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승리인가 자본의 위기인가
울리케 헤르만 지음 | 에코리브르
자본의 승리인가 자본의 위기인가
울리케 헤르만 지음
에코리브르 / 2014년 11월 / 352쪽 / 17,000원
자본에 관한 세 가지 오류
자본주의는 시장 경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본주의가 시장 경제와 동일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독일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48퍼센트가 자본주의를 “더 이상 시대에 적합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시장 경제는 진보, 자유, 성장과 책임이라는 개념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반면, 자본주의는 불평등, 착취, 탐욕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시장 경제라는 표현은 포근하게 들린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편안한 전통 시장을 떠올린다. 동그랗지 않은 사과도 있고, 최근 소식을 이웃 사람들로부터 듣는 시장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시장 경제는 더 이상 없다. 우리는 뭔가 완전히 다른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를 지속적으로 혼동하는 바람에 잘못된 정치적 결정을 자주 내린다.
물론 시장 경제를 다루는 신자유주의 이론가들도 시장과 시장 경제를 구분한다. 통상적인 정의에 따르면, 시장 경제 안에서 처음으로 모든 것이 가격을 갖게 되었다. 땅, 노동력과 제품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었다. 그런데 가격 하나만으로는 자유 시장이 형성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경쟁이다. 공급과 수요가 방해를 받지 않으면 공정한 가격이 형성된다고 한다. 그래서 시장 경제를 진정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경쟁을 지극히 좋아한다. 하지만 포르셰와 피에히 가문 그리고 아우디, 벤틀리, 부가티, 두카티, 람보르기니, 포르셰, 스카니아, 세아트, 스코다, 폴크스바겐 및 폴크스바겐 영업용 자동차들이 서로 얽혀 있는 마당에 경쟁이라는 아이디어를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적합한지 의문이 생긴다.
자동차 산업을 살펴보면, 19세기에 이미 철강 산업에서와 같은 현상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투자 비용이 너무 많아 거대 기업 연합만이 이를 조달할 수 있고, 따라서 이런 거대 기업 연합이 시장을 지배하는 위치를 점한다. 예전에 생각하던 경쟁이라는 개념과는 더 이상 상관이 없는 것이다. 독일의 경제가 얼마나 집중되어 있는지는 최근에 나온 통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 2009년의 경우, 1%도 채 안 되는 거대 기업들이 총매출의 65%를 차지했다. 다른 서구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자유 시장만 있다면 많은 농부들은 아주 빨리 망할 것이다. 수확이 좋은 해는 가격이 바닥일 테고, 흉작일 때는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다. 따라서 이른바 시장 경제는 아주 특이한 현상이다. 농부들은 국가 차원에서 보조를 받아야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기업 연합은 가능한 한 경쟁을 하지 않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합병하고, 협력함으로써 말이다. 여기에 시장 경제를 광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떠올리지 못할 의문점이 하나 있다. 과연 어딘가에 진정한 의미의 시장이 존재할까? 그렇다.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시장은 대부분 경제 정책이 아직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는 틈새에서 일어난다. 소규모 자영업자가 바로 그들인데, 이들은 가차 없는 경쟁에 내몰린다. 수공업자, 미용사, 음식점 주인, 건축가, 작은 가게나 세탁소를 운영하는 사람은 모두 경쟁을 해야만 한다.
‘시장 경제’가 일종의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자칭 ‘시장’이라는 것들이 넘쳐나고 있다. 노동 시장, 금융 시장, 건강 관련 시장, 운송 시장, 에너지 시장, 교육 시장, 주거 시장 그리고 심지어 결혼 시장이라는 것도 있다. 이와 같은 명칭 뒤에는 본질적인 오류가 숨어 있다. 모든 것이 시장에서 유통할 수 있는 제품이며,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고, 또 가격도 있을 것이라는 오류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시장 경제는 짐 크노프(미하엘 엔데가 쓴 동화의 등장인물)가 본 거인 투르투르(Turtur)를 생각나게 한다. 멀리서 보면 시장 경제는 엄청 거대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작아진다.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독일이라는 공식적인 ‘시장 경제’에서 진정한 시장 하나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시장 경제’가 허구라는 인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심지어 조지프 슘페터 같은 보수적 경제학자조차도 일찍이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시장’이 아니라 기술적 진보임을 깨달았다. 따라서 우리는 시장 경제가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시스템을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공적 요소인 국가와 사적 요소인 개인이 혼합된 형태이며, 아울러 소수 독점 형식의 거대 기업 연합과 작은 틈새시장이 혼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을 움직이는 힘은 투자를 통해 나중에 더 많은 돈을 얻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만약 이것이 서류상으로만 재산이 증가하는 눈덩이 시스템이 아니라면, 제품의 양도 증가해야 하는데, 실제 성장은 오로지 기술적 진보를 통해서만 발생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뜻이기도 하다. ‘기술적 진보가 없으면 자본주의도 끝난다.’
오늘날 우리의 경제 형태는 고삐 풀린 역동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시장 경제’라는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를 그려낼 수 없다. ‘시장’이라는 단어는 제품의 교환 및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 경제’가 우리의 시스템을 잘못 그려내고 있다면, 왜 우리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 이 개념에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매우 소박하다. 이렇듯 잘못된 이론으로부터 진정한 이득을 얻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당하게 이득을 보는 주인공은 바로 거대 기업들이다. 이 기업들은 ‘경쟁’을 거의 종교적 원칙처럼 떠받들고, 그럼으로써 한때 공공기관들이 했던 사업을 떠맡을 수 있는데, 그들이 떠드는 슬로건이 바로 ‘민영화’이다.
한편 신자유주의적 시장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것보다 막강해서 많은 비판가들조차 하나의 ‘시장 경제’라는 게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추종한다. 다만 ‘시장 논리’가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을 뿐이라면서 말이다. 유명한 정치철학자 마이클 J. 샌델은 최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라는 매우 투쟁적인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샌델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시장과 시장을 기준으로 삼는 생각은 예전에 시장과 거리가 멀었던 가치를 통해 규칙을 정하던 삶의 분야(가족 생활과 사적인 인간관계, 건강과 교육, 환경 보호와 처벌 가능성, 국가의 안전과 시민의 삶)에까지 파고들었다.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장 경제를 갖춘 사회에서 시장 사회로 진입했다. 이 두 사회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즉 시장 경제는 생산성을 조직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치 있고 효율적인 도구)이다. 이와 반대로 시장 사회는 실제로 모든 것을 팔 수 있는 장소로, 시장 가치가 사회의 관계로 파고들어 모든 영역을 결정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와 같은 묘사가 상당히 비판적으로 들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긍정적이다. 왜냐하면 샌델은 제품의 생산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시장’이라는 이른바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경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소수 거대 기업 연합만이 자본주의적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저자는 완전히 놓치고 있다. 즉, 시장 경제라는 전설을 이어받음으로써 샌델은 이미 신자유주의자들이 쳐둔 덫에 걸려버린 것이다.
그는 그렇게 효율적이라는 시장을 향해 윤리적 한계를 긋기 위해 방어적인 싸움을 한다. 그런데 경제학적으로가 아니라 윤리적으로 논쟁을 펼친다. 여기엔 옳지만 심각한 단점이 있다.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윤리적으로 논쟁하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간단하게 성과는 보상을 받아야 하고, 폭넓은 대중이 보편적 복지로부터 혜택을 누려야 하므로 불평등은 옳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샌델은 이와 같은 윤리적 논쟁에서 승리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미 시장은 “가치 있고 효율적인 도구”라는 것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비판가들은 무의식적으로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분법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방어적 자세를 취한다. 즉 한편에는 사유 재산과 시장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사회와 국가가 있다. 유일한 차이라면, 샌델 같은 비판가들은 시장이라는 전능한 것으로부터 사회적 관계를 구하고자 하며, 반대로 프리드먼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칭 독재적인 국가로부터 시장을 보호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장과 국가의 분리는 허구이며, 이런 구분은 비현실적이다. 순수한 형태의 시장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자본주의와 국가는 전혀 적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국가는 함께 발생했으므로 항상 매우 밀접하게 협력한다. 오로지 현대적인 국가에서만 현대적인 자본주의가 있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국가와 적대적이지 않다 / 세계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항상 경제가 국가로 인해 억압을 받고 있으며, 이와 같은 정치적 독재로부터 힘들어도 벗어나야 한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모습은 완벽하게 어긋난 그림이다. 자본주의의 초기 형태가 이뤄지던 시기에는 자본주의자들이 항상 정치적 힘도 갖고 있었다. 전형적 사례는 중세 시대의 한자도시 함부르크, 뤼베크 혹은 브레멘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도시의 화려한 시청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더라도 과거에 얼마나 막강한 시의원들이 이곳에서 회의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짤막하게나마 역사를 되돌아봐도 자본주의는 국가와 맞서 발생하지 않았으며, 항상 국가의 도움을 향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꽃피우려면, 시민들이 교육을 더 잘 받고, 대학을 세우고, 연구에 자금을 지원해야 하며, 또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도시들은 도로와 철도를 세울 계획을 세우고 이를 관리해야만 한다. 아울러 새로운 약품처럼 잠재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제품을 감독해야 했고, 공장이 안전한지도 감독해야 했고, 환경 오염도 방지해야 했다. 갑자기 도처에서 국가를 필요로 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아가 중요한 기술 개발 또한 만일 국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가 가능한 한 경제에서 손을 떼야만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고 보는 신자유주의적 기본 시각은 틀렸다. 예로 오스트리아는 국가 재정 지출이 50.5퍼센트에 달하지만, 지난 몇 년간 독일보다 훨씬 더 많이 성장했다. 반면 유럽 전역에서 지난 몇 년 동안, 국가 재정 지출을 직시하고 가능한 한 이를 줄이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적 물결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오로지 통계적으로 속임수를 펼침으로써 성공했을 뿐이다. ‘순수한’ 국가 재정 지출은 모든 서구 국가에서 여전히 높은 상태이다. 이는 사회민주당이 지배하든 보수당이 지배하든 상관이 없다. 다시 말해, 국가는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근본적 토대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 자본주의는 즉각 붕괴하고 만다. 예로 국가가 지원하고 감독하면서 개입하지 않는다면 ‘금융 시장’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어느 곳에나 존재하며, 국가의 지속적 개입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작동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왜 시장자유주의자들은 이를 완강하게 무시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은 이러하다. 국가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전혀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끊임없이 수백만 명의 시민과 함께해야 하는 것도 힘들고, 사람들이 도망갈 수 있는 경제적 섬이 없다는 것도 무척 힘들 것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시장이라는 이념은 그들에게 무한한 위로를 준다. 이곳에서는 오로지 개인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곳에서 개인은 자신의 성과를 바탕으로 삶을 구축할 수 있고, 전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울러 이곳에서 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고, 자신과 가족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수 있다. 그들에게 이런 동화는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답다. 게다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부를 이룰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을 까마득하게 망각하고, 자신이야말로 성과를 이뤄낸 장본인이라고 스스로를 추켜세운다.
한편 국가는 정반대의 비난도 받고 있다. 민족 국가는 무력하다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시대착오적인 영향을 주는 역사적 유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국가는 매우 촌스럽고 시대에 뒤진 존재로 비친다. 왜냐하면 제품과 무엇보다 금융 자본은 자유롭게 전 세계를 흘러 다니는 데 반해, 국가는 자신의 토양에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라는 단어는 1990년대에 나타났고, 따라서 많은 사람이 세계화 현상은 이 단어처럼 젊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세계화는 오래되었다. 심지어 아주 옛날 옛적부터 있어왔다. 따라서 세계화는 결코 새롭지 않다. 다만 임금을 억제하고, 기업에 대한 세금을 낮추고, 금융 시장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자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세계화라는 표현을 악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만 새로울 따름이다. 그리고 흔히 세계화 시대에 정치를 실행하는 게 가능한지 의심을 많이 한다. 이런 의심의 배후에는 기업이 국제적으로 행동하면 민족 국가는 힘을 잃고 만다는 생각이 숨어 있다. 이 역시 착각이다. 민족 국가는 결코 세계화와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세계화와 함께 발생했고, 또 세계화를 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자본의 위기
위기가 일어난 후는 위기가 일어나기 전이다: 어떻게 현대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어려움에 처하는가1760년대의 세계는 오늘날의 의미에서 경제 위기라는 것을 몰랐다. 그 대신 기근이 있었다. 유럽 전역을 덮친 마지막 기근은 1846~1847년에 발생했다. 나쁜 날씨가 곡물 수확을 망치고, 동시에 감자의 부패가 만연했다. 특히 끔찍했던 나라는 아일랜드였다. 1841년 820만 명이던 인구가 1901년에는 450만 명으로 줄어들었는데, 최소 100만 명이 굶어 죽었고, 나머지는 미국과 영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후로 서부 유럽에서는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 식량이 부족한 경우가 없었다. 다만 핀란드는 예외였다. 1867년 핀란드에서는 흉작으로 인해 160만 명이던 인구 중에서 10만 명이 아사했다.
그 후 자본주의는 기아를 극복했지만, 대신 과잉 생산 때문에 경제 위기와 금융 위기라는 새로운 위기가 발생했다. 이 둘은 함께 나타나기도 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먼저 경기 위기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경제가 규칙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848년 출간한 『공산당 선언』에서 그들은 이렇듯 새롭고도 기이한 현상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상업상의 위기가 도래하면 생산한 제품 대부분뿐만 아니라 이미 마련해둔 생산력 대부분도 한결같이 파괴된다. 위기에는 과거 부조리로 보였을지도 모를 사회적 전염병이 번져나간다. 이른바 과잉 생산이라는 전염병이다.”
이로써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근본적인 맥락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곧 고대와 중세에는 결핍이 우세해 어떤 재화라도 즉각 소비자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과잉 생산이란 게 결코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경제 위기는 사회의 많은 구성원이 소비를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부유해진 이후부터 비로소 나타났다. 다시 말해, 고객을 찾지 못한 제품이 팔리지 않고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물론 19세기에도 여전히 엄청난 가난은 존재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점에 대해 능숙하게 비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소비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핍 사회에서 과잉 사회로 변화하며 과거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한 가지 현상이 발생했다. 바로 광고였다. 식량과 의복이 부족할 때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구매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만연해지자 왕인 고객에게 온갖 아첨을 다 떨어야 했다.
과잉은 항상 매출의 위기를 초래했다. 그래서 어쩌면 규칙적으로 이런 위기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등장했다. 1860년 프랑스의 의사 클레망 쥐글라르는 7~11년 주기로 위기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훗날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에 의해 수정되었지만, 오늘날까지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져 있다. 즉, 현대 경제는 호황과 침체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동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경향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호황기에는 모든 측면에서 좋은 기분이 지배적이다. 이는 대부분의 기업가들에게 투자를 하고 근로자를 고용하게끔 고무시킨다. 따라서 임금도 올라가고, 가격도 올라가고, 매출도 올라가고, 이윤도 올라간다. 세상이 정말 멋져 보인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기쁨은 두려움으로 바뀌고, 자신의 제품을 앞으로 더 이상 팔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끼는 기업가가 최초로 나온다. 그리하여 그는 더 이상 투자를 하지 않고 돈을 쥐고 있게 된다. 그러면 침체기가 시작되고, 기업은 자신의 재화 위에 앉아서 직원을 해고하기 시작한다. 이는 모든 소비자에게 영향을 준다. 요컨대 직장에서 해고당하지 않은 소비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대비해 절약하기 시작하고 “사람 일을 어떻게 알겠어?”라는 말을 내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