월 1일부터 태강릉의 강릉, 동구릉의 숭릉과 함께 공개하고 있다.

조선 왕릉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 당시 묘포장에 있는 종자 은행과 소나무 등 각종 유전자원이 궁궐과 능원의 생태 문화 자원 보존에 의미가 있다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알려진다. 이곳에 있는 소나무 묘목은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소인 준경묘와 영경묘의 낙락장송 후손으로,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소나무로 평가받고 있다. 1999년에는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에 옮겨 심어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아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다. 이때 사용된 소나무를 ‘정령송’이라 부른다.

정순왕후의 처음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세종 22년(1440)에 태어나 15세 때 한 살 어린 단종과 가례를 치러 왕비로 책봉되었다. 사실 이 결혼은 단종이 즉위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 수양대군과 양녕대군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왕비를 고른 후 단종에게 거의 반 강제로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한 것이다. 결혼한 이듬해인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정순왕후는 의덕왕대비가 된다.

세조의 왕위 찬탈은 과거 세종,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의 일부 학사 출신들에게 심한 저항을 받았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의 유신들은 무관인 유응부, 성승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조 1년(1455) 명의 책명사가 조선에 온다는 통보를 계기로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 때 거사할 것을 계획했는데, 마침 이날 세조 제거의 행동책을 맡은 별운검이 갑자기 폐해져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자 계획이 탄로되었음을 두려워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내용을 누설하고, 다시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해 주동자인 사육신과 연루자 70여 명에게 그야말로 피바람이 몰아친다. 이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했고, 상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된 후 죽임을 당한다. 단종이 유배되자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봉되고 나중에는 관비로까지 곤두박질친다.

이 당시 놀라운 기록은 신숙주가 정순왕후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은 것이다. 정순왕후가 관비가 되었으므로 신숙주의 요청이 법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료들은 절개를 지키다가 처절하게 죽어 사육신이 된 상황에 왕비를 종으로 달라는 신숙주의 처신이 어처구니없지 않을 수 없다. 세조도 신숙주의 행동이 놀라웠는지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라는 명을 내려 정업원으로 보냈다.

정업원은 조선 초기 슬하에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결혼 후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야 했던 왕실의 여인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정업원에서 시녀들과 함께 살면서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생계를 부담하기 위해 제용감에서 심부름하던 시녀의 염색 기술을 도와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당시에는 지치라는 식물의 뿌리를 이용해 비단에 물을 들였다. 정순왕후가 염색업을 하던 골짜기를 자줏골이라 불렀는데, 현재 한성대학교 후문 부근에 있으며 지봉 이수광 선생이 『지봉유설』을 저술한 초가삼간 비우당에 당시의 흔적이 있다. 정순왕후가 염색하던 곳을 자주동샘이라고 하는데 정순왕후가 이곳에 와서 단종이 억울하게 죽은 영월 쪽을 향해 명복을 빌며 비단 빨래를 하면 저절로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고 한다.

세조는 말년에 정순왕후의 실상을 알고 궁핍을 면할 수 있는 집과 식량을 주겠다고 했지만 정순왕후가 그것을 고이 받을 여인은 아니었다. 왕후로서의 자존감을 꺾고 죽은 남편의 억울함과 열여덟에 홀로된 자신의 한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편, 그녀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은 조정의 눈을 피해 먹을거리를 건네주고자 감시병 몰래 금남의 채소 시장을 열어 정순왕후를 돌봤다. 신설동 동묘의 벼룩시장을 끼고 나오면 도로 한쪽에 숭신초등학교가 보이는데 이곳이 조선 시대에 여인들만 출입한 여인 시장이 있던 곳이다.

채소 시장 옆에 있는 영도교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이다. 두 사람은 이후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영도교를 건너면 더 이상 사랑하는 임을 볼 수 없다는 사람들은 ‘영원히 이별하는 다리’라는 뜻의 ‘영이별교’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4년간의 짧고 애틋한 결혼 생활을 한 두 사람 사이에는 후손도 없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사사된 후 64년 동안 그를 기리다 82세로 정업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을 왕비로 간택했다 결국엔 폐비로 만들고, 남편에게 사약을 내린 시숙부 세조보다 53년을 더 살았다. 또 세조의 후손이며 시사촌인 덕종과 예종, 시조카 성종, 시손 연산군의 죽음까지 지켜보면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조선 시대 모든 능역에는 사가의 무덤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릉에는 사가의 무덤이 몇 기 남아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단종 때부터 7대의 왕을 거친 그녀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돌아갈 당시 왕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장을 치렀다. 능을 조성할 처지가 아니므로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집안에서 장례를 주도했다. 해주 정씨 가족 묘역 안에 정순왕후를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 아직도 사가의 무덤이 남아 있는 것이다. 1698년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강 씨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의 영녕전에 안치되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는 뜻으로 능호를 사릉이라 붙였다.

조선 왕릉의 능침은 기본적으로 도래솔(무덤가에 죽 둘러선 소나무)이 둘러싸고 있는데 사신사의 현무를 나타낸다. 현무는 소나무의 수피가 오래되면 검은색으로 변하고 두껍게 갈라져 거북 등 같은 모습이 되는 것에서 연유한다. 지금도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 공간에는 소나무가 절대적 우세를 나타내며 잘 보존되고 있다. 이 소나무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 쪽을 향해 고개 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태릉 - 문정왕후



태종은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 씨(1501-1565)의 능으로 봉분 1기만 있는 단릉이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정권에 개입하는 등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조선을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로 알려진다.

문정왕후에 관한 일화는 워낙 많지만 을사사화와 연계된 정난정의 일화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그녀의 아버지 정윤겸은 부총관을 지냈지만 어머니는 관비 출신이므로 위계가 철저한 조선에서 그녀가 일어설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난정은 이 기회를 반전하기 위해 우선 기생이 되었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동생인 소윤 윤원형의 첩이 되었다. 마침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계는 모두 윤원형 쪽으로 쏠린다.

곧바로 윤원형은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이 그의 조카 봉성군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고 무고한다.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권력 다툼으로, 결국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 등이 반역 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만다.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이 기회를 이용해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 씨를 몰아낸 다음 적처가 되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해 전매ㆍ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한다. 그럼에도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했고, 1553년에는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된다.

정난정에 대한 사가들의 평은 비난으로 꽉 차 있지만 그녀는 윤원형을 움직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 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당시로서는 신분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좌절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문정왕후는 당의 측천무후, 청의 서태후와 비교될 정도로 억척같은 집념으로 아들을 왕으로 만든 여인이다. 그러나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국정을 지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문정왕후의 가장 큰 피해자로 그의 아들인 명종이 손꼽히기도 한다. 왕이 된 아들에게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겠느냐?”라며 호통을 치고,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회초리까지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종을 눈물로 왕위를 지킨 왕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녀의 월권은 적어도 국왕의 권위를 누르거나 자신의 욕심만을 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수렴청정을 끝내며 문정왕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우리나라가 불행하게도 두 대왕이 연이어 사망했으므로, 주상이 어린 나이에 보위를 이어 국정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부득이 섭정을 하기는 했으나, 미안한 마음을 일찍이 하루도 잊지 못했다. 더구나 재변이 계속 이어지고 여러 변고가 함께 발생함이 지금과 같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나의 부덕한 소치 때문이 아닌가 해 주야로 근심하고 염려했으며 2~3년 이래로는 항상 성상께 귀정하고자 했으나, 아직 주상의 학문이 성취되지 못해 모든 기무를 홀로 결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는 까닭에 머뭇거리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명종은, 당시 지관이며 예언가였던 남사고가 “동쪽에 태산을 봉한 뒤에야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라고 한 예언에 따라 어머니를 태릉에 모시고 자신도 태릉 옆인 강릉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남편인 중종 옆에 묻히고 싶었는지 원래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서삼릉 내) 우측에 있던 중종의 능을 정릉(현재의 강남구 삼성동) 터로 옮겨놓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힐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정릉 주위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 자주 침수되자, 명종이 장마철에 물이 들어온다는 명분을 대고 태릉에 안장해 결국 그녀의 뜻은 무산된다.

태릉은 조선 왕릉 가운데 능침과 정자각의 거리가 가장 길며, 기를 모아 뭉치게 한다는 능침 앞 강(岡)을 약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는데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 신을 의미하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 위의 만석 중앙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12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이유는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여기에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할 만하다.

문ㆍ무인석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다. 문인석은 높이가 260센티미터로 사람의 실제 키보다 크며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 차림이다. 두 손으로는 홀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좌측 문인석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우측의 문인석은 반대 자세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인석이 홀을 잡는 방법이 동일한데 이곳은 예외다. 무인석은 문인석과 비슷한 크기이지만 얼굴이 크고 방울눈에 유난히 큰 코와 우락부락한 표정이 특징이다. 문ㆍ무인석 모두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 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다. 학자들이 이들 석상에 큰 점수를 주지 않는 이유는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 입체감이 결여되어 사각기둥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정자각은 6ㆍ25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과 그 앞의 배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금천교를 만날 수 있으며 태릉의 소나무 숲은 신림으로 불릴 만큼 울창해 도시에서 얻을 수 없는 풍취를 느끼게 한다. 임진왜란 직전 조영된 태릉은 효인이라는 사람이 능침 안에 금은보화가 많다고 고자질해 1593년 1월 왜군이 기마병 50명을 동원해 도굴하려 했으나, 삼물의 회가 너무 단단해서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릉 - 세종과 소헌왕후



영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도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영릉 덕분에 조선 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이런 명성을 갖고 있는 영릉은 제4대 세종(1397-1450)과 소헌왕후(1395-1446) 심 씨의 합장릉이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08년 충녕군에 봉해졌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맏아들 양녕대군이었는데 그는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라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과 딱딱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러한 그의 품행은 태종의 눈에도 벗어나 결국 1418년 충녕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세종이 태종에게 낙점받은 이유 중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태종실록』에 보인다. 세종이 술을 적당히 마실 줄 알았다는 것이다.

“중국의 사신을 대해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해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충녕대군이 대위(매우 높은 관작)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보통 왕은 왕위를 물려받을 때 선왕이 죽은 뒤 닷새째 되는 날 입관을 마치고 다음 날 즉위한다. 하지만 세종은 선왕이 살아 있을 때 왕위를 물려받았다. 태종 18년(1418), 태종은 경복궁 보평전에서 대성통곡하며 만류하는 신하들의 간청을 뿌리치며 세종에게 옥새를 주고 왕의 자리에 앉힌다. 세종이 울면서 사양하자 태종은 결연히 말했다.

“어찌 나에게 효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같이 어지럽게 구느냐. 내가 만일 신료들의 청을 들어 왕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면 나는 장차 마음대로 죽지도 못할 것이다. 이미 나는 다시 복위 않기로 북두칠성에 맹세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

그리고 사흘 뒤 세종은 22세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조 제4대 왕에 즉위한다.



원래 영릉은 1446년 소헌왕후 사망 후 헌릉 서쪽 대모산(현 서초구 내곡동)에 동릉이실로 조영된 능이다. 우측 석실은 왕의 수릉으로 삼았다가 1450년 세종이 사망하자 합장해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고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그런데 세종의 능은 조성될 때부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주장 때문에 논란이 잦았다. 지관들이 강력하게 능 자리를 철회하자고 권했지만 세종은 “다른 곳에서 복지를 얻는다고 하지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단 세종의 고집대로 능을 조성했지만 세조 때 다시 강력한 천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서거정이 “천장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이면 되었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반대해 옮기지 못했다. 결국 예종 1년(1469)에 천장했는데 그곳이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 중 하나라는 현재의 영릉이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풍석과 석실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합장했다. 한편 구 영릉에 있던 석물들은 모두 그 자리에 묻었는데, 1973년 석상, 장명등, 망주석, 문ㆍ무인석, 세종대왕 신도비 등이 발굴되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로 옮겨졌다.

영릉은 이장하면서 예종 때 선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합장릉인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둘렀으며 난간석을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는 한자로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병풍석 없이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 좌우에 망주석을 놓았는데 혼유석의 고석은 선대의 5대에서 4개로 줄었다. 또한 2개의 격실 사이에 48센티미터의 창문(창혈)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통하게 해 합장릉의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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