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를 그만두다
히라카와 가쓰미 지음 | 더숲
소비를 그만두다
히라카와 가쓰미 지음
더숲 / 2015년 1월 / 228쪽 / 14,000원
나, 소비자 제1세대
최초의 낭비가, 베이비붐 세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단한 물건이 없었다. 게다가 일만 하는 사람에게는 갖고 싶은 물건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아버지 세대는 개인 소비와는 거의 무관했다. 그러다가 1950년 무렵이 되자 조금씩 부흥이 일어났고, 내가 태어난 해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해 전쟁 특수로 일본이 호경기를 누리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전후해 일본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그 때문일까. 베이비붐 세대는 본질적으로 낭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말하자면 ‘최초의 낭비가’로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에게 TV는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철이 들 무렵에는 미국 TV 드라마가 끊임없이 전파를 타고 방영되었다. TV에 비쳐진 미국의 윤택한 생활을 본 베이비붐 세대는 금세 따라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베이비붐 세대의 소비는 바로 그 시점에 시작되었다.
악덕에서 미덕으로 탈바꿈한 ‘소비’
먹고사는 데 돈을 쓰는 행위를 ‘소비’라 불러야 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소비’는 살아가는 데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무언가를 원하고 그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벌어서 쓰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의 ‘소비’를 좋게 보는 ‘소비자’ 집단이 바로 전후 일본 사회에 등장한 ‘소비자 제1세대’다. ‘소비자’가 탄생하기 전 사람들이 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하겠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였다. 집 근처 문방구에서 물건을 샀다. 물건 값은 50엔(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500~1,000엔 정도). 요즘 아이들은 500엔 정도를 예사로 쓰겠지만, 당시 아버지는 어린 아이가 혼자 50엔을 썼다고 펄쩍 뛰셨다. 나는 얼마나 겁을 잔뜩 집어먹었는지 당시 돈을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버렸다. 전중파(제2차 세계대전 중에 10대 말부터 20대 초반의 청춘기를 보낸 일본인 세대를 일컫는 말)인 아버지 세대에게 어린아이가 돈을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부도덕하다고까지 여길 만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은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심지어 젊은 세대들은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지 않을까?
어쨌든 우리는 부모 세대의 가르침에 반해서 ‘소비자 제1세대’가 된 것인데, 마음 한구석에는 ‘돈 쓰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생각이 지금까지도 새겨져 있다. 그래서 지금 신자유주의자들이 당당하게 ‘더 많이 소비하자’고 부추기는 데 대해 큰 위화감을 느낀다. 소비를 장려하는 허울 좋은 구두선을 당당하게 외치게 된 것은 1980년대 나카소네 정권 때부터다. 소개하면 이렇다. 미ㆍ일 양국의 무역마찰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은 엔화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절상할 것을 요구한다. 그때 미국의 의향에 부응하기 위해 총리는 직접 나서서 국민들에게 ‘돈을 더 많이 쓰라’고 주문했다.
삶의 의미가 노동에서 소비로 변질된 시대
삶의 의미가 변화한 증거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여기저기 꿰매고 수선한 옷을 입는 것을 낭비하지 않고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돈을 쓰는 행위가 미덕이 된 시대에 수선한 옷은 그저 지저분하고 보기 흉한 옷일 뿐이다. 예전에는 부자라 하면 어딘지 부도덕한 면이 있는 사람이라 여겼다. 하지만 점차 부자는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확대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모든 것이 생산 중심으로 돌아가던 사회가 소비 중심 사회로 바뀌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게다가 이 같은 변화는 누군가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지시도 아닌데 마치 종교를 바꾸기라도 하듯 사람들의 가치관은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최근에는 노동자도 물건을 생산하기보다는 자신을 얼마나 비싼 값에 팔 것인가, 즉 자신을 소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강하다. ‘자격증을 따면 높은 연봉에 고용될 수 있다’거나, ‘일을 하는 이유는 돈을 모아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서’라는 식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살아가기=노동’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이 ‘살아가기=소비’ 쪽으로 옮아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금전만능 사회와 소비라는 병
삶의 의미가 노동에서 소비로 변한 현상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시간을 두고 되짚어보고 나서야 이해가 갔다. 핵심은 돈이 가장 중요해졌다는 것, 사회에서 돈의 만능성이 극대화되었다는 것이다. 돈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물론 입증할 수 있는 이론은 아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근거가 되는 신앙 내지 신념 같은 것이다. 이런 신념은 극도로 경쟁적이고 야박해지는 세상의 변화를 막을 수 있다. 또 조금이나마 신중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해준다. 생활에 규범과 기준이라는 것을 제공한다는 얘기다.
마침 돈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기서 상점가의 변질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아버지 세대의 상점가와 지금의 쇼핑몰은 비슷한 것 같아도 전혀 다르다. 상점가는 우리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날마다 들러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상품교환은 사실 이차적인 행위였다. 무엇보다 그곳에서는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만을 샀으며, 장보기 품목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모두가 같은 물건을 매일 사러 오니 상점가의 소매점 주인들도 생활이 가능했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옷장을 정리하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옷장 속에는 가격표도 떼지 않은 아버지 속옷, 나와 동생의 양말 등이 꽤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년의 어머니는 집에서 거의 밥을 안 해드셨는데 그러면서도 아픈 다리를 끌고 매일 일정 시간이 되면 동네 상점가로 장을 보러 나갔다가 매일 비슷한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가 드실 회를 좀 사서 돌아다니다가 양품점에 들러 필요도 없는 속옷과 양말을 샀던 것이다. 순수한 소비 행위라기보다는 동네 가게 주인들과 잡담을 나누고, 나간 김에 무엇이 됐건 한두 가지 물건을 사오는 행위였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대화가 주였고 장보기는 인사치레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쇼핑몰에서는 그런 광경을 볼 수 없다. 쇼핑몰에 가면 정말이지 없는 것이 없다. 상품 더미를 보고 있으면 갖고 싶다는 욕망이 자극을 받아 고개를 쳐든다. 하지만 진짜 필요한 것은 거기에 없다. 우리 어머니 같이 없이 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생활필수품을 갖추고 나면 쇼핑몰에 늘어선 상품 따위는 무의미해진다. 그래도 쇼핑몰에는 매일 상품이 쌓인다.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바로 그곳에서 필요도 없는 물건까지 사도록 부추김을 당한다. 똑같이 필요 없는 물건이라 할지라도 우리 어머니의 경우와 현대 소비자의 경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어머니에게 그것은 이차적인 행위이고, 상점가 사람들과의 친밀감이 우선이었으나, 현대 소비자의 소비는 공허한 욕망을 물건으로 채우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소비병에서 탈출해야 한다.
도시화는 자연스런 발전과정
어떻게 해야 소비병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려고 하는 주제다. 문명의 진전,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전통적인 공동체가 붕괴되고 호혜적인 사회가 등가교환적인 사회로 변화하며 도시화한 사회가 탄생하는 과정은 상당 부분이 자연스런 발전과정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도시화한 사회에서는 증여적인 공동체가 존속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화폐와 상품의 교환을 통해 필요한 것을 얻는다. 어떤 상품을 언제 살지는 완벽하게 개인의 자유이며,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지도 않는다. 반면 호혜적, 증여적인 공동체에서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는 일정 정도 제한된다. 이 같은 개인 자유의 발현은 문명의 진전에 따른 역사적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조차도 소비화는 병폐이고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은 스스로 원했던 것이다.
인간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는 존재
소비화한 사회, 화폐만능 사회, 고립화한 도시 사회는 인간이 개인으로서 자유와 다양성을 추구한 결과다. 그런데 그렇게 다양성을 좇고 자유로워지려 했지만, 오히려 다양해지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생각과 실현 사이에는 차이가 발생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히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이 단순한 이치를 이해해야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어를 하면 글로벌 인재가 된다거나, 애국 교육을 하면 애국심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생각은 단순하고 어리석다는 얘기다. 현실은 다르다. 출발점은 좋아도 가다 보면 점점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다. 그러는 사이에 ‘내가 왜 이러지?’라고 자문하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쳐나가고 극복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소비행동 바꾸기
어떤 의미에서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유일한 답일지도 모른다. 대단히 어렵겠지만 소비사회에 일격을 가하고, 거기서 탈피하기 위해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방식을 통째로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2010년 미국에서 발표된 『스펜드 시프트(Spend Shift)』라는 책이 힌트를 준다.
소비자가 현 상황에서 도망치는 제일 빠른 길은 구매를 중단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구매행위 없이 살 수는 없다. 그런데 구매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이름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스펜드 시프트’다. 선택하는 물건을 바꾸고, 사는 장소를 바꾸며, 사는 행위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지가 낡았을 때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바지를 사는 것이 소비인데, 그 행동을 바꾸자는 주장이다. 새로운 바지 대신 덧깁기 위한 천을 사거나 바지를 버리고 잠방이나 그것을 대신할 만한 다른 옷을 입는 것도 하나의 ‘스펜드 시프트’다.
소비 비즈니스의 격랑 속에서
사장이 된 아르바이트생
나는 남에게 고용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대학 졸업 후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고 한동안 ‘아르바이트생’으로 생활했고,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친구들과 함께 ‘어번 트랜스레이션’이라는 번역회사를 차려 제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창업 멤버는 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우치다 다쓰루, 중학교 동창 요코야마 도루, 이렇게 셋이었고 얼떨결에 나는 사장직을 떠맡았다. 회사 설립 자금은 부모님께 빌린 자본금과 전에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알게 된 번역자에게 빌린 돈을 합해 40만 엔이 전부였다. 처음 한 달 동안 수주 건수는 겨우 두 건, 매출은 다 합해 십여 만 엔이 고작이었다.
그런 상태로는 밥도 못 먹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우리는 곧 고급 주택가에 보습학원을 차렸다. ‘시로카네 세미나’라는 학원이었다. 장소를 제공해준 사람은 아타카 산업의 과장이었다. 그는 시로카네에 투자용 아파트를 구입한 직후라 대출금을 갚아야 했는데, 돈은 없어도 의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애송이들을 붙잡아 자기 아파트에 학원을 차려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준 은인이었다. 학원은 표면적으로는 입시학원이었지만 프랑스어와 영어도 가르쳤다. 근처의 평판이 좋아 순식간에 학생 수는 100명까지 늘었다. 그렇게 학원 수입에서 집세를 제한 나머지를 똑같이 나누자 내 월급은 금세 20만 엔을 넘었다. 당시 대졸 초임이 10만 엔 정도였으니 우리는 제법 돈을 버는 축이었다.
왁자지껄 즐거웠던 일터
학원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어번 트랜스레이션의 영업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자 매출은 매달 쑥쑥 성장세를 기록했다. 당시 일본이 강세를 보인 분야는 플랜트 수출이었다. 플랜트 수출은 일본의 플랜트 개발 및 중화학공업 기업이 종합상사와 함께 현지에서 일을 받아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계약서류는 물론 현지 언어로 작성된다. 우리는 그 계약서의 번역을 도왔다. 알제리의 플랜트 발주와 관련해서는 입찰 서류의 프랑스어를 영어로 번역했고, 일본 기업 측에서 영어 서류를 읽은 다음, 이어서 영어로 응찰 서류를 꾸미면 그 서류를 우리가 프랑스어로 다시 번역했다. 당시 우리는 약 스무 명 정도의 외국인 계약직원을 두고 있었는데,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호평을 받자 사업은 점차 잘 풀렸다. 모두가 왁자지껄 즐겁게 일한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죽어라 일한 끝에……
우치다는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2년 만에 경영에서 손을 뗐지만, 남은 사람들은 매일 그저 죽어라 일했다. 우리를 달리게 만든 것은 돈이 아니었다. ‘어번 트랜스레이션이라는 회사를 만든 사람들’이라는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우리는 앞뒤 재지 않고 달렸다. 2000년을 전후해서는 직원이 60~70명, 연간 매출액은 7~8억 엔이나 되었다. 회사 실적은 줄곧 성장곡선을 그렸다. 그런 식으로 끝까지 잘 풀릴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1990년대 중반의 사무실 이전이 하나의 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직원이 늘어 사무실이 좁아진 탓에 대로변에 있는 빌딩으로 옮겼는데, 한 층을 통째로 임대했다. 공간이 제법 넓은 데다 민망하게도 사장실이라는 공간까지 생겼다. 일은 승승장구했고 나는 사장실에 죽치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 지루한 나날에 싫증이 났고 뭔가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 인생 ‘암흑의 10년’
나는 1999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어떤 회사 설립 과정에 참가하게 되었다. 벤처기업의 창업과 성장을 지원하는 벤처인큐베이팅이 주 업무인 비즈니스 카페(Business Cafe Inc.)라는 회사였다. 2000년에는 비즈니스 카페 재팬을 설립했다. 2000년 무렵은 미국, 일본 할 것 없이 거품이 최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비즈니스 카페 재팬을 설립했을 당시 출자를 받기 위해 몇 군데 설명회를 다녔을 뿐인데도 무려 5억 엔이나 되는 거금이 모일 정도였다. 과연 인큐베이팅 사업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10년 만에 5억 엔을 까먹고 회사를 접었다. 대충대충 일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열심히 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세상에 내놓지 못하는 사이에 인건비와 투자 실패는 산더미처럼 쌓였고 순식간에 돈이 날아갔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암흑의 10년’이었다.
주주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에서
비즈니스 카페 재팬의 사업은 한마디로 장래성이 있는 벤처에 출자를 하고, 출자한 대상 기업이 이익을 내면 배당 또는 주식매각을 통해 투자를 회수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주주 입장에서는 이익의 극대화만이 목표인지라, 주주의 당연한 권리로서 출자한 회사가 이익을 올리기만을 기대하고 요구했다. 출자한 기업에 대해 우리가 주주로서 요구한 사항은 우리의 주주로부터 요구받는 내용이기도 했다. ‘팍팍 투자하고 팍팍 불려라’라는 요구에 따라 우리는 5억 엔이라는 거금을 줄줄이 출자하는 데 썼다. 출자한 회사는 20여 군데나 됐다. 놀랍게도 그 모두가 몇 년 만에 사라졌다. 어느 한 군데도 제대로 된 이익을 내지 못한 채 도산했던 것이다.
타개책이 결국은 패착으로
돈으로 돈을 불리는 투자 비즈니스 업계의 한가운데에서도 희망적 조짐이 없지는 않았다. 나는 리눅스로부터 다음 사업의 힌트를 얻었다. 리눅스의 OS와 이념을 현실 세계에 확산시키기 위해 카페라는 현실의 장을 거점으로 공동체 사업을 벌이자는 발상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2001년에 비즈니스 카페 재팬과 내 개인 출자를 통해 리눅스 카페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리눅스라는 무료 OS로 사업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무료 OS는 아무리 확산시킨다 해도 우리 손에 한 푼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회사에 입주해준 리눅스 벤처 기업에게 받은 임대료로 통장 잔고를 유지했다. 하지만 리눅스 카페의 경영은 시작부터 몹시 힘들었다. 모회사인 비즈니스 카페 재팬도 출자 회사로부터 배당수입을 얻을 가망이 없었기 때문에 2000년대 초반에 시작한 이 사업도 일찌감치 난감한 지경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