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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 잔혹사

조민기 지음 | 책비
조선 임금 잔혹사

조민기 지음

책비 / 2014년 4월 / 368쪽 / 15,000원





제1부 왕으로 선택된 남자



세종 - 성군의 기준을 세운 임금

역사상 완벽한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은 처음부터 왕위 계승자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조선 건국 초기의 혼란스러웠던 시대 상황과 맞물려 있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아내가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고향에서 혼인한 아내 한씨로, 그녀는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여섯 아들을 낳았으나 조선이 건국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다른 한 명은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혼인한 아내 강씨로, 이성계는 자신보다 무려 스물한 살이나 어린 그녀를 몹시도 총애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세상을 떠난 한씨는 신의왕후로 추증되었고, 강씨는 조선 최초의 왕비(신덕왕후)가 되었다. 왕비가 된 강씨는 자신이 낳은 두 아들 중 한 명이 왕위를 물려받기 원했고 결국 이성계는 아내 강씨의 애원에 넘어가 강씨가 낳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태조의 이러한 결정은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아들들의 반발을 샀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불만을 제기한 인물이 바로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 방원이었다.

몇 년 뒤,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방원은 ‘적자(嫡子)’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며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결국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은 제1차 왕자의 난과 함께 세상을 떠난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수습되자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차남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실권이 없는 상왕(上王)으로 물러난다. 사실 방원은 한시라도 빨리 왕위에 오르고 싶었으나 아버지 태조의 미움과 세상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형인 방과에게 잠시 왕위를 양보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한씨의 넷째 아들 방간이 방원의 독주에 불만을 품고 방원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제2차 왕자의 난이다. 방원은 간단하게 반란을 진압하였고 난이 수습되자 정종은 약 2년 동안의 짧은 재위를 마치고 방원을 아들로 삼아 세자로 책봉한 뒤 왕위를 그에게 물려준다. 그가 바로 조선의 제3대 임금 태종이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즉위 직후부터 왕비가 낳은 장남, 즉 적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정상적인 왕위 계승의 전통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장남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착실하게 제왕학 수업을 시켰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방탕아로, 임금이 되기엔 자질과 성품, 학식이 모두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한다.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인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어진 성품과 뛰어난 학문으로 칭송이 자자했던 충녕대군이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하자마자 곧바로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그리고 두 달 후, 양위(讓位)를 선언하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그렇게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은 세자가 된 지 두 달 만에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외척의 배척, 태종의 왕실 전통 만들기: 상왕 태종은 임금의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당시 세종의 나이는 스물두 살로, 친정(親政)을 하기에 충분한 나이였지만 상왕인 태종의 힘과 권위는 젊은 임금을 압도했다. 게다가 세종의 국정 운영 경험이라고는 세자로 보낸 두 달이 전부였기에 태종 밑에서 최대한 자신을 낮추며 때를 기다렸다. 절대왕권을 추구했던 태종은 외척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각별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임금이 된 후 후궁제도를 법제화시키고 연달아 후궁을 들인 것도, 자신의 처남들에게 줄줄이 사약을 내린 것도 모두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였다. 상왕 태종의 다음 목표는 세종이 충녕대군이었던 시절부터 사위가 왕위를 잇기를 은근히 바랐던 세종의 장인, 심온이었다. 세종이 즉위한 후, 태종은 심온의 벼슬을 영의정으로 높이고 세종의 즉위를 명나라 황제에게 고하는 사절단으로 그를 보낸다. ‘임금의 장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권력과 명예를 모두 준 것이다. 하지만 심온이 명나라에 머무는 동안 태종은 역모 사건을 꾸미고 그 주모자를 심온으로 선언했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심온은 마흔네 살의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죄 없는 심온의 아내와 여러 딸들은 노비가 되었고 아들들은 귀양을 갔다. 또한 왕비의 힘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태종은 자신이 손수 고른 여인들을 세종의 후궁으로 들여보낸다. 소헌왕후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차마 질투조차 하지 못했다.

세종의 애민 정신과 훈민정음의 창제: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목적은 백성들이 보다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을 만들어 소송을 걸거나 재판을 할 때에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훈민정음 창제 외에도 세종은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세종이 위대한 성군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비단 그가 남긴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세종은 ‘역사의 모든 악업은 내가 짊어지고 간다. 주상은 성군의 이름을 만세에 남기라’는 태종의 유언을 가슴에 묻고 초인적인 노력으로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다. 이는 숙청과 역모 사건이 빈발한 조선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백성들의 삶이 향상되도록 항상 신경을 썼다. 백성들을 위해 빈번하게 은전을 베풀거나 사면령을 내리는 것을 넘어, 아예 제도를 법제화시키기도 했다. 세종은 노비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노비에게 혹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했다. 세종이 노비 문제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그가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루아침에 노비로 전락한 처가 식구들의 영향도 컸다. 신하들은 임금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반대했지만 세종은 죽는 날까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정신을 따라오지 못한 육체의 한계: 그 누구보다도 학문과 국정에 열심이었던 세종은 일찍부터 육체의 한계를 느껴야만 했다. 또한 공부를 좋아하고 운동을 싫어하며 고기를 즐겨 먹고 채소를 싫어했던 습관 때문에 젊어서부터 비만과 소갈병(당뇨)에 시달려왔다. 그리하여 40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앉아서 정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나빠졌다. 1440년(세종 23년) 이후로 세종은 세자에게 강무(講武)를 대행시켰다. 당시 세자였던 문종은 스물네 살로, 세종은 세자에게 강무를 대행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국정의 여러 분야를 세자와 분담하려 했다. 이미 세종 19년부터 국정에 참여해왔던 세자는 차분하고 능숙하게 국정을 처리하였다. 중요한 것은 세자가 국정을 분담한 이후 훈민정음의 창제에 가속이 붙게 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세종의 머릿속에는 하루빨리 국정을 세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훈민정음 창제에 열중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세종 27년, 임금은 군사를 제외한 모든 분야를 세자에게 맡긴다.

세종의 승하와 그가 남긴 숙제: 1444년(세종 27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 번째 아들인 광평대군이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에는 일곱 번째 아들 평원대군이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차례로 두 아들을 잃은 충격을 견딜 수 없었던 소헌왕후는 경복궁을 떠나 자식들의 집에 머물며 위안을 찾았고 1446년(세종 29년)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아들들과 아내를 연달아 잃은 세종은 종교에서 위안을 찾았다. 말년의 세종은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아첨하는 신하를 총애하는 등 ‘세종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1450년 2월, 세종은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이 이룩한 업적은 눈이 부셨지만 그가 남긴 숙제 또한 많았다. 세종을 도와 국정을 담당해왔던 세자 문종은 탁월한 행정가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 역시도 건강이 좋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말년의 세종은 왕자들에게 정치를 맡겼다. 이것이 문제였다. 왕위를 계승할 세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왕자들은 학문이나 정치보다 예체능에 관심을 돌리도록 유도하는 것이 조선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야심이 강했던 수양대군을 비롯한 아들들을 정치에 참여시켰다. 그 결과 문종 승하 1년 만에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안평대군 등을 제거했고, 그 뒤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 세종의 은혜를 잊지 못한 대부분의 집현전 학자들은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지만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단종은 강원도에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 후 세조는 집현전을 폐쇄했고, 정조 대에 규장각이 설치되기 전까지 집현전이 담당했던 기능은 조선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제2부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인조 - 단언컨대 가장 완벽한 최악의 군주

조선 역사상 왕위를 위협한 인물과 사건들 중 공식적으로 성공한 반정은 딱 두 번,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뿐이다.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특히 즉위 초에는 의욕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이며 성과도 거두었지만 둘 다 재위 5년을 넘기지 못한 채 혼군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이 놀랄 만큼 비슷하다. 하지만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의 성격은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중종과 인조 역시 전혀 닮지 않았다.

먼저 성종과 정현왕후(성종의 세 번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중종의 경우에는 혈통적인 명분은 충분했으나 정작 본인은 반정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 반정이 있던 당일, 군사를 보고는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착각하여 자결할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는 반정을 계획한 신하들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하지만 인조반정은 달랐다. 인조는 선조의 수많은 서자들(13명) 중 한 명에 불과한 정원군의 아들이었기에 혈통적인 명분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반정에 가담했고 반정 당일 거사를 이끌었다. 인조의 행동은 수양대군과 비슷했지만 양위를 통해 왕위에 오르지 않고 광해군을 폐위시킴으로써 반정이 성립되었다.

인조반정은 성공한 반정이었지만 인조는 성공한 군주가 되지 못했다. 인조는 반정의 명분으로 광해군이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일을 비난했다. 하지만 정작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있고, 며느리 민회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 두 손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또한 인조는 광해군이 명나라에 배은망덕한 일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며 명나라를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두 번의 전쟁에서 무참하게 패배한 후,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굴욕 끝에 항복하였고 세자와 아들들을 볼모로 뺏겼다. 인조는 재위 내내 광해군의 모든 치적을 부정하고 비난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광해군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악의 군주가 되었다.

반정에 최적화된 인조의 가계도: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인 정원군이다. 인빈 김씨는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와 함께 선조의 사랑을 다투었던 여인으로 그녀의 아들 신성군은 광해군과 세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신성군이 임진왜란 중 세상을 떠나고,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그녀는 조용히 꿈을 접었다. 그러나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다는 말처럼 그녀는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급격히 냉랭해진 광해군과 선조의 사이를 조율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한때 광해군을 가장 위협하던 인물에서 가장 우호적인 인물로 노선을 변경한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영창대군이 유배되어 목숨을 잃은 것과는 달리, 그녀의 자식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모두 아홉 명으로, 아들이 넷, 딸이 다섯이었는데 이들은 조정의 주요 인물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큰아들 의안군은 어려서 세상을 떠났지만 세자 후보로 거론되던 둘째 신성군은 신립 장군의 사위였다. 셋째 정원군은 강직한 성품으로 명망이 높은 구순의 손녀와 혼인하였다. 이러한 처세술을 보면 참으로 대단한 여인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원군은 부인 구씨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 능양군이 바로 인조다. 이런 관계로 맺어진 덕분에 훗날 신립 장군의 후손들과 구순의 후손들은 인조반정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백부 광해군에 대한 적대감으로 반정을 계획하다: 인빈 김씨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광해군 7년, 정원군과 신성군의 집터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광해군은 신성군의 양자로 간 능창군을 역모의 우두머리로 체포하여 강화도에 유배했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과 함께 동생인 능창군을 구하기 위해 재산을 팔아 관리들에게 뇌물로 바치며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능창군은 유배지에서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자 광해군은 정원군과 능창군의 집을 빼앗고 그곳에 경덕궁(지금의 경희궁)과 인경궁을 지었다.

아들을 잃고 집까지 빼앗긴 정원군은 광해군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쓰러졌고 4년 동안 자리보전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원군의 아내인 구씨 부인은 남편의 죽음 앞에 통곡했다. 이후 구씨 부인은 남편과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친정 식구들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반정을 계획했다. 구씨 부인의 친정 오빠인 구굉과 신립 장군의 아들인 신경진 등이 반정 세력의 주축이 되었다. 신경진은 신립 장군과 함께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전사한 김여물 장군의 아들 김류를 포섭했다. 문인인 김류가 반정에 합류하면서 이귀, 김자점, 최명길, 이괄 등의 인물들이 대거 반정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들은 광해군을 몰아낸 후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인조)을 옹립하기로 했다.

당시 광해군은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한 후 경운궁에 유폐하여 패륜의 명분을 제공하는 한편, 명나라와 대금(大金)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주장함으로써 당파를 초월하여 사대부 전체와 등을 지고 있었다. 거사는 광해군 15년인 1623년 3월 12일 밤으로 결정되었다. 반정 당일 능양군은 몸소 무장을 하고 일가친척들이 수장으로 있는 군사들을 직접 이끌었다. 거사 당일, 반정에 대한 소식이 광해군의 귀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 소식을 들은 군사들은 크게 동요하였고, 반정군을 이끌기로 한 김류는 거사를 포기한 채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군사를 이끌고 집으로 찾아온 이괄이 설득을 거듭한 끝에 반정군에 합류한 김류는 뒤늦게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반정 초기의 혼란은 광해군에게는 기회였지만 거듭되는 역모, 고변, 국문에 진력난 광해군은 능양군의 반정 소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결과 어이없을 만큼 싱겁게 광해군은 폐위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서인, 민심을 달래기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제수하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의 36개 죄목을 열거하며 반정의 정당성을 공표하고 민심을 사로잡고자 했다. 그런데 정작 백성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백성들은 광해군이 폐위되고 새로운 임금이 즉위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명나라를 섬기는 대신 대금과 화친을 하는 실리를 추구했던 광해군은 사대주의를 목숨처럼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에게는 공공의 적이었겠지만, 백성들에게는 전쟁(임진왜란)의 고통을 함께 나누던 ‘우리 임금’이었던 것이다.

선조 중기부터 광해군 때까지 계속해서 동인이 실권을 잡으면서 서인은 당쟁에서 밀려나 있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이들은 그동안 당쟁에 밀려 조정에서 실각한 서인들이었고, 인조반정으로 실권을 잡은 서인들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반정 직후 인조와 서인 세력은 차가운 민심에 크게 당황하였다. 이들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유배 중이었던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제수한다. 반정 사흘 후 이원익의 가마가 한양에 들어왔다. 백성들은 그때서야 이원익의 가마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환영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민심의 동요로 위기를 맞았던 반정 정부는 이원익의 합류로 간신히 민심을 달랠 수 있었다.

반정 정부를 위협한 이괄의 난: 명나라는 인조반정을 왕위 찬탈로 생각하였고, 대금에서는 광해군의 복수를 한다며 군사를 일으켰다. 설상가상 조선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역모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중 인조 정부를 가장 위태롭게 했던 사건은 즉위 이듬해에 일어난 이괄의 난이다. 선두에서 인조반정을 이끌었던 그는 2등 공신에 봉해진 것에 불만을 품었고, 심지어 뒤늦게 반정군에 합류한 김류가 상석에 앉은 것을 보고 울화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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