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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몰랐던 근대사 비밀 29

이수광 지음 | 북오션
우리도 몰랐던 근대사 비밀 29

이수광 지음

북오션 / 2014년 11월 / 348쪽 / 15,000원





대원군은 명성황후 민씨와 왜 원수가 되었나?



명성황후 민씨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한국 근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대원군 이하응은 영조의 4대손으로 남연군 이구의 넷째 아들이다. 일본인들은 그를 5척 단신이지만 호랑이 같은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야망이 많은 인물이었고 조선 왕실의 후예답게 조선 왕조를 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기회를 잡는 이하응: 이하응은 조선에 풍운이 몰아치던 1820년에 태어났다. 이하응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 남연군 이구는 이하응이 총명하고 기국(器局)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하응은 12세 때 여흥 민씨 민치구의 딸과 혼인하고 어머니를 여의었다. 18세 때에는 부친 남연군마저 여의었다. 이하응은 헌종 9년에 군(君)으로 봉해졌다. 헌종 13년에는 동지사로 사신 물망에 올랐으나 뽑히지 못했고, 오위도총부의 도총관이 되었다.

야사에는 이하응이 가난하게 살았고 안동 김씨의 핍박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부유하게 살았고 왕족으로 높은 벼슬도 누렸다. 도총관은 조선의 군사조직인 오위의 총책임자니 한직도 아니었고 실질적으로 병권을 쥔 것이었다. 이때의 경험이 이하응에게는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헌종에게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대권이 돌아올지 모른다고 은연중 야망을 품었다. 이하응은 대권이 자신에게 돌아오면 나라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정계의 거물들과 교분을 나누었고 세력을 떨치고 있던 안동 김씨와도 친밀하게 지냈다. 이하응은 왕실의 후손답게 많은 땅을 갖고 있었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헌종이 죽자 대권이 강화도령 철종에게 넘어갔다. 이하응은 크게 실망했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이라 정치력도 없고 무능했다. 하지만 철종 역시 후사가 없어서 이하응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하응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왕대비 조씨의 친정 조카들인 조성하ㆍ조영하 형제와 친밀하게 지냈고, 그들을 통해 왕대비 조씨에게 접근했다. 왕대비 조씨는 남편인 효명세자가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왕비의 자리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대비가 된 불운한 여인이었다. 익종으로 추증된 효명세자와의 사이에서 헌종을 낳았으나 왕비의 집안인 안동 김씨 세도 때문에 그녀의 친정은 권력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녀는 풍양 조씨 가문을 일으키려는 야망이 있었다. 이하응은 왕대비 조씨를 은밀하게 만나 협상했다. “대감의 아들을 효명세자의 양자로 삼으라고?” 왕대비 조씨가 이하응에게 물었다.

“그렇게 하시면 안동 김씨 세도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왕대비마마께서 섭정을 하게 되시니 풍양 조씨 가문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하응이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들을 몰아내겠소?”

“신이 왕대비마마의 수족이 되어 돕겠습니다.”

왕대비 조씨와 이하응이 합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철종이 죽었다. 왕실의 가장 어른인 왕대비 조씨는 재빨리 옥새를 간직하고 이하응의 둘째 아들 재황을 효명세자(익종)의 양자로 삼아 왕실의 대통을 잇는다고 선포했다. 이하응의 아들 이재황은 그렇게 하여 조선의 제26대 국왕이 되었다. 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고 대원군 이하응이 실질적인 섭정이 되었다. 이하응은 국왕의 생부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대원군의 대척자가 되는 명성황후: 고종은 15세가 되었을 때 왕비를 맞아들였다. 왕비는 장악원 첨정을 지낸 여흥 민씨 민치록의 딸로 훗날 명성황후가 된다. 명성황후는 여주에서 태어나 안국동의 감고당에서 살았으나 집안이 한미하여 외척 세도의 염려가 없기 때문에 이하응이 며느리로 삼았다고 야사에서는 전한다. 그러나 그녀는 금혼령을 내리고 초간택, 재간택을 한 후에 당당하게 조선의 국모가 된 여인이었다. 대왕대비 조씨는 초간택에서 다섯 명의 규수를 선발했다. 재간택에 오른 규수들은 모두 쟁쟁한 명문가의 딸이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명성황후 민씨는 당당하게 간택에 참여하여 1866년 2월 29일 왕비로 선발되었던 것이다.

명성황후와 대원군 이하응의 대립은 개화와 관련이 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으로 개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는데도 이하응이 완고하게 쇄국정책을 고집하고, 임금이 20세가 되었는데도 섭정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왕이 15세가 되면 섭정에서 물러나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진짜 섭정인 대왕대비는 물러났는데 아무 근거도 없는 대원군이 국정을 다스리고 있지 않는가?’ 명성황후는 이하응의 섭정이 불만이었다. 이하응은 마치 상왕이라도 된 듯이 조정의 인사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정책을 결정하는가 하면 고종에게도 영을 내렸다. 서원을 철폐하여 유림의 불만을 샀고 천주교를 탄압하여 병인양요를 불러왔다. 또한 쇄국정책을 강행하여 개화를 반대했다.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지 않으면 국왕이 허수아비가 된다.’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움직여 이하응을 탄핵하게 했다. 최익현의 상소는 대원군이 임금의 아버지니 녹을 후하게 주어 편하게 살게 하고 나라의 정치에 간섭하지 말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사간원과 사헌부가 일제히 최익현을 탄핵했다.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오자 조정은 들끓었다. 삼사를 비롯하여 육조판서, 성균관 유생들까지 최익현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고종의 반응은 달랐다. 고종은 최익현을 오히려 호조참판에 임명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최익현을 두둔하고 조정의 관리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했다.

쫓겨나는 대원군: ‘이는 조선을 개화시키려는 중전의 책략이다.’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자신의 쇄국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명성황후는 개화를 하려면 대원군이 정계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조선이 장차 외국의 침략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개화가 불가피했으나 그때까지 개화는 조선 왕조의 국책인 쇄국을 바꾸는 것이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종은 대원군의 대궐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하응은 한순간에 권력의 정점에서 몰락했다. 대원군은 실망하여 양주 직곡으로 은거해 버렸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가 이제는 한낱 야인이 된 것이다. 그가 양주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자 추종하는 세력은 대원군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효(孝)라고 상소를 올리며 고종을 질책했다. 그러나 고종은 대원군의 추종 세력을 중벌에 처해 유배 보냈다. ‘중전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왕을 움직여 나에게 대항하고 있다.’ 대원군은 며느리인 명성황후 탓에 권력을 빼앗긴 것이라고 생각하여 분노했다.

1876년 대원군이 야인으로 물러나 있을 때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 조선은 일본에 개항했다. 그 무렵 명성황후와 대원군을 대립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민승호는 대가 끊어진 명성황후의 친가에 양자가 되었는데 명성황후가 왕비가 되자 벼락출세를 하게 되었다. 그는 인사권을 휘두르면서 척신으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으며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민승호의 집에서 화약이 폭발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그는 명성황후의 어머니인 한창부부인 이씨와 함께 폭사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세력이 저지른 것이었다.

“이는 대원군의 짓이 분명합니다.” 민씨들이 명성황후에게 은밀하게 말했다. 명성황후는 친정어머니와 오라버니가 폭사하자 이를 갈았다. 대원군은 고종의 친정이 안정을 찾은 뒤에야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동안 고종과 명성황후는 외국 여러 나라들과 수교조약을 맺고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보내는 등 개화정책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대결의 마지막: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대원군은 구식 군대의 난동을 주의 깊게 살피고 그들의 난동을 일본을 몰아내는 척왜와 명성황후를 몰아내는 척족타도로 이끌었다. 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난군은 대궐로 몰려가 명성황후를 죽이려고 했다. 명성황후는 가까스로 대궐을 탈출하여 장호원으로 피신하여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임오군란은 청군이 개입하여 진압되었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면 개화를 할 수 없다.’ 대궐로 돌아온 명성황후는 대원군을 청나라로 보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개화가 대세인가? 그러나 무작정 개화를 하면 조선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대원군은 일본과 서구 여러 나라가 조선으로 밀려오자 탄식했다. 그는 명성황후에 대한 원망도 분노도 잊었다. 1895년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당했을 때 일본은 사태 수습을 대원군에게 맡기려고 운형궁으로 가서 대원군을 설득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며느리인 명성황후를 일본인이 시해한 것을 알고 사태를 수습하는 일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청일전쟁은 동학농민전쟁 때문에 일어났는가?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조선을 교두보로 삼아야 했고, 근대화가 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줄곧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征韓論)을 실현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일본의 낭인 무리도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고 시위를 하며 자신들이 선봉에 서겠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의 이러한 야망을 간파하지 못하고 일본의 도움으로 조선을 근대화시키려고 했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탔고 일본군도 타격을 받았다. 일본은 조선에 공사관 재건이라는 구실로 10만 원의 배상금을 받아갔고 청나라와는 천진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 군사력을 확대하기 위해 2개 대대 병력을 조선에 파견했다. 이어 청나라와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대사로 천진에 보내 이홍장과 담판을 지었다. 그 결과 조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청나라와 일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1. 청일 양군은 4개월 이내에 조선에서 철병한다.

2. 조선 국왕에게 권해 조선의 자위군을 양성하도록 하되, 훈련 교관은 청일 양 당사국 이외의 나라에서 초빙하도록 한다.3. 조선에서 이후 변란이나 중요 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두 나라 또는 어느 한 나라가 파병할 때는 먼저 문서로 연락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철병한다.

동학농민전쟁을 기회로 이용하다: 천진조약 이후,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지역을 휩쓸고 충청도 지역으로 올라오자 조정은 청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그러자 일본도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조선은 일본의 파병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가 이미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기 때문에 일본도 파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일본군을 강제로 상륙시켰다. 조선은 일본군의 상륙을 단순하게 조선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일본은 달랐다. 그들은 대륙 진출을 위해 청나라와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선에 파병을 하면서 영국에서 전쟁 비용을 빌리고 일본 청년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일본은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조선이 청나라를 돕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 왕실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1894년 6월 17일부터 조선의 4대문을 일본군이 지키기 시작했고 6월 18일에는 일본군이 왕궁 앞에서 훈련을 하면서 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조선인들이 놀라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도 했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 작전: ‘일본군이 수상하다.’ 한양의 각국 공사관들은 긴장했다. 러시아와 미국은 청과 일본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일본군이 경복궁 점령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6월 20일,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사는 비로소 인천에 있던 러시아 수병을 상륙시켜 한양으로 이동하게 해서 러시아 공사관을 보호하게 했다. 6월 21일 새벽 0시 30분 오토리 공사는 마침내 혼성여단(보병 2개 연대에 포병, 공병, 기병이 딸린)에 경복궁 점령 계획을 실행하도록 지시했다. 일본군은 새벽 4시가 되자 두 방향으로 경복궁을 향해 진격했다. 경복궁 영추문은 빗속에 굳게 닫혀 있었다. 그들은 영추문 앞에 도열하여 공격 준비를 했다.

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영추문에 포탄이 작렬했다. 잇달아 발사되는 포탄에 의해 영추문이 부서져 나가고 성곽이 무너져 내렸다. 일본군이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영추문으로 돌진했다. 그때 조선의 시위대 병사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해 왔다. 일본군 제21연대는 영추문을 돌파하여 건청궁으로 달려갔다. 경복궁 안쪽에 있는 건청궁 밖에는 50명의 왕궁 시위대 병사들이 번을 서고 있었다.“일본군이다!”

시위대는 일본군이 달려 들어오자 뛰어나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고종은 포성에 놀라 잠에서 깼다.

“전하, 일본군이 대궐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시위대에 영을 내려 속히 일본군을 몰아내라.”

고종이 영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시위대 병사들은 일본군에 의해 전멸당하고 말았다. 궁녀들과 환관들이 고종과 명성황후를 에워쌌다. 고종은 당황하여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일본군이 쏘는 탄환이 건청궁 안에 있는 고종의 처소인 곤령합까지 빗발치듯 날아오고 있었다.“사격 중지!”

이내 일본군이 곤령합을 에워싸자 지휘관인 모리 소좌가 명령을 내렸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건청궁에는 이미 일본군이 빽빽하게 몰려와 있었다. 모리 소좌는 궁녀와 내관들을 밖으로 몰아내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인질로 잡았다. “전하!” 모리 소좌가 고종에게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전하, 조선군에게 사격을 중지하라는 어명을 내리십시오.”

“사격 중지?”

“일본군이 이미 경복궁을 점거했습니다. 더 이상의 전투를 하게 되면 왕궁시위대는 모조리 죽게 될 것입니다.”“일본 공사를 부르라.”

“사격부터 중지시키십시오.” 모리 소좌가 군도를 들고 고종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사격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려라!” 고종은 사색이 되어 몸을 벌벌 떨면서 어명을 내렸다.



고종의 사격중지 명령은 즉시 왕궁 시위대에 하달되었다. 창화문 일대에서 치열하게 일본군을 격퇴하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왕명이었다.“전하! 어찌하여 이런 왕명을 내리십니까?”

고종의 전투 중지 명령은 병사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러나 왕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조선군 병사들은 백악(북악) 방향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오전 7시 30분, 마침내 일본군은 경복궁을 완전히 점령했다.

청일전쟁의 시작: 오토리 공사는 조선의 내각을 붕괴시키고 김홍집 내각을 세웠다. 또한 군국기무처를 설치한 뒤에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라고 고종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오토리 공사는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자 무쓰 무네미스 외무대신에게 긴급 보고를 했다.

외무대신 각하, 조선 정부는 이제야말로 우리 대일본제국의 수중지물(手中之物)이 되었습니다. 조선에서의 일은 안심하고 각하의 일을 추진하십시오.

‘각하의 일’이라는 것은 청일전쟁을 뜻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자 즉각 청일전쟁에 돌입했다. 청은 일본을 오판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이 근대의 병기를 제작하고 서구 열강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홍장은 북양함대로 일본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랑하는 북양함대는 인천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에 의해 모조리 격침되었다. 아산과 성환에 상륙했던 청군도 일본군을 만나 대패하고 평양으로 군사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평양에서 청군을 격파한 뒤에 여순(旅順, 뤼순)으로 진격했다. 여순에서 청일 양국은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으나 오랫동안 전쟁 준비를 해온 일본이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군은 여순을 점령하고 중국인 부녀자까지 마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여순을 점령했으나 청나라와 계속 전쟁을 할 여력은 없었다. 일본은 이홍장과 강화회담을 했다. 이홍장이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측이 제시하는 강화안을 수용하여 4월 17일 조약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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