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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꼭 읽어야 할 서양고전

윤은주 지음 | 소울메이트



살아가면서 꼭 읽어야 할 서양고전

윤은주 지음

소울메이트 / 2015년 2월 / 332쪽 / 15,000원





정치에 대한 가르침



거대한 괴물의 손에 맡겨진 정치: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정치, 참으로 복잡하고 부담스럽고: 4년, 혹은 5년마다 열리는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들은 각자의 기량을 펼치느라 땀을 흘리고 유권자들은 품평회를 하느라 이 말 저 말을 쏟아내며, 좋든 나쁘든 선거를 즐긴다. 후보자들은 그간의 공적은 뒤로한 채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미래 계획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그 대가로 당선의 타이틀을 거머쥔다. 당선만 되면 목에 핏대 세우고 떠들던 공약(公約)들을 공약(空約)으로 만들고, 정치가 그렇게 인식되고 선거가 물들어간다. 우리는 정치는 사기꾼들의 놀음이고 선거는 부정부패의 온상이라고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포기한다. 하지만 정치를 모두 부정적으로 본다면, 정치를 때려치우고 살아야 할 텐데, 그래도 사람들은 정치에서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을 찾으려고 한다. 사람은 어찌 되었든 모여 살아야 하고, 모여 살자면 누군가 지도자의 자리에서 다수의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니 정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도자가 왜 필요한지, 그에게 어떤 권한을 주어야 할지, 우리는 얼마나 그를 따라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정치, 그것 참 복잡하고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피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리바이어던, 괴물이 지도자로: 그런데 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일까? 지도자에게 어떤 권한이 있어 국민들이 그를 따르는 것일까? 이 이야기는 사회계약론이라는 지배와 피지배, 군주와 군민, 지도자와 백성의 구도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사회계약론이라니, 도대체 무엇을 계약한다는 말인가? 사회계약론 하면 떠오르는 사상가가 두 명 있다. 하나는 『리바이어던』을 쓴 홉스고, 다른 하나는 『사회계약론』을 쓴 루소다. 두 사상가는 모두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다시 말해서 지도자와 구성원 사이의 계약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물론 그 출발은 조금 다르다. 사회계약을 통해 홉스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자연 상태에서 탈출하려는 것이고, 루소는 모두가 평화로웠던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여기서 홉스와 루소를 모두 다루면 좋겠지만, 일단 루소는 뒤로 미뤄두고 홉스가 말하는 지도자와 구성원 사이에서 계약자인 갑과 피계약자인 을이 도대체 무슨 계약을 맺었는지 확인해보자.

지도자는 구성원들의 생명과 재산권을 보호하고 그들이 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며, 구성원은 지도자에게 보호를 받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는 사회계약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론이 바로 『리바이어던』이다. 더구나 여전히 종교의 그늘 아래 놓여 있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해 진정한 기독교 국가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하려는 홉스의 종교적 신념 또한 담겨져 있다. 따라서 『리바이어던』은 철학적 사유의 개념화이자 지도자와 구성원의 정치적 관계에 대한 정당화로, 혹은 기독교 국가로 이끄는 보편적이고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절대군주를 상정하는 1인 독재, 혹은 전체를 위해 개인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전체주의와 같은 오도된 정치 이념으로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단정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홉스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세계를 기준으로 세울 만한 잣대를 제공하려고 무던히 애쓴 사상가다. 정치란 머리 아픈 권력싸움이나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몇몇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합리적으로 국가를 유지해나가기 위한 정치철학적 방법론이라고 『리바이어던』은 말하고 있다.

원래 ‘리바이어던(leviathan)’은 구약성서 「욥기」 41~42장에 나오는 괴물로 입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오고, 칼이나 창으로 찔러도 소용없고, 돌처럼 단단한 심장을 가진 영웅조차 공포에 떨게 만드는 존재다. ‘땅 위에 그와 같은 것이 없으니 그것은 무서움을 모르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높은 자들을 모두 내려다보니 그것은 모든 오만한 자들 위에 군림하는 임금’이다. 이처럼 리바이어던은 그저 공포의 괴물신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가 뿜어내는 공포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그의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이 어찌 두려움만으로 지속되겠는가? 마키아벨리는 우둔한 백성들을 잘 다스리려면 당근도 주어야 하지만 채찍이 필요하고, 그 채찍은 소소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강력해야 한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아주 강하게 보여주는 공포야말로 백성들이 군말 없이 군주를 따르게 하는 약이라고 말이다. 잔인한 거열형이 마을 광장에서 축제처럼 벌어졌던 것은 공포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군주가 백성들을 지배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할까? 오히려 그러한 공포스러운 퍼포먼스는 반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만약 홉스가 그 두려움을 무기 삼아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권력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리바이어던』을 썼다면, 21세기에는 터무니없이 문제만 일으키는 책이 되어 서점 구석 어딘가에 먼지를 푹 뒤집어쓰고 버려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20세기를 물들였던 전체주의의 그늘이 세상에 내놓은 절대 권력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불을 뿜어대는 성서의 리바이어던처럼 공포를 통해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 괴물들이었다. 일각에서 홉스를 1인 독재를 지지하는 절대 권력 숭배자로 보고 있으나 그가 생각하는 권력의 집중체로서의 군주는 결코 성서 속의 리바이어던이 아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사회 구성원들을 억압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하려는 독재자가 아니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거대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공포의 외투를 뒤집어쓴 독재자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 의지의 집합체로서 권리 대행자이자 대표자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모든 권리를 양도해준 사회구성원들을 보호해주는 거대한 방패,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무한히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울타리다. 방패이자 울타리, 그것이 바로 홉스가 말하고자 하는 리바이어던이다.

리바이어던은 왜 필요한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험한 세상을 혼자 살기에는 벅차다.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일을 해서 얻은 것을 지키지 않으면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문제는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치는데 그것을 지키는 일까지도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대신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무에게나 맡길 수도 없다. 적당한 보수를 주고 맡긴다 하더라도 더 좋은 보수를 주려는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마음을 바꿔먹을 수 있다. 더구나 자신보다 힘센 사람이 나타나 빼앗으려 한다면 고스란히 다 내줘야 할 판이다.

홉스는 본래의 세상, 자연 상태를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통용되는 아마존 정글이라고 보았다. 지독한 먹이 사슬에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 말이다. 진정으로 힘이 강한 자가 전체를 아우르며 다스리지 않는다면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결국 혼자만 남게 될 것이고, 혼자서는 세상을 유지할 수 없으니 결국 모두가 전멸하게 된다. 그래서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그들 모두를 위압하는 공통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이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다.” 그 유명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다. 자기 것 지키겠다고 서로 싸우면 결국 최종 승자가 남긴 하겠지만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진대 혼자 살아남아 무엇하겠는가? 더구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 싸우면 결국 제 것도 남의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될 것이며 종국에는 전멸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홉스는 이런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을 생각했다. ‘세상 질서를 정리해 사람들이 적절하게 욕구를 분출할 수 있도록 무언가를 만들면 되겠다.’ 다시 말해서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자 한다면, 어떤 강력하고 강제적인 힘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리바이어던이며 절대군주다.

그렇다면 절대군주인 리바이어던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 대가로 그에게 무엇을 주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생명과 재산을 욕심내지 않고 지켜줄 보호자다. 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수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줄 수 있다. 그 대가는 바로 권리다. 정치 공동체에서 우리 모두가 동등하게 가지고 있어서 대가로 지불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적 권리다. 내 권리를 그에게 이양하는 대신 그는 그 권리를 발휘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하고 사람들을 전쟁에서 구하는 수호자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권리 이외에 나의 사적 재산이나 생명을 따로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상호 신뢰가 바탕이 된다. 그런 점에서 홉스는 “어떤 강제적 힘이 존재해야 한다. 이 강제력이 하는 일은 신의계약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도 더 큰 처벌의 공포를 통하여 신의계약 당사자 쌍방이 각각의 채무를 이행하도록 평등하게 강제하고, 그들이 보편적 권리를 포기한 대가로 상호계약에 의해 소유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리바이어던은 정치 공동체 구성원들의 보편적 권리로 무장한 절대 권력자다. 이 권력을 확립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람의 의지를 다수결에 의해 하나의 의지로 결집하는 것, 즉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혹은 하나의 합의체에 양도하는 것이다. 계약에 의해 양도된 권리를 하나로 모음으로써 그 하나는 절대적 권력을 가지게 되며, 이러한 절대 권력의 행사, 즉 홉스가 말하는 리바이어던이 탄생하는 것이다.

올바른 정치꾼, 리바이어던: 문제는 절대 권력을 가지게 되면 욕심이 과해진다는 데 있다. 아무리 신의계약이라 하더라도 절제의 덕목을 잃어버리고 욕심에 좌지우지되면 군주는 계약과 달리 사회 구성원들을 괴롭히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자신의 힘을 쓰게 될 것이다. 신뢰와 선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계약이 폭력적인 정치권력으로 변질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혹은 우리를 대표해 선출된 국회의원이 처음부터 부정부패를 즐기는 이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에게 모든 권리를 양도해준 사회 구성원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이 정치공동체 내에서 그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평화로운 환경을 만들어줄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사람들은 정치인들에게 자신의 평등한 권리를 양도한 것이지, 당리당략을 위해 권력싸움을 하고 자신의 이권을 챙기라고 길을 터준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 때가 다가오면 모두들 민심 챙기기에 바쁘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민심은 뒷전이고 그동안 비어 있던 자신의 곳간을 채우고 지인들의 이권을 챙기기에 바쁘다.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정치를 맡겼는지 그 이유는 잊어버린 채 말이다. 이 과정의 악순환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이양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정치는 나랑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무관심으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는다.

홉스는 “통치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기만 하면, 권력은 모두 같은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리바이어던에게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맡겼다. 정치인들의 손이 수많은 이들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정치인들의 어깨에 놓인 책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우리의 바람은 누가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든 그들을 대표로 뽑아준 우리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며 올바르게 권력을 사용할 줄 아는 리바이어던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리바이어던이 괴물신이어도 공포에 두려워 마음 졸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하게 마음 편히 살지 않을까 싶다.



앎에 대한 가르침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

제 이름을 갖지 못한 들풀이어도: 어떤 사람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하게 사는가 하면 누군가는 제 이름조차 밝히지 못한 채 음지에서 겨우 숨만 쉬면서 살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누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권력자들의 고통스러운 억눌림에 힘겹게 살기도 한다.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많은 사람들 중의 소수다. 세상은 제 이름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과 민중이나 대중이란 집단적 명칭으로 뭉뚱그려 언급되는 다수의 사람들로 채워진다. 그렇게 보면 세상은 소수와 다수가 모두 있어야만 가능한 것인데, 모든 시선은 그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모여든다. 그들만이 역사를 만들고 세상을 발전시키며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영웅이고 지도자이며 없어서는 안 될 위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플라톤에게 대중이란 위대한 현자인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나 구형하는 우둔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우둔한 대중들을 이끌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이성적 활동을 통해 지혜와 정의를 구하고자 한 철학자들로 하여금 정치를 하게 하는, 철인왕 정치를 주장했다. 또한 마키아벨리에게 민중이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는 쉽게 현혹되지만, 해가 되는 것에는 쉽게 등을 돌리는 나약한 의지의 소유자이며 자신들을 이끄는 지도자를 쉽게 따르지만 쉽게 배반하기도 하는 다수의 무리였다. 그래서 변덕스러운 대중을 지배하기 위해서 군주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켄타우로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론 권모술수와 기만을, 때론 진실된 정치로 선과 악을 모두 시행하는 강력한 존재로서의 군주만이 민중들을 복종시키고 다스릴 수 있다고 여겼다.

플라톤의 철인왕 정치든 마키아벨리의 켄타우로스 같은 강력한 군주정이든 다스리는 자 밑에는 다스림을 받는 역할을 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그렇게 사회는 지배자로서의 군주와 피지배자로서의 민중이나 대중들의 손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그렇다면 피지배자로서의 민중이나 대중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이야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그저 어리석은 판단만 하는 우민인지, 아니면 마키아벨리가 말한 것처럼 이익만 쫓는 지조 없는 변덕쟁이인지 한번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 길에 한 권의 책이 놓여 있다. 역사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이 그것이다.

똑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다: 18세기 종이의 보급과 인쇄술의 발달로 보급형 문고들이 등장하면서, 또는 근대 자유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선천적 신분제에서 벗어나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식이 등장하면서 대중 사회가 등장했다고들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대중은 이전까지는 없다가 시대적 변화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집단처럼 보인다.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집단의 등장이 가능할까? 아마도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집단을 꾸리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다수의 무리는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군중 혹은 대중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과거에도 있긴 했지만 그때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을 뿐이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군중’은 한곳에 모인 다수의 무리인 반면, ‘대중’은 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사람이다. 의미만 놓고 보자면 군중은 원시 노예제 사회에도 있었고 21세기 서울 한복판에도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대중은 조건이 붙는다. 즉 다수가 모였다는 것만으로는 성립되지 않고 현대 산업사회라는 시대적 배경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대중은 노동하는 사람으로 전환되는데,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대중을 노동대중으로 한정해 내용을 전개하지 않는다. 그러니 대중을 군중과 노동자의 교집합 정도로 보도록 하자. 그렇게 하면 대중의 역할, 혹은 반란의 의미는 폭넓은 외연을 갖게 되고 보수니 진보니 하는 영역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와 과학 실증주의 그리고 산업 자본주의라는 세 원리가 작동하는 20세기 이후 대중은 신분적으로는 선천적 종속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시민이었지만, 그럼에도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지배를 받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집에서 태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장기에 어떤 환경에서 얼마큼의 교육을 받았느냐가 미래를 결정하는, 나름 자유로운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불평등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달라진 바는 없다. 이제 신분적이든 원칙적이든 일단 합법적으로 자유민이 된 다수의 대중에게 확고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하는 역사적 의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동안 능동적 삶보다는 수동적 삶에 익숙해 있던 대중에게 갑자기 자유를 줄 테니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아보라고 하는 것은 파도가 꽤 높은 바닷가에 5살 어린아이를 보모 없이 풀어놓는 것처럼 불안하다. 그만큼 신나게 놀 수도 있지만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그래서 쉬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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