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
리처드 솅크먼 지음 | 인물과사상사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
리처드 솅크먼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5년 3월 / 288쪽 / 14,000원
국민 신화와 마주하기
우리는 종종 정치인들의 멍청한 말과 행동을 화제에 올리면서 국민으로서 우리의 우월감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멍청해도 정치인을 조롱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가 그들이 아니라 우리에게(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중 자주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이들에게)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직설적으로 말해서, 유권자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깊이 조사해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우리가 비겁했다고 생각한다.
9ㆍ11 사태 이후, 새로운 생각이 절실히 필요했던 그 시기에도 우리 사회는 대중의 지혜가 가진 한계와 그 엄연한 진실을 대면하지 않았다. 전 세계 곳곳에 민주주의를 퍼뜨리느라 분주했던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결점을 용기 있게 숙고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 우리는 우리의 결함을 인정하기는커녕 우리가 숭고한 목표를 가진 선하고 위대한 국민이라는 신화에 수동적으로 안주했다.
우리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국민 신화 때문에 유권자들의 잘못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유권자들이 신화에 근거를 두고 견해를 말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풀기 힘든 문제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이성적 동물이라는 가정에 뿌리를 둔다. 그런데 사실은 사건과 역사를 신화화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면(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신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역설에 봉착하게 된다.
9ㆍ11 사태 이후 국제정책태도프로그램(PIPA)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수많은 미국인들이 복잡한 논의의 우여곡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예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석 달 전인 2003년 1월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다수의 미국인이 “이라크가 9ㆍ11 사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PIPA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그다음 1년 반 동안 응답자의 57퍼센트는 알카에다가 미국을 공격했을 당시 사담 후세인이 그들을 도와주었다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하지만 2004년 봄 9ㆍ11 위원회는 사담 후세인이 알카에다를 지원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고, 위원회의 발표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해 8월에 실시된 PIPA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0퍼센트는 여전히 사담 후세인이 알카에다에 ‘상당한’ 지원을 제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9ㆍ11 사태의 배후에 사담 후세인이 있다는 환상은 현실 세계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PIPA 조사원들이 인용한 <인베스터즈 비즈니스 데일리>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2003년에 이라크전을 지지한 미국인들의 80퍼센트는 전쟁을 지지한 가장 큰 이유가 사담 후세인이 알카에다와 연계되어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대중의 무지는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과 관련해서도 드러났다.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유권자들은 정부 방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빠르지만 자신들이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느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스 블릭스, 데이비드 케이, 리처드 클라크 같은 전문가들이 미국이 침공했을 당시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없었다는 확고한 결론을 내렸고, 이 사실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2004년 봄이 되어도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계 여론과 관련된 문제도 있었다. 어떤 척도로든 이라크 전쟁은 국제적으로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전쟁 전날,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부시 대통령과 미국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고립된 미국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PIPA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세계 여론이 반반으로 나뉘어 있거나, 아니면 사실상 전쟁에 찬성하는 분위기라고 믿었다. 미국인의 35퍼센트만이 계획된 침공에 지지보다는 비판이 더 많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9ㆍ11 사태와 이라크전 같이 중요한 사건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면, 미국인들이 과연 어떤 사건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선동 정치와 유권자 집단
미디어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런 논의는 거의 다 폭스뉴스(Fox News)의 시청자들이 다른 정보원에 의존하는 사람들보다 9ㆍ11 사태와 이라크에 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자료에 초점이 맞춰졌다. PIPA 조사에 따르면 폭스뉴스 고정 시청자들의 80퍼센트가 사담 후세인이 알카에다와 연계되어 있고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 공영 방송 PBS나 공영 라디오 방송 NPR의 뉴스를 듣는 미국인들 중에서 그런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비율은 23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런 결과들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미디어가 여론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이 결과들은 왜 대중이 잘못된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많은 비평가가 결과에 집중함으로써(대중의 잘못보다는 미디어의 잘못을 강조함으로써) 대중이 무고한 구경꾼이라는 인상을 남긴다는 점이다. 미디어에 관한 논의가 이런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비판을 받지 않았다.
비평가들이 제기한 또 다른 주장은 부시 행정부가 미국인들의 두려움을 이용했고 잘못된 정보로 국민을 오도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 역시 사실이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이 9ㆍ11 사태의 공포를 반복적으로 이용했다는 증거는 많다. 2004년 선거운동 기간 중에 딕 체니는 민주당 후보인 존 케리가 당선되면 미국이 또다시 테러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의 조작과 속임수를 집중 조명하는 것뿐 아니라 대중이 그 조작에 얼마나 쉽게 휘둘리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쉽게 속아 넘어간 것일까?
여론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으려는 우리의 태도는 이상하고도 유별나다. 미국의 지난 역사에서는 주요 공식 토론에서 국민에 대한 의심을 표현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과 동맹국 양 진영이 프로파간다를 광범위하게 활용하는 것을 목격한 월터 리프먼 등 소위 ‘초조한 자유주의자’들은, 민중들을 저대로 내버려두면 선동 정치가들에게 쉽게 미혹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대중민주주의의 ‘만행’을 타개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여론을 주도할 것을 제안했다.
한편 표면적으로는 낙관론자였던 존 듀이는 집중을 방해하는 오락거리들에 둘러싸인 소비사회를 사는 유권자들이 시민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은 몹시 어려울 것이라는,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경고를 했다. 영화관에 가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드라이브를 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국민들은 정치에 점점 흥미를 잃을 것이고, 그 결과 국민들은 점점 더 조종하기 쉬운 대상이 될 것이라고 그는 예측했다. 그리고 1930년대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대규모 실업자 집단이 파시즘에 이끌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돌출했다. 다행스럽게도 미국인들은 파시즘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리프먼과 듀이가 지적한 문제의 큰 윤곽이 더욱 뚜렷해졌다. 또한 충격적이게도 이 나라의 엘리트들은 이라크전의 실패를 계기로, 중대 현안의 기본적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대중을 개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작 시점부터 침공을 반대했던 일부 비평가들은 ‘그러게 내가 뭐랬어’라는 식의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를 취했고, 다른 이들은 행정부가 저지른 단계별 실수를 시간 순으로 정리했지만, 대중들이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전쟁에 찬성했다는 사실이 우리 민주주의의 성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연구하지 않았다.
미국의 대규모 유권자 집단이 선동 정치에 휘둘릴 가능성을 걱정해야 할 이유는 ‘초조한 자유주의자들’보다 우리에게 더 많다. 20세기에는 파시즘이 미국을 삼키지 못했지만, 21세기에는 잘못된 정보로 공포심을 자극하는 전략이 압도적 다수의 미국인들에게 먹혔다. 1930년대의 비평가들은 앞으로 일어나리라 우려가 되는 일을 분석했다. 우리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우리는 대중들이 두려움과 잘못된 정보에 조종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실제로 알고 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의 비평가들은(미국인들이 파시스트가 될 가능성은 희박했음에도)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위험을 과대평가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실제로 일어난 일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보건대, 미국 대중의 역량이 심히 부족하다고 해도 우리는 그럭저럭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 상태에 안주하는 것은 옳은 선택이 아닐지 모른다. 지난 40여 년 동안 미국의 정치가 점점 더 민주화되면서, 일반 유권자들이 점점 더 많은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역사가 국민들에게 위임한 현재의 임무를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과거의 경험 중 그 어떤 것을 봐도 국민이 이를 감당할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대중의 지독한 무지
‘국민이 어리석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어리석음을 정의하는 특징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완전한 무지다. 뉴스에 나오는 주요 사건들을 모르고, 우리 정부가 어떻게 기능하고 누가 책임을 지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두 번째는 태만함이다. 중요한 사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믿을 만한 매체를 찾는 일에 소홀한 태도를 말한다. 세 번째는 우둔함이다. 사실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는 성향이다. 네 번째는 근시안적 사고다. 상호 배타적이거나 국가의 장기적 이익에 반하는 공공 정책을 지지하는 것을 말한다. 다섯 번째는 넓은 범주로, 마땅한 단어가 없어서 멍청함이라고 부르겠다. 의미 없는 문구, 고정관념, 비합리적 편향,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을 이용하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진단과 해법 등에 쉽게 흔들리는 성향을 말한다.
어리석음을 정의한 뒤에도 우리는 또 다른 문제에 부딪힌다. 어리석음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문제다. 우리는 보통 여론조사를 통해 여론을 파악한다. 여론조사가 정확하다고 가정한다면, 그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가령 응답자의 절반이 미국 헌법 초안이 필라델피아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미국 국민이 어리석다는 결론을 내려도 될까? 아니면 더 높은 비율이 필요할까? 이런 질문들에 분명하고 깔끔한 대답이 있으리라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 아마 충분할 것이다. 질문을 함으로써 우리는 대중의 어리석음이란 주제가 얼마나 복잡한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인은 얼마만큼 어리석은가?
우리는 얼마나 무지한 것일까? 만일 정치학자들에게 이같이 물으면, ‘미국인들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무지하며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강력하고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놀랐는가? 2004년 한 대학에서, 다가올 대선에 대한 강의를 할 때 내가 만난 학생들처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특별히 더 박식하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이처럼 큰 착각에 빠져 있을까? 이 오류는 전례 없는 정보 접근성을 실제적인 정보 소비로 오인한 데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정보 접근성은 경이적이다. 주로 신문이나 전국 네트워크 뉴스 프로그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 세대와는 달리, 언제라도 CNN이나 폭스뉴스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거나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다.
이처럼 미국인들은 뉴스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자신들이 읽고 듣고 보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1986년의 가장 큰 화제 중 하나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정상회담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ABC뉴스와 《워싱턴포스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다수의 미국인들이 고르바초프의 이름을 듣고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고 한다. 심지어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정부를 이끌고 있는 이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미국이 걸프전을 하고 있던 시기에는 15퍼센트만이 당시 합동참모본부의장이던 콜린 파월이나 국방부 장관이던 딕 체니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2003년 해외유학 대책 위원회는 세계 정세에 관한 미국인들의 지식 수준을 연구했고, ‘외부 세계에 대한 미국인들의 무지’는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정도로 심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우리가 더 멍청해지진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 기준에 따르면 우리는 실제로 더 멍청해지고 있다. 최근에 실시된 ‘사라지는 투표자 프로젝트’의 책임자 토머스 패터슨은, 오늘날의 유권자들은 과거 유권자들에 비해 각 정당들이 무엇을 옹호하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1952년 미시간 대학교의 앵거스 캠벨과 그의 동료들이 유권자들과 인터뷰했을 때, 응답자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자신들이 공화당과 민주당의 어떤 점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정당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응답자는 10퍼센트뿐이었는데, 20년 후 똑같은 조사를 실시했을 때 정당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하지 못한 응답자가 27퍼센트로 거의 3배 늘었다고 한다. 심지어 1980년대에는 절반이 넘는 응답자가 한 정당 또는 두 정당 모두에 대해 어떤 말도 못했다고 한다.
무지한 젊은이들
이런 통계자료 이상으로 현실은 훨씬 더 심각하다. 여러 기준에서 봤을 때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40년 전의 젊은이들에 비해 아는 것이 적다. 또한 그들의 정보 습득 습관 역시 좋지 않다. 18~34세 미국 젊은이들의 20퍼센트만이 일간신문을 읽으며, 11퍼센트만이 정기적으로 인터넷 뉴스 사이트를 방문한다고 한다. CNN 시청자의 평균 연령이 60세일 정도로 젊은이들의 케이블 뉴스 시청률도 낮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뉴스가 자신들과 상관없는 것이라고 여긴다. 정치를 따분하게 여기는 학생들은 각종 시민 활동이나 행사를 피하고 다른 미국인들보다 더 낮은 투표율을 보인다. 미국 통계국 자료를 보면 18세에서 24세 사이의 젊은이들의 투표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18세 이상이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1972년에 이들의 투표율은 52퍼센트였다. 그 이후 해가 갈수록 투표율이 하락했다. 1976~1984년 사이의 투표율은 43퍼센트였고, 1988년에는 40퍼센트, 1992년에는 50퍼센트, 1996년은 35퍼센트, 2000년은 36퍼센트였다. 2004년에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 참여 독려 활동이 가장 치열하게 이루어졌음에도 47퍼센트만이 투표했다.
우리를 지배하는 국민 신화
신화는 건국 초창기부터 우리 정치에 큰 역할을 했다. 공화국 초기에 일종의 국가적 접착제처럼 우리를 한 나라의 국민으로 뭉치게 만든 것은 조지 워싱턴 신화였다. 또 독립 혁명과 남북전쟁 사이에 우리는 신화 만들기에 탐닉했고, 벤저민 프랭클린, 데이비드 크로켓, 에이브러햄 링컨을 비롯해 두각을 나타낸 거의 모든 인물들을 전설적이고도 신화적인 인물로 바꾸어놓았다. 우리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들려주었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치를 정의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민자의 나라에는 공통의 혈통과 동족이라는 유대가 없었기 때문에 신화는 우리에게 특별히 더 중요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공유한 것은 신화가 전부였다. 그리고 오늘날 정치인들은 신화를 끌어오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한 정치의 못마땅한 측면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대중의 직접적인 선거 참여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쟁점에 관한 폭넓고 진지한 논의에 대중을 참여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가짜 이미지, 슬로건, 노래, 횃불 행진, 과장된 미사여구 등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이 사실을 기다릴 수 있는 참을성이 없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신화는 사람들을 움직이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한다. 또한 신화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사실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