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다섯가지 상품 이야기
홍익희 지음 | 행성B잎새
세상을 바꾼 다섯가지 상품 이야기
홍익희 지음
행성B잎새 / 2015년 6월 / 387쪽 / 19,000원
1. 소금
로마의 소금 길, 모든 길은 로마로
작은 도시국가로 시작한 로마는 남부 이탈리아 반도의 조그만 어촌에서 소금 거래를 하던 몇몇 상인들이 모여 만든 나라였다. 로마가 발전한 이유 중 하나도 소금이었다. 특히 인근 염전과 관계가 깊다. 페니키아 시대부터 로마 근교 테베레 강 하구에 건설된 인공 염전에서 소금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유럽 최초의 인공 해안염전이다. 당시 북유럽 내륙 염호나 암염 갱에서 불로 구워 만든 소금은 생산비도 높았지만 운송비가 특히 비쌌다. 낙타 네 마리가 싣고 온 소금 운송비로 세 마리 낙타가 싣고 온 소금을 주어야 했다. 게다가 오는 동안에 통행세 격인 수입세와 관세 등을 많이 물어야 했다. 따라서 그 무렵 소금은 생필품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비싼 귀중품이었다. 이렇듯 큰 이문이 남는 소금무역에서 큰 문제는 장기간의 내륙운송이었다. 그런데 테베레 강 하구의 소금은 하천을 통해 바로 로마 시내로 운반되었다. 이 소금이 로마 건국의 일등 공신이었다. 하천을 통해 배로 운반된 소금은 품질도 좋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이로써 로마는 소금 유통의 중심지가 되어 소금을 대륙으로 수출했다. 이 수출 길이 로마 발전의 원동력이 된 그 유명한 ‘소금 길’이다.
경쟁적인 소금 길 개척과 가혹한 통행세: 소금을 나르는 상인들은 두 가지 골칫거리가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과 도적들의 공격이었다. 다행히도 영주들이 자기 영토를 지나갈 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주었다. 우선 길을 평평하게 잘 닦아 마차가 불편 없이 왕래하게 해주었다. 또 그곳 기사들이 안전을 책임져주었다. 물론 통행세를 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악명 높은 ‘소금 길 세금’이다. 소금상인들 덕택에 많은 돈을 벌게 된 영주들은 소금 길을 경쟁적으로 만들어 통행세를 거두었다. 그리고 소금 길이 유럽 대륙 전역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소금장수들이 소금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가자 이를 눈여겨본 귀족들이 동참했고 나중엔 수도원까지 합세했다. 그 뒤 소금 길만 가지고 장사하던 도시들이 소금무역에 직접 참가하면서 도시의 재정은 점점 불어났고 전매제도로 자리 잡게 된다.
소금이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게 하다: 로마인들이 해안에서 대량으로 소금을 생산해내기 시작하자 소금교역이 꽃피웠다. 소금은 북유럽의 호박, 모피, 노예와 교환되었다. 또 사용가치가 높은 귀중한 교역품이었던 만큼 적에게 소금을 판매할 경우에는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일부 황제들은 인기 유지를 위해 로마 시민들에게 소금을 무상으로 배급하기도 했다. 국가의 전매사업인 소금수출이 늘어나면서 로마는 자연스럽게 부강해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로마로 몰려들었다. 결국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도 소금 길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금은 로마를 경유한 뒤 내륙 각지로 운반되었다. 소금의 수요는 미지의 대륙은 물론 대양을 가로지르고 사막 길을 개척해 무역로를 닦았다. 이미 기원전 4세기 전반에 소금 운반을 위해 로마로 통하는 길이 다 닦였다. 소금이 운반되던 길은 ‘비아 살라리아’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이 길들이 로마 군사들의 원거리 교통로로 이용되어 로마제국 부흥의 기반이 되었다. 지금도 로마 근교에 가면 소금 길이란 이름의 도로가 남아 있다.
로마 초기에는 소금이 화폐의 역할을 했다. 관리나 군인에게 주는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했는데 이를 ‘살라리움’이라 했다. 봉급을 뜻하는 샐러리, 봉급생활자를 일컫는 샐러리맨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soldier(병사)’, ‘salad(샐러드)’ 등도 모두 라틴어 ‘sal(소금)’에 어원을 두고 있다. 이렇게 로마제국의 부흥은 소금과 관계가 깊다. 그러나 1세기경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염전을 상실한 로마는 흑해에서 소금을 수입해야 했다. 부의 근원을 상실한 로마의 경제력은 이후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세계사를 뒤흔든 소금
고대에는 소금을 가진 자가 돈과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로마가 소금으로 일어났고 중국 진시황의 천하통일 사업도 소금 덕에 가능할 수 있었다. 당시는 소금이 귀해 이윤이 높아 대부분 권력자의 전매품이었다. 소금이 흔해진 것은 최근세에 들어와서다.
소금이 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아프리카 내륙에서는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소금무역이 계속되고 있다. 말리의 타우데니 광산에서 채굴된 암염판은 사하라 사막 너머 팀북투를 거쳐 700킬로미터에 걸친 3주간의 대장정을 통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길에서는 늘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힘들고 위험한 장거리 여행 끝에 전해지는 소금은 ‘흰색의 금’이라 불리며 같은 양의 황금과 맞교환될 정도로 비쌌다. 고대 그리스인은 소금으로 노예를 샀다. 옛날에는 소금을 얻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딸을 팔기도 했다. 이렇게 소금은 화폐 역할도 했다.
12세기 이후부터 대서양 염전의 소금은 벨기에의 브루게와 앤트워프에서 거래되어 이 도시들이 북해 상권의 중심지가 되었다. 14세기 초 프랑스 왕실은 소금 전매를 통해 수익의 삼분의 이를 왕실 소유로 삼았고 이 소금을 제네바까지 공급했다. 제네바와 베네치아는 중세 소금교역을 놓고 전쟁까지 불사했다. 암염광이 발견되어 동유럽 소금의 유통지가 된 잘츠부르크는 이름 자체가 ‘소금 성’이라는 뜻이다. 이곳의 영주인 주교와 독일 황제 사이에 소금 독점을 위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신대륙 아메리카의 역사는 소금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스페인과 영국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소금 각축전을 벌였다. 식민지의 반란, 즉 미국의 독립전쟁에 대해 영국은 소금 봉쇄로 맞섰다. 북미에서 소금 투쟁의 역사는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대포는 남부의 소금 공장을 조준했다. 남부군은 소금 제조업자들의 병역을 면제해야 했고, 소금 공장은 탈영병들로 넘쳐났다. 남부 연맹은 소금 때문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2. 모피
모피, 세상을 움직이다
인간이 처음 만난 옷감은 동물의 털가죽이었다. 동물의 모피는 사냥의 기념품이자 최초의 의복이었다. 모피는 고대부터 신성하고 종교적인 가치를 지녔다.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만이 사자 꼬리로 만든 허리띠를 착용할 수 있었다. 모피가 신성하고 귀한 소재였던 만큼 그 값어치도 만만치 않았다. 인구가 늘어나고 공급이 제한되면서 모피는 대표적인 사치품이 되었다.
모피는 세상을 바꾸었다. 모피사냥 덕분에 개발된 곳이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다. 유럽에서 모피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중세에 동방무역을 주도했던 유대인들에 의해서였다. 당시 유럽인은 귀족들을 위해 동물을 사냥했다. 사냥 대상은 다람쥐, 산족제비, 여우 등 주로 작은 동물이었다. 외투 한 벌을 만들려면 다람쥐 수백 마리, 여우 수십 마리가 필요해 엄청난 숫자의 동물이 죽임을 당했다.
결국 서유럽에서 모피동물이 멸종의 위기를 맞자 사람들은 시베리아와 그 너머 극지방까지 가기 시작했다. 거리가 멀어지자 자연히 국제무역 시스템이 갖춰졌다. 이러한 모피 국제무역은 근대 초기에 러시아가 시베리아까지 땅을 넓힐 수 있었던 주요 원동력이었다. 모피사냥꾼들의 시베리아 개척 속도는 군대의 진격 속도보다도 빨랐다. 러시아는 담비, 비버, 늑대, 여우, 다람쥐 가죽을 수출했다. 이로 인해 18세기 말에는 광활한 시베리아 숲에서 살던 모피동물들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 러시아 무역상들은 육지의 모피동물이 사라지자 베링 해협을 건너 북태평양의 해달에게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포획 동물들의 수가 감소하자 북아메리카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아메리카 서부 개척의 일등 공신, 모피
북아메리카의 모피사냥: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에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도 예외가 아니다. 동부에 정착하기 시작했던 유럽인들의 모피동물 사냥은 얼마 안 되어 동부 지역 모피동물의 씨를 말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들은 미시시피 너머 서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모피사냥은 백인들이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간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냥감은 설치류 중에 가장 큰 비버였다. 한때 북아메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번성하던 비버는 1630년대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상류사회 사람들은 반드시 비버 모피로 만든 모자를 써야 한다는 포고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 대륙 전체에서 비버 가죽 붐이 일었다.
명품 모피의 대명사 비버, 북아메리카 역사를 바꾸다: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아시아 무역을 위해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독점 무역을 주도하는 한편, 대서양으로도 뱃길을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하프문’ 호를 이끌던 헨리 허드슨이 1609년 9월에 맨해튼을 발견했다. 이듬해 7월 네덜란드로 돌아온 하프문 호는 비버 모피 등 아메리카의 특산물을 가득 싣고 왔다. 그 무렵 질기고 따뜻한 솜털이 달린 비버 모피는 유럽 최고의 인기상품이었다. 그래서 비버는 일찍부터 사냥꾼의 목표물이 되었다. 비버 가죽에 눈독 들인 네덜란드 상인들은 뉴욕 맨해튼 지역을 주목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와는 별도로 1621년에 아메리카 신대륙을 겨냥한 서인도회사를 세워 맨해튼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활동을 시작했다. 동인도회사와 마찬가지로 이 회사의 대주주들은 대부분 암스테르담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하던 유대 상인들이었다.
유대인, 대구 잡이와 비버 모피 수출에 가담하다: 초기에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생업으로 맨해튼 어촌에서, 네덜란드에서 하던 대구 잡이와 간단한 일용잡화 행상을 시작했다. 맨해튼에서 가까운 매사추세츠 동남부 반도에 있는 케이프 코드 앞바다는 말 그대로 ‘물 반, 대구 반’이었다. 네덜란드에 있을 때부터 대구 잡이와 소금 절임은 유대인들의 주특기였다. 유대인들은 잡은 대구를 해변에서 말리는 동안 인디언들과 만나게 되고, 양측은 서로 물물교환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주로 비버 모피를 사들여 서인도회사에 비싼 값에 되팔았다. 대구를 잡는 것보다 인디언과 교환해 얻은 모피를 서인도회사에 되파는 것이 수익 면에서 훨씬 좋았다. 비버 가죽이 돈이 되자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과정에 길을 내고 작은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북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스페인, 러시아 모두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비버 사냥: 비버 모피는 19세기 초까지 인기를 누렸는데, 이때쯤 미시시피 강 동쪽에서는 비버가 사실상 멸종되다시피 했다. 비버는 비교적 쉽게 사냥할 수 있는 반면 번식률이 낮기 때문에 사냥꾼들이 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잡고 나면 거의 사라질 지경이 되었다. 19세기 초에는 미시시피 서쪽과 태평양 연안 지역만이 마지막 남은 비버의 대량 서식지가 되었다. 그리고 곧 사냥꾼들이 몰려왔고 이 지역의 동물들 역시 사라졌다. 이로써 북아메리카 대륙은 어느 정도 개척되었다. 값나가는 동물들이 사라지자 값이 덜 나가는 동물로 시선을 돌렸다. 사향뒤쥐와 담비 모피가 몇 년 동안 모피무역을 지탱했지만, 이 동물들 역시 머지않아 거의 사라졌다. 그러자 해달과 바다표범이 비버의 자리를 대신했다.
18세기엔 모피의 소재로 북해의 해달이, 19세기엔 물개가 유행했고, 이후엔 검은 여우가 쓰였다. 이때부터 야생동물이 귀해지자 모피용 동물을 사육하기 시작해서 은여우가 길러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엔 밍크가 부드러움과 우아함으로 ‘모피의 여왕 자리’를 고수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밍크 최대 사육국은 덴마크와 중국이다. 덴마크에서는 연간 1,200만 마리의 밍크 모피를 생산하고, 중국은 한때 연간 1,800만 마리까지 생산하다가 지금은 900만 마리로 줄었다.
인간의 욕심을 위한 동물의 수난: 지금도 캐나다에선 매년 30만 마리 내외의 바다표범 사냥이 계속 허용되고 있다. 수많은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바다표범 사냥이 멈추지 않는 이유는 털가죽과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한 기름 때문이다. 현재 모피 의류 제조를 위해 4천만 마리의 밍크가 사육되고, 1천만 마리의 여우가 사육되거나 덫에 잡힌다. 여우코트 한 벌에 20 마리의 여우, 밍크코트 한 벌에 55 마리의 밍크가 필요하다. 이렇게 매년 8천만~1억 마리의 동물이 모피제조를 위해 죽임을 당한다.
3. 보석
독점 괴물의 탄생, 드비어스
‘다이아몬드’라는 말은 그리스 어의 ‘ADAMAS’에서 나왔다. 이는 ‘정복할 수 없다’라는 뜻으로 다이아몬드는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는 깨뜨릴 수 없는 신성한 존재라는 뜻이다.
로스차일드 자금으로 설립된 드비어스: 본격적인 다이아몬드 생산은 1866년 남아공 오렌지 강 유역에서 21캐럿짜리 ‘유레카’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나서부터다. 이어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어 근대적 채굴법이 채택되었다. 대량 발굴되기 시작한 다이아몬드는 널리 대중화되었다. 그 뒤 남아공에 다이아몬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드비어스는 원래 남아공 원주민 형제의 이름이다. 농사꾼이었던 이들 형제는 한 농장을 50파운드에 매입했는데 우연히 그 농장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드비어스 형제는 이 농장을 무려 6,300파운드에 팔았고, 농장을 팔면서 농장의 명칭을 자기들의 이름인 ‘드비어스 광산’으로 영구히 붙여줄 것을 요구했다. 오늘날 다이아몬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드비어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드비어스 형제로부터 다이아몬드 농장을 사들인 사람은 영국인 세실 로즈였다. 세실 로즈는 로스차일드가의 자금을 받아 1888년 드비어스 사를 설립했고 농장 밑에 묻혀 있던 엄청난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거부가 되었다. 이후 세실 로즈는 정계에 진출해 1890년 남아공 케이프 주 식민지 총독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각종 정책과 법을 영국인과 드비어스 사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로즈는 인근 지방에 대한 무력정복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아프리카 남부 일대에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가 정복한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라고 불렸다. 로즈의 땅이란 뜻이다. 이 지역이 1980년 영국에서 독립한 짐바브웨다. 로즈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따 ‘로즈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비롯한 많은 영재들이 받은 ‘로즈 장학금’이 바로 로즈 재단에서 지급한 장학금이다.
유대인 오펜하이머, 금과 다이아몬드 모두를 장악하다: 건강이 나빠진 세실 로즈는 1902년 49세의 나이로 후계자 없이 죽었다. 그 뒤 드비어스 사에서 일하고 있던 독일계 유대인 어니스트 오펜하이머가 주인 없는 회사의 주식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1880년 독일에서 유대인 담배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17세에 영국으로 건너가 다이아몬드 중개상의 수습사원이 되었다. 1902년 영국 보석상의 대리인으로 남아공의 킴벌리 광산에 파견되어 원석을 선별하고 구매하는 일을 맡았다. 이후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오펜하이머는 드비어스 사에 들어가 능력을 인정받는다. 1917년 오펜하이머는 JP모건과 합작으로 광산회사 ‘앵글로아메리카’를 설립한 후 사업을 확장해갔다.
다이아몬드가 값비싼 이유가 있다. 보통 1캐럿 다이아몬드 한 개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약 250톤의 자갈과 바위를 캐내야 할 만큼 어렵고 힘든 작업을 거쳐야 한다. 평지나 강가에서 1캐럿의 원석을 얻으려면 무려 1,500톤의 흙을 파헤쳐야 한다. 그런데 오펜하이머는 흑인 노동자의 임금을 쥐어짜 이들을 착취했다. 또한 공급량 조절과 가격 조작으로 경쟁사의 몰락을 유도하고 망한 경쟁사를 헐값으로 사들이는 등 악명이 높았다. 흑인 노동자가 불만을 갖고 임금인상 투쟁을 하자 그는 이들을 모두 내쫓고 더 값싼 중국인 노동력을 투입했다. 그의 무자비한 경영으로 드비어스 사는 대형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면서 꾸준히 드비어스의 주식을 사들여 1929년 마침내 드비어스 사의 회장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곧 대공황이 닥쳤다. 오펜하이머는 유대인답게 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그는 전 세계 거의 모든 다이아몬드를 헐값에 사들였다. 동시에 파산한 광산회사들을 사들여 독점을 위한 토대를 닦았다. 공급 물량을 독점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된 드비어스는 생산-유통-재고관리-판매의 모든 과정을 장악하고 고가 정책을 기본 모토로 삼았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공업용 다이아몬드의 수요가 급증해 사세는 더욱 커졌다. 무엇보다 런던에 자회사인 중앙판매기구라는 신디케이트를 만들어 전 세계 다이아몬드 원석의 생산, 유통, 판매를 폐쇄구조 안에서 독점적이고도 체계적으로 통제함으로써 드비어스 신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