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아트
노소영 지음 | 자음과모음
디지털 아트
노소영 지음
자음과모음 / 2014년 9월 / 292쪽 / 18,000원
1. 순수예술의 죽음
예술의 종말, 순수예술은 죽었다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 Brillo Box>는 20세기 시각 예술에서 가장 도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세제 박스와 외양상 구분이 가지 않는다. 워홀보다 반세기 앞서 마르셀 뒤샹은 <샘 Fountain>이라는 작품에서 남성용 소변기를 가상의 작가 서명과 함께 버젓이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는 시각적 경험만으로 예술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모든 것이 상품화된 현대 사회에서 문화의 심미화가 진행되면서, 예술과 상품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모더니스트들이 예술의 상품화를 우려했다면, 워홀을 필두로 한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상품이 예술화되는 시대를 맞았다. 그래서 예술의 종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순수예술 시대의 종말이다.
20세기 전반을 풍미한 모더니즘 예술은 여러 사조의 경합을 통해 미술의 본질을 규명하려 했다. 인상파, 입체파, 미래주의, 추상파, 야수파, 초현실주의 등등, 모두 새로운 지각적 현실을 표방한 것이다. 이렇게 순수미술이라는 기치를 들고 일상의 건너편에서 심미적 피안을 건설하고 있던 모더니즘 예술에 뒤샹은 찬물을 확 끼얹어버렸다. 백남준은 뒤샹에 관하여 “예술에 넓은 입구와 매우 좁은 출구를 남겼다.”고 평했다. 소변기, 눈 치우는 삽, 자전거 바퀴 등 무엇이나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예술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비결정적이며 유동적인 세계를 고정된 이미지(회화, 조각, 오브제)로 재현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지각과 진실은 거리가 멀고, 예술과 진리도 별개이다. 진실과 순수가 죽은 시대에 예술가가 취할 태도는 두 가지이다. 뒤샹처럼 작업을 그만두거나, 그럴 수 없는 예술가라면 끊임없이 유동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는 것이다.
‘예술 독립군’ 플럭서스 그룹
현대예술의 이중성은 바로 무가치, 무의미, 비의미를 요구한다. ‘무가치하다’라고 할수록 사람들은 그것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궁금해한다. 여기에 고급스런 미술관 갤러리의 분위기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포장하는 평론가들이 합세하면 대중은 주눅이 들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마저 갖게 된다. 이제 예술은 시장에서 존재 의미를 부여받고, 비싼 그림이 더 좋은 그림이 됐다. 예술적 가치의 서열이 오늘날보다 더 명확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디선가 독립군이 나타났다. 1960년대의 일이다. 흔히 ‘전위 예술가’로 통하는, 때로는 장난 같지만 대부분 알 수 없는 행위나 퍼포먼스로 충격을 주는, 이름하여 플럭서스(fluxus)라는 그룹이다. 음악, 미술, 무용, 시, 영화 등 다양한 장르 사이를 넘나들며, 날로 상업화돼 허망한 ‘새들의 치장’으로 전락해가는 기존 예술에 대한 반 예술 또는 대안 예술을 제시했다.
미스 커닝햄이라는 안무가의 작품은 무용수들의 가위 바위 보로 시작한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그야말로 4분 33초 동안 연주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때 들려오는 관객의 움직임과 소리가 음악의 내용을 이룬다. 백남준은 1960년 스승 격인 존 케이지와 협연하고선 애송이 주제에 겁도 없이 케이지의 넥타이를 싹둑 자른다. 그의 해프닝 예술은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실수로’ 바지를 내린 것으로 정점을 이루었다. 플럭서스 아티스트는 모든 인위적인 경계를 허물고자 했다. 물질적인 소산보다 과정을 중시했고, 특히 관객의 참여를 강조했다. 다학제적이며 비선형적인 이야기 구조, 열린 체계, 우연성과 즉흥성, 관객과의 상호작용 등은 그대로 다음 세대의 디지털 아티스트에 전수됐다.
디지털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1990년대 말, 내가 스스로 부과한 사명감에 벅차 변혁의 미디어 아트를 담을 새로운 미술관을 구상하러 다닐 때였다. 유럽의 큐레이터나 예술가들이 종종 내게 물어왔다. 당신이 구상하는 디지털 아트센터는 ‘남준 팩’의 정신을 이어받는 뮤지엄인가?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다. 부끄럽기 이를 데 없지만, 당시 나는 백남준의 예술 세계에 대해 완전 무지했다. 미디어로써 시대를 통찰하는 백남준의 예언자적 비전과, 종교와 동서양 학문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변화무쌍하고 드넓은 작가의 정신세계를 그 누구도 내게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수년이 지난 후, 백남준 아트센터가 생기고 초대 관장인 이영철 씨의 열정에 넘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인지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일견 아무렇게나 만든 것 같은 비디오 조각들, 정신없이 작렬하는 이미지들의 대합창, 인공위성으로 시공을 뛰어넘는 대륙 간 예술 퍼포먼스. 그의 작업은 인쇄 문명을 넘어 디지털 시대의 예술혼을 앞서 보여주었다. 평등과 개방의 유목민 정신으로,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타고, 이리저리 마치 아무렇게나 연결된 듯한 이미지의 흐름은 바로 지금 우리 시대의 표상이다. 백남준은 시대를 앞서 본 선지자일 뿐 아니라, 겁 많은 지성인들이 한 발짝도 못 나가는 낯선 길을 외롭게 미친 듯이 달린 선구자이기도 했다.
프로그래밍 예술
일반적으로 디지털 아트는 ‘컴퓨터로 만들어진 도무지 알 수 없는 예술’로 여겨진다. 디지털 아트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프로그래밍 아트이다. 프로그래밍이란 논리와 수학적 연산으로 세계를 프로그램화, 즉 합리화하는 것인데, 이러한 프로그램이 어떻게 논리적 구조를 초월하는 예술과 접목될 수 있는지 언뜻 모순어법처럼 들린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수식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오늘의 날씨(Xt)는 어제의 날씨(Xt-1)와 계절적 변화에 관한 함수(F), 그리고 오늘 발생하는 오류(εt), 즉 우연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함수는 이론적으로 가능한 모든 인과관계를 총칭하고, 그 밖의 우연적 요소들은 오류로 처리하기 때문에, 이 수식은 논리적으로 무오류의 식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모든 인과관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오류가 진짜 우연히 발생하는 오류인지 혹은 거기에 어떤 인과관계가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실용적 목적의 확률 과정 수식에서는 대체로 오류를 무시하거나 수학적 조작을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을 한다.
그러나 예술은 이 오류항을 다르게 본다. 오류라 부르기를 거부하며 그 유연성에 집중하고 즐긴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에서 연주자는 피아노 앞에 4분 33초 동안 잠잠히 앉아 있다 일어난다. 연주라는 형식의 일반 함수 F에는 변함이 없지만 음악적 내용인 Xt를 최소화하고, 대신 관중의 움직임 소리로 이루어진 우연한 소리인 오류를 극대화한 것이다. 관중의 야유와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이 오류항에 집중하는 이유는 거기에 반 프로그램, 나아가 탈 프로그램의 길이 있음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2. 미래의 미술관
퓨처 뮤지엄을 꿈꾸다
“지금 보이는 이 많은 멀티미디어 작품 있지요? 앞으로 20~30년 후에는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뮤지엄에 가 있을 겁니다.” 리치 골드라는 이름의 엔지니어이자 예술가인 사람을 시그라프(SIGGRAPH)에서 만났다. 시그라프는 연구원, 아티스트, 개발자, 영상 감독, 과학자 등이 참여하여 최신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주도하는 국제적인 커뮤니티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세 가지 종류의 뮤지엄이 존재한다. 과거의 유물을 보여주는 과거 뮤지엄, 현재의 정신적ㆍ물적 소산을 보여주는 현재 뮤지엄 그리고 당대에서 그리는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미래 뮤지엄이다. 미래는 골드의 생각보다 빨리 오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은 카메라 인식이나 공간 좌표 인식을 통해 빈 공간에 심어놓은 콘텐츠를 끄집어내 볼 수 있게 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관객이 모바일폰으로 작품에 관한 설명을 보고 들을 수 있다. 바야흐로 시간과 공간이 이리저리 변형되어 우리의 손안에서 놀고 있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이러한 증강현실은 미래 미술관의 최신 버전이다.
뮤지엄 약사(略史)
뮤지엄이라는 용어는 본래 그리스어 무제이온(mouseion)에서 비롯됐다. 무제이온은 학예를 관장하는 아홉 명의 뮤즈 여신의 전당을 지칭했다. 신전이나 뮤즈 여신에게 바치는 봉헌의 형식으로 신자들이 가져오는 봉납물을 축적한 것이 그리스 최초의 예술품 저장소였다. 근대적 뮤지엄의 시작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민들이 왕을 단두대로 보내고 왕족과 교회가 가졌던 미술품과 골동품을 빼앗아 루브르 궁전에 진열한 것이 박물관의 효시라고 한다. 18세기 시민혁명과 함께 등장한 뮤지엄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자본의 성장과 함께 확산, 발전한다. 대표적인 예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신대륙 북미에서 신흥 부호들이 세운 뮤지엄이다. 뉴욕 현대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등이 이 시기에 세워졌다.
산업 사회 초기 소수의 부르주아와 엘리트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됐던 뮤지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점차 대중지향적으로 변해갔다. 뮤지엄 관계자들은 재정 상황의 개선을 위해 공공 예산을 끌어와야 했고, 이는 예술을 공공재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전까지의 활동이 전시에 그쳤다면, 이때부터 대중 강연, 갤러리 토크 등이 등장했고, 전시 도록과 같은 출판물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80년대 이후 세계적인 슈퍼스타 미술관과 블록버스터 전시의 등장은 예술의 대중화를 넘어 산업화를 안착시킨다.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과 루브르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테이트 모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과 구겐하임 등 대도시와 그곳에 자리한 대표적 뮤지엄은 대중에게 동일시된다. 슈퍼스타 미술관은 그들이 소장한 슈퍼스타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도시 관광의 주요인이 된다. 자본과 예술은 슈퍼스타 미술관에 도시 마케팅을 결합해 문화예술의 글로벌화를 가속화한다. 교통ㆍ통신의 발달로 여행과 정보의 습득이 자유로워지면서, 이제 미술관의 대중은 글로벌 관객으로 확대됐다.
아트센터 나비: 디지털 미술관
1997년 나는 워커힐 미술관을 이어받아 이를 새로운 미술관으로 바꿀 궁리를 시작했다. 여기에는 디지털의 영향이 컸다. 디지털 혁명과 인터넷의 확산은 전혀 새로운 세상을 눈앞에 열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중소 미술관으로서의 생존 전략이었다. 과거처럼 기업의 후원 없이 개인의 사재만으로 미술관을 운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마침 정보통신업에 진출한 SK 최태원 회장이 지원 의사를 밝혔다. 그는 이 새로운 미디어가 사용자의 인지와 감성을 어떻게 바꾸어갈지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워커힐 호텔의 조그만 방에서 직원이라고는 달랑 비서 한 명을 두고 시작했다. 그때 내 마음은 딱히 무얼 어떻게 할지 알지는 못해도 새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시그라프(SIGGRAPH) 같은 국제 컨퍼런스에 가면 컴퓨팅의 달인이면서 대안적 현실을 꿈꾸는 새로운 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디지털 시대의 개척자들이었다. 스콧 피셔는 가상 현실의 초석이 되는 연구를, 조지 랜도는 하이퍼텍스트의 개념을, 댄 산딘은 케이브 환경에서 가상현실을 구현하고 있었다. 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나는 당돌한 발상을 하게 됐다. “그래, 예술에도 혁명이 오는 거야, 혁명은 변두리로부터 오지. 더 이상 기존의 미술관 같은 제도의 수호자이자 낡은 게이트키퍼들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 민주적인 새로운 예술을 만들고 확산하고 즐기는 거야. 새로운 예술은 오감으로 체험하는 예술, 네트워크를 통해 한없이 열려 있는 예술, 돈과 관습에 오염되지 않은 예술이지.”
아트센터 나비의 초기 프로젝트들
나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과학기술과 예술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 소위 통섭을 도모하는 모임을 2000년 6월에 발족했다. 그런데 과학기술과 예술, 디자인 분야의 쟁쟁한 멤버들이 모였음에도 통섭의 스파크는 잘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깨닫게 된 사실은 첨단의 학문적, 예술적 성취가 몇몇 뜻있는 사람들의 소망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통섭이 일어날 수 있는 개방과 공유의 지적 풍토에 더하여, 새로운 아이디어와 지식에 대한 시장이 확보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그 기초에 탄탄한 학문적 전통과 실력이 존재해야 한다. 나는 전문가 모임이 실패하자 아마추어에게 관심을 돌렸다. 산업디자인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이준 작가와 컴퓨터 음악을 담당하는 장재호 등 12명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을 만들었다.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건축가, 작가 지망생 등 다양한 전공의 열의에 찬 젊은이들이 참가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트라이얼로그>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종합 인터랙티브 설치 작업이었다. 하지만 관객은 물론 작가들조차 이 새로운 작품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작품에 관심을 보인 국내 예술계 인사도 없었다.
또 다른 선구적인 작업으로 2002년에 만든 <워치 아웃! Watch Out>이 있다. 모리스 베나윤이라는 천재 작가와 최두은 큐레이터의 공동 작업이다. 작품의 개요는 이렇다. 길거리를 무심코 걷다 보면 특이한 모양의 박스가 있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 장착된 카메라가 내 눈을 찍는다. 내 한쪽 눈이 거리의 스크린에 크게 비춰진 것을 모르는 채 나는 아직 그 안을 들여다본다. 박스 안에 작가가 질문을 써놓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한 당신의 경고는 무엇입니까?” 세상을 향한 자신의 경고를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보내면, 그 메시지들을 인터넷에 취합해 보여주고, 또 갤러리 스페이스에 전시해준다. 이 작품은 모바일폰을 이용한 선구적 작업으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술 전시에 초대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의 초기 디지털 아트
소통의 예술인 디지털 아트에서는 사회ㆍ문화적 맥락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관객과 눈을 맞추지 못했던 초기 작업들 이후, 아트센터 나비는 좀 더 적극적으로 관객과의 소통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트센터 나비 활동의 주 관객층인 한국의 2030, 소위 N세대에 주목하면서 말이다. N세대는 복잡하거나 난해한 사안들은 기피한다. 지적인 아이러니 따위에는 별 관심 없다. 이들은 단순하면서 즉각적인 메시지, 가슴을 통하며 공유할 수 있는 것,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 다 함께 거국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산뜻하고 강렬한 카타르시스에 열광한다.
2004년 7월, 2030 관객들을 위해 동세대 작가, 공학자, 문화이론가 등이 아트센터 나비의 박소현 연구원과 함께
라는 커뮤니티를 결성했다. 이들은 디지털미디어의 상호작용성을 탐구하기 위해 주제별 세미나와 토론을 진행하며 새로운 협업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 결과 2005년 10월 도시 전체를 전시장이자 새로운 놀이공간으로 만들었던 <도시의 바이브 Urban Vibe>라는 전시로 도심 속 시민들과 만났다. 이후에도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을 위한 커뮤니티 양성은 아트센터 나비의 핵심적 활동으로 지속됐다. 2007년에는 실험적인 사운드를 탐구하는 <텍스트톤>, 택티컬 미디어 그룹 <파라사이트>, 장소성을 기반으로 한 놀이 집단 <마이크로 웨이브>, 오디오 비주얼 미디어 밴드 <옥타민> 등 커뮤니티가 모여 쇼케이스를 열었다. 또한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커뮤니티적 요소를 강화해 지속적인 공유와 협업이 가능한 온라인 사이트를 마련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디지털 아트의 저변이 확대되어갔다.
3. 예술과 과학기술의 만남
열린 극장
디지털 아트 퍼포먼스에서 우리는 정해진 스크립트에 의해 움직이는 배우가 아니라, 매 순간 작품과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스크립트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다. 디지털 아트는 관객과 함께 만들어가는 일종의 열린 극장이 될 수 있다. 오감을 통해 통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예술, 네트워크 기술로 물리적 환경과 가상의 환경 사이를 이음새 없이 오가며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고 체험하는 예술, 나 홀로가 아닌 전통적인 극장의 집단적 카타르시스가 가능한 열린 극장이다. 2003년 11월 시연한 <리퀴드 스페이스>라는 공연은 성공작이라 평할 만하다. 벨기에 출신의 디지털 아티스트 그룹을 초청해 국내 아티스트와 공동 워크숍을 진행하고, 그 결과로 나온 작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