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의 수상록
몽테뉴 지음 | 소울메이트
몽테뉴의 수상록
몽테뉴 지음
소울메이트 / 2015년 4월 / 204쪽 / 13,000원
1 늙음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모든 곳에서 죽음을 기꺼이 기다린다
매 순간 다가오는 죽음의 모든 모습을 상상해보자. 말이 발을 헛디딜 때, 기와가 떨어질 때, 아주 작은 핀에 찔렸을 때, 즉시 “그래, 이것이 바로 죽음의 모습일 수도 있었어.” 하고 되새기자.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힘쓰자. 축제와 환희의 순간에도 언제나 이 구절을 떠올리며 우리의 처지를 기억함으로써 즐거움에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하자. 가끔 우리는 이 구절을 떠올리지 못해 쾌락에 빠지곤 한다. 이로써 죽음의 표적이 되고 위협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연회와 같은 큰 잔치 도중에 망자의 마른 해골을 가져와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곤 했다. “매일이 그대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그 시간이 더 바랄 것 없이 유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죽음이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모든 곳에서 죽음을 기다리자.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은 곧 자유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죽는 법을 깨우치고 나면 반대로 죽음에 속절없이 당할 거라는 두려움을 잊게 된다. 죽음이 뭔지를 알면 모든 굴복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삶을 박탈당하는 것이 해악이 아님을 깨닫고 나면 삶에 해로운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삶을 사는 동시에 죽음을 산다
“이 세상에 들어갈 때처럼 나오라. 죽음에서 삶으로 두려움 없이 들어갔던 그 길이 삶에서 죽음으로 나오는 길이다.” 당신의 죽음은 만유(萬有) 질서의 한 조각이자 세계의 생의 한 조각이다.
“주자가 횃불을 넘겨주듯 사람들은 서로 생명을 내준다.”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원리를 어찌 그대를 위해 바꾸겠는가? 그대는 이같이 아름다운 원리를 통해 창조되었으며 죽음은 그대의 일부다. 죽음에서 도망하는 것은 곧 자신에게서 도망하는 것이다. 지금 누리는 그대의 존재 역시 죽음과 삶에 동시에 속해 있다. 태어난 첫날부터 그대는 삶을 사는 동시에 죽음을 사는 것이다.
죽음은 자연의 원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득(得)이 되는 것은 다른 이에게 실(失)이 된다. 하나의 예로 아테네의 데마데스가 자기 마을의 장의사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죄목은 그자가 많은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결이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희생을 치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없으며, 그렇게 따지면 모든 종류의 소득을 단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사꾼은 청년이 방탕할 때, 농부는 밀 가격이 비쌀 때, 건축가는 집이 무너졌을 때, 사법관은 소송과 분쟁이 있을 때 돈을 잘 번다. 성직자들 역시도 우리가 죽거나 악을 행할 때에야 존경을 받고 제 역할을 한다.
어느 고대 그리스 희극에서는 자기 친구들이 건강할 때 기뻐하는 의사 없고, 자기 마을이 평화로울 때 좋아하는 병사 없으며, 이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라 했다. 심지어 개개인이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일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싹트고 자라남을 발견할 것이다. 이 생각을 하다 보니 죽음이 자연의 원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학자들은 모든 것의 기원, 성장, 발달이 다른 것의 변질과 퇴화에 상응한다고 간주한다. “무언가 변하고 본성을 거스른다는 것은 이전에 존재하던 것의 죽음을 의미한다.”
내가 겪는 자연적 쇠퇴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내 얼굴과 눈은 내 상태를 단번에 드러낸다. 모든 변화가 거기에서 시작되며 실제보다 조금 더 강하게 표현된다. 나는 이유 없이 친구들의 동정심을 유발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나는 거울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도 아무 일 없이 안색이 좋지 않고 거동이 불편해 보이며 징조가 좋지 않았던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사들조차 그러한 외적 변화의 원인을 찾지 못해 정신적인 문제라고 말하며 내면의 은밀한 격정이 나를 좀먹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틀렸다. 내 몸이 내 영혼만큼 뜻대로 되었다면 나는 조금 더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내 영혼에는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만족과 기쁨으로 가득했다. 이는 성격 덕분이기도 했고 일정 부분 의도적이기도 했다.
내 몸이 수차례 무너질 때도 정신의 온기가 내 몸을 일으켜 세워주었던 것 같다. 그만큼 나의 정신은 쾌활하거나 혹은 평온하고 안정적이었다. 또한 4~5개월 동안 사일열을 앓았을 때 내 몸은 완전히 망가졌으나 정신만은 유쾌하게 유지되었다. 고통이 떠나가면 쇠약과 우울도 나를 그다지 슬프게 하지 않았다. 이름만 들어도 겁나는 육신의 질병이 무수히 많지만 나는 내가 실제로 겪는 수천 개의 격정과 정신의 동요가 더 두렵다. 그래서 나는 내가 겪는 자연적 쇠퇴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인생이 참나무의 수명만큼 길고 강하지 않다고 해서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2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긴다
춤을 출 때 춤만 추고, 잠을 잘 때 잠만 잔다
나는 춤을 출 때 춤만 춘다. 잠을 잘 때는 잠만 잔다. 그리고 아름다운 과수원을 홀로 거닐다가 잠시라도 딴 생각을 하게 되면 곧 내 생각을 바로잡아 다시 그 과수원에서의 산책으로, 그 고독의 감미로움으로 그리고 나에게로 돌려놓는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하는 행위들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도록 자연이 어미의 마음으로 그렇게 설정해두었다. 그리고 자연은 이성뿐만 아니라 욕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므로 자연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평소 자신의 일에만 골몰하는 카이사르와 알렉산드로스가 인간적이고 육체적인 즐거움도 충분히 향유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그것이 영혼을 흐트러뜨리는 일이 아니라 반대로 강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결단력을 단호히 발휘해 지독한 고민거리와 복잡한 생각을 일상의 습관에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명하게도 즐거움을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 여기며 그 외의 것을 오히려 예외로 간주했다.
본성은 저절로 자신을 드러내니 우리는 그저 운영할 따름이다. 본성은 모든 계층에 존재하며 장막이 없는 듯 뒤에서도 드러난다. 본인의 품행을 꾸밀 줄 아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책을 지은 사람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다. 휴식을 취할 줄 아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도시와 제국을 점령한 이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인간 최대의 걸작은 바로 온당하게 사는 인생이다. 통치하고 재산을 모으고 계획을 세우는 다른 모든 일들은 기껏해야 부수적이고 사소한 찌꺼기들일 뿐이다.
세간에 인간은 늘 미래의 일들에 얼이 빠져 있다고 비난하는 자들, 지나간 것들을 붙잡지 않았듯이 앞으로의 것들도 손에 쥘 생각이 없는 듯 그저 현재의 것들을 꽉 붙들고, 또 그 위에 자리 잡으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만약 본성에 따라 이끌려 간 결과들도 감히 오류라 칭한다면, 그자들은 인간의 가장 흔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정신보다는 행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거짓된 생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불행도 인간의 한 요소임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불행’의 부재일 뿐이다. 이것은 쾌락을 가장 예찬했던 철학 학파(에피쿠로스학파)가 행복을 괴로움의 부재라고 정의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엔니우스가 “불행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듯이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불행의 부재다.
일부 즐거움에서 느낄 수 있는, 단순한 건강과 무통(無痛) 이상의 것을 주는 듯한 흥분과 욕구는 곧 적극적 쾌락이다. 말하자면 변화무쌍하고 통렬하며 신랄한 이 적극적 쾌락은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진다. 바로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인을 향한 정열은 결국 고통을 뒤쫓게 하는데, 이 고통은 격렬하게 불타는 욕망을 일으킨다. 그리고 정열이라는, 이 적극적 쾌락은 오직 그 열기를 채우거나 잠재우거나 해소해줄 것을 요구한다. 다른 욕망도 마찬가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처지를 고려할 때, 단순함이 우리를 불행의 부재로 이끈다면 우리는 곧 굉장히 행복한 상태로 이끌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단순함이 무미할 정도로 둔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말자.
하지만 만약 에피쿠로스가 설파한 불행에 대한 무감각이 불행의 도래나 출현마저도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크란토르의 이에 대한 반박은 옳은 것이다. 나는 고통의 완전한 부재에는 동의하지 않는데,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내가 병에 걸리지 않았음에 만족하지만 설사 병들었다 하더라도 나의 상태에 대해 알고 싶고, 내 몸을 지지거나 도려내야 한다면 그 고통을 느끼고 싶다. 왜냐하면 아픔에 대한 인식을 없앤다는 것은 그와 동시에 쾌감에 대한 인식도 없애버리는 것이며, 나아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조건이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에 무감각해지려면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그 대가는 정신의 둔화와 육체의 마비다.” 불행도 인간의 한 요소다. 그러므로 항상 고통을 쫓아내고 쾌락을 좇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부유함과 궁핍함은 개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 부든, 명예든, 건강이든, 그것을 소유한 이가 부여한 의미 이상의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지니지 못한다. 본인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하다. 스스로의 확신이야말로 본질적이고 진실한 것이다.
운명은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하지 못한다. 단지 우리의 영혼에 재료와 씨앗을 주어 더욱 강해진 영혼이 원하는 대로 향하고 실행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자의만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유일한 근거이자 주권자다. 외부적인 성취는 내부적인 조직을 통해 맛과 색을 가진다. 우리가 옷을 입었을 때 몸에서 열이 나는 것은 옷 자체에 열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발산하는 열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몸을 차갑게 하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한기를 얻는다.
게으름뱅이에게는 공부가 고역이고 술주정뱅이에게는 금주가 고문이다. 음욕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수수한 삶이 형벌이고 허약하고 태만한 사람에게는 훈련이 고통스러운 일이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일은 그 자체로 괴롭거나 힘들지 않다. 우리의 약함과 비겁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일을 판단하려면 크고 위대한 정신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악함이 그 판단에 영향을 준다. 곧은 노(櫓)도 물 안에서는 굽어져 보인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사실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하다.
3 진짜 나답게 되는 법을 안다
남아 있는 인생만큼은 온전히 나를 위해 산다
타인을 위한 삶은 충분히 살았다. 이제 남아 있는 인생만큼은 자신을 위해 살자. 모든 생각과 의도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안위를 지향하게 하자. 확실한 자기만의 방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라 다른 일과 병행하기에는 다소 벅찰 수 있다. 하지만 신이 우리에게 떠날 겨를을 주었으니 채비하자.
짐을 꾸리고 직장에서 미리 휴가를 얻자. 그리고 다른 것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우리를 옭아매는 폭력적인 속박들을 풀어내자. 그 속박이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의무감에서 벗어나 이제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사랑하되, 오직 자신과만 혼인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것과 관계를 맺되 자신의 일부를 벗겨내거나 뜯어버리지 않고서는 그것과 분리될 수 없을 만큼 결합하거나 달라붙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이제는 우리가 사회에 기여할 것이 없으므로 사회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무언가를 빌려줄 수 없는 사람은 빌리지도 말아야 한다. 기력이 쇠하고 있으니 남은 힘은 안으로 끌어모아 자신을 위해서만 쓰자. 사람들은 쇠약해져가는 우리를 쓸모없고 불쾌하고 성가시게 여긴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까지 쓸모없고 성가시고 불쾌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보듬고 어루만지며, 무엇보다 본인의 이성과 의식을 스스로 통제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럽게 실족하지 않아야 한다.
“스스로를 충분히 존중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릴 때는 배워야 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숙달해야 하며, 나이가 들었을 때는 어떠한 의무도 없이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진정한 자유와 고독을 만끽한다
악(惡)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고 있을 때 영혼은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영혼을 되찾아 자기 안에 가두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고독이다. 도시 한가운데서나 궁정에서도 누릴 수 있는 고독이지만 홀로 떨어져 있을 때 더 만끽할 수 있다. 사람들과의 교제 없이 혼자 지내기로 작정한 이상 자신의 기쁨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과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고 자신에 대한 주도권을 잡아 완벽히 혼자서 마음대로 살도록 하자.
스틸폰은 마을의 화재 때문에 도망쳐 나오면서 아내와 자녀, 전 재산을 잃었다. 엄청난 재앙을 겪고도 당황한 기색이 없는 그를 본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가 그에게 아무런 손실도 없었는지 물었다. 스틸폰은 “천만다행으로 자기 것은 하나도 잃지 않았다.”라고 대답했다. 철학자 안티스테네스가 우스갯소리로 하던 “조난을 당해도 빠져나올 수 있게 물에 뜨는 비상식량을 준비해두어야 한다.”라는 말의 의미도 바로 이것이다.
분별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건사했다면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이 맞다. 외적이 침입해 폴린 주교가 살고 있던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잃고 포로가 되었으나 신에게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제가 이 상실을 느끼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그들이 제 소유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시련 속에서도 스틸폰이나 폴린 주교를 유복하게 해주었던 부와 선량하게 해주었던 선은 전부 그대로 있었다. 우리가 보물로 삼아야 할 것은 이렇게 약탈당할 걱정 없고, 발길 닿지 않는 곳에 숨겨두어 자기 자신 외에는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아내와 자녀, 재산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특히 건강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이 그것들에 좌우될 정도로까지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온전히 자신만의 은신처를 마련해 진정한 자유와 고독을 만끽해야 한다. 그 장소에서 매일 자신을 돌보며 외부의 교류나 소통이 전혀 접근하지 못할 만큼 철저히 은밀한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곳에서 아내나 자녀, 재산, 하인이 없는 사람처럼 웃고 떠들다 보면 실제로 그것들을 잃는 날이 왔을 때도 우리는 초연하게 견뎌낼 수 있다. 우리 영혼은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릴 줄 알기 때문에 우리의 착실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우리 영혼은 공격하거나 방어할 능력, 주고받는 능력도 있다. 그러므로 고독할 때 지루한 무위에 빠져버릴까 염려하지 말자. “고독 한복판에서 스스로 군중이 되어라.”
상대방의 판단이 아니라 내 판단을 믿는다
몇몇 친구들은 이따금씩 허심탄회하게 나를 비판하고 나무란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럴 때도 있지만 내가 부탁할 때도 있다. 그러면 친구들은 제대로 된 영혼을 위해 유익하고 친절한 우정으로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그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정중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늘에야 말하자면 나는 그들의 찬사와 비판이 다소 부적절하다고 느꼈으며, 그들이 잘되라고 말해준 대로 하는 것보다 내가 잘 안 되려고 마음먹은 대로 하는 편이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내면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의 시금석이 될 내면의 기준을 세워, 이에 따라 때로는 자신을 칭찬하고 때로는 비난해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나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위해 나만의 법규와 법원을 두고 그곳에 나 자신을 제소한다. 다른 이들의 기준으로 내 행위를 제한하면서도 나의 기준으로 내 행위들을 펼친다. 그대가 비겁하고 잔인한지, 충직하고 신실한지는 그대 자신밖에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불확실한 추측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대의 기교를 볼 뿐, 본성은 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판단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판단을 믿으라.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것을 없애버리면 이 땅의 무엇과도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