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의 세계사
함규진 지음 | 미래의창
조약의 세계사
함규진 지음
미래의창 / 2014년 12월 / 456쪽 / 18,000원
근대의 조약
베스트팔렌 조약: 근대국가의 탄생
새로운 시대를 위한 진통: 서구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을 꼽는다면 아마 제1차 세계대전이나 제2차 세계대전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300여 년 전, 화약 무기의 위력이 그다지 세지 않았던 때에 세계대전 못지않게 유럽인들의 영혼을 공포와 환멸로 갈가리 찢어버린 참혹한 전쟁이 있었다. 삼십년전쟁은 주로 독일 땅에서 펼쳐졌지만,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참여했고 그 참상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토록 무시무시하고 지긋지긋한 전쟁을 겪은 나머지, 사람들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전통을 의심하며 새로운 길을 찾고자 손을 잡았다.
삼십년전쟁의 발단은 1618년, 신성로마 황제의 신교 탄압 정책에 불만을 품은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이 라트신 궁전에서 가톨릭 참사위원들을 창밖으로 던져버린 사건이었다. 하지만 정작 베스트팔렌(웨스트팔리아) 조약은 그보다 반세기 전인 1566년에 네덜란드 신교도들이 가톨릭교회들을 습격해 방화와 파괴를 자행한 사건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사건으로 ‘팔십년전쟁’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촉발되었으며,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 독립을 승인하는 조약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십 년 동안 유럽 땅에 피를 뿌렸던 갈등의 일차적 원인은 종교에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불어닥친 종교개혁의 바람은 유럽인들이 서로를 악마의 종들로 여기고 거리낌 없이 살육을 저지르는 종교전쟁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종교만이 오랜 전쟁의 원인은 아니었다. 신성로마 황제는 ‘교회의 수호자’라는 정치적 역할을 내세워 신교를 믿는 지역과 영주를 탄압하고 황제권을 강화하려고 했으며, 황제의 간섭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지방 세력은 종교전쟁을 이용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 했다. 더구나 16세기 초부터 유럽 전체가 불황과 빈곤의 늪에 빠지게 되자 전쟁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배를 채우자는 사고방식이 만연했다.
종교전쟁에서 영토 전쟁으로: 삼십년전쟁은 보헤미아 신교도들의 반란을 보헤미아 출신의 신성로마 제국(962년에 오토 1세가 황제로 대관한 때부터 프란츠 2세가 제위를 물러난 1806년까지의 독일제국 명칭) 황제가 무력 진압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스페인이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인연 때문에 황제 편에 서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전쟁을 벌이던 네덜란드는 당연히 반(反)황제 전선에 섰다. 또한 신교 국가이자 독일의 팽창을 염려했던 덴마크와 스웨덴도 반황제 전선에 가담했다. 여기에 독일과 스페인이 동서 국경 양쪽에서 압박하는 것을 경계한 프랑스까지 신교 세력을 돕자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사실 프랑스는 일찍이 자국의 신교도(위그노)를 잔인하게 탄압했던 나라였다. 그래서 프랑스의 본격적인 참전은 구교와 신교의 대결이라는 양상이 많이 퇴색된 1635년에야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전쟁은 종교전쟁의 틀을 벗어나 황제파와 반황제파의 영토 전쟁으로 변질된다.
1631∼1632년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가 황제파의 발렌슈타인을 격파하고, 1635년에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황제파는 밀리게 된다. 1637년 프랑스는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고 명실공히 반황제파 중심 세력이 된다. 1640년에는 포르투갈이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하자, 스페인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조차 패색이 짙어져 황제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쯤 되자 황제는 평화조약으로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을 한다. 진작부터 황제가 그런 결심을 하길 두 손 모아 빌던 사람들은 독일의 평범한 서민들이었다. 그들은 30년 동안 계속되는 전쟁에 끌려나가고, 학살당하고, 약탈당하고, 강간당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독일 인구의 5퍼센트 이상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밤낮으로 꿈꾸었던 것은 신의 영광도, 황제의 영광도 아닌 오직 평화였다.
두 개의 결정, 하나의 결과: 1648년 황제와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각국의 국익이 주요 관심사였지만 조약 자체는 애초에 종교전쟁으로 출발했음을 상기하려는 듯, 스웨덴 등은 가톨릭 도시인 오스나브뤼크에서,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개신교 도시인 뮌스터에서 각각 황제와 조약을 맺었다(뮌스터 조약은 5월 15일, 오스나브뤼크 조약은 10월 24일). 하지만 두 조약이 상호 보완적이고 두 도시 모두 독일의 베스트팔렌 지방에 있었으므로 이를 합쳐 ‘베스트팔렌 조약’이라고 부른다. 이 조약 중에서 영토 관련 주요 내용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ㆍ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독립한다.
ㆍ수십 년 동안 실질적인 독립국가였던 스위스가 신성로마 제국에서 공식 독립한다.
ㆍ프랑스는 스트라스부르를 제외한 알자스-로렌을 차지한다.
ㆍ스웨덴은 서부 포메른과 비스마르, 브레멘 등 발트 해 연안의 독일 땅을 차지한다.
낡은 화면에 그린 새로운 세계의 청사진: 베스트팔렌 조약은 영토 조정 외에도 중요한 내용을 여럿 담고 있었다. 그중 신교도 가운데 루터파의 존재를 인정했던 1555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칼뱅파도 관용의 대상에 넣기로 함으로써 개신교가 비로소 유럽에서 인정받으며 종교전쟁의 불씨가 사라진 점이 중요했다. 그토록 오랜 고통의 세월 끝에, 영혼의 구원을 빌미로 육체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합의가 유럽인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나마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이른바 ‘근대적 주권’이 조약 내용에 비로소 명시되었다.
제국의 모든 공국들은 (……) 법률을 만들고 해석할 권한, 전쟁을 선포할 권한, 세금을 매길 권한, 병사들을 징집할 권한, 영지 내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거나 강화할 권한이 있다. (……) 다만 그런 동맹이 황제, 제국, 제국의 평화 그리고 이 조약 내용을 해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각자 황제 및 제국과 맺은 맹세와 어긋나도 안 된다.-뮌스터 조약 제65조
이로써 프로이센이든, 보헤미아든, 바이에른이든 각자 신성로마 황제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나라를 다스리고 동맹을 체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은 곧 이들 공국이 ‘주권국가’로 거듭났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미 중세 시대부터 봉건 영주는 상위 영주에게 우선적으로 충성한다는 전제하에 영지를 자유롭게 다스렸고, 상위 영주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이상 동맹도 마음대로 맺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조항은 그런 오래된 원칙을 다시 한 번 공식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한창 진행되고 있던 절대왕정과 중앙집권화 경향에 발맞추어 근대적 주권국가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내일: 이후 중세 질서가 빠르게 소멸되면서 유럽 각국은 절대왕정과 국가권력의 강화,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역사적 발전 단계를 재빠르게 밟아나간다. 그 과정에서 ‘주권국가끼리의 자유로운 교류와 연합’이라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틀을 되밟으며 주권 평등과 절대성의 원칙, 내정 불간섭의 원칙 등 아마도 조약 당사자들은 예상하지 못했을 근대적 원칙들을 하나하나 정립했다. 하지만 이런 원칙들은 ‘서구 기독교 국가’ 간에만 적용되었다. 영국이 뉴질랜드 원주민과 맺은 와이탕기 조약(1840년), 프랑스가 모로코와 맺은 탕헤르 조약(1844년), 제1차 아편전쟁을 마무리한 난징 조약(1842년), 미국이 포함으로 일본을 개항시킨 카나가와 협정(1853년) 등 지리상의 발견 이래 꾸준히 계속된 비서구권 국가에 대한 침략 과정에서 맺은 조약들은 상대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지도, 내정간섭을 자제하지도 않았다. ‘베스트팔렌 체제’가 비로소 전 세계에 적용된 것은 20세기 세계대전 이후다.
전쟁과 평화
베르사유 조약: 현실과 타협한 이상주의의 또 다른 비극
그 조약은 확실히 공개적이었다. 여러 서명국에서 비준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조약 내용을 일반에 낱낱이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약 내용 자체는 결코 ‘공개적으로’ 수립되지 않았다. 역사상 그 어떤 협상도 그처럼 철저한 비밀에 싸인 신비의 과정이 아니었다. (……) 윌슨,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가 밀실에서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완전무장한 미군은 각국의 전문가, 외교관, 심지어 대통령 외 미국 대표단까지도 그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통같은 경계를 펼쳤다.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베르사유 조약 협상 과정에 참여했고, 이후 국제 외교 이론의 명저 『외교론』을 저술한 해럴드 니컬슨이 남긴 회상이다. 확실히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기 위한 파리강화회의와 그것의 가장 큰 결과물인 베르사유 조약은 국익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국민의 목숨을 희생시켰던 일을 반성하며,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새로운 국제정치의 틀을 만들려는 희망을 담았다. 하지만 그 희망은 도처에서 낡고 차가운 현실주의에 묶여 있었다.
사상 최악의 전쟁과 윌슨의 이상주의: 제1차 세계대전은 비스마르크 퇴진 후 흐트러진 동맹 체제에 계속 고조되던 민족주의가 뒤얽히면서 발발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작은 분쟁으로 끝났을 일이 범슬라브주의에 따른 러시아 개입, 삼국동맹에 따른 독일 개입, 삼국협상에 따른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며 세계 주요 열강이 빠짐없이 참전하는 도가니가 되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는 처음에 이 전쟁이 몇 주면 끝나리라 보았지만, 결국 4년이나 끌었다. 그냥 끈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포탄을 쏟아부으며 무시무시한 살육전이 밤낮으로 이어졌다.
전쟁 발발 직후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맹목적 애국주의에 취해 전쟁을 부르짖고 있는 동안 일부 사회주의자들만이 “어떤 미친 인간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피를 흐르게 했다는 이유로, 이제 수천 명 민중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며 전쟁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수천만 명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고 말했어야 하니까! 러시아 사상자 665만, 독일 사상자 599만, 프랑스 사상자 563만……. 총 사상자 3,252만 4,566명.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전이 낳은 전대미문의 파괴력이, 국민국가가 헌법적 권한을 통해 전장으로 내몬 선량한 보통 사람들에게 사정없이 밀어닥친 결과였다.
19세기 말에 이미 세계 제1의 경제 대국 지위를 차지했던 미국은 유럽의 자멸로 끝난 이 전쟁의 결과, 정치ㆍ군사적으로도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수반인 우드로 윌슨은 ‘미국적 방식’인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협상 중심주의를 국제 질서의 기본 원칙으로 삼아 영구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이상에 불타는 사람이었다. 윌슨은 1917년 1월 의회 연설에서 이 전쟁은 “세력균형이 아니라 세력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서로 편을 먹고 맞설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편이 되어 공동의 평화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전쟁은 ‘승리 없는 평화’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승리란 다른 누군가의 패배를 의미하며, 유리한 자와 불리한 자, 이익을 본 자와 손해를 본 자가 나뉜다면 결코 평화 공동체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그의 입장은 1918년 1월의 유명한 ‘평화 원칙 14개조’에서 더 구체화되었다. 제1조에서는 모든 비밀외교를 금지했으며, 제5조는 주권평등과 민족자결주의를 규정하고 그 구체적 실천 과제를 6조에서 13조까지 제시했다. 제14조에서는 국제연맹의 창설을 제창했다. 말미에 윌슨은 이렇게 말했다. “세력이 강하든 약하든 관계없이 모든 민족과 국가에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그들 모두가 자유와 안전을 동등하게 보장받으며 더불어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다.” 당시 세계 여론은 14개조를 신시대의 복음으로 여기며 열광했다.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과 함께 유럽 국가들은 윌슨의 14개조를 기조로 한 평화협정을 추진할 것에 합의했다.
현실과의 야합, 비극이 잉태되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참석차 윌슨은 1918년 12월에 유럽으로 갔으며, 가는 곳마다 ‘구세주’로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회담장에서는 냉랭하고 긴장된 분위기 때문에 당황해야 했다. 유럽의 승전국 대표들은 윌슨의 승리 없는 평화도 바라지 않았고, 세력 공동체를 이룰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전시에 수상이 된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는 독일의 위협을 영구히 제거하기 위해, 전쟁으로 황폐한 국토와 거덜 난 산업 시설 복구에 도움이 될 자원을 얻기 위해, 약 반세기 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겪은 치욕을 되갚기 위해 독일에 잔혹한 대가를 요구해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인권 변호사 출신의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도 자유주의 정치인으로서 윌슨의 사상에 다분히 공감했지만, 실추된 영국의 국위를 높이고 유럽에서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자신의 첫 번째 사명이라고 여겼다.
한편 이탈리아는 본래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했다가 삼국동맹에서 빠진 다음, 통일 과정에서 ‘미수복 영토’를 되찾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연합군에 참여했으므로 강화회의에서 그 영토와 또 다른 오스트리아 땅을 덤으로 받기를 바랐다. 일본은 중국과 태평양의 독일 식민지를 요구했다. 이 밖에 팔레스타인 땅을 얻으려는 시온주의 유대인들, 독립을 염원하는 한국, 인도, 아르메니아 대표들이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회의장 앞을 떠나지 않았다. 윌슨과 그의 14개조에 지나친 기대를 건 때문도 있었고, 전쟁을 치르는 도중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맺은 각종 조약과 밀약 따위를 총결산할 자리가 이 회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이는 도무지 윌슨이 제창한 승리 없는 평화나 민족자결주의와 부합되지 않았다. 미국의 위력과 윌슨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자국 이익 우선주의를 제압할 수는 없었다. ‘모든 국가가 자유와 안전을 동등하게 보장받아야 한다’는 원칙도 ‘비밀외교는 없어야 한다’는 원칙도 지킬 수 없었다. 결국 수많은 나라와 민족의 대표들이 각자의 요구를 내밀며 소란을 피우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5개국의 수석 및 차석 대표들로 ‘10인 이사회’를 구성해 배타적으로 협상을 시작했다. 며칠 뒤에는 일본을 따돌리고 윌슨, 클레망소, 로이드 조지, 이탈리아의 오를란도 수상 이렇게 네 명만 회의를 열었다. 또 얼마 뒤에는 오를란도마저 퇴장하고 세 사람만이 니컬슨의 묘사대로 ‘철통같은 경계’ 속에서 비밀 회담을 진행했다.
미국은 초강대국이었지만 윌슨이 곧 미국은 아니라는 점도 문제였다. 대학 총장 출신의 그는 명석한 정치인이었으나 노회한 협상가는 아니었으며, 건강이 몹시 나빠진 탓에 클레망소나 로이드 조지의 옹고집에 배짱 좋게 맞설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던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아킬레스건마저 있었다. 반면,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민족자결주의와 비밀외교 금지 원칙을 들어 양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명백한 차별 대우에 격분한 오를란도는 회담장에서 퇴장해버렸다. 이는 훗날 이탈리아에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불씨가 된다. 일본도 자국의 요구가 거절되자 회담을 거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윌슨이 마지못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자, 이번에는 중국이 반발하며 회담장을 떠났다.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 파리강화회의 결과 연합국은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고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조약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제1장 국제연맹 규약>은 “국제 협력 증진과 국제 평화 및 안보를 달성하고자 전쟁에 의존하지 않을 책임을 받아들이고, 상대국 국민들과의 교류에서 정의를 유지하고 모든 조약상의 의무를 견실히 준수하여 국제연맹 규약에 동의한다”고 표시하고 있다. 제4조는 파리강화회의의 연합국 이사국들이 상임이사회를 구성한다고 규정했지만, 제5조에서 “모든 회의의 의결은 참석자들의 만장일치로 한다”고 규정해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는 만장일치의 비현실성과 더불어 국제연맹의 운신 폭을 좁혔으며, 협상 과정에서 미국 상원을 달래려 원안에 있던 연맹의 국내 문제 개입권과 가입국의 탈퇴 금지 의무를 삭제함으로써 이후 일본과 이탈리아가 연맹을 탈퇴하고 독일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의 주역이 될 길을 열어주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