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의 말
류성룡 지음 | 소울메이트
류성룡의 말
류성룡 지음
소울메이트 / 2015년 3월 / 272쪽 / 15,000원
1장 곪아 있는 조선을 바꾸고자 직언하다
백성의 삶을 어루만질 방책을 찾아야 합니다
『서애별집』 권2 <무빙차자>, 선조 14년(1581) 공물과 군역의 폐해로 인해 백성들이 엄청난 고초를 겪는 것을 상소에서 지적하며백성들을 위해 군주를 세운 것은 그들을 부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옛사람이 “한 백성이 살 곳을 잃으면 왕정의 잘못을 알기에 족하고, 한 여자가 버려지게 되면 백성들의 곤궁함을 알기에 족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하니 오늘날 경기 지역 내에서 구렁텅이에 빠져 살 곳을 잃고 하소연할 곳이 없다고 하늘에 울부짖어 조화로운 기운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몇억만이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소의간식(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고 늦게야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하고 걱정이 많음을 뜻함)은 언제나 백성의 삶에 두었고, 가엾게 여기고 어루만질 방책을 강구하심은 진실로 이미 이르지 않은 것이 없는데, 오직 백 년 동안 쌓인 폐단이 고질에 빠지게 되어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군사의 수효는 날마다 줄어들지만 인보(변방에 사는 백성들에게 가까운 이웃끼리 뭉쳐 적의 침입을 막고 치안을 유지하게 하는 것)는 홍수나 화재보다도 심하고, 공물과 세금은 가혹해 방납(공물을 대신 납부하고 이자를 붙여 받는 일)하는 무리들은 사나운 호랑이와 같습니다. 이것은 큰 것이고 나머지는 다 논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바꾸어 바로잡지 않는다면, 벌판을 태울 것 같은 기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나라의 근본이 무너질 것입니다.
까닭 없이 작위가 주어지면 안 됩니다
『서애집』 권4 <예조판서를 사직하는 상소>, 선조 17년(1584) 8월 자헌대부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에 제수되자 이를 사양하며무릇 작위를 내리는 것은 애초부터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은 덕망이고, 그다음은 재능이고, 그다음은 공로이고, 그다음은 연차입니다.
만약 이 몇 가지에 해당되지도 않는데 까닭 없이 작위가 주어지는 것은 정사에 있어서도 잘못이고, 개인 신상에 있어서도 상서롭지 못합니다. 신은 이미 재능과 덕망으로 선택된 것도 아니고 또한 연차와 공로가 쌓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순서와 등급을 뛰어넘어 우뚝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니 정사의 체통에는 어떠하며, 물정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영남 변두리의 미천한 출신으로 어리석은 주제에 평소 학문도 제대로 통하지 못해 쓰일 만한 재능이 못 되고, 체질이 허약해 질병마저 더해졌으며, 식견과 도량이 어둡고 얕아서 일에 부딪치면 어쩔 줄을 모르니, 이 어찌 사무를 담당할 만한 그릇이겠습니까?
목수가 나무를 쓰듯 사람을 등용하소서
『서애집』 권4 <대제학을 사양하는 상소>, 선조 21년(1588) 10월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를 겸하게 하자 이를 사양하며신이 듣건대 사람을 등용하는 방법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것을 억지로 크게 할 수 없으며 짧은 것을 늘여서 길게 할 수도 없습니다. 혹시라도 위치를 바꾸려 한다면 버려야 할 재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임무에 따라 인재를 선발해야 현명하고, 신하는 능력대로 직책을 맡아야 충성스럽습니다.
지금 신의 재주로 저의 책임을 헤아려 볼 때,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것은 굳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혈지한안(능력에 넘치는 일을 해 탈이 나는 것)의 졸렬함으로 큰 목수의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감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중하게 다시 대신들과 의논해 속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 막중한 임무가 오래도록 비어 있지 않게 하신다면 조정에 다행일 것입니다.
2장 임금이 떠나면 조선은 우리 소유가 아닙니다
내가 이순신을 천거해 수사로 임명되었다
『징비록』 권1, 선조 24년(1591) 2월 16일 전운이 감돌던 때 정읍 현감이던 이순신을 사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3품 당상관인 전라좌수사로 천거하며이때 왜적이 침범한다는 소문이 날이 갈수록 급해졌으므로 임금은 비변사에 명령해서 각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셨다. 내가 이순신을 천거했는데, 마침내 순신은 정읍 현감을 뛰어넘어 수사로 임명되었다. 사람들이 너무 빨리 승진했다고 의심했다.
진관이라는 이름만 있지 유명무실합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1591) 10월 1일 조선의 국방체제인 제승방략체제로는 왜적의 침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건국 초기에는 각도의 군병을 모두 진관(鎭管)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급한 일이 있으면 진관이 소속 읍을 물고기 비늘처럼 통솔해 잘 정돈하면서 주장(主將)의 호령을 기다렸습니다. 우선 경상도를 가지고 말한다면, 김해ㆍ대구ㆍ상주ㆍ경주ㆍ안동ㆍ진주가 6진(鎭)이 됩니다. 그러다가 적군이 쳐들어와 한 진의 군대가 혹 패하더라도 다른 진이 차례로 군사를 잘 단속해 굳게 지켜서 한 번에 쓰러져 무너지는 데 이르지 않았습니다.
지난 을묘년의 변란 이후 김수문이 전라도에 있을 때 처음으로 분군법으로 고치면서 도내의 여러 읍을 분발해 순변사ㆍ방어사ㆍ조방장ㆍ도원수 및 본도의 병사와 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제승방략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여러 도에서 모두 이것을 본받았습니다. 이로써 진관이라는 이름이 비록 남아 있다고 해도, 실제로는 서로 연관되지 않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겁이 많고 나약합니다
『서애연보』, 선조 25년(1592) 4월 신립이 “아무리 왜적에게 조총이 있다 한들 어찌 다 맞힐 수 있겠습니까?”라며 안이하게 생각하자나라가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겁이 많고 나약합니다. 만약 실제로 변란이 난다면 지탱하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몇 해 후에 군사훈련이 익숙해지면 혹 수습할 수도 있겠지만, 그 처음이 매우 걱정됩니다.
내가 모집한 무사들을 먼저 데리고 가시오
『징비록』 권1,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개전 직후 삼도 순변사 신립이 대궐 문 밖에까지 나가서 무사를 모집했으나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자 이에 체찰사 류성룡이 모아둔 군관들을 내어주며다 같은 나라 일인데 어찌 이것저것을 구별할 수 있겠소? 공이 가는 것이 이미 급하니 내가 모집한 사람들을 먼저 데리고 가시오. 나는 별도로 모집해서 가야겠소.
나라를 버리자는 논의를 누가 내놓았는가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1592) 5월 1일 선조에게 의주행을 건의한 도승지 이항복을 책망하며어찌하여 가벼이 나라를 버리자는 논의를 내놓았는가? 그대가 비록 길에서 전하를 따라 죽더라도 궁녀나 내시가 하는 충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이 한 번 나오게 되면 인심이 와해될 것이니, 누가 수습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피난 가지 말고 굳게 지켜야 합니다
『서애연보』, 선조 25년(1592) 6월 적병에 가까이 이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조정의 신하들이 평양성 밖을 나가 난을 피하자고 주청하자 이에 반대하며오늘의 사세는 도성에 있을 때와 다릅니다. 그때는 인심이 붕괴되어 비록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었지만, 이 성은 앞이 강으로 막혀 있고 민심이 자못 단단합니다. 또한 가까이에는 중원 지방이 있어서 만약 며칠만 굳게 지키면 명나라 군사들이 와서 구원할 것이니, 오히려 의지해서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부터 의주까지는 다시 자리 잡을 수 있는 땅이 없으니 사세가 반드시 망국에 이를 것입니다.
3장 도성의 왜적을 일거에 소멸시켜야 합니다
북쪽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습니까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1592) 7월 1일 평안도 숙천에 머물던 중 함경도로 피난을 가자는 신하들의 권유를 선조가 따르려 하자, 이에 서쪽으로 가서 명나라의 원군을 맞이할 것을 주장하며지금 성상(聖上)께서 서쪽으로 피난하신 것은 본래 명나라에 의지하려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지금 북도에 깊이 들어갔다가 중간에 적병이 가로막아 명나라와 소식이 끊기고, 또 불행히도 적병이 북쪽을 침범한다면 그 위태롭고 절박함이 더욱 심할 것입니다. 지금 조정 신하들의 가족이 모두 동북 지방에 피난해 있기 때문에 각자 사사로운 계책을 마음에 두고 다투어 북도로 피하려 합니다.
신 또한 노모(老母)가 동쪽으로 피난을 떠났으니 반드시 함경도 지역으로 흘러 들어갈 것입니다. 사사로운 계책으로 말한다면, 어찌 북쪽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다만 나라의 대계의 측면에서 사사로운 의도는 용납할 수 없기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위급한 시기에 기댈 것은 오직 인심입니다
『서애집』 권5 <시무를 아뢰는 차자>, 선조 25년(1592) 11월 정주에 있으면서 선조에게 정세와 방책을 보고하며나랏일의 위급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기댈 것은 인심입니다. 인심이 와해되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습니다. 무릇 군공에 대한 작위와 상훈을 즉시 내려 옛사람이 상훈을 시행하면서 때를 넘기지 않았던 뜻에 부합해야 합니다. 또한 군사와 백성들이 적을 잡아 획득한 것은 곧 그 사람에게 주어 백성들이 적을 죽이는 일의 이로움을 알게 해 다투어 적을 토벌하러 일어나게 하면, 적의 기세는 거의 쇠퇴할 것입니다. 강원도의 산골에는 사냥으로 생계를 삼는 자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만약 후한 상을 주어 그들이 수풀 사이에 흩어져 매복해 있다가 출몰해 적을 잡게 한다면, 적이 오가는 북로는 수미가 끊어지고 동남의 형세는 서로 통할 수 있게 됩니다.
왜적과 강화하러 가는 기패에 절을 할 수 없다
『선조실록』, 선조 26년(1593) 4월 19일 기패를 앞세우고 남하하던 명군이 류성룡에게 고두례를 행하라고 요구하자, 기패의 명령이 일본과 강화하라는 뜻이므로 절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며기패(위엄을 더하기 위해서 종이 대신 깃발에 적은 명령서)에 고두례(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는 것)를 행하는 것은 감히 사양할 수 없겠지만, 이것은 곧 적의 진중으로 가는 기패이니 우리들이 어떻게 먼저 고두례를 올릴 수 있겠는가? 또 왜적은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여서 우리나라에서 강화(講和)를 허락할 리가 전혀 없으니 고두례를 올리라는 명을 더욱 받들 수 없다.
군사들이 밤낮으로 배우고 훈련하게 해야 합니다
『서애연보』, 선조 26년(1593) 6월 명나라 군사가 부산을 포위한 채 진격하지 못하고 철수해버리자 정예병을 선택해 훗날에 도모하기를 청하며이렇게 적이 후퇴할 즈음에는 정예 병사를 뽑아 많은 전략을 쓴 뒤에야 적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신이 경기 내 여러 고을의 군대를 살펴보니 여러 해를 적과 싸워서인지 마음과 담력이 이미 단단해 매번 전투마다 먼저 나섭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삼남 지방에는 쓸 만한 자가 더욱 많을 것입니다. 강원도 산간에는 사냥을 생계로 삼아 맹수를 때려잡으며 굶주리고 목말라도 지치지 않는 자가 또한 많이 있습니다. 이제 곳곳에서 그런 자를 뽑아 활과 화살, 전투용 말, 양식을 대주고 용맹한 장수들에게 분배해 항상 훈련하게 하고, 또한 각 고을 수령에게 명해 자기 지역 내의 정예 병사를 가려 뒤섞이지 않게 하여 한 곳에서 변란이 발생하면 서로서로 응원하게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군졸이 잘 훈련되어 전쟁에 임해 적의 소문만 듣고 흩어져 도망갈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적이 믿는 것은 그저 조총뿐이니, 우리나라도 마땅히 밤낮으로 훈련해서 군사들이 배우고 익히지 않은 것이 없게 한다면, 적의 장기(長技)를 우리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4장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습니다
공물과 방물의 폐해를 고쳐야 합니다
『서애집』 권5 <시무를 아뢰는 차자>, 선조 27년(1594) 4월 공물로써 미곡을 만들어서 군수에 보충할 것을 건의하며나라의 토지세는 10분의 1을 내는 것보다도 가벼워 백성들이 무겁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토지세 이외의 일로 각 고을마다 진상하는 공물과 때마다 바치는 방물(지방의 특산물) 같은 것으로 침해를 입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당초에 각 고을의 공물 수를 전결(田結)에 따라 균일하게 나누지 않아서, 고을의 크기에 따라 많고 적음이 현격하게 달라 백성의 고통이 막심합니다.
청컨대 담당 관리에게 한 도의 공물과 전결의 수를 모두 계산해 고을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말고 똑같이 마련하십시오. 그래서 갑이라는 고을에서 1결에 1두(斗)를 내면 을이라고 하는 고을에서도 1결에 1두를 내도록 하고, 2~3두를 내더라도 모두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방물을 바치는 대가를 쌀이나 콩으로 내는 것도 모두 전결에 따라 균일하게 정하면, 결마다 승(升)이나 홉(合)처럼 미미하게 내는 데 불과해서 백성이 방물이 있는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상 또한 모두 쌀이나 콩으로 대납하게 해 경창(京倉)으로 수송하고 물가를 계산해 담당 관리에게 사서 쓰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군용 물자가 부족하거나 나라에서 별도로 조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진상하는 공물ㆍ방물의 수량을 계산해 감해주면 되니, 창고에 저장해둔 쌀과 콩을 번거롭게 환작하지 않아도 무궁히 쓸 수 있습니다.
도성에 1만의 정예병을 두어야 합니다
『서애집』 권5 <시무를 아뢰는 차자>, 선조 27년(1594) 4월 공물로써 미곡을 만들어서 군수에 보충할 것을 건의하며지금은 국고가 텅 비어 비록 병사를 훈련시켜 왜적을 방어하려 해도 계책이 나올 곳이 없었는데, 신이 요즘 한 가지 계책을 얻었습니다. 각 관청의 노비ㆍ제원(승문원ㆍ상의원ㆍ시옹원ㆍ사복시ㆍ전설사 등에 배치된 하인)ㆍ조례(도성의 각 관청에서 부리던 하인), 장악원의 악공ㆍ악생, 개인 집의 봉족(군역에 종사하는 사람의 집안일을 보조하는 사람)을 모두 합하면 약 20만 명입니다. 지금은 변란이 있은 뒤여서 평상시의 숫자대로 구할 수 없겠지만, 거의 10만 명에 이르거나 혹은 넘을 것입니다.
만약 상번(上番)을 제외하고 각자 1석씩의 쌀을 바치게 하면 그 수는 10만여 석에 이릅니다. 이어 도성에 정예하고 용맹한 자 1만 명을 소집해 5영에 나누면 영마다 2천 명이 됩니다. 이들을 법에 따라 훈련시키면 이 도성 안에는 항상 1만의 정예병이 있어 근본이 견고해집니다. 또한 1만 명을 두 교대로 나누어 군영마다 항상 1천 명을 상주시키고 남은 5천 명은 따로 경기도 안의 비옥한 노는 땅에 나누어 배치하고 농사를 지어 그 반은 그들이 먹고 반은 관청에서 취하게 하면, 양식을 자급하는 길은 날로 넓어지고 응모자도 구름같이 모일 것입니다.
인재의 기준은 출신과 문벌이 아닙니다
『서애연보』, 선조 28년(1595) 1월 문벌과 출신을 떠나 오직 재주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을 청하며하나, 지금 사람을 등용할 때 반드시 문벌을 따지는데, 문벌이나 비천함을 따지지 말고 오직 재주에 따라 등용하십시오. 또한 우리나라는 남쪽 지역의 선비를 많이 쓰고 서북에서는 전혀 없었다가 이제 겨우 몇 명이 있습니다. 실제로 서북에 일찍이 재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변란이 일어난 이래 7도가 와해되고 어가가 서쪽으로 거둥했을 때에 관서 사람들은 그 마음과 힘을 다해 접대하느라 바빴고, 군사를 차출해 군량을 운반하고 명나라 군사들에게 길을 인도했습니다. 이렇게 해 국토를 수복했으니, 그들의 공로가 매우 크지만 지금 조정에 등용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이와 같으니, 무엇으로 그 지역의 민심을 위로하며 장래를 위해 권고하겠습니까? 청컨대 해당 관청에 명하여 널리 더 찾도록 해 함경도 사람과 함께 간간이 발탁해 등용하고, 인재들을 다투어 권고하게 해 남과 북에 차이가 없게 하십시오.
5장 나라를 구했지만 더 큰 시련이 시작되다
나라의 근본인 도성은 반드시 고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