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융합
김경집 지음 | 더숲
생각의 융합
김경집 지음
더숲 / 2015년 3월 / 496쪽 / 16,500원
콜럼버스, 이순신을 만나다 : 시공간을 초월한 역사와 역사
욕망에 불을 지른 한 권의 책
인간은 욕망의 존재다. 물론 그 욕망의 핵심은 권력과 재력이다. 그런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책이 중세 말에서 근대 초기의 유럽을 풍미했는데, 바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다. 무엇보다 『동방견문록』이 저잣거리의 낭인들까지 설레게 만든 건 “가는 곳마다 황금이 있었다”는 구절 때문이었다. 지팡구(일본)의 집들은 지붕까지 금으로 덮여 있다는 등의 허풍을 곧이들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의 횡재를 꿈꾼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나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잔인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피사로의 동기도 바로 금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다.
콜럼버스, 새로운 세상을 열다
1492년 8월 3일 세 척의 배가 에스파냐 팔로스항을 떠났다. 그리고 도중에 카나리아 제도에서 식량을 보충하고 대서양을 건너기 시작했는데, 그 배의 선장이 바로 콜럼버스였다. 마침내 10월 12일 갈대와 풀잎이 물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육지가 나타난 것이다. 콜럼버스의 꿈을 지핀 것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에스파냐의 세비야에 있는 콜럼버스 박물관에는 콜럼버스가 수없이 읽고 메모를 적어놓은 라틴어로 된 『마르코 폴로 여행기』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일확천금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넜다. 그가 가려고 했던 곳은 인도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다. 콜럼버스는 이른바 신세계를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기 위해 항해를 했기 때문이다. 왜 그는, 아니 당시 유럽인들은 인도로 가는 항로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당시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인도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향료는 매우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품들은 대부분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던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야 했기에 엄청나게 비쌀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아랍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교역량의 차이도 매혹적이었다. 직접 거래할 뿐 아니라 배로 운송하면 대규모로 교역할 수 있기 때문에 수익이 엄청날 것이라 여겼다. 콜럼버스는 낙타 대신에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면 인도와 중국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콜럼버스와 이순신이 만나게 되는 결정적 모멘텀
대항해 시대에 유럽과 중국의 교역은 활발히 이루어졌고 규모도 컸다. 그런데 중국과의 교역에서 유럽이 팔았던 품목은 별로 없다. 한쪽은 일방적으로 수출에만, 다른 한쪽은 수입에만 의존한다는 건 정상적인 교역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교역이 가능했을까? 그 비밀은 바로 은에 있었다. 1545년경 유럽인들은 페루의 포토시에서 엄청난 은광을 발견했다. 그리고 1572년부터 수은아말감법으로 품위가 낮은 은광도 이용할 수 있게 되자 마구잡이로 채광이 이루어졌다.
포토시의 은은 유럽으로 유입되어 유럽의 가격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젤란이 태평양 항로를 발견하면서 나중에는 직접 필리핀으로 은을 운반했다. 바로 이 은이 동방무역의 주요 수단이 되었고, 이런 무역을 통해 엄청난 양의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참고로 16세기에 중국에서는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1대 6~8이었지만, 유럽에서는 1대 12였다. 유럽에서 금 1킬로그램을 은 12킬로그램으로 바꿔서 중국에 가져오기만 하면 1.5~2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으니 그 자체로 매력적인 거래였다. 게다가 중국에서 금을 구입하여 유럽에 가져가 팔면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은은 물품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는 화폐인 동시에 하나의 상품이었던 셈이다. 만약에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엄청난 은을 빼앗고 채굴하지 않았다면 과연 유럽의 대규모 상선들이 중국에서 무역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랬다면, 임진왜란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일본, 유럽인에게서 총을 구입하다
1543년 중국 해적선 한 척이 명나라 닝보로 가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규슈의 남단에 위치한 다네가시마에 닿게 되었다. 이 배에 탔던 포르투갈인은 일본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영주인 다네가시마 도키타카는 이들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배 안에 있던 명나라 사람과 필담을 나누다가 그 포르투갈인이 가지고 있던 총(철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도키타카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억 엔어치의 거금인 2,000냥을 주고 두 자루의 총을 입수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스기보노라는 장인에게 총의 기능과 제작법을 배워 모조품을 양산하게 하였다. 그렇게 조총의 양산이 시작되었지만 총열과 총의 아랫부분을 결합하는 방법을 몰랐던 스기보노는 자신의 딸을 포르투갈인에게 주는 도박을 감행하여 그 기술을 알아냈다. 그렇게 해서 조총의 본격적인 양산 체제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그 후 조총은 전국 다이묘(10세기 말에 등장하여 19세기 후반 폐지되기 전까지 일본의 각 지역을 다스렸던 지방 유력자)들에게 퍼져나갔다.
조총이 일본에만 전해진 건 아니었다. 1550년대를 전후해 중국 명나라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는 조총보다 대포에 집중했던 터라 그 작은 무기에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명나라는 북부 국경을 따라 요새를 건립했고 대포를 배치했는데, 북방 이민족, 특히 기마병 위주인 이들을 멀리서 격퇴하기 위해서는 대포가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중국에 조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포의 비중이 훨씬 높았고 조총은 보조적인 역할만 담당했다. 무기를 개발하는 데 이렇게 차이가 나는 까닭은 중국은 화약무기를 고정시키고 방어하는 방식을 택한 반면, 일본은 공격용 무기가 필요했고 따라서 고정하는 화포보다는 조총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어땠을까? 조선 역시 중국처럼 방어 위주의 국방 전술을 택했기 때문에 화포 중심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변도의 채널 때문에 서양의 새로운 문명을 비롯해 새로운 총기를 접할 기회도 없었다. 결국 조선과 일본은 사회적·문화적으로 필요한 기술이 달랐고, 따라서 조선은 기술특화가 진행된 무기 체계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어디 과거에만 그칠 일일까?
임진왜란, 마침내 콜럼버스와 이순신이 만나다
1592년 4월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 바로 임진왜란이다. 이 전쟁은 조선을 초토화시켰다. 제대로 방비를 세우지 않았던 조선은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조총이었다. 그것은 앞서 본 것처럼 포르투갈 상인들이 전해준 총에서 비롯되었고, 그런 무역은 새로운 항로의 개척 덕분에 가능했으며, 그 중심에 콜럼버스가 있었다. 그런 일본군을 격퇴시키고 무력화시킨 존재가 조선의 수군이었고 그 주인공이 바로 이순신이었으니, 이렇게 두 사람은 조우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이순신은 바다에서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는 왜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순신은 연전연승했다. 그것은 이순신의 전략과 훈련, 그리고 대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유심히 살펴볼 것은 해상과 해안에서의 승리가 무엇 때문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순신의 지략이 큰 힘을 발휘했지만, 무엇보다 그 전쟁은 대포와 조총의 대결이었고, 육상에 비해 방어적 개념이 더 강한 해상 전투에서 화포, 특히 대포의 위력이 조총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콜럼버스와 이순신, 1492년과 1592년. 10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 동양과 서양이라는 공간적 차이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사이에 펼쳐진 수많은 시간과 변화까지 소환함으로써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입체적 사고력의 한 단면을 맛보게 해준다. 그 중심에는 은과 조총이 있다.
7년에 걸친 대 전쟁은 결과적으로 중국, 한국, 일본의 영토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쇠락한 명나라는 여진족에게 나라를 빼앗겨 청나라의 등장을 재촉했다. 또한 일본에서는 종전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체제, 즉 1603년 일본의 마지막 막부인 에도 막부가 등장하였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에도 정작 조선은 변하지 않았다. 왕조도 바뀌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조선의 안정성이 높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수구 세력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변화를 거부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 변화를 제대로 분석,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히딩크, 렘브란트와 만나다 : 시대를 극복한 ‘자유로운 개인’
네덜란드 축구대표팀이 ‘오렌지 군단’으로 불리는 이유
아직 한 번도 월드컵에서 우승한 적은 없지만 언제나 강력한 우승 후보 물망에 오르는 국가가 있다. 네덜란드다. 거스 히딩크를 통해 우리는 네덜란드 축구와 매우 친근해졌다. 한편 한국 축구 하면 국가대표팀과 더불어 ‘붉은 악마’가 떠오른다. 유래는 1983년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대표팀이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참가해 4강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자, 해외 언론들이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고 부르며 감탄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그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붉은 악마’가 되었고 한국 축구팀을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각 나라 축구팀마다 고유한 색깔이 있다. 예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은 ‘아주리 군단(‘아주리’는 이탈리아어로 푸른색을 지칭한다)’으로 불리는데, 과거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에 강력했던 사보이 왕가를 대표하는 색이 푸른색이었던 데서 연유한다. 한편 네덜란드 대표팀은 ‘오렌지 군단’으로 불린다. 유니폼의 색깔이 오렌지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렌지’라는 말은 본디 오렌지 색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네덜란드의 자유와 독립에 공을 세운 어떤 인물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화를 자초한 막강 에스파냐, 그리고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16세기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다. 당시 에스파냐는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엄청난 금과 은을 약탈함으로써 국부를 쌓았고, 또 당시 최강이던 무적함대까지 보유한 그야말로 강대국이었다. 하지만 그게 독이었다. 에스파냐는 국토를 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톨릭 절대왕국으로 회귀하면서 수많은 학자와 자본가들을 추방함으로써 지적 유연성과 자본의 합리성을 스스로 상실했다.
그 결과 자본과 군사력에 취해 문제의 본질을 읽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힘에 도취되었고, 에스파냐와 네덜란드를 맡은 펠리페 2세는 종교전쟁에 개입했다. 그는 아버지의 외할머니인 이사벨 여왕처럼 강력한 가톨릭 국가를 원했고 자신이 가톨릭교회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신교도 국가와 전쟁을 일으켰고, 이 전쟁들로 인해 엄청나게 국고를 탕진했다. 다행히 아메리카 대륙에서 약탈한 금과 은으로 그 손실을 충당했지만 그런 실패를 거듭하고도 그는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영국과의 전쟁이었다. 영국은 이전부터 언젠가는 에스파냐와의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고 해전으로는 불리하다고 여겨 대포 개발에 전력을 다해왔었다. 그러니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라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에스파냐는 패전했고, 이것을 계기로 막강한 왕국 에스파냐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 한판의 승전으로 영국이 곧바로 모든 제해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함이 아니라 대포를 중심으로 해서 승리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영국이 배의 건조보다 포 제작에 몰두하는 사이 네덜란드는 꾸준히 바다로 진출해서 제해권을 장악했다. 네덜란드로서는 그것만이 살길이었기 때문에 결사적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무역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강력한 두 나라(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눈치를 보느라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네덜란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도와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하여 무역했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그 돈으로 다시 더 큰 배를 건조해서 강력한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식민지로서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자유에 대한 신념은 종교적 관용으로 이어졌고 그에 따라 신교도가 급증해 급기야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가뜩이나 타 종교에 배타적이고 자신의 종교에 대한 신념이 강했던 에스파냐는 네덜란드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촉발시켰다. 이것이 바로 네덜란드 독립전쟁이었다. 그 전쟁의 결과 에스파냐의 속령인 네덜란드의 홀란트, 위트레흐트 등 북부 7주가 1572~1609년에 본국과의 항쟁에서 독립을 쟁취했는데, 그 전쟁을 이끈 핵심 인물이 네덜란드의 초대 총독을 지낸 오라녜 공 빌렘 1세였다.
오라녜 공, 네덜란드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다
이렇게 얻어낸 자유와 독립이니만큼 네덜란드인들에게 자유에 대한 갈망과 자부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자유는 다양한 분야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종교의 자유뿐 아니라 학문의 자유도 철저히 보장해서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 유명한 철학자를 배출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단순히 네덜란드의 자유와 독립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그것은 근대혁명을 새롭게 열게 된 위대한 승리였다. 오라녜를 기억하고 그가 싸운 자유의 가치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오렌지색이다. 따라서 우리가 네덜란드의 오렌지 색깔을 볼 때 진정 읽어내야 하는 가치는 바로 자유라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네덜란드의 개방성은 유연성에서 비롯되었다
히딩크는 한국 축구에서 오래 기억될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는 네덜란드 사람이며, 네덜란드에는 네덜란드어가 있다. 하지만 히딩크는 영어로 소통했다. 네덜란드의 학교에서는 영어와 독일어를 함께 배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어를 습득했을 것이고, 유럽의 여러 클럽 팀을 지휘하기 위해서도 영어의 소통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인들이 영어를 잘하는 까닭은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어서 여러 언어를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고, 근대에 강력한 무역 강국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는 네덜란드가 17세기 유럽의 인쇄 중심지였으며, 그것은 바로 관용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15세기 유럽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인쇄한 곳은 베네치아였다. 그런데 17세기에 들어서자 유럽 인쇄의 중심지가 베네치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했다. 그것은 탈지중해 시대의 강력한 지식 드라이브 정책 덕분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관대한 국가 중 하나였다. 자연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따라왔을 것이다. 네덜란드는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로 책들을 찍어냈다. 왜 네덜란드가 외국어로 된 책들을 엄청나게 인쇄하게 되었을까? 다른 유럽 국가들은 검열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은 자국의 검열을 피해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일찍이 동인도회사를 통해 외국의 문물과 정보에 대해 강한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인쇄물의 증가는 자연히 인쇄술의 발달과 생산 원가의 절감으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검열이 아니더라도 저렴한 인쇄 가격 때문에 유럽의 여러 국가들에서 네덜란드에 인쇄물을 주문하는 일이 많아졌다.
관용과 억압의 차이
네덜란드의 사례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관용의 힘이다. 네덜란드는 그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고, 피보다 더 아끼는 국토를 스스로 파괴하면서까지 지켜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다른 이들의 자유도 존중할 줄 알았고 공존의 지혜를 모색했다. 네덜란드는 바로 거기에서 성장했다.
네덜란드, 화폭에 현실을 담고 자신들을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