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배신
도현신 지음 | 인물과사상사
국가의 배신
도현신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5년 2월 / 252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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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속아서 끌려다니다 희생되다 - 국민방위군 사건
무엇을 위해 조직된 단체였나?: 국민방위군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17일부터 시행된 제도다. 당시 전황은 매우 급박했다. 북한을 도와 참전한 중공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을 밀어내며 남진을 하고 있었다. 국군은 물론이고, 미군조차 소위 ‘인해전술’을 쓴다는 중공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던 터라, 온 나라에는 자칫 전쟁에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에 이승만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우리도 인해전술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군 이외에 따로 청장년들을 조직해 별도의 군대를 편성했다. 국회에서는 17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자들을 징병ㆍ모병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통과시켰다.
국민방위군 설치법은 1950년 12월 16일에 국회에서 통과되어 21일에 공표되었는데, 법이 공표되기도 전인 12월 17일부터 강제징집이 시작되었다. 처음 국민방위군 관련 예산을 편성할 때 목표했던 인원수는 50만 명이었다. 그런데 막상 군대와 경찰이 각 지역에서 강제징집을 하고 보니 그 사람들의 수가 무려 100만 명이나 되었다. 이는 애초에 징집 대상이 아닌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끌고 간 결과였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미 국민방위군의 실패는 예고되어 있었다. 애초에 정해진 50만 명의 인원도 그 무렵의 정부 재정으로 다 먹여 살리기 어려운데, 실제로 그보다 두 배나 많은 수가 징집되었다면 보급의 어려움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어떠한 전투든지 간에 보급이 없으면 싸울 수 없다.
국민방위군을 조직한 정부도 우리 군의 보급 부족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한 예로 국민방위군 설치법 통과 후 전국 각지에서 징집된 장정들은 임시 수도인 부산까지 내려가야 했는데, 한겨울인 12월이었음에도 국민방위군 장병들에게 겨울용 동복과 군화가 지급되지 않았다. 동복과 군화 관련 예산을 정부에서 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방위군을 담당한 전국 각지의 훈련소는 그들을 제대로 훈련조차 시키지 못하고, 그냥 다른 훈련소로 가라고 내보내는 일이 고작이었다. 식량과 무기가 형편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책임한 국가라 해도 무기와 장비와 식량도 없는 걸인 비슷한 집단을 조직해놓고 중공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방위군이 창설된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전후 상황들로 추측해보건대, 국민방위군은 애초부터 적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북한군이 신속하게 남진한 한국전쟁 초반에, 서울 시민들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그중 많은 수가 북한의 의용군으로 탈바꿈하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쉽게 말하자면 중공군과 북한군이 아군을 병사나 노역부로 쓰지 못하도록, 그들이 점령할 것으로 예측되는 지역들에서 미리 청장년들을 포섭하는 것이 국민방위군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따라서 국민방위군은 설립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달리 생각해보면, 국민방위군에 포함된 사람들은 애초에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너무나 비참했던 죽음의 행렬: 이렇듯 조직된 동기부터가 극도의 인명 경시적 사고에서 시작된 국민방위군은 얼마 못 가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우선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가 문제였다. 앞서 말했듯, 국민방위군 인원의 대부분은 강제징집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미처 겨울용 옷이나 신발을 구하지 못하고 평상복 차림 그대로 끌려왔다. 병사들은 군에서 동복과 군화를 지급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국민방위군을 편성할 때 각 언론사에 뿌린 다음과 같은 선전기사 때문이었다. “국민방위군은 50만에서 100만 사이의 건장한 청년들로 편성되었습니다. 정부는 총 209억 원의 막대한 예산을 마련해, 이들에게 산더미 같은 각종 군수품을 넉넉히 지급했습니다. 현재 국민방위군 병사들은 철저한 훈련을 받고 얼마 안 가서 전선으로 출정해 용감하게 싸워 공산군을 물리칠 것입니다.”
대다수 국민들과 국민방위군에 징발되어 끌려온 사람들은 이런 군 당국의 거짓 선전을 그대로 믿었다. 하지만 선전 내용과는 정반대로 군 당국은 국민방위군 병사들을 극도로 홀대했다. 국민방위군 병사들은 싸늘한 겨울 추위를 견디면서 힘든 강행군을 하느라 발에 동상이 걸렸고, 심지어 하나둘씩 죽어갔다. ‘단지 추운 날씨에 시달렸다고 사람들이 죽어나갈까?’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의 열악하고 부실한 보급 체계를 감안한다면 결코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국민방위군 관련 예산에는 병사를 위한 난방 지원과 그들의 치료를 담당할 의료 부문이 아예 없었다. 식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국민방위군 병사 1명에게 지급되는 하루 식량은 곡식 4홉(1홉은 약 180밀리리터)인데, 북한군이나 중공군이 포로에게 주는 하루 치 식량은 곡식 5홉이었다. 국민방위군 병사들은 적군의 포로들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그나마 이것조차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정리한 자료에는 이와 관련된 다른 내용의 인터뷰도 포함되어 있다. 2010년 3월 15일의 진술 조사에서 심 모 씨는 자신이 체험한 국민방위군 생활을 고백했는데, 제주도 서귀포초등학교의 20평 규모의 교실을 200여 명이 사용해 앉아 있기도 힘들었으며, 운동장에 나가면 모두 기침을 하고 검은 가래침을 뱉었다고 한다. 식사는 주먹밥에 소금국과 고사리가 전부였으며, 그나마도 서로 먼저 건져 먹겠다고 식사 시간이 되면 아비규환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나마 양심이 있던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국가에서 발급받은 양곡권을 들고, 행군로 주변의 마을을 찾아가 식량을 얻어내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이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12월에서 1월이라는 한겨울에, 50만 명이나 되는 많은 병사를 먹여 살릴 식량을 비축한 마을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양곡권을 내밀어도 더 이상 내놓을 식량이 없으니 군 간부들이 없는 식량을 만들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대로 먹지를 못하니 자연히 몸은 쇠약해졌다.
짐짝처럼 버려지다: 각지에서 죽어간 국민방위군 병사들의 시체는 과연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1951년 3월 무렵에 국회의원 몇 명이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에 대해 조사를 하러 나왔다가 경남 마산 교외의 밭두렁에서 새끼줄에 매인 국민방위군 병사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병사들의 시체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조사 결과 기간 사병들이 병사들의 시체를 새끼줄로 매어 끌고 나오다가 귀찮은 나머지 그대로 밭두렁에 버린 것으로 밝혀졌다. 또 김해 읍장이었던 허성룡은 김해에 도착한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매일 2~3명씩 죽어나가는 바람에 그 시체들을 일일이 매장할 수 없어서 거적때기로 덮어 막사 옆에 두었다가, 어두워지면 공동묘지에 묻었다고 증언했다. 처음에는 봉분도 만들어주었으나, 시체가 너무 많아져서 그조차도 중단해버렸으며, 죽은 인원이 몇 명이든 한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이렇듯 국민방위군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스러운 죽음의 행군을 계속 이어가야 했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꼼짝없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갖고 있던 시계나 금반지 같은 패물을 국민방위군 장교들에게 갖다 바치고, 그 대가로 병역을 면제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있었다. 그럴 재물이 없는 사람들은 불평을 늘어놓다가 불순분자로 몰려 처형당했고, 용기는 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행군을 하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달아났다. 용기도 돈도 없는 사람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묵묵히 걷다가 하나둘씩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서 죽어갈 뿐이었다. 병사들을 인솔하는 국민방위군 장교들은 그런 상황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그들을 치료하거나 구하기 위한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저 죽어가는 병사는 그냥 대열에서 치워버리고,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그대로 계속 걸었다.
‘죽음의 행렬’에서 도망쳐 나온 병사들의 입을 통해 국민방위군의 비참한 실상이 알려지자, 여론은 분노로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이 문제를 국회에서 정식 거론하고 이승만 정부가 무계획적인 국민방위군 편성으로 수많은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강도 높게 정부를 비판했다.
대통령과 국방장관, 사령관의 거짓말 행진: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은 1951년 1월 8일의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앞에는 국민방위군 50만 명이 있고 …… 먹일 식량이 있고 산같이 쌓인 군기군물(軍器軍物)이 있다.” 하지만 의혹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김윤근은 1월 20일에 다시 기자회견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0만 국민병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일부 불순 세력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음은 실로 유감이다.”
국방부 장관 신성모와 이승만도 그를 감싸기 위해 노력했지만 분노한 민심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고,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시위가 부산의 임시 국회 앞에서 연일 계속되었다. 더 이상 진실을 은폐하는 데 한계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사건의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꼼수를 부렸다. 신성모는 자신의 사위이자 심복인 김윤근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친구인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을 국민방위군 사건을 담당할 재판장으로 임명했다. 이선근은 불과 사흘 만에 국민방위군 부사령관 윤익헌에게 징역 3년 6개월이라는 가벼운 형을 선고했고, 나머지 간부들은 모두 무죄 처리했다.
이런 판결에 민심은 더욱 분노했다. 민중과 야권의 거대한 분노 앞에서 전전긍긍하던 이승만 정부는 결국 고심 끝에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해임하고, 대신 이기붕을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이기붕은 이승만의 의중을 잘 헤아려 국민방위군 재판을 다시 열었다. 1951년 7월 5일, 대구에서 열린 육군고등군법 회의장에서 김윤근과 윤익헌 등 국민방위군의 최고 간부 5명은 그들이 저지른 공금 횡령 등의 비리가 드러나 사형 선고를 받았고, 결국 대구 교외의 한 야산에서 전원이 공개 총살을 당했다.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처형당한 국민방위군은 더 이상 존속이 불가능해졌고, 1951년 4월 30일, 국회에서 ‘국민방위군 사건 설치법 폐지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얼마나 죽었을까?: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죽어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정부 기관에서 제대로 된 희생자 집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식적 통계에는 1,000명이 조금 넘는 것으로 나오지만, 국민방위군 사건을 겪은 당사자들은 1,000명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었으리라고 본다. 《부산일보》가 간행한 《임시수도 천일》에서 집계한 사망자 수는 5만 명이었고,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에서는 사망자가 10만 명 정도였으리라 추정했다. 그런가 하면, 이 사건을 담당했던 국회 조사단은 27만 명의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행군 기간에 죽거나 행방불명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국가가 국민들의 목숨을 값싼 소모품 정도로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제2의 국민방위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몇 번이고 반복되기 마련이다.
폭력국가
무고한 국민을 깡패로 둔갑시키다 - 삼청교육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조폭이나 불량배 같은 범죄자들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서 치안이 안전했으니, 다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삼청교육대로 보내버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꽤 많다. 그러나 과연 삼청교육대를 두고 그런 식으로 편하게 말할 수 있을까? 삼청교육대라는 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선진 국가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끔찍한 인권유린이었고, 삼청교육대를 만든 권력자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진실을 숨기는 데 급급했다.
삼청교육대를 만든 것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였다. 이 조직은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은 10ㆍ26 사태 이후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의 모임이었다. 왜 이들은 삼청교육대를 만들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 정권을 쥔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세력에 겁을 주기 위함이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일당은 불량배들을 제거해 사회를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댔다. 그러나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 범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삼청교육대의 진짜 목적은 범죄 소탕이 아니라 공포 분위기 조성에 더 가까웠다.
1980년 8월 1일부터 11월 27일까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조치로 경찰들에 의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그 수는 6만여 명에 달했다. 문제는 각 경찰서마다 담당 지역에서 최소 200명 이상을 무조건 잡아와 숫자를 채우라는 할당량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만약 이 할당량을 어기면 해당 지역의 경찰서장들이 자리에서 쫓겨날 판국이었다. 결국 이들은 자리 보존을 위해서 눈에 불을 켰고, 할당 인원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삼청교육대에 끌고 갔다.
당시 삼청교육대 인원 선별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는 2002년 《시사저널》에서 보도한 「여자 삼청교육대는 끔찍했다」라는 기사에 잘 드러나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여자들도 있었고, 범죄자가 아닌 평범한 가정주부나 심지어 15세 여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염전 문제로 마을 주민들과 다투거나, 횟집에서 술값 시비를 벌였거나, 화투판이나 싸움이 난 현장을 구경하다가 경찰에 끌려갔다. 이는 경찰들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결과였는데, 경찰이 붙잡아 온 사람들을 넘겨받은 군 관계자조차 “경찰이 엉터리로 잡아다 인계해 정말 기가 막혔다. 내무부 장관에게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밖에도 몸에 문신이 새겨져 있으면 무조건 조폭이나 불량배로 간주해서 잡아들였고, 심지어 자기가 무슨 이유로 끌려왔는지 잡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사람도 많았다. 한 피해자는 자신이 군인들의 빨래를 해주러 전방 부대에 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개중에는 버스를 타고 삼청교육대로 끌려가다가 경찰에 뒷돈을 주고 중간에 내린 사람도 있었다. 이 말은 뇌물을 줄 돈이 있는 사람은 처벌을 안 받았고,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만 끌려갔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삼청교육대가 불량배 소탕과 범죄 예방에 효과적이었다는 인식은 틀렸다고 볼 수 있다. 경찰이 범죄 용의자들을 잡아들였다가 그들에게서 뒷돈을 받고 풀어준다는 것은, 경찰이 지독하게 부패했거나 아니면 애당초 그들이 범죄 용의자가 아니어서 돈을 받고 풀어줘도 괜찮다고 경찰이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군부의 요직에 있던 고급 군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전두환과 신군부에 저항했다가 정적 처벌의 차원에서 삼청교육대로 연행되었다. 한 예로 육군보안사령관을 지냈던 강창성은 하나회가 군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며 이를 해체하려 했다가, 전두환의 미움을 사서 삼청교육대를 무려 네 번이나 끌려갔다.
길고 지옥 같았던 생활: 경찰에 끌려간 사람들은 네 등급으로 나누어 분류되었다. A급은 조폭이나 마약, 강도 현행범으로 분류되어 군사재판에 넘겨져서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B급은 조폭의 행동 대원이나 사기꾼 및 상습 도박자였는데 4주일 동안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순화 교육을 받은 다음에 근로봉사대라는 별도의 조직으로 끌려갔다. C급은 B급보다 완화된 기준에 따라 4주일 동안만 삼청교육대에서 교육을 받고 석방된다고 발표했다. D급은 경범죄자로 분류되어 훈방되었다. 이 네 등급에 따라 경찰에 체포된 사람들은 6만여 명이었다. 그들 중 1만 7,000여 명은 D급으로 분류되어 석방되었고, 3,000명은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그리고 나머지 4만여 명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