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감동하다
원유상 지음 | 좋은날들
한국사에 감동하다
원유상 지음
좋은날들 / 2015년 4월 / 264쪽 / 12,800원
part 1 우리 문화유산을 다시 보다
고인돌과 온돌, 우리 민족의 돌 이야기
우리 민족 고유의 난방 방식, 온돌: 우리 민족에게 온돌은 참 특별합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난방을 책임져준 것이 온돌이었으니까요. 온돌은 말 그대로 풀이하면 따뜻한 돌입니다. 순수한 우리말로는 ‘구들’이라고 하지요. 구들은 ‘구운 돌’의 줄임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돌을 구워서 방을 따뜻하게 하는 것일까요? 전통적인 온돌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아궁이에 불을 지핍니다. 그러면 뜨거운 연기가 구들(고래) 쪽으로 들어갑니다. 구들은 방 아래에 있는 통로를 말합니다. 이 통로가 뜨거워져 방 아래에 깔려 있는 돌을 데우는 것이지요. 이때 연기는 굴뚝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갑니다.
오늘날 전통적인 온돌은 많이 사라진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온돌 방식은 오늘날 우리의 난방에 응용되어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보일러를 이용한 난방입니다. 방 아래에 온수 파이프를 묻어서 방을 데우는 형태이지요.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방바닥을 데워서 방을 따뜻하게 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온돌을 사용하였던 것일까요? 초기 철기 국가 중 옥저에서 온돌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온돌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나라는 고구려였습니다. 중국 역사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겨울이 되면 모두 기다란 구덩이(구들)를 만들어서 그 밑에 불을 때어 그 열기로 따뜻하게 한다. -《구당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에서도 온돌이 발견되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영토인 크라스키노 성터는 연해주의 발해 유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입니다. 이곳은 발해의 행정과 상업 중심지 중 한 곳이었지요. 1958년에 발견된 이 성터는 러시아를 비롯해 한국, 중국, 일본 등이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현지조사 및 발굴에 참여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2005년 8월에 아주 중요한 발견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온돌 쌍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굴을 하던 우리 측 연구자의 외침이었습니다. 한국의 고구려연구재단과 러시아의 극동 역사 고고민속학 연구소 중세연구실은 크라스키노 발해 유적에서 공동으로 발굴 작업을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발굴 현장에서 온돌 쌍구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본부로 전해진 것입니다. 온돌 유적 발견에 참여한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온돌 유적은 고구려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매우 유사한 형태였기 때문입니다. 온돌은 중국이나 여러 북방 민족 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 민족 고유의 난방 시스템입니다. 더욱이 고구려는 사실상 온돌의 원조 격이 되는 나라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발해의 대표적인 유적지에서 온돌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동북아시아 고대사를 재구조화하는 작업을 국가적으로 전개하며 우리 고대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동북공정의 대표적인 표적이 되었던 국가가 발해였습니다. 발해를 말갈족의 역사로서 중국사의 일부로 보려는 것이지요. 발해가 정치적, 문화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의 역사라는 사실이 사료 등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도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연해주 크라스키노의 발해 유적에서 온돌이 발견된 것입니다. 고구려 온돌의 고유성으로 보건대, 발해에서 온돌 유적이 발견된 것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문화적으로 명백히 입증하는 결과였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서민들이 온돌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돌이 보다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시대라고 합니다. 이전에 입식 생활을 주로 하던 지배층도 이제는 온돌을 선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배층, 서민 구분할 것 없이 온돌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아주 보편적인 난방 문화가 되었습니다.
온돌의 난방 방식은 서양의 전통적 난방과 비교할 때 여러 면에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서양의 전통적 난방은 벽난로입니다. 실내에서 불을 피워 그 열기로 난방을 하는 방식이지요. 거실의 벽난로를 보면 매우 따뜻해 보이고 멋도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굴뚝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면 실내에 연기가 들어올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재가 집 안에 날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온돌은 구들을 통해 방을 데워주고 연기는 바로 굴뚝으로 나가며, 재 또한 방으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실내를 깨끗하고 쾌적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난방 효과도 온돌이 훨씬 우수합니다. 벽난로는 불을 때지 않으면 금방 열이 사라집니다. 온돌의 경우도 불을 때지 않으면 열기가 식는 것은 벽난로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구들장에 스며든 열은 금방 식지 않습니다. 바닥 온기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지요.
이처럼 온돌은 아주 훌륭한 우리 고유의 난방 방식입니다. 그래서 전통적 온돌 문화를 보존하고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2002년에는 국제온돌학회가 창설되었습니다. 온돌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우리 온돌 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며, 실제로 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려의 찬란한 문화유산, 고려청자와 직지심체요절
천하제일의 비색, 고려청자: 고려가 남긴 많은 문화유산 중에 고려청자와 직지심체요절은 다른 나라들도 인정하고 감탄해 마지않는 고려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입니다.
낙양(洛陽)의 꽃, 건주(建州)의 차(茶), 촉(蜀)의 비단, 정요(定窯) 백자, 고려 비색(翡色)은 모두 천하제일이다.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수중금》
이 자료는 중국 송나라 학자로 알려진 태평노인의 저서 《수중금》에 나오는 글입니다. 위의 글에서 우리 눈에 띄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고려 비색’입니다. 고려 비색은 고려청자를 말합니다. 고려청자의 표면에서 특유의 비색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왜 태평노인은 고려청자를 천하제일이라고 했을까요? 먼저 청자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청자는 자기(瓷器)의 하나입니다. 자기는 매우 높은 온도에서 만들어지지요. 무려 1,300도 정도는 되어야 그릇이 가벼우면서도 단단하고, 두드렸을 때 아주 청명한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낮은 온도에서 만드는 도기와는 달리 자기는 만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1,300도를 만들고 유지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또한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높은 온도에서도 깨지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특별한 흙인 자토(瓷土)를 구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자기는 재료와 기술력 면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지요.
청자를 처음 제작한 곳은 중국입니다. 중국은 3세기, 즉 우리나라 삼국 시대 초기부터 청자를 생산해왔습니다. 이후 선종이 유행하면서 차를 즐기는 선종 승려들이 청자에 따라서 마시게 되자 청자의 생산과 사용이 점차 확대되었지요. 그러한 영향을 우리나라도 받게 됩니다. 중국의 청자가 수입되기도 하고요. 이 과정에서 9∼10세기 무렵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청자가 조금씩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청자를 제작하는 기술력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지요. 그러다가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드디어 우리나라의 청자 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합니다. 전라도 부안과 강진 등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청자 생산지가 많이 형성되었습니다. 서해안과 남해안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교류가 활발해 자기 문화가 일찍부터 유입되었습니다. 또한 한반도에서는 따뜻한 지역이기에 차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청자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 시대에 청자는 오로지 중국과 고려만이 만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만드는 것 자체도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고려는 청자 만드는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켜 고려의 비색을 만들어냈습니다. 사실 고려청자는 말 그대로 청색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차라리 녹색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완전한 녹색 또한 아닙니다. 밝고 은은한 녹색에 가까운 빛깔이라고 하면 좋을까요? 바로 이것이 비색입니다. 옥과 비슷한 색깔이면서도 또 다른 고려청자만의 특유의 색깔이지요.
청자를 만드는 방법을 안다고 하더라도, 비색을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간혹 TV를 보면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이 다 구운 도자기를 하나씩 살펴보다가 망치로 깨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빛깔이 나오지 않으면 가차 없이 깨뜨려버리지요. 고려청자의 비색도 그렇게 탄생했을 것입니다. 고려의 장인들이 끊임없이 만들고 또 깨뜨리고를 반복해서 만들어낸 빛깔인 것입니다. 그 고려청자의 비색을 송나라의 태평노인이 천하제일이며, 어느 지역에서도 따라올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는 태평노인만이 내린 것은 아닙니다.
도자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이라고 하는데, 근년의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도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선화봉사고려도경》은 송나라의 사신인 서긍이 1123년에 고려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면서 보고 들은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모두 40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는 고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글에서 서긍은 고려청자의 비색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송나라의 대표적인 수출품 중의 하나가 바로 도자기, 즉 청자였습니다. 청자를 처음 만든 곳이 중국이었고, 송나라 대에 이르러 청자는 더욱 훌륭하게 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평노인이 천하제일로 송나라의 청자가 아닌 고려청자를 언급했다는 데서 그만큼 고려청자의 비색이 실로 대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천하제일의 것으로 인정받던 고려청자는 한 단계 더 발전합니다. 바로 상감기법이 청자에 적용된 것입니다. 상감기법은 겉면에 홈을 파고 그곳에 다른 재료를 넣는 방식입니다. 청자를 만드는 고려의 장인들은 겉면에 홈을 파서 여러 가지 모양을 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백토와 자토를 채워 넣은 다음 구웠습니다. 이로써 비색 바탕에 흰색과 검은색의 멋진 문양이 들어간 청자가 탄생합니다. 이것이 상감청자입니다. 청자 사진에서 학이나 꽃문양이 있는 것을 다들 보았을 테지요. 바로 이것이 상감기법으로 만든 청자입니다. 상감기법을 청자에 적용한 것은 고려청자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는 고려청자의 독창성, 그리고 예술적 경지에 이른 청자 제작 기술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려청자는 오늘날에 보더라도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예술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만들었던 고려청자를 오늘날 그대로 재현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몽골의 침략과 원의 간섭으로 국토가 황폐화되면서 청자제작소가 크게 줄어들고 장인들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고려청자는 그 기술이 대대로 전수되어야 하는데 차츰 대가 끊어지게 된 것이지요.
영국 도자기 전문가인 윌리엄 허니는 1945년에 펴낸 그의 저서 《중국과 극동 각국의 도자기》에서 고려청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최상급의 한국 도자기는 세계 도자기 중에서도 가장 우아하고 진실하다. 도자기가 가지는 모든 장점을 갖추고 있는데, 그것은 행복한 민족의 소산임을 첫눈에 말해주고 있다.” 고려청자는 천하의 으뜸이라는 칭송과 함께 우리 역사를 찬란하게 장식해주는 문화유산 중 하나입니다.
책과 능이 간직한 조선 500년의 역사
기록 문화의 최고봉,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에서 있었던 사실의 기록입니다. 여기에서는 그냥 짧게 실록이라고 하겠습니다. 실록은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에 이르기까지 472년간(1392∼1863년)의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1997년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것도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왜 철종까지일까요? 그 뒤에 고종도 있고 순종도 있는데 말입니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실에 대한 기록의 왜곡 여부입니다. 실록이 갖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엄격한 편찬규례입니다. 그런데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였던 1927∼193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존 실록이 가지고 있던 엄격한 편찬규례를 따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근대화 과정의 여러 사실과 조선 왕실(혹은 대한제국 황실)의 동정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요. 따라서 세계기록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철종실록>까지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실록은 어떤 면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서 가치가 있을까요? 가장 먼저 주목할 부분은 실록이 장구한 세월에 걸쳐 편찬된 한 왕조의 역사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이웃 나라인 중국도 실록을 편찬하였습니다. 하지만 명나라 이전의 실록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후 명실록 2,909권, 청실록 3,000여 권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 실록도 세계적이고도 훌륭한 역사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분량과 기간 등의 면에서 우리 조선왕조실록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예를 들어 명실록의 경우 권수는 많지만 실제 분량은 우리 실록의 4분의 1 수준입니다. 우리 실록이 약 6,400만 자인데, 명실록은 약 1,600만 자이니까요. 그리고 청실록은 296년간에 걸친 기록이지만, 우리 실록은 472년간의 기록입니다. 이처럼 우리 실록은 다른 그 어느 나라의 실록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오랜 세월의 역사를 담은 기록입니다. 게다가 이 방대한 실록은 아주 수려하고 정교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실록은 당시 우리나라의 발전된 인쇄술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록은 다양한 방면의 풍부한 내용을 담았다는 측면에서도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왕조실록이니까 정치와 관련된 게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각종 법률과 제도, 경제, 교통(지리), 풍속, 천문학, 미술(공예), 음악, 종교 등 시대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왕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의 기록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은 백과사전식 실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러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합니다.
실록은 기록의 진실성이 매우 높다는 측면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실록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록은 그 왕대에 바로 기록되지 않습니다. 왕이 승하하면 이후의 왕대에 편찬이 이루어집니다. 현재 권력을 가진 왕이 자신 대의 역사를 실시간으로 기록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전 왕의 실록 작성과 편찬이 결정되면 이를 담당하는 실록청이 설치됩니다. 그리고 전국 관원들에게 사초(史草) 납부령이 내려집니다. 사초는 실록을 작성하는 데 필요한 기초 자료라고 할 수 있는데, 좁은 의미로는 훗날 실록 편찬을 위해 사관들이 그때그때 작성하는 일종의 보안 속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관들이 기록하는 사초에는 왕의 언행을 비롯해 조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가감 없이 기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관들은 신분을 보장받습니다. 사초는 왕을 포함해 그 누구도 열람할 수 없습니다.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 역시 함부로 그 내용을 말했다가는 큰 화를 입게 되지요. 그만큼 사초는 아주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며 관리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초가 모아지면 본격적으로 실록이 작성되기 시작합니다. 사초와 각종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을 추출하여 작성하는데, 이를 초초(初草)라고 합니다. 그리고 초초 중에서 빠진 사실을 추가하거나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빼는 등의 수정을 하여 중초(中草)를 작성합니다. 다음에는 실록을 담당하는 최고 책임관들이 마지막으로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고 전체적으로 체제와 문장을 맞춥니다. 이렇게 해서 인쇄본이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데, 이를 정초(正草)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