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초상
함규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유대인의 초상
함규진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5년 2월 / 372쪽 / 16,000원
저항의 초상 - 혁명가들
레온 트로츠키 - 이 사람만 한 볼셰비키가 어디 있는가
도련님에서 혁명아로: 트로츠키의 본명은 ‘레브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개척 농민으로 출발해, 부농(쿨락)의 반열에 든 다비드 브론슈타인의 둘째 아들로 1879년에 태어났다. 어린 그는 똑똑한 도련님으로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똑똑하다 보니, 자신을 둘러싼 모순을 일찍부터 깨닫기 시작했다. ‘왜 우리 유대인은 열심히 공부해도 관리가 되지 못할까?’, ‘왜 아버지는 소작인과 일꾼을 멸시하며 짐승처럼 다룰까? 저들 덕분에 우리는 편안히 사는 건데?’ 하는 생각은 스펜치르라고 하는 친척 대학생이 가정교사로 찾아오면서 더욱 발전했다. 의식 있는 대학생이었던 그는 트로츠키에게 속박된 러시아 민중의 비애를 노래한 알렉산드르 푸시킨과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시를 읽어주고, 민중의 비참한 삶을 그린 찰스 디킨스의 소설도 몰래 전해주었다. 어린 트로츠키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고 한다. 이런 비분이 결국 그를 편안하지 못한 삶으로 이끌게 된다.
오데사의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편입한 니콜라예프의 김나지움에서 인생이 뒤바뀌게 된다. 사회주의를 공부하는 알렉산드라라는 여성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트로츠키는 그녀와 사귀고픈 마음으로 사회주의 서클에 다녔지만, 차차 그의 반골 기질과 날카로운 지성이 사회주의 자체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어느새 모임의 주동자가 된 그는 ‘남부 러시아 노동자 동맹’을 조직했고, 그 때문에 1899년 20세의 나이에 시베리아로 유배되고 만다. 그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사회주의를 더욱 열심히 파고들었으며, 그의 곁에는 옥중 결혼한 아내 알렉산드라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딸(지나이다, 니나)이 태어났다.
그는 시베리아를 탈출해 1902년 마침내 러시아혁명의 주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당시 레닌은 런던에 망명해 잡지 《이스크라》를 중심으로 망명 사회주의자들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레닌과 연락이 된 트로츠키는 아내와 딸들을 남겨둔 채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갔다. 이때 여권을 위조하면서 성명란에 오데사 감옥에서 자신을 무척 괴롭혔던 간수 이름을 적었는데, 바로 ‘트로츠키’였다. 사자를 뜻하는 ‘레온’은 그의 본명인 레브에서 따온 것이다. 1902년 10월 처음 만난 레닌과 트로츠키는 서로의 지성과 카리스마에 감탄했지만, 둘은 무언가 기질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1903년 브뤼셀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전당대회에서 충돌하고 만다. 그는 레닌의 처사가 독재적이며 행실은 부도덕하기 짝이 없다고 비난을 퍼부어, 결국 레닌이 《이스크라》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트로츠키는 사상적으로도 레닌에 정면으로 반대해 레닌의 ‘전위정당론’을 반혁명적인 ‘대리주의’라고 매도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가름은 이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유럽의 망명 사회주의자들이 이처럼 분열과 대립을 반복하는 사이에 곪을 대로 곪아 있던 제정러시아 체제는 마침내 파탄이 났다. 1905년에 혁명이 터지자, 트로츠키는 누구보다도 빨리 귀국해 혁명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사로잡혀 두 번째로 시베리아에 유배되는데, 얼마 후 또다시 탈출해 유럽으로 가서 한동안 언론과 저술 활동에 주력했다. 그를 곁에서 돌본 사람은 런던에서 새로 맞은 아내 나탈리아였다. 이 시절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카우츠키 등 유명한 유럽 사회주의자와 교분을 나누었고 이오시프 스탈린과도 처음 만났는데,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를 거북하게 여겼다고 한다. 결국 러시아혁명은 1917년 본궤도에 올랐고,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레닌은 부랴부랴 러시아로 돌아왔다. 트로츠키도 한 달 뒤에 귀국했고, 임시정부의 탄압을 거친 다음 레닌과 화해하고 볼셰비키의 일원이 된다.
이후 러시아혁명사에서 트로츠키의 기여는 한마디로 눈부셨다. 1917년 11월 7일, 그는 당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날은 트로츠키의 38세 생일이기도 했다. 이후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이 되어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제국주의 독일과 계속 싸워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그도 강화를 독일 내부 혁명의 기회로 삼아야지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혁명에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레닌의 완강한 입장과 불리한 전세 때문에 결국 1918년 2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는다. 트로츠키는 다시 군사인민위원이 되어 붉은 군대의 증강에 온 힘을 쏟았다. 그의 초인적인 행정 능력과 적절한 결정 덕에 몇천에 불과했던 인민군은 2년여 만에 500만으로 늘었고, 이는 레닌의 입에서 “이 사람만 한 볼셰비키가 어디 있는가!”라는 찬탄을 자아내게 했다. 1919년 3월에는 코민테른 집행위원이 되어 창립선언문을 썼으며, 10월에는 붉은 군대를 이끌고 반혁명군과 싸워 최종승리를 거두고 모스크바로 위풍당당하게 개선했다. 트로츠키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였다.
스탈린과의 대결: 그러나 그가 거의 혼자 힘으로 군대를 크게 키우고 총사령관이 되자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쑥덕임이 크렘린을 뒤숭숭하게 했다. 프랑스혁명의 결실을 무력으로 빼앗아 황제가 된 나폴레옹처럼, 트로츠키도 쿠데타로 소비에트 정부를 뒤엎고 군사독재자의 길을 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점이 이 의심의 불꽃에 부채질을 했다. 첫 번째는 그의 재승덕박한 성품과 교만한 이미지였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웅변가요, 첫째가는 이론가였으며 행정 능력까지 발군인 천재였다. 그러나 천재 특유의 괴팍함도 있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너그럽게 넘기지 못했으며, 상대가 레닌이든 누구든 예의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직성이 풀렸다. 논쟁이 붙으면 타협할 줄 몰랐고,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은 철저히 무시하거나 혹독하게 물고 늘어졌다. 또 불같은 성미여서 조용하다가도 주위를 온통 뒤집어놓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 개인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앙심을 품는 사람이 늘어나는 게 당연했다.
또한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족쇄로 작용했다. 혁명 주역에 유대인이 많았지만, 유대인에 대한 러시아의 근거 없는 혐오감은 미국 남부인이 한때 흑인에게 품었던 혐오감에 못지않았고, 유대인이라는 꼬리표는 혁명 이후에도 암울한 그림자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쪽이었다. 그는 레닌과 등을 졌던 1903년 전당대회에서 유대인의 사정을 보아줄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며 사회주의 내 유대인 분파를 깔아뭉갰다. 혁명 이후에도 거듭 찾아오는 유대계 대표들을 한 번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가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코스모폴리탄이어서라기보다 콤플렉스를 애써 외면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때에 따라 공산당 내의 유대인과 힘을 합치려 했다. 1903년에 레닌과 갈라선 까닭도 레닌이 유대인인 파벨 악셀로트, 베라 자술리치 등을 배제하려는 데 분격했기 때문이며, 1926년에는 스탈린과 싸우기 위해 한때 사이가 나빴던 유대인 간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손을 잡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 경우에도 동족애 같은 것의 발로가 아니리라. 권좌에 있을 때는 유대인이라는 꼬리표가 부담스러워 유대인 티를 안 내려 애썼고, 수세에 몰렸다 싶을 때는 함께 위험해진 유대인 동지들을 가장 믿을 만한 상대라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이런 트로츠키의 등 뒤에서 그에 대한 불신의 불꽃을 열심히 부추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다. 변방의 그루지야(조지아) 출신인 스탈린은 트로츠키처럼 화려한 경력도 없고 혁명 과정에서의 공로도 변변찮았다. 그러나 레닌의 충복을 자처했으며, 민족인민위원을 맡아 여러 공화국을 소비에트연방에 통합하는 작업을 성공적으로(상당한 강제력을 동원하며) 수행하면서 레닌의 신임을 얻어 어느새 트로츠키의 라이벌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은 정치 이념에서도 대립했다. 트로츠키는 ‘연속 혁명론’을 주장하며 사회주의 체제는 세계가 자본주의에 머무르는 한 오래 버틸 수 없으며 반드시 유럽을 비롯한 세계 혁명이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스탈린은 러시아가 사회주의 체제로 충분히 지속할 수 있으며, 세계 혁명은 먼저 소련 체제를 안정시킨 다음의 문제라는 ‘일국사회주의론’을 내세웠다. 스탈린은 수적으로나 정신 무장 면에서나 노동자들의 힘만으로는 체제를 유지할 수 없고 농민과 관료의 힘이 필수적이라고 보았지만, 트로츠키는 농민이 일시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시즘 교리대로 노동자가 독재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관료들이 인민의 자유를 구속하고 감시하는 체제는 혁명의 악몽이며 배반이라고 보았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던 레닌이 1924년에 세상을 떠나자 트로츠키는 딱한 신세가 되었다. 레닌은 두 사람 중 누구도 자신의 후계자로 불충분하다고 여겨왔는데, 최종적으로는 스탈린을 더욱 불신해 트로츠키와 동맹을 맺고 스탈린을 축출하려 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을 신격화하면서 자신을 충실한 추종자로 부각하고, 트로츠키는 과거에 레닌과 대립했을 뿐 아니라 최근까지도 레닌의 노선에 정면으로 맞섰다고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트로츠키는 1925년에는 요직에서 해임되었고, 1926년에는 정치국에서 추방되었으며, 1927년에는 당에서 제명되었고, 1928년에는 세 번째로 시베리아 유형을 떠났으며, 1929년에는 국외 추방되고 말았다. 트로츠키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스탈린은 그가 남긴 유산을 모두 파괴하고 조작했다. 심지어 혁명 초기에 그가 레닌과 나란히 찍은 사진조차 없애거나 트로츠키 부분만 편집해 지워버렸다. 누구보다도 혁명에 기여한 사람의 위대한 발자취가 불과 10여 년 만에 거짓말처럼 지워져버린 것이다.
영원한 방랑 영원한 메시지: 이렇게까지 된 데는 트로츠키의 ‘우유부단함’도 한몫했다. 그는 적어도 네 차례 주도권을 장악할 기회가 있었지만 매번 그 기회를 흘려버렸다. 첫 번째는 1917년 혁명이 성공한 직후였다. 레닌은 그에게 인민위원회 의장을 제의했다. 새 정부의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1905년에 홀로 혁명을 시도했고, 이번에도 독자적으로 무장봉기를 이끌어 혁명을 성공시킨 그이기에 결코 자격이 모자란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사양했다. 그러면 내무인민위원이라도 맡으라고 했지만, 트로츠키는 “그러면 민족 문제를 다루어야 할 텐데, 유대인인 나로서는 곤란합니다”라며 그것도 사양했다. 만일 이때 그가 새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는 유대인 콤플렉스를 벗어버릴 수 없었고, 스스로 국외자 운명의 소유자임을 의식해 통치자 자리를 꺼렸던 것이다.
두 번째 기회는 1922년, 다시금 레닌이 만들어주었다. 이번에는 인민위원회 부의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는데, 레닌에 이은 2인자이자 후계자로 공식 인정받게 될 터였지만 역시 사양했다. 이번에도 이유는 “나는 유대인이라서……”였다. 레닌은 그해에 다시 세 번째 기회를 주는데, 스탈린에 맞서서 동맹을 맺고 그를 몰아내자는 비밀 제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트로츠키의 고개는 좌우로 흔들렸다. 당의 원칙상 분파는 금지된다는 이유였다. 이미 스탈린이 분파를 만들어 당을 사납게 집어삼키는 중이었지만, 부정을 막자고 부정을 저지를 수는 없다는 참으로 지식인다운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1923년, 잔뜩 수세에 몰려 있던 그에게 그를 따르던 군 장성들이 군부 쿠데타를 제의했다. 그러나 수세에 몰렸을지언정 불법 쿠데타를 해서는 안 된다는 트로츠키 앞에서 장성들은 탄식했다. 스탈린이었다면 이미 ‘나폴레옹’이라고 의심받던 시점에 쿠데타를 벌였으리라. 레온 트로츠키, 그는 유대인 콤플렉스와 지식인 기질을 최후까지 털어버리지 못했다. 사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모든 것을 털어버릴 줄 모르는 사람은 마지막에 승리할 수 없다.
영원토록 방랑하는 유대인, 이는 트로츠키에게도 내려진 저주였을까. 피와 땀으로 이룩한 새로운 조국에서 쫓겨난 그는 이후 10여 년간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 등을 떠돌며 살았다. 유랑 중에도 그는 저서와 논평을 통해 스탈린 체제를 공격하고 “지금의 소련은 관료들의 독재 체제일 뿐, 올바른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다”라고 비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1938년에는 스탈린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코민테른(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설된 공산주의 국제 연합)을 부정하고 ‘제4인터내셔널’을 파리에서 창립했다. 스탈린은 그 보답으로 트로츠키의 피붙이를 차례차례 살해하더니, 끝내 트로츠키에게도 마수를 뻗쳤다. 트로츠키의 마지막 작품이 된 『배반당한 혁명』을 읽어본 스탈린은 길길이 뛰더니 “이놈의 머리를 뭉개버려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 트로츠키는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얼마 전까지 화가 프리다 칼로와 나누었던 단꿈을 반추하는 중이었다. 그때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화가 다비드 시케이로스가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는 이 야만스러운 공격을 잘도 피해 살아남았다. 하지만 8월 20일에는 피하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트로츠키의 추종자를 가장하며 곁에 머물러 있던 스탈린의 하수인, 라몬 메르카데르가 뒤통수를 얼음송곳으로 내리찍은 것이다. 그는 하루 만에 숨을 거두었고, 코요아칸에 묻혔다.
트로츠키는 그 뒤 소련이 망하기까지 저주받은 이름이 되었고, 유대인은 트로츠키와 동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철저히 숙청당했다. 웃지 못할 일은, 트로츠키 때문에 미국에서도 똑같이 혹독한 유대인 탄압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트로츠키를 비롯한 유대인이 소련을 세우고, 세상을 정복하려 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유산은 스탈린보다, 소련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1990년대 이후 ‘소련은 제대로 된 사회주의가 아니다’는 그의 이론에 착안한 사회주의자들이 ‘참된 사회주의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세계 자본주의가 불안한 조짐을 보일 때마다 트로츠키의 사상에서 비롯한 이론들로 ‘사회주의가 대안이다’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생전에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콤플렉스와 괴팍함에 찌든 불완전한 사람이었을지라도 트로츠키가 남긴 메시지가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에 꿋꿋이 맞설 것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메시지는 유대인이든 아니든, 사회주의자든 아니든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나 되새겨질 것이므로.
권력의 초상 - 정치학자들
헨리 키신저 - 대통령이 못 된다면, 황제가 되겠다
보이지 않는 예복: 유대인 정치학자 해나 아렌트는 정치는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나라한 인간성이 까발려진 폐허 속에서 고대의 광명을 찾는 것, 잔혹한 운명의 길을 걸으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정치에서 이상과 이념을 전혀 배제하지 않더라도 “정치는 가능한 것의 예술이다”라고 차가운 눈매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한 사람이 있다. 독일 제2제국의 영광과 수십 년 동안 유럽 평화를 이룩한 불세출의 정치가 비스마르크다.
그가 19세기 외교의 찬란한 별이라면, 20세기에는 그의 정치사상을 받들어 새기면서 더 큰 무대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며 외교의 신이라 불린 헨리 키신저가 있다. 그는 사교성은 뛰어났지만 세련미가 부족했고, 언제나 한물간 농담만 늘어놓아서 주변을 곧잘 썰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언젠가 그가 아주 그럴싸한 임기응변으로 청중의 폭소를 이끌어낸 적이 있다. 당신처럼 유능하고 인기도 많은 사람이 왜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불행하게도 미국 법률에 이민 1세대는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고는 한 번 싱긋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황제가 되지 못하도록 한 규정은 어디에도 없답니다.”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농담이었다. 그는 실제로 미국 안에서 외교정책에 관련해서는 황제였고, 미국 바깥에서는 여느 황제보다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며 ‘제국’에 군림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