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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감정 때문에 힘든 걸까

김연희 지음 | 소울메이트



왜 나는 감정 때문에 힘든 걸까

김연희 지음

소울메이트 / 2014년 12월 / 276쪽 / 14,000원





1부 감정에 대해 제대로 알자: 첫걸음 떼기



감정이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 걸까?

감정, 미운 오리에서 백조로: 보통 감정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쓰인다. 감정적인 사람은 지나치게 정에 이끌려 손해를 볼 수도 있고, 흥분을 잘하는 등 감정 기복이 큰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에 이성적인 사람은 냉철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리분별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리라고 기대한다. 우리는 정신적인 활동을 할 때 생각하고 느끼는 2가지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렇듯 감정은 이성에 비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다. 서양의 합리주의 철학사조에서는 특히나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에 의해 관리되는 합리적인 사고체계를 갖추는 것이 오랜 주제였다. 물론 스피노자처럼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를 무시하지 말고 이해할 것을 요구한 선구적인 철학자도 있었지만 말이다.

현대에 이르러 이성이 감정보다 우위를 점하고 또 그래야 한다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그 근거를 잃고 있다. 1994년 출판된 『데카르트의 오류』라는 책에서 포르투갈 출신의 미국 뇌과학자 안토니오 디마지오는 판단을 내리는 데 감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신의 환자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유능한 변호사였던 엘리엇은 이마의 종양 제거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직장에서 곧잘 쫓겨나는 형편없는 변호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의 기억력, 주의력, 언어능력, 논리성 등 대부분의 인지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면 대체 뭐가 문제였던 것일까? 엘리엇의 신경과 주치의였던 디마지오 박사는 엘리엇이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전혀 감정이 없고 무관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엘리엇은 과거 자신의 실패 경험은 물론 뇌종양 수술 이후 계속되는 직업적 좌절에 대해서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의사에게 말했다고 한다. 디마지오 박사는 뇌종양 수술로 전두엽의 일부가 제거되면서 감정의 중추인 편도와 관련된 신경회로, 사고기능을 하는 신피질 사이의 연결고리들이 함께 제거되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 엘리엇은 진료예약 날짜를 잡을 때조차도 결정을 내리지 못해 극도로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다. 의사가 제시한 날짜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좋고 나쁜 점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어떤 것이 좋고 싫은지는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전혀 선택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엘리엇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도 중요하지만 감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안타까운 세월호 사고에서도 이성을 압도하는 감정의 힘을 볼 수 있다. 배가 뒤집혀 물이 차오르는 상황에서 밖으로 나가야 자신이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와 제자를 구하기 위해 배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내린 판단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이렇듯 위급한 순간에는 감정이 이성을 압도해 행동을 하게 만들고 이러한 상황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면서 감정이 가지는 존재 가치가 증명되어왔다고 주장한다.

감정에 휩싸인 결정이 손해로 이어지거나 좋지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채 결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성과 감정을 대립적으로 보고 어느 하나를 배제하려고만 하는 태도는 잘못이다. 누군가와 사귀고 결혼을 하고 직업을 선택하거나 이직을 하고 아기를 낳고 집을 사는 등 인생의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이성의 판단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감정의 호소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음과 몸은 한통속으로 상호작용을 한다

마음이 아파 몸도 아픈 캔디: 곱게 예쁨 받으며 자랐을 것 같은 인상과는 달리 K양이 털어놓는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K양의 아버지는 K양이 5세 때 사업에 실패하고 어머니와 서류상 이혼을 한 뒤 나중에 기반을 잡고 나면 부르겠다며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만 데리고 호주로 도피성 이민을 갔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는 호주에서 다른 여자와 재혼을 하고 경제적 지원을 끊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미술에 소질을 보이던 K양은 아버지에게 호주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무작정 편지를 써 보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초청으로 호주로 갔지만 기대와는 달리 미술 공부는커녕 배다른 남동생을 돌보고 집안 살림을 해야 했다. 1년간 학교도 못 가고 식모처럼 일만 하던 K양을 보다 못한 10살 위 오빠가 아버지와 싸워서 학교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새어머니의 구박 속에 지내던 K양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오빠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충격을 받고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2년 전부터 사내 연애를 해오던 K양은 남자친구가 6개월 전 갑자기 퇴사를 하더니 휴대전화 번호도 바꾸면서 일방적으로 차이게 되었다. 헤어지게 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어 함께 알고 지내던 지인을 통해 수없이 연락을 취해봤지만 거절만 당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의아함과 당혹감이 서서히 억울함과 분노로 바뀔 무렵 가슴이 지나치게 두근거리는 증상이 찾아왔다. 심장수술을 하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실까 봐 불안해졌다. 자신도 어머니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불면증이 생겼고, 체중도 갑작스럽게 늘었다. 직장 동료며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짜증도 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보통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환자가 호소하는 가슴 두근거림을 정서적인 원인에 의해 나타나는 신체증상으로 이해한다. 이미 심장내과에서 할 만한 검사는 다 해봤는데도 심장에 심각한 문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럴 때 나는 환자에게 설명을 하고 심층심리검사를 권유한다. 다행히 K양은 내 의견을 받아들여 심층심리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 K양은 분노가 누적되어왔으며 친밀한 관계에 대한 결핍과 고독으로 만성적인 우울감과 불안감을 느껴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러한 설명에도 K양은 자신이 그렇게 우울하거나 불안하다고 느끼지 않았으며 헤어진 남자친구와 가슴 두근거림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 의아해했다. K양은 고통스러운 정서 경험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어서 스스로도 마음이 아픈 줄 모르고 그야말로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로 꿋꿋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갑자기 떠나버린 남자친구에게 심한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꼈지만 늘 해오던 대로 분노를 표현하지 못한 채 신체적 채널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 바로 가슴 두근거림이었다.



2부 부정적 감정을 다시 보자: 양파껍질 벗기기



슬픔, 삶의 깊이를 헤아리고 어른이 되는 과정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이별하는 슬픔: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 앞에서 느끼는 슬픔이야말로 삶을 뿌리째 뒤흔들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은 두려움과 무기력함으로 가득 차 함께하는 이들까지 무겁게 가라앉힌다.

A부인은 가까운 친구를 심장마비로 갑자기 잃고 진료실에 찾아왔다. 5년 전 남편이 폐암으로 죽었을 때도 무척 슬프고 막막했지만 차츰 기운을 되찾았는데 친구가 죽은 일은 쉽게 떨쳐지지 않고 자꾸 생각이 나서 힘이 든다고 호소했다. 남편과의 이별은 2년여 간 투병생활을 거치며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었는데 친구의 경우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고 했다. 친구는 남편과 사별한 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 나가기 시작한 노래교실에서 만난 동년배 남자였다. 취미가 같고 사별을 했다는 공통점으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같은 노래교실 사람들과의 친교 모임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며 서로를 더 알아가게 되었다.

그 남자는 A부인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현했지만 A부인은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사별한 남편에 대한 미안함, 결혼을 하지 않은 20대 딸의 혼사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염려, 나이 든 여자의 재혼에 대한 남들의 시선 등을 생각하면서 선을 그었다. 하지만 남편의 허전한 빈자리를 채우고 외로움을 달래는 데 그 남자친구의 존재가 시간이 갈수록 커져갔다. 딸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은 뒤로는 엄마에게 연애 좀 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하는 데다 한결같은 남자친구의 모습에 좀 더 마음을 열려고 결심을 할 무렵 갑자기 그가 죽은 것이다. 설 연휴에 무엇 하냐고 전화가 왔길래 음식을 좀 싸다 줄까 하다가 말았는데 그게 마지막 통화였다. 자녀가 없었던 탓에 형제와 친구들이 마지막을 지킨 장례식장에서 A부인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명절에 너무나 외롭게 쓸쓸히 간 남자친구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려다 망설였던 게 한없이 후회되고 가슴 아팠다. 딸에게 남편을 먼저 보냈을 때보다 슬프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가까운 친구에게도 비밀로 했던 만남이었기에 어디 속 시원히 털어놓을 곳도 없어 진료실에 왔다고 했다.

슬픔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 A부인과의 상담은 클라이브 루이스가 그의 책 『헤아려 본 슬픔』에서 말한 대로 “슬픔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공감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슬픔은 마치 긴 골짜기와도 같아서, 어디로 굽어들든 완전히 새로운 경치를 보여주는 굽이치는 계곡이다. 부분적으로 반복되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같지 않다.”

상담 과정에서 여러 가지 기억과 그에 묻은 감정을 더듬으며 여행한 끝에 A부인은 큰 슬픔을 견디면서 때로는 사랑했던 이와의 즐거운 추억에 웃기도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A부인은 평생 누군가의 보살핌 속에서 마치 온실 속 화초처럼 지내오다가 남편의 죽음으로 갑자기 울타리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남자친구를 마음 한구석에 새롭게 안식할 수 있는 온실로 여겨오다가 또다시 죽음을 통해 이별하자 의지할 곳 없는 마음이 되어 슬펐던 것 같다고 했다. 나 또한 젊음이 다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두렵고 슬프기도 했다며 어느새 죽음이 더욱 현실로 다가오는 나이가 되었노라고 담담히 말하게 되었다.

바라보기의 힘: 루이스나 A부인처럼 슬픔이 상태가 아닌 과정이 되게 하는 힘은 바로 ‘observing’에 있다. ‘observing’의 사전적인 뜻은 ‘보다, 주시하다, 관찰하다.’이다. 루이스의 글쓰기나 A부인의 상담에는 말 그대로 ‘슬픔을 두고 유심히 들여다보는’ 과정이 있었다. 감정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거리를 두고 들여다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에 휘둘리거나 압도당하지 않고 견디면서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바라보기를 통한 거리 두기야말로 감정을 잘 다스리는 첫걸음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마다 우울, 불안, 스트레스가 많지만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들여다보고 내적으로 충분히 소화할 시간적 여유가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러다 너무나 커져버린 감정에 체한 사람들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 문을 두드린다. 상담 과정에서 치료자는 대부분 ‘observing’을 통해 그런 감정에 압도당하지 않고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분노, 나를 지키기 위한 건강한 자기주장

왜 화가 나는 걸까?: 화가 나는 상황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가 귀여우면 흔히 머리를 쓰다듬지만 피지에서 멋모르고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가는 아이 부모에게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피지 사람들은 머리를 쓰다듬으면 영혼이 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구체적인 상황은 문화나 나라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어도 공통점이 있다. 인지주의 심리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바로 그 상황에 대한 공통된 해석 내지는 평가다. 인지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나 원하지 않은 일이 발생해 좌절을 하게 되는 경우,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 체계와 반대되는 일이 생긴 경우, 화를 내서 통제할 수 없는 경우 등이다.

치매 환자의 보호자로 진료실을 찾은 L부인의 경우 인지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분노가 일어날 만한 모든 상황에 처해 있었다. 50대인 L부인의 남편은 고위 공무원으로 20년 넘게 성실하게 근무해오다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3년 전부터 기억력이 깜박깜박해서 나이가 들어 그러려니 했는데 최근 6개월 사이에 급격하게 나빠져 진료를 받게 되었다. 검사 결과 남편은 조발성 알츠하이머 치매였다. 아직 결혼시키지 못한 아들과 딸이 있는데 가장이 치매에 걸렸다는 것에 L부인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일이 왜 하필이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는지 억울해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L부인이 더 화가 나는 데는 사연이 있었다. 남편이 밖에서는 성실하고 유능해서 인정받는 사람이었지만 집에서는 정반대로 폭군이었던 것이다. 이기적이고 돈만 아는 구두쇠로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한 푼도 쓰길 아까워했지만 자기 어머니와 동생들에게는 아낌없이 퍼주었다. 당연히 L부인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L부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질을 해댔고 드러내놓고 바람까지 피웠다.

수도 없이 이혼을 생각했지만 L부인은 자식 때문에 참고 살았다. 그런데 자식이 이제 다 커서 결혼만 시켰더라면 지금 당장 이혼해도 미련이 없는 남편이 치매에 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수발은 고스란히 L부인의 몫이 되었다. 남편이 경제적인 도움을 줄 때는 장남으로 모시고 형님으로 받들던 시댁 식구들은 남편이 치매 진단을 받고 은퇴를 하게 되자 나 몰라라 했다. 안부 전화 한 통 없던 시누이들에게 명절에 “언니는 오빠 연금 타니까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L부인은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누가 보더라도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L부인은 초인처럼 화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 L부인이 유일하게 화를 내는 때는 남편이 치매센터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거나 약을 먹지 않겠다고 버틸 때였다. 어르고 달래도 남편이 말을 듣지 않을 때 L부인은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화를 터트렸고 이는 주효했다. 남편이 고분고분해졌기 때문이다.

화를 다스리는 다양한 방법: 욕구가 좌절되어 분노, 갈등,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경우,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기 위해 특징적인 방법들을 사용한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처음 제기했던 이 심리적인 기제에 대한 개념을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 프로이트가 정리ㆍ완성했고, 이를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화가 나는 상황뿐만 아니라 화가 났을 때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이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은 바로 주로 사용하는 방어기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억제, 승화, 유머 등은 성숙한 방어기제로 개인이 상황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집단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 반면 미성숙한 사람은 투사, 전치, 반동 형성, 격리, 신체화 등의 방어기제를 더 많이 사용한다. 방어기제가 미성숙하다고 해서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숙한 방어기제와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함께 쓴다. 어떤 것을 더 많이 쓰느냐에 따라 성격이 결정되기도 하고 병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지난 결혼생활을 돌이켜 보면 남편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L부인은 화를 잘 억제하며 치매에 걸린 남편을 돌보고 있었다. 남편의 규칙적인 생활과 균형 잡힌 영양식단을 지극정성으로 꾸린 것은 반동 형성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하고 싶은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간병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푸는 L부인의 유일한 취미가 골프와 십자수 뜨기라는 것이 흥미롭다. 공을 때리고 바늘로 찌르며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형식으로 화를 풀었다고 보면 바로 승화인 것이다.

진료실에서 보았던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지나치게 꼼꼼하고 융통성 없는 남편 때문에 가계부며 냉장고 정리까지 일일이 지적당하는 어떤 부인은 놀다 들어온 아들에게 냅다 소리를 지르며 공부를 안 한다고 야단치곤 했다. 이것은 전치의 방어기제다. 남편에게 화가 나는 것을 만만한 아들에게 푼 것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속담이 여기에 들어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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