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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유영호 지음 | 창해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유영호 지음

창해 / 2015년 4월 / 340쪽 / 15,000원





프롤로그_ 성곽, 그리고 성곽의 역사



한양도성의 사대문 - ‘인의예지신’을 인간의 공간으로

한양도성은 동서남북에 사대문이 설치되어 있고 각 대문의 명칭을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숙정문(肅靖門)이라 칭하였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맹자에 나오는 4덕(四德), 즉 인의예지(仁義禮智)가 한 자씩 들어 있는데, 유교를 중시하는 조선시대에는 이름 하나하나에도 그에 맞는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며 지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나라 동중서가 오행설에 기초하여 신(信)을 추가하여 완성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오상(五常)이라 불리며 유가에서는 이 다섯 가지를 두고 ‘인간에게 있어서 변하지 않는 성품’이라 하였다. 즉 이 오상이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경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도성을 지으면서도 이 오상을 염두에 두고 건설하였다. 따라서 도성 사대문에 ‘인의예지’를 넣고 나머지 ‘신’은 도성의 중심인 보신각에 넣어 한양도성이야말로 짐승이 아닌 인간이 살아가는 곳, 즉 인의예지신을 모두 갖춘 곳으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하나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한양도성의 북문에는 지(智) 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전혀 다른 명칭인 숙정문이 있지 않은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이 갈리고 있다. 여기에 들어가야 할 ‘지’는 훗날 숙종 때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도록 축성한 홍지문(弘智門)이 그것을 대신한다는 주장도 있고, 숙정문 자체가 다른 이름으로 소지문(昭智門)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자본의 논리 속에 날로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현실을 볼 때, 서울이라는 공간을 ‘인의예지신’을 갖춘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으로 그 의미를 부여한 우리 선조의 뜻을 다시금 새겨야 할 때인 듯싶다.

현재 사대문과 사소문 가운데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돈의문, 소의문(서소문), 남소문(현재는 광화문으로 대치하여 사용)을 빼고는 모두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현존하는 성문들 가운데 대문으로는 흥인지문만 온전히 남은 셈이다. 지난 2008년 숭례문의 문루가 모두 불타고 홍예(석문)를 이루는 돌만 남아 복원해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 소문으로는 창의문이 유일하다. 영조 때 재건한 창의문은 1958년에 크게 보수하였지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나머지 대문으로는 숙정문 그리고 소문인 광희문과 혜화문 등이 있는데 모두 1970년대 중반에 새로 복원되었다.



의義: 수오지심을 말하다



첫 번째 걸음 - 돈의문에서 사직터널까지

돈의문 - 제 이름마저 빼앗기고 사라진 대문: 서대문역에서 돈의문이 있었던 자리까지는 불과 250미터 내외 정도 된다. 그런데 그 짧은 공간 속에서 양파처럼 겹겹이 싸인 우리 역사를 상상하니 가슴 한편이 저릿해왔다. 서울성곽의 서쪽에 있는 대문, 돈의문. 하지만 실제 돈의문의 모습은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곳 정동사거리 우리은행 강북삼성병원영업점 앞에 돈의문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만 있을 뿐이다.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그 형체도 없이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돈의문은 일제강점기 때 전차궤도를 복선화한다는 명목으로 1915년 그 운명을 다한 채 헐려버렸다.

당시 돈의문은 경매에 붙여져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단돈 205원에 낙찰되었다. 쌀 한 가마니가 16원 정도 할 때였으니, 도성 사대문 중 하나인 돈의문이 겨우 쌀 13가마니 값에 팔린 셈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돈의문을 해체하는 와중에 엄청난 보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는 돈의문의 기와와 목재를 경매에 부쳐 그가 낙찰 받은 금액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하니 그야말로 염덕기는 횡재를 맞은 셈이다.

이렇게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 돈의문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갖고 태어난 문이다. 한양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계속 자리를 못 찾고 이리저리 헤매다 겨우 자리를 잡을 만할 때 외세에 의해 헐렸으니 말이다. 돈의문은 처음 태조 5년(1396) 도성을 완성할 때 다른 대문들과 함께 건설되었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독립문 근처 사직동 고개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던 것이 태종 13년(1413)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이곳을 없애고 그보다 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새로 건축하였다. 이름까지 서전문(西箭門)으로 바꾸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10년을 못 채워 다시 폐쇄되고, 세종 4년(1422) 정동사거리에 돈의문(敦義門, 의를 북돋는 문)이란 이름으로 자리하게 된다.

자리를 계속 이동하며 새로 지어졌기에 조선의 백성들은 이를 속칭 ‘새문’ 또는 ‘신문(新門)’이라 불렀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불리는 것과 사뭇 다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을 우리는 ‘새문안로(서대문로타리~광화문로타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돈의문을 서대문이라 명명하는 것은 과연 일제의 잔재인지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는 사대문의 각 고유 명칭보다는 방향을 나타내는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등의 명칭을 더 익숙하게 쓰고 있다. 일각에서는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명칭이라며 기피하기도 하는데 꼭 일제 때만 쓰였던 명칭은 아니다. 광해군 6년(1614)에 저술된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의하면 숭례문, 흥인지문을 속칭 남대문, 동대문이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경성(京城) 팔문은 정남은 숭례라 하며 속칭으로 남대문이라 부르고, 정북은 숙청이라 부르고, 정동은 흥인이라 하며 속칭으로 동대문이라 부르고, 정서는 돈의라 하며 속칭으로 신문(新門)이라 부르고, 동북은 혜화라 하며 속칭은 동소문이라 부르고, 서북은 창의라 하고, 동남은 광희라 하며 속칭으로 남소문이라 하고, 서남은 소덕이라 하며 속칭으로 서소문이라 부르고 또 수구문이 있어 이 양문으로 장사지낼 사람이 나간다.” - 『지봉유설』 중에서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점은 돈의문을 서대문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념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지켜지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독립신문》의 기사를 훑어보더라도 ‘새문밖’이니 ‘새문안’이니 하는 표현은 나오지만 ‘서대문’이라고 지칭한 구절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의 경우에도 ‘서대문정거장’을 일컬어 ‘새문밖정거장’이라고 적어놓은 사례를 흔히 발견하게 된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두 번 등장하긴 하지만 그 뒤 서대문은 우리의 기록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서대문’이라는 이름이 통용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편찬된 자료를 살펴보자.

‘돈의문을 조선인은 신문, 내지인은 서대문이라 부른다.’ - 『조선만록』, 마츠다 코(松田甲), 조선총독부, 1928.‘신문(新門) 즉 내지인(內地人)이 서대문이라 부르는 것은 이전에……’ - 『향토자료 경성오백년』, 경성부공립보통학교교원회, 1926.

이러한 자료에 근거해볼 때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이 돈의문을 서대문이라 칭하며 새로운 시설이나 지배기관이 들어서거나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족족 그들의 편의대로 서대문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면서 이러한 용법은 더욱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서대문구, 서대문역, 서대문경찰서, 서대문형무소 등 아직도 모든 것이 ‘서대문’이다. 심지어 경인선의 출발지였던 정거장(현 경찰청 맞은편 의주로공원 일대)까지 모두가 다 서대문으로 표기되고 또 그렇게 불리고 있다. 일제의 잔재가 지금까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서울 중구는 조선시대 청계천 이남에 위치해 있다 하여 남촌(南村)이라 부르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대거 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곳이다. 조선총독부, 조선헌병대, 조선신사, 경성신사 등 일본 시설이 주로 위치하였으며, 충무로나 명동 일대 또한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형성되었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청계천 이북 종로를 장악하고 있던 조선의 김두한이 청계천 이남 충무로를 장악하던 하야시와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떠올리면 쉽게 상상이 될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1943년 일제는 행정효율화를 위해 구제(舊制)를 실시하며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남촌에 조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중구(中區)라고 명명하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중구의 핵심이었던 혼마지(本情, 본정)는 충무로로 바뀌었는데 지역구의 명칭은 여전히 중구이다. 지금이라도 남대문구나 남산구 정도로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사직터널 - 70년대 말 전쟁위기를 상상하다: 홍난파 가옥을 지나 북쪽으로 조금 걸으면 이내 사직터널이 나오는데 그 위쪽으로 걸어 다닐 수 있다. 조선시대엔 터널이 없었을 것이고 이곳으로 성곽이 놓여 있었을 것이며, 도성이 처음 완성되었을 600여 년 전에는 돈의문이 처음 이곳에 건설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하지만 지금은 오래된 가옥들이 오밀조밀 들어선 동네일 뿐이다. 이곳은 인왕산 자락의 일부였기 때문에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걸어서 넘기가 꽤 힘든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1967년에 사직터널이 완공되어 서울시 최초의 차량터널이 되었다. 136미터에 이르는, 지금의 추세로는 작은 터널 축에 들지만 당시로서는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든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한편, 사직터널 위에서 바라보면 성곽 밖으로는 고가도로가 지나가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사직터널과 금화터널이 신호등 없이 연결되었다. 그리고 고가도로 바로 아래에 독립문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 고가도로 건설공사로 인하여 원래 위치를 떠나 서북쪽으로 약 70미터 옮겨져 현재의 독립공원 입구로 오게 되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홍구 교수의 다음과 같은 분석을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북한에 대하여 크게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1975년 호치민에 의하여 베트남이 공산국으로 통일되면서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박정희는 최악의 상태에 대비할 필요를 느꼈다. 그 결과 생각해낸 것이 청와대에서 김포공항까지 갈 수 있는 최단거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청와대, 사직터널, 금화터널, 성산대교, 김포공항을 잇는 대공사가 시작되었고, 금화터널과 성산대교의 공사 착공일 또한 똑같이 1977년 4월이 되었다. 결국 권력자의 안전을 위하여 독립문은 맨 처음 자신이 자리했던 위치를 잃게 된 셈이다.

두 번째 걸음 - 서대문 밖 이야기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 감옥 속에 비친 대한민국 역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독립공원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에 나 역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약 600년 전 한양 천도를 결정한 뒤 궁궐을 지을 곳을 찾던 무학대사는 이곳이 금계포란(金鷄抱卵,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 형의 명당이지만 3천 명의 홀아비가 탄식할 곳이라 포기했다는 그럴듯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런 이곳에 1908년 항일의병의 탄압을 위해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무학대사가 예상했던 감옥이 들어섰다. 그 후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으로 그 명칭이 바뀌어왔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1998년에 이르러 이곳은 새롭게 인권교육 학습장으로 재탄생되었다. 이곳을 거쳐 간 애국자가 약 4만여 명이며, 여기서 옥사한 사람만도 4백여 명이다. 하지만 본래 있던 건물의 3분의 2가량은 철거되었고 일부만 남아 있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항일과 반독재 투쟁의 현장인 이곳은 분명 민족과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줄 커다란 교육장이 될 만한 곳인데 너무도 쉽게 이런 역사현장을 없앤 것 아닌가.

일제강점기 외세에 의한 감옥이나 해방 후 대한민국 자체의 감옥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일제강점기 이곳은 독립운동가들이 주를 이뤄 수감되기도 했지만,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자들로 가득 찼었고, 전쟁 후에는 민주주의자들이 갇혀 있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거의 대부분 일제강점기의 감옥만을 재현해놓고 있어 아쉬움을 준다. 최근 일부 공간에서 해방 이후 조국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이들도 작은 규모로 전시 및 추모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감옥을 비롯하여 학교, 군대, 공장, 정신병원 등을 사회과학에서는 근대의 산물이라 일컫고 있다. 즉 근대국가가 성립되기 전에는 이러한 것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되거나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감옥의 특징은 우리 역사를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조선시대의 형벌제도를 생각할 때 대개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법집행과 고문 등을 연상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나름의 엄격한 법집행과 형벌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형법은 일반적으로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을 이용하는데, 『대명률』의 첫머리에는 태ㆍ장ㆍ도ㆍ류ㆍ사(笞ㆍ杖ㆍ徒ㆍ流ㆍ死)라는 다섯 가지의 형벌이 적혀 있다. ‘태형’과 ‘장형’은 죄인의 볼기를 치는 것에 따른 분류이고, ‘도형’은 관에 붙잡아두고 힘든 일을 시키는 것이며, ‘류형’은 유배 보내는 것, ‘사형’은 목숨을 끊는 것이다. 굳이 지금의 징역형과 유사하다고 볼 만한 것은 힘든 일을 시키는 도형이지만, 근대의 징역형과는 기본적 형벌의 개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자유형’이라는 형벌은 없었다. 즉, 징역형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감옥의 역할은 그저 수사나 재판절차를 밟고 있는 사람들을 잠시 가두어두는 것에 불과했다. 요즘 말로 일종의 유치장과 같다.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감옥을 전옥서(典獄署)라 불렀는데, 이곳은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에 있는 영풍문고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 1번 출구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일대는 의금부가 있던 자리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조상들은 재판이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해서 이곳의 동명을 ‘공평동’이라 지었다. 게다가 이것으로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바로 그 윗동네는 재판과정에서 그러한 공정성을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견지동’이라 지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법원과 검찰은 모두 서초동에 있다. ‘서초(瑞草)’란 이름은 그곳에 서리풀이 많다는 의미를 한자로 쓴 것이다. 서리풀이란 서리를 맞은 풀을 이른다. 요즘은 권력으로부터 서리를 맞아서 그런지 검찰청은 말할 것도 없고 사법부의 위상조차 그리 신뢰가 높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법조인들이 일해야 할 곳은 우리 조상이 이름 지어준 공평동이 더 적합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이곳을 간단히 돌아보며 우리의 인권 역사를 느껴보고자 한다. 제일 먼저 만나는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가면 이곳 체험의 핵심인 여러 옥사들이 나온다. 현재로서는 중앙사와 9, 10, 11, 12옥사만 남아 있다. 중앙사라는 곳에 서 있노라면 철학자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이야기하는 파놉티콘을 그대로 재현해놓았음을 보게 될 것이다. 파놉티콘은 보는 자의 시선은 철저히 가려진 채 보이는 자의 일거수일투족이 투시되는 장치다. 파놉티콘으로 감시당하는 죄수는 간수가 딴청을 피울 때조차도 ‘그가 나를 감시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24시간 연기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토록 무시무시한 감시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공작사, 한센병원, 추모비를 지나게 된다. 그리고 형무소에서 가장 극단의 공포를 던져주는 사형장이 담장에 둘러싸인 채 자리하고 있다. 이 사형장에는 두 그루의 미루나무가 있는데,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 바로 담장을 사이에 두고 안팎으로 식재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심어졌지만 두 나무의 크기는 현저히 다르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은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어찌할 바 몰라 마지막으로 이 나무를 붙잡고 눈물을 토해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사형장 바깥쪽의 이 나무를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사형장 안쪽에 심은 미루나무는 이렇게 죽어간 사람들의 억울한 한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일반범이든 정치범이든 자신의 죽음 앞에서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약 400여 명의 애국지사가 조국의 해방과 민주화를 위하여 이곳에서 죽어갔다고 생각하니 다시금 숙연해지는 마음을 넘어 비통함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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