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5년 5월 / 356쪽 / 15,000원
제1장 ‘갑질공화국’의 파노라마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조선시대보다 더한 계급사회’?: “오늘의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법칙이 완전히 지배하는, 소름 끼치는 격투장이 되어버렸다. 한국인들은 마치 맹수에 쫓겨 정신없이 달아나는 토끼들처럼, 불안과 공포라는 괴물을 피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멈출 수 없는 경쟁의 쳇바퀴를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리학자 김태형의 말이다. 경제부총리를 지낸 이헌재는 “기회가 많고 역동적이었던 우리나라가 이젠 솔직히 현대판 세습사회나 다름없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경제는 정치다: 이헌재의 경제특강』에서 “혹자는 조선시대보다 더한 계급사회라고도 혹평한다. 능력과 노력만으로 가능했던, 자유로운 신분 이동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사회적 지위나 재산이라는 기득권이 사람들의 미래를 결정한다.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끌고 온 힘, 그 역동성은 사라졌다. 고인 물은 썩는다. 정체되고 닫힌 사회는 병든다”고 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텐데, 그건 정치의 몫이 아닌가. 그러나 정치는 반감과 혐오와 저주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우리는 지금 무언가 잘못된 틀 안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위기는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고 한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에 따르자면, 오늘의 한국 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위기에 처해 있는 셈이다. 연세대 교수 김상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위기’라는 말로는 부족하다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아포리아(aporia)’로 규정한다. “배가 좌초되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를 고대 그리스인은 아포리아라고 했다. 이는 위기보다도 더 심각한 단계다. 위기는 도움을 청하거나 노를 저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아포리아는 그보다 더 심각한 ‘길 없음’의 상태에 접어들었음을 말한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남에게 손가락질한다.”
한국인의 ‘이카로스 패러독스’: 영국 저널리스트 대니얼 튜더는 한국의 그런 두 얼굴을 다룬 책의 제목을 아예 『한국: 있을 수 없는 나라(Korea: The Impossible Country)』라고 붙였다.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그런 양면성을 실감 나게 표현해주고 있다. 물론 그 역시 답을 잘 알고 있다. “한국을 가난에서 구제하고 마침내 우뚝 서게 한 그 경쟁의 힘이, 오늘날 한국인을 괴롭히는 심리적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적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은 ‘개천에서 난 용’이다. 그런데 이 용은 늘 비교중독증에 시달린다. 대니얼 튜더는 “한국과 외국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서글픔을 느꼈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남과 비교하는 저주에 빠져버렸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물론 그런 ‘비교의 저주’는 일상적 삶에서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누가 용이 되었으며 누가 용의 지위에 더 근접했느냐를 놓고 한국인은 남들은 물론 자신조차 못살게 군다.
‘6ㆍ25 심성’은 우리에게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게 한 동시에 ‘전쟁 같은 삶’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심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한국이 ‘갑질 공화국’이 된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다. 상호 맞물려 있거니와 각기 위상이 다르긴 하지만, 단순 나열식으로 열거해보자면 압축성장의 부작용(황금만능주의 등), 효율을 기하기 위한 1극 중심주의가 낳은 서열주의,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 중심의 정책으로 인한 사회적 위계화, 수출지향형 경제정책으로 인한 기업사회 구축, 부정부패와 출세주의, 법치의 실종, 연고주의ㆍ정실주의ㆍ패거리주의 등 무수히 많은 요인이 얽혀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요인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감내케 한 주요 원인이라는 점에서 ‘6ㆍ25 심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6ㆍ25 심성’의 두 얼굴은 이른바 ‘이카로스 패러독스(Icaros Paradox)’로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상황에서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의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태양에 가까이 감으로써 목숨을 잃고 만다. 지금 우리는 이카로스처럼 태양에 점점 더 근접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인이 빠져든 이카로스 패러독스는 이른바 ‘경로의존(path dependency)’의 산물일 수도 있다. 경로의존은 한번 경로가 결정되고 나면 그 관성과 경로의 기득권 파워 때문에 경로를 바꾸기 어렵거나 불가능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한번 길이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 길로만 다닌다. 그 길을 따라 수많은 건물이 세워진다. 그 후에 아무리 더 빠르고 좋은 길을 찾아낸다 해도 이미 엄청난 ‘기득권’을 생산한 길을 포기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금 우리는 더 좋은 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현재의 길을 바꾸는 게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전혀 원치 않는 길을 따라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가? 이제 우리도 일관성의 덫에서 탈출해 태양을 향해 가는 진로를 변경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제2장 ‘갑질’을 가르치는 교육
“공부 안 할래? 너 엄마 죽는 꼴 보고 싶니?”
교육은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의 수단: 대한민국은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는 물론 학벌에 따른 임금 격차도 심각한 수준이다. 역대 정권들은 학력ㆍ학벌 간 임금 격차 해소라고 하는 지름길을 외면한 채 임금 격차로 인해 빚어지는 입시전쟁과 사교육 문제에 대해 입시제도를 바꾸는 미련한 방법으로 대응해왔다. 입시전쟁을 견디지 못한 10대 자살률이 세계 1위를 기록해도, 모든 답이 입시제도에 있는 것처럼 그걸 갖고 장난친 게 수십 년째다.
이젠 메뉴가 고갈되었는지 ‘인성면접’이라는 새로운 장난감을 들고 나타났다. 아니, 입시전쟁 자체가 인성을 타락시키는 판국에 그 체제를 그대로 두고서 ‘인성 코스프레’를 점수로 매겨 평가하겠다니 그게 말이 되나? 학생ㆍ학부모ㆍ교사는 그 장난감 사용법을 익히느라 고생하겠지만, 곧 그 장난감이 불량품이라는 게 밝혀질 것이고, 그러고 나선 또 다른 새로운 장난감이 등장할 것이다. 이는 지난 수십 년간 지겨울 정도로 반복된 불멸의 법칙이건만, 늘 교육 당국자들의 표정은 진지하고 심각하기만 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국민 세금으로 먹고사는 만큼 뭔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또는 이른바 ‘행동 편향(action bias)’ 때문일까? 그렇게 선의 해석을 한다 해도 그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그게 문제다. 차라리 “답이 없다”고 포기 선언을 하는 게 모두를 덜 괴롭게 만드는 일이겠건만, 이런 일엔 더할 나위 없이 부지런하기만 하니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이명박 정부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이주호는 장관이 되기 전에 “장관 따라 정권 따라 바뀌는 입시제도에 신물이 날 지경이다. 교육부 장관이나 대통령 마음대로 입시를 좌지우지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 역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에 굴복해 언론에서 “정권마다 성형 수술되는 대입에 국민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비판을 받았다. 물론 그 이후로도 ‘대입 성형 수술’은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왜 그럴까?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 때문이다. 교육 작가로 활동 중인 이계삼이 잘 지적했듯이, “한국 교육의 근원적인 불행은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 외에는 다른 삶을 향한 출구가 이 사회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즉, 교육은 누가 용이 될 것인가를 가려내는 선발의 의미만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걸 귀신같이 꿰뚫고 있는 학부모가 자식의 전투력 강화에 일로 매진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원래 전쟁의 공포는 증폭되기 마련이다. “너 대학 못 가면 뭔 줄 알아?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 인간 떨거지 되는 거야!”와 같은 폭언이 난무한다. 전국 방방곡곡 각 가정의 일상에서 각종 변주를 거치며 수시로 만들어지는 말이다.
가정과 학교의 ‘갑질 교육’: 그런 상황에서 고등학교는 ‘수능 익숙한 학생을 찍어내는 공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교 교실, 아니 공장 작업장에 이런 급훈들이 내걸리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네 성적에 잠이 오냐?”, “쟤 깨워라”, “10분만 더 공부하면 마누라가 바뀐다”,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 “끝없는 연습만이 살길이다 10시간: 서울대, 8시간: 연대, 7시간: 이대.”
흥사단 투명사회본부 윤리연구센터가 발표한 ‘2013년 청소년 정직지수’를 보면, “참고서를 친구에게 빌려주기 싫어서 없다고 거짓말할 수 있다”는 항목에 초등학생은 26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중학생은 42퍼센트, 고등학생은 46퍼센트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높아졌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문제집의 표지를 불투명한 커버로 숨기는데, 이는 내가 뭘 보고 공부하는지 남들이 모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국 학생들의 ‘더불어 사는 능력’이 세계 꼴찌 수준인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 식으로 키워져 성공한 아이들이 갑질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있을까? 요컨대, 한국의 가정교육은 사실상 ‘갑질을 가르치는 교육’이고, 사교육 업체들은 그런 고객의 뜻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2000~2015학년도 1,751명 특목고 합격 1위.” 서울의 ㅁ학원은 2000년부터 2015년까지 16년간 특수목적고ㆍ자사고ㆍ영재학교에 합격한 수강생의 명단을 일일이 적은 현수막을 학원 건물 외벽에 붙여두었다. “2015 대입 수능 결과 전 과목 만점자 2명 탄생!”이란 현수막을 건 서울 목동의 ㅊ학원은 이들 학생 2명의 얼굴 사진과 이름을 현수막에 인쇄해 건물 외벽에 걸어놓았다. 이런 광고 행위에 대해 학벌 차별 문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과연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될까? 학교 역시 그런 광고에 열심이다. ‘서울대 6명 대전 일반계고 최다 합격, 연세대 5명, 고려대 9명, 서강대 2명…….’ 최근 대전 중구 한 고등학교 벽면에 내걸린 이 학교 학생들의 2015년 대학별 합격자 수가 빼곡히 적힌 현수막이다. 오죽하면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런 현수막들이 ‘학력ㆍ학벌 차별 문화를 조장한다’며 특정 학교 합격 홍보물 게시 관행 개선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겠는가.
그러나 학교들은 들은 척도 않고 계속 현수막을 게시하고 있다. 수시합격이 유망한 학생의 스펙을 위해 상을 몰아주기도 하는 학교에서 그런 현수막 게시가 무어 큰일이랴. 최상위권 학생만의 특별반을 편성해 차별적 혜택을 제공하고, 성적 우수자에게만 기숙사 혜택을 주어 스파르타식으로 훈육하며 심지어 급식까지도 성적순으로 배식하기도 한다. 그런 교육을 받고 모교의 현수막에 등장하는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대학 서열을 신분 계급으로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 갑의 갑질이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지는 당해본 을만이 안다. 그런데 갑을관계의 진짜 비극은 갑의 갑질에 있다기보다는 갑질을 당한 을이 자신보다 약한 병에게 갑질과 다를 바 없는 을질을 한다는 데에 있다. 병은 또 자신보다 약한 정에게 갑질ㆍ을질과 다를 바 없는 병질을 한다. 이런 먹이사슬 관계를 온몸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이들이 놀랍게도 아직 갑을관계의 본격적인 현장에 뛰어들지 않은 대학생들이다. 미리 연습을 하려는 걸까? 사회학자 오찬호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란 책은 대학생들의 ‘대학 서열 중독증’을 실감나게 고발하고 있다.
오찬호는 대학의 수능점수 배치표 순위가 대학생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전국의 대학을 일렬로 세워놓고 대학 간 서열을 따지는 건 단지 재미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인정투쟁이자 생존투쟁이다. 대학 서열은 수능점수나 학력 평가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아예 노골적인 인간차별로 이어진다. 왜? 수능점수는 ‘진리의 빛’이기 때문이다. 오찬호는 <내 깡패 같은 애인>이라는 영화를 ‘인 서울(서울 소재 대학)’ 대학생 열다섯 남짓과 같이 보고 나서 지방대생이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차별을 받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학생들은 모두 “차별이 없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입장을 내보였다. 한 학생은 “에이, 그래도 지방대는 저희 학교보다 대학 서열이 한참 낮은 곳인데, 제가 그 대학 학생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을 받는 건 말이 안 되죠!”라고 말했고, 이 말에 모두 다 동의했다나.
그런데 학생들과의 심층면담과 그들이 제출한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대학보다 서열이 낮은 대학에 대한 실제 학문적 역량차를 개인적으로 직접 경험해보았는가?”라는 질문에 92퍼센트가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심지어 사람을 딱 보면 대학 서열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생들도 있다. “선생님이 우리 보고 ‘편견’이라고 그러시는데, 정말 그렇지 않아요? 수준 떨어지는 대학을 다니는 애들은 딱 보면 알지 않나요? 선생님은 여러 대학 출강하시는데 그런 것 못 느끼세요? 제가 지금 오버하는 거예요?” 물론 오버지만, 대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하게끔 키워져온 걸 어이하랴.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능력주의: 대학생들의 ‘대학 서열 중독증’은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의 막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모델을 신봉하게끔 키워져온 학생들은 왜 대학 서열을 따지는 게 문제라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개천 출신이건 어디 출신이건 자신이 용의 반열에 들었을 때 가정과 학교는 물론 자신의 주변에서 쏟아진 환호는 대학 서열을 따지는 게 옳고 또한 바람직하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니었던 말인가? 그들의 그런 신앙을 선의로 해석하자면 이른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다. 능력주의의 슬로건은 “억울하면 출세하라”다. 물론 능력주의 시스템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들이 내세운 슬로건이다. “우리가 이긴 것은 우리가 잘나서이고 너희가 패한 것은 너희가 무능해서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너희의 그 불행한 처지에 만족하면서 살아라. 그리고 그게 억울하면 너희도 출세하라.” 하는 식이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허구이거나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능력은 주로 학력과 학벌에 의해 결정되는데, 고학력과 좋은 학벌은 주로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서울대 합격률이 아파트 가격과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것마저 입증된 바 있다. 학력과 학벌의 세습은 능력주의 사회가 사실상 이전의 ‘귀족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웅변해준다. 물론 모든 능력을 다 세습의 산물로 볼 수는 없으며, 그런 시각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지금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정반대의 것, 즉 모든 능력을 세습되지 않은 재능과 노력의 산물로 보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격차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즉 능력주의다.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차이가 점차 우연과 예상하지 못한 선택에 좌우되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그런 우연을 필연인 것처럼 가장하는 게 시대의 유행이 되고 있다.
크리스토퍼 래시는 『엘리트의 반란과 민주주의의 배반』에서 물려받은 사회경제적 기득권이 성공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지만, 새로운 엘리트들은 “오로지 자신의 지적 능력의 힘으로 성공해왔다는 ‘소설’을 써왔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자신이 받은 수혜에 대한 감사함이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성공은 오직 자기 노력과 힘으로 달성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이클 샌델은 『공동체주의와 공공성』에서 “우리 재능의 우연성을 절감하는 것, 즉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성공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지 않다는 의식은 능력중심사회가 부자는 그들이 가난한 자들보다 더 대접받을 만하기 때문에 부자라는 독선적인 생각에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