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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혼란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 에코리브르



마음의 혼란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에코리브르 / 2015년 4월 / 400쪽 / 17,800원





해 질 녘이면 나타나는 이미지 : 보네 증후군

1759년 봄, 제네바. 은퇴한 치안판사 샤를 륄랭은 장시간의 구술 작업을 위해 비서를 불렀다. 그는 나이가 지긋하고(거의 90세였다) 시력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1753년 10월에는 왼쪽 눈에 백내장 수술을 했다. 1756년 9월까지는 볼록렌즈의 도움으로 볼 수 있었지만 이젠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오른쪽 눈도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읽고 쓸 정도로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약간의 시력이 남아 있긴 했다. 륄랭은 자신이 지금부터 기록하려는 특이한 경험은 시력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확신했다.

1758년 2월, 이상한 물체들이 시야에 떠다니기 시작했다. 시작은 파란 손수건을 닮은 어떤 것이었다. 모서리마다 노란 동그라미가 있고, 크기는 파이브즈(fives) 공만 했다. 손수건은 눈의 움직임을 따라다녀서 벽, 침대 등 무엇을 쳐다보건 방 안에 있는 사물을 가렸다. 륄랭의 정신은 완벽하게 또렷했고, 단 한 번도 진짜로 파란 손수건이 떠다닌다고 믿은 적은 없었다. 또 그 이미지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다. 그냥 눈을 오른쪽으로 움직이기만 하면 다시 방 안의 익숙한 사물들이 보였다.

손수건만 보인 게 아니었다. 8월 어느 날, 손녀 둘이 들렀다. 륄랭은 안락의자에 앉고, 손녀들은 오른쪽에 있었다. 그런데 왼쪽에서 청년 2명이 나타났다. “같이 온 청년들이 정말 잘생겼구나! 함께 온다고 말하지 그랬니?” 그러나 손녀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청년의 이미지는 손수건처럼 몇 분 안에 흩어졌다. 다음 몇 주 동안 그들 말고도 더 많은 가상의 방문객이 등장했는데 모두 여자였다. 하루는 하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두 숙녀가 뒤따라 들어왔다. “같이 온 숙녀분들은 누구신가?” “죄송합니다, 어르신. 여긴 아무도 없는데요.” 그 숙녀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륄랭은 자신이 본 이미지의 다양함에 놀랐다. 어떤 때는 한 무리의 얼룩이 갑자기 비둘기 떼로 변하고, 어떤 때는 춤추는 나비 떼로 변하기도 했다. 시내로 산책을 가는 길에 엄청나게 큰 가설물을 신기하게 쳐다보느라 걸음을 멈추었는데, 집에 도착해 보니 똑같은 게 거실에도 있었다. 이번에는 30센티미터 높이도 안 되는 미니어처였다. 륄랭은 이미지의 크기와 관련해 실험을 해보았다. 집에서 100걸음쯤 떨어진 곳에 분수대를 갖춘 작은 광장이 있었다. 그는 분수대 옆에서 파란 손수건을 보면 큰 식탁보 크기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식사하는 동안 식탁을 배경으로 그걸 보면 엄지손톱만 했다.

‘가장 놀라운 사례’: 이러한 경험은 커다란 공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5개나 되는 서명이 이 문건이 진짜라는 걸 증명한다. 첫 번째 서명은 륄랭 자신의 것이고, 나머지 서명은 비서, 그걸 읽은 독자 한 명, 주치의 그리고 륄랭의 손자 샤를 보네의 것인데, 마지막으로 서명한 사람이 훗날 보네 증후군으로 알려질 현상의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륄랭은 “이 위대한 동물학자 겸 자연과학자”인 보네가 시키는 대로 자신의 경험을 그토록 자세히 기록한 것이라고 썼다.

샤를 보네는 1572년 일어난 ‘생바르텔르미 축일 대학살’ 이후 스위스로 도주한 프랑스 신교도 집안에서 1720년에 태어났다. 7세 때 학교에 입학한 보네는 청력이 안 좋아 놀림을 당하자 자퇴서를 냈다. 그때부터 집에서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1743년에는 런던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몇 년 뒤에는 골똘히 사물을 쳐다보면 통증이 찾아오는 안과 질환에 걸렸다. 그러다 백내장까지 생겨서 결국 거의 읽거나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지적 호기심은 시각적인 제약의 지배를 받아, 심리학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형이상학으로 옮겨갔으며, 그 결과를 《우주에 관한 명상》이란 제목의 900쪽짜리 원고로 집대성했으나 발간하지는 못했다. 보네는 1793년 사망했다.

보네의 조각상: 정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생물체의 작용이 있다. 이를테면 각각의 인지에 대해서는 감각적 자극이, 각각의 감정에 대해서는 신체의 동요가, 각각의 기억에 대해서는 뇌 속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심리적 및 생리적 과정 사이의 정확한 매칭은 보네의 할아버지가 이미지들을 봤을 때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네는 그 원인은 분명 “시각기관과 연결된 뇌의 그 부위”에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백내장 수술 이후 재발한 시력 감퇴가 기질적 변화를 일으키고, 이러한 변화가 정상적인 상황에서 정신에 이미지를 전송하는 다양한 신경을 ‘안에서부터’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시각에 변화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보네는 말한다.

이와 동시에 만약 판단력을 지원하는 신경이 “여전히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다면, 정신은 그 이미지를 실제와 혼동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현대의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외부 자극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눈과 뇌 사이의 경로를 따라 있는 어딘가의 시신경을 활성화시키는 신경 조직에서 이런 과정이 발생한다. 보네는 심리적 현상의 원인을 “특정한 신경들의 일종의 흥분” 탓으로 돌린다.

이름 - 세례 문서: ‘보네 증후군’이라는 용어는 1936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드 모르시에라는 제네바의 신경학자는 《주간 스위스연방 의학》에 환시에 관한 짧은 가시를 게재했다. 이 기사는 여섯 건의 사례를 바탕으로 환각의 유형을 분류하고 그것을 뇌 손상, 안과 질환, 뇌종양, 정신병 같은 다양한 조건과 연결시켰다. 그중 다섯 번째 사례는 R 부인(74세)의 것이었는데, R 부인은 한쪽 눈엔 녹내장을, 다른 쪽 눈엔 백내장을 앓았고, 약 1년간 R 부인은 색깔과 크기가 모두 정상인 사람의 형상을 비롯해 주로 줄지어 걸어가는 아이와 동물 무리를 ‘보아왔다’고 서술한다. 그런데 당시 그 도시의 역사를 꿰고 있던 드 모르시에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제네바에서 주로 연구해온 한 가지 증후군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또 기사 끝부분에서 그는 이런 종류의 환각에 ‘보네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30년이 넘게 지난 후, 드 모르시에는 환시라는 주제를 다시 꺼냈는데, 이 글의 첫 문장에서 그는 1936년 자신이 다른 뇌 기능은 여전히 훼손되지 않은 노인들의 환시를 ‘보네 증후군’이라 부를 것을 제안했다고 썼다. 이어서 그 후 이 증후군은 정신의학자들에게서 완전히 잊혔는데, 그 까닭은 문제의 노인들이 어떤 신경과적 또는 정신과적 증상을 보이지도 않았고, 따라서 대개 정신요양원이나 병원에 입원하지 않으려 한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고 썼다.

보네 증후군에 초점을 맞춘 논문의 수가 증가세를 보인 것은 고작 지난 10~15년 동안의 일인데, 드 모르시에에 따르면 이는 끔찍한 혼란을 가져왔다. 많은 저자들이 그 명칭을 너무나 상이한 질병에 갖다 붙이는 바람에 원래의 정의가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눈병이 있는 젊은이들에게 보네 증후군을 앓는다고 하는 연구자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의사들은 시각적 환영을 보는 노인 환자에게 그가 다른 정신병이나 신경증을 앓고 있을 때조차도 그 이름을 갖다 붙인다.

전문 용어와 관련해서도 통일성이 없다. 이미지는 ‘유령 이미지’, ‘시각적 망상’처럼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리고 소형화는 ‘걸리버 환각’이나 ‘소인국 이미지’로, 연장화(elongation)는 ‘거인국 이미지’라고 부르곤 한다. 전문적으로는 소시증(microspy)과 대시증(macrospy)으로 알려진 이 용어들은 간질 발작 초기나 중증 편두통 중에도 일어날 수 있는 왜곡을 가리킨다. ‘거짓 환각’ 같은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다른 연구자들이 이의를 제기해왔다. 환각이란 그 사람이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진짜라고 정말 믿는다는 것인데, 보네의 이미지와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환각은 말 그대로 가상인데, ‘거짓’이라는 접두사를 추가해 가뜩이나 베일 속에 가려진 용어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보네 자신을 포함해) 어떤 저자들은 중립적인 용어인 ‘비전’을 선호한다. 가장 확실한 선택은 단순하게 ‘보네 이미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는 전문적인 문헌에서 보이지 않는다.

눈과 뇌: 보네 증후군에 대해 제기된 설명은 거의 이미지 자체만큼이나 다양하다. 특히 독창적인 가설 하나는 소인국 이미지를 회귀의 결과로 보는 견해다. 환자들이 보는 사람 이미지가 동화책 속 등장인물처럼 어린이 크기이고, 모든 사물이 장난감처럼 편리한 규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시증도 보네 이미지에서 소시증만큼이나 흔히 나타난다. 그리고 이 가설은 ‘자기상 환시’ 같은 현상도 설명하지 못한다. 참고로 정신분석학에서 영감을 받은 저자 플린은 환자의 나빠진 시력이 인식 가능한 실재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킴으로써 자기가 상상해 만들어낸 것들에 자리를 내어준다고 썼다.

지난 30년 동안 나온 가설들의 공통점은 그 원인을 신경생리학 영역 어딘가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어디서 이미지가 생겨나는지, 곧 눈인지 아니면 뇌인지에 대해서만 의견을 달리한다. 대부분의 경우 보네증후군은 양쪽 눈의 손상을 동반하는데, 그 손상의 원인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참고로 백내장, 녹내장, 감염, 망막 출혈, 망막 박리 같은 질환은 모두 왜곡된 지각을 초래할 수 있다. 사물이 흉측하게 변형될 수 있으며(빛 한 점이 여러 개로 증식하거나 윤곽선이 네다섯 개의 평행선으로 두드러진다), 형형색색의 오라(aura)가 밝은 지점을 둘러싸거나 무정형의 얼룩들이 무리를 이루다가 달아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한편 내과 의사 호로비츠는 환시가 눈과 뇌 사이의 ‘협상 과정’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 과정을 통해 “눈은 뇌에 자기가 무엇을 보는지 말하고, 뇌는 눈에 무엇을 찾아봐야 할지, 눈이 봐온 것 중에서 계속 보고 있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보네 이미지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이후 두고두고 반복적으로 그것과 연결된다. 요컨대 그는 보네 증후군은 과도하게 자유로운 뇌의 연상인 눈이 전달한 심각하게 왜곡된 정보와 만난 결과라고 말했다.

그리고 ‘감각 차단’ 가설에 따르면, 보네 이미지의 원인은 장기간 계속된 뇌의 자극 부족에 있다. 참고로 극히 단조로운 자극은 환각을 초래할 수 있다고 오래전부터 알려졌는데, 이런 현상은 북극 탐험가와 단독 항해사는 물론이고 독방에 감금된 수감자를 통해 보고되었다. 감각 차단에 초점을 맞춘 연구에 따르면 그것은 실험실 환경 속에서도 재현되는데, 실험 결과, 감각을 봉쇄하거나 혹은 똑같은 자극에 몇 번이고 노출시켜 감각을 ‘마취시킨다’ 해도 뇌의 처리 활동을 완전히 정지 상태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얼마 후 뇌의 활동은 외부에서 오는 것 같은 소리나 이미지 또는 촉각 등의 감각을 생산하기 시작하며, 그런 이유 때문에 진짜 자극을 구별하기 어렵다.

극장으로서 뇌: 1902년 플루르노이는 이 증후군에 대한 원인을 찾는 것과 관련해 자신과 동료들은 1760년의 보네보다 한 발짝도 못 나아갔다고 썼다. 그로부터 100년이 흘러 퇴니서는 자신의 논문 말미에서 보네 증후군은 여전히 대부분 수수께끼라고 결론지었다. 보네 이미지가 발생하는 눈과 뇌 사이의 궤도상 정확한 지점과 관련해 합의된 것도 없으며, 어떤 요인이 혹은 요인의 조합이 그런 이미지를 발생시키는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원인이나 매개 또는 촉진 요인을 풀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리고 이 증후군의 기준도 규정되지 않았다. 드 모르시에에게 고령은 증후군의 정의에서 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퇴니서는 환자들의 많은 나이는 상관관계가 있는 요인 중 하나였지만, 이런 관점은 젊은이들 또한 보네 이미지를 경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뒀다. 지금껏 제기된 모든 설명은 자체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현재 보네 증후군에 관한 거대 이론은 없다. 정신의학이나 신경학에도, 안과학이나 지각심리학에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완전히 빈손으로 남겨두는 것은 아니다. 미래 연구가 지향할 방향을 시사하는 아주 흥미로운 부수적 결론이 있다. 시각연합피질에 손상을 입은 한 환자가 유사 보네 이미지를 보는 것으로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즉 1931년 V19(시각연합피질의 일부)로 알려진 부위에 전기 자극을 가하자 보네 이미지가 나타났는데, 언제든 이런 이미지는 아주 순식간일지라도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이나 양전자방사단층촬영(PET scan) 형태의 영상공학 손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되면 원인 부위에 대한 위치 추적이 가능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대집단의 상관성 연구를 통해서는 새로운 요인을 향한 길을 터주는 연관 관계를 밝혀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퇴니서가 기록한 외향적 행동에 대한 낮은 점수는 뇌의 활성화 수준과 개연성 있는 연결 고리를 암시한다. 참고로 외향적인 사람은 내향적인 사람보다 약간 낮은 활성화 수준을 갖고 있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알려졌다. 이러한 발견은 직관에는 약간 반대되지만 흔히 제시하는 설명에 따르면, 외향적인 사람은 별도의 신경 자극을 더 추구하기 때문에 매우 외부지향적이라고 한다.

좀더 간단히 말해서, 내향적인 사람의 뇌는 본래 충분히 활발한 반면, 외향적인 사람의 뇌는 외부의 자극을 필요로 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보네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높은 활성화 수준에 익숙해진 내향적인 뇌에서 형체를 갖춘다. 그리고 극단적인 상황에서(시각적 자극이 거의 사라졌을 때) 뇌는 자기 고유의 자원, 다시 말해 상상력과 기억력 그리고 이 둘의 결합에 의존해 이미지를 하나씩 소환하고 점검하는 타고난 장기를 발휘한다. 이는 샤를 보네를 기쁘게 할 만한 생각이다. “그의 정신은 이미지들과 함께 즐겁게 노닌다.” 1760년 보네는 할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의 뇌는 극장이다. 예고 없이 찾아왔기에 더욱 경이로운 공연이 그 안에서 무대장치 위에 올려진다.”



매듭들의 미로 : 알츠하이머병

1901년 11월 26일, 알로이스 알츠하이머는 자신의 새 환자와 대화를 나눈다. 의무 차트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침대에 앉아 있음. 제정신이 아닌 표정.” 그는 그녀에게 묻는다. “이름이 뭐예요?” - “아우구스테.” “성은 뭐예요?” - “아우구스테.” “남편의 이름은요?” - “아우구스테인 것 같아요.” “결혼하셨어요?” - “아우구스테하고요.” 이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냐고 묻자 그녀는 “3주”라고 말한다. 그는 연필, 펜, 열쇠, 담배 등 다양한 물건을 그녀에게 보여준다. 그녀는 그것들을 잘 식별할 수 있지만, 잠시 후 물건을 보여주지 않은 채 이름을 대보라고 하자 전부 까먹는다. 점심 식사(콜리플라워와 돼지고기)가 도착하자 그는 무얼 먹고 있냐고 묻는다. “시금치요.” 그는 ‘아우구스테 데터 부인’이라고 써보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부인’이라고 적더니 뒤에 뭘 쓰려 했는지 잊어버린다.

이틀 뒤 알츠하이머는 그녀의 차트에 이렇게 적는다. “언제나 제정신 아님, 불안해 보임.” 하루 뒤에는 “제정신 아님. 모든 것에 저항함”이라고 적는다. 아우구스테는 5년을 그 병원에서 지낸다. 죽기 직전까지 멍한 정신으로,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고 두 다리를 들어 올린 채 알츠하이머가 “완전한 정신 박약”이라고 표현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지냈다. 아우구스테는 1906년 봄 사망했다. 알츠하이머는 그녀의 뇌를 잘라낸 절편에서 오늘날 알츠하이머병이라고 알려진 것의 특징인 조직 이상을 발견했다.

알츠하이머, 신경병리학자: 알로이스 알츠하이머는 1864년 독일에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등학교를 마친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집에서 가까운 뷔르츠부르크 대학을 지망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알로이스보다 훨씬 야망이 커서 아들을 의학의 메카인 베를린 대학으로 보냈다. 그러나 한 학기 뒤에 알츠하이머는 가방을 싸서 뷔르츠부르크로 떠났다. 알츠하이머가 의학 공부를 진지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은 1884년에서 1885년으로 이어지는 겨울 학기 때였다. 그는 법정신의학과 미세 조직 연구에 마음이 끌렸다. 이후 1888년 후반 알츠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정신병자와 간질 환자를 위한 병원’의 수련의 자리에 지원했다. 병원 관리자이던 에밀 시올리는 전보를 보내 알츠하이머가 수련의에 합격했음을 통보했다. 알츠하이머는 시올리와 죽이 잘 맞았다. 그들은 독방 감금이나 구속복 같은 어떤 형식의 강압도 없는 환자 관리 방식을 도입하기 위해 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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