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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식계보학

최연식 지음 | 옥당



조선의 지식계보학

최연식 지음

옥당 / 2015년 2월 / 336쪽 / 16,000원





제1부 지식국가 조선의 탄생



역사가들은 왕조의 극적 교체라는 사실에 주목해 조선 건국의 의미를 평가한다. 하지만 건국 과정에서 드러난 문명 전환의 다면성에 주목해 조선 건국의 의미를 평가하기도 한다. 왕조의 극적 교체를 강조하는 관점에서는 위화도 회군과 공양왕의 폐위를 주도한 무장 이성계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것은 조선을 말 위에서 세운 나라로 보는 관점이다. 반면에 문명 전환을 강조하는 관점에서는 물리적 혁명뿐 아니라 혁명을 완성할 제도와 정신 개혁에 주목하게 된다. 이것은 관료제의 확립과 과전법 체제의 구축 등과 같은 사회 경제상의 제도 개혁과 제도 개혁을 추동한 유교 이념의 확산을 강조하는 입장이며, 조선을 명실상부한 유교의 나라로 만든 지식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마상의 건국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그들은 임금의 도리를 잃고 민심을 저버린 공양왕의 실정을 문제 삼았지만, 사실 조선의 건국은 홍건적과 왜구의 도발을 진압하며 세력을 키워가던 무장 세력이 무력을 배경으로 선양을 강요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에서 조선의 건국은 백성들과는 무관한 지배층 내부의 정치투쟁적 성격을 띠었다. 따라서 민심의 지지 없이 권력을 장악한 건국 세력은 저항 세력과 백성들에게 건국의 정당성을 합리적으로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곧 고려의 정신에 맞서는 동시에 조선의 비전을 제시하는 문제였다. 이성계는 육생이 한 고조 유방에게 “마상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마상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했던 충고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려에 대한 충성을 선택한 정몽주와 화해를 시도했고, 정도전의 새로운 문명 설계도를 받아들였다.

조선 건국은 문명의 설계자 정도전을 중심으로 판단한다면, 이념과 제도의 건국이었다. 반면 불사이군의 충절을 조선의 정신으로 승화한 정몽주를 중심으로 판단한다면, 그것은 정신의 건국이었다. 즉, 정도전은 왕권에 대한 경계를 이념과 제도에 담으려 했고, 정몽주는 부당한 권력에 희생된 지식인들의 정신적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건국의 숨은 두 주역,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다. 더구나 정몽주가 고민했던 정신의 건국이 갖는 의미를 지식인들이 주목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제도의 건국

고려는 고종 18년(1231)부터 공민왕 5년(1356)까지 무려 120여 년 동안 몽골의 침략을 받으며 국가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갔고, 고려 사회의 영혼을 지탱했던 불교는 정치권력과 결탁해 타락하고 있었다. 기울어가던 고려 사회가 회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공민왕이 시도한 개혁정책의 성패에 달려 있었다. 결과적으로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공민왕이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시도한 유학 부흥운동은 성리학으로 무장한 새로운 지식인 집단의 성장을 도왔다. 공민왕은 1367년에 성균관을 새로 짓고 학생 100명을 선발해 오경재와 사서재 두 기숙사에 나누어 수용했다.

당시 성균관에서 진행한 성리학 연구의 중심에는 정몽주가 있었고, 정도전은 그의 명성을 일찍부터 듣고 있었다. 정도전이 정몽주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그가 16~17세 되던 무렵이었다. 이때 그는 성률(聲律)을 맞추는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민자복에게서 “사장(詞章)은 지엽적인 재주[말예(末藝)]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심신(心身)의 학문인데, 그것은 모두 『대학』과 『중용』에 갖추어져 있다”는 정몽주의 말을 전해 들었다. 정도전은 이 말을 듣자마자 그 두 책을 구해 읽었는데, ‘비록 의미는 잘 알지 못했지만 자못 기뻤다’고 회고했다. 정도전이 글재주만 꾸미는 사장의 학문에서 벗어나 성리학적 세계관에 개안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 정도전은 세 번 연속 장원 급제한 정몽주를 찾아가 직접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정몽주는 정도전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지만 이때부터 둘은 사제지간이자 친구의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정도전은 관직 생활 초기에는 주로 성균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순탄한 관직 생활은 1374년에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1375년, 북원에서 사신을 보내 명나라를 협공하자는 제의가 들어오자 이인임과 경복흥은 정도전에게 북원의 사신을 영접하라고 명령했지만, 정도전은 그들의 목을 베거나 명나라로 압송하겠다며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결국 정도전은 이인임과 경복흥의 노여움을 샀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에 유배되었다. 정도전은 처음 유배를 떠난 1375년부터 함주의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간 1383년까지 8년간 유배와 유랑을 전전하며 변덕스러운 세상의 인심을 익혀가고 있었다.

1383년 가을, 정도전은 이성계를 만나려고 함주로 갔다. 또 1384년 여름에 다시 함주로 이성계를 찾아갔고, 돌아온 직후인 1384년 7월 정도전은 전교부령에 복직되고, 우왕의 왕위 계승 승인과 공민왕의 시호를 요청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이때 그는 성절사 정몽주를 서장관 자격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1385년 4월 사행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한 바로 그날 성균좨주 겸 지제교에 임명되어 성균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에 여생을 보낼 목적으로 외직을 자원해 남양부사로 떠났다.

정도전은 남양부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1388년에 중앙 정계로 복귀했다. 당시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그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추천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정도전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믿는 진리가 통용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온전히 그의 편이 되지 못했다. 역사는 기록되는 시점에서 승리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경복과 근정의 나라

1394년은 정도전이 본격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제도를 설계한 해였다. 이해 5월 그는 조선 최초의 헌법전이자 『경국대전』의 원형이 된 『조선경국전』을 편찬했다. 정총이 쓴 『조선경국전』서문에 따르면, 이 책은『주례』의 육전 체제에 따라 편찬되었다. 다만, 정도전은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 등으로 구성된 육전의 명칭을 부분적으로 바꿔 치전, 부전(賦典), 예전(禮典), 정전(政典), 헌전(憲典), 공전 등의 편제로 구성했다. 그리고 정도전 스스로 밝혔듯이, 형법과 관련된 부분인 헌전은 『대명률』을 참고했다.

정도전은 조선이 영원토록 경복(景福)을 누릴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이 먼저 사욕을 버리고 근정(謹政)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혈통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는 정치는 아무리 합리적인 기준을 세우더라도 왕위 계승의 적격성에 대한 시비와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연의 정치였다. 따라서 정도전은 정치의 우연성을 배제하기 위해 제도에 의한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고, 우연과 사익이 정치에 개입되는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사병 혁파를 주장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역린(逆鱗)을 건드리고 말았다. 『한비자』〈세난〉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무릇 용이란 짐승은 길들여 탈 수 있다. 그런데 그 턱 밑에 지름 한 자 정도의 거꾸로 박힌 비늘(역린)이 있다. 만일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 군주에게도 마찬가지로 역린이 있다. 유세하는 자가 능히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효과를 기대할 만하다’

결국 사병 혁파는 이방원의 몫이 되었다. 그는 태조의 4남 이방간과 권력 투쟁에서 승리해 용이 되는 길을 열었고, 곧바로 사병 혁파를 단행해 신하들이 역린을 건드릴 수 있는 소지를 원천봉쇄했다. 당시 사병 혁파를 주장하는 상소문은 권근과 김약채 등이 작성했다. 주장의 핵심은, 병권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권력 기반이므로 나누어가질 수 없고, 사병을 양성하는 것은 임금을 위협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논거를 “신하는 무기를 비축해서는 안 된다”는 공자의 말과 “병기나 갑옷을 사가에 감추는 것은 예가 아니라 인군을 협박하는 행위”라는 『예기』의 구절에서 찾았다. 권력 집중을 통한 왕권의 안정은 용이 된 태종에 의해 실현되었고, 그 이념적 토대는 『예기』의 대가였던 권근이 제공했다. 결국 정도전은 역린을 건드렸지만 그가 꿈꾸던 나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 내용을 채워가기에 충분한 설계도로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제2부 사화와 반정 그리고 조선 지식인의 상징



정도전은 조선이 경복과 근정의 나라로 오래 지속되길 바라며 새 왕조 설계를 주도했다. 그는 절제되지 않은 임금의 권력이 폭정으로 기울 것을 우려했고, 임금의 사익 추구를 견제할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맹자』를 즐겨 읽었던 그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진정한 지식인이라고 믿었다. 비록 그의 신념은 거대한 왕권의 벽에 부딪혀 당대에는 실현될 수 없었지만, 연산군의 폭정을 종식시킨 반정(反正) 시대에 그의 정치적 맞수였던 정몽주의 부활을 계기로 되살아났다.

단 하루도 조선을 위해 살지 않았던 고려 지식인 정몽주가 조선 지식인의 상징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평정심을 잃은 임금 연산군의 폭정 때문이었다. ‘반정’의 어원인 ‘발란반정(撥亂反正)’이 난세의 진압과 정도의 회복을 의미하듯이, 지식인들은 진정한 의미의 반정은 폭정의 종식이 아니라 연산군 이전의 정상적인 정치의 회복이라고 믿었다. 이때 지식인들이 회복시키려던 정상적인 정치는 대간의 언론활동을 통해 임금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제한할 수 있었던 성종 시대의 정치였다.

폭정은 연산군 개인의 성향에서 비롯되었지만 성종의 치세가 남긴 부정적 산물이기도 했다. 13세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후견인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성년이 된 이후에야 후견세력을 견제할 대간을 육성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면, 연산군은 왕세자로 책봉된 8세부터 제왕 수업을 받았고, 19세에 즉위했기 때문에 대간의 언론활동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다. 결국 연산군은 왕권 행사에 걸림돌인 대간의 자유로운 언론활동을 봉쇄했고, 자신에게 맞선 지식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지식인의 희생, 즉 사화(士禍)가 시작된 것이다.

폭정을 종식시킨 반정의 아이콘은 중종이었다. 그러나 그는 옹립된 임금에 불과해 반정의 시대정신을 제시하지 못했고, 그 몫은 중종이 발탁한 조광조를 비롯한 젊은 지식인에게 맡겨졌다. 이들은 사화에 희생된 스승을 문묘에 종사해 새로운 시대의 표상으로 삼고자 했지만 당시에는 문묘 종사 적격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그들은 그들의 스승과 사승관계(師承關係)로 연결된 정몽주를 최종 대안으로 선택해 부당한 권력에 맞선 정의로운 지식인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고려인 정몽주가 조선 지식계보의 기원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려의 지식인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반역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조선 지식계보의 기원은 계보 작성자들이 주장처럼 처음부터 도덕적으로 투명한 것은 아니었다.

반정의 상징을 찾아서

종묘가 왕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마련된 사당이라면, 문묘는 지식인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사당이다. 문묘는 종묘와 함께 유교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이기 때문에 태조는 문묘 건립을 추진해 태조 7년(1398)에 완공했다. 그리고 태종 7년(1407)에는 정종 2년에 소실되었던 문묘를 신축하고 오성(五聖)과 공문십철(孔門十哲)을 종사하는 문묘의 형식을 갖췄다(『태종실록』, 7년 3월 21일; 5월 6일). 그러나 당시 조선의 문묘에는 고려 때 이미 결정되었던 설총, 최치원, 안향만 종사되어 있었기 때문에, 태종 9년(1409)에 사헌부를 통해 이들 이외에 조선의 정신을 대표할 새로운 문묘 종사자를 선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당시 사헌부는 문묘의 형식이 비록 중국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더라도 문묘의 내용과 정신은 조선적인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사헌부는 문묘 종사 대상자의 자격 요건으로 학문적 업적과 정치적 헌신을 제시했다. 우선 문묘 종사 대상자는 상당한 수준의 학문적 업적도 갖추어야 했지만, 그가 쌓은 학문의 내면에 도덕적 진실성이 담겨 있어야 했다. 다음으로 문묘에 종사될 수 있는 인물은 정치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임금에게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그러나 문묘 종사 대상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세종 1년(1419) 8월이었다. 당시 사간원 좌사간 정수홍은 태종 9년에 사헌부가 제시한 문묘 종사 대상자의 자격 요건과 동일한 기준에 따라 권근의 문묘 종사를 청원했다. 그는 조선 최초의 문묘 종사 대상자로는 학문적 업적과 정치적 역량 면에서 정몽주보다는 권근이 더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정수홍은 권근이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을 저술해 조선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입학도설』이 후학들에게 성리학에 입문하는 길을 열어준 책이라면, 『오경천견록』은 선학들의 미진한 점을 밝혀낸 책이라면서 그의 학문은 선학들의 업적을 잇고 후학들의 앞길을 개척했다는 의미에서 계왕개래(繼往開來)의 공로가 있다고 평했다. 또 정수홍은 태조 5년(1396)에 권근이 정도전을 대신해 명나라에 파견되어 양국의 외교 마찰을 원만히 해결하고 돌아왔던 공로를 지적했다.

그 후 권근에 대한 문묘 종사 논의는 세종 15년(1433)과 18년(1436)에 두 번 더 제기되었다. 먼저 세종 15년 8월에 권근의 문인이었던 성균관 사에 김반은 권근이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을 집필했던 학문적 성과를 거론하며, 그의 학문이 이제현(1287~1367)과 이색에 연원을 두고 발전한 것이므로 세 사람을 모두 문묘에 종사하자고 주장했다(『세종실록』, 15년 2월 9일).

또 세종 18년 5월에는 성균관 생원 김일자가 이제현, 이색, 권근의 문묘 종사를 다시 청원하며, 그들이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던 점을 강조했다(『세종실록』, 18년 5월 12일). 권근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마지막 논의는 세조 2년(1456) 3월에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1415~1482)가 제기했다. 그러나 권근에 대한 문묘 종사 논의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특히, 성종 시대에는 이제현, 이색, 권근의 계보를 문묘 종사의 논의 대상에서 완전히 배제했다.

이제현, 이색, 권근의 계보가 문묘 종사 대상에서 배제되면서, 이제까지 거론되었던 문묘 종사 대상자 중 대안으로 논의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는 정몽주만 남았다. 그러나 정몽주의 문묘 종사가 다시 거론된 것은 성종 8년의 마지막 논의 이후 33년이 지난 중종 5년(1510)이었다. 당시 사간원 정언 이려(1484~1512)가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청원했다.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은 중종 9년(1514)에 김구(1488~1534)에 의해 다시 한 번 제기되었다. 그러나 김구의 제안은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났다. 그 후 정몽주의 문묘 종사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중종 12년(1517) 8월이었다. 이때는 중종반정이 성공한 지 10여 년이 지났고, 박원종(1467~1510), 유순정(1459~1512), 성희안(1461~1513) 등 반정의 주역들도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리고 이때는 “조광조가 아뢴 바는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사림의 공론”이라고 했던 대사간 방유령(1460~1529)의 말 그대로(『중종실록』, 10년 12월 4일), 조광조가 사림 전체의 공론을 이끄는 주역으로 부상한 이후였다.

아무튼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성공시킨 주역은 조광조와 그의 추종세력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한 김굉필의 문묘 종사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대안으로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시킴으로써 부당한 권력에 맞서다 희생된 지식인의 절의정신을 치세의 상징이자 시대정신으로 부활시켰다. 이 점에서 정몽주는 김굉필의 정신적 기원이자 시대정신의 상징으로 조광조 등에 의해 초혼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정몽주의 절의정신이 반정시대의 시대정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위해서는 정몽주의 학문이 길재, 김숙자, 김종직을 거쳐 김굉필과 조광조에게 계승되었다는 선명한 계보가 확립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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