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드라마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미국은 드라마다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4년 8월 / 336쪽 / 16,000원
‘추수감사절’인가, ‘추수강탈절’인가? ‘메이플라워’의 이상과 현실
아메리카행을 택한 분리주의 퓨리턴
1558년부터 1603년까지 45년간 영국을 통치한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는 새로운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가 번성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와 가톨릭교회는 별 차이가 없다고 불만을 가진 이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바로 퓨리턴이다. 이들은 교회를 정화할 개혁을 요구했는데, 특히 가톨릭적 요소를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puritan’이라는 말이 나왔고 청교도라는 번역어도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다.
퓨리턴에도 여러 유형이 있었는데, 가장 급진적인 퓨리턴은 국법으로 규정된 성공회 교회 참석을 거부하고 독립된 종교 집회를 가졌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왕의 권위는 신에게서 나온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퓨리턴을 탄압했다. 이에 스크루비라는 마을의 분리주의자들은 1608년부터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네덜란드의 레이던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레이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망명자들 중 인쇄 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윌리엄 브루스터가 영국 국교회를 비판하는 인쇄물을 찍어내 제임스 1세의 분노를 샀다. 체포령이 떨어지자 브루스터는 도피했지만 청교도 집단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이를 계기로 청교도들은 새로운 돌파구 마련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1607년에서 1609년까지 신대륙의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영국의 첫 번째 식민지 정착촌을 건설하고 돌아온 존 스미스는 다시 탐사 여행을 떠났다. 그는 1616년 자신이 본 지역에 대해 소개하는 소책자를 출간했다. 지도까지 들어 있는 스미스의 소책자는 분리주의자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특히 이들의 관심을 끈 것은 대구라는 물고기였다. 스미스는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되었는데, 분리주의 청교도들도 대구를 통해 이루게 될 성공의 기대감에 들떴다. 1620년 스크루비 그룹은 왕에게서 “만약 조용히 떠나만 준다면 그들을 괴롭히지 않으리라”는 언질을 받고 마침내 1620년 9월 6일 35명의 ‘신도(분리주의 퓨리턴)’와 67명의 ‘이방인(그들의 교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등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영국 플리머스를 출발했다. 청교도들은 66일간의 길고 위험한 항해 끝에 1620년 11월 11일 현재의 케이프코드 해안을 발견했다.
북아메리카 최초의 성문헌법인 ‘메이플라워 서약’의 탄생
청교도들이 육지에 상륙할 것을 결정하자 ‘이방인들’은 청교도 지도자들의 명령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청교도와 이방인들은 이미 항해 중에 서로 융합하기 어렵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청교도 지도자들은 이러한 갈등에 신속히 대처하면서 성인 남자 대부분의 동의를 받아 짤막한 자치 정부 선언문을 만들었다. 양피지 위에 쓰인 서약의 내용은 자주적 식민지 정부를 수립하고 다수결 원칙에 따라 운영한다는 것이었다. 1620년 11월 11일 남자 성인 41명이 선상에서 이에 서명했다. 이것이 북아메리카 최초의 성문헌법으로 간주되는 ‘메이플라워 서약’이다. 메이플라워 서약에 따라 청교도 지도자 존 카버가 정착지 지사로 선출되었다. 그들은 몇 차례에 걸쳐 무장 선발대를 보내 인근 지역을 탐사한 뒤 한 달여 만인 12월 20일 보스턴에서 동남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플리머스록 해안에 내렸다. 이들을 가리켜 필그림(순례자)이라고 한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이주민들은 첫해 겨울에 영양실조와 질병 등으로 반이 죽었다. 이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존법에 무지했다. 고기잡이에 큰 기대를 걸었으면서도 필요한 도구도 제대로 챙겨오지 않았거니와 고기를 잡는 방법도 몰랐다. 뉴잉글랜드 바다에서는 10여 척의 영국 배가 대구를 무더기로 건져 올리고 있었지만, 이들은 거의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1621년 3월 16일 이들에게 기적과 같은 행운이 일어났다. 이전에 영국 탐험대에 동행했던 덕분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디언 사모셋이 나타난 것이다. 이틀 후에 그는 스페인과 영국에 살았던 스콴토라는 인디언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이들은 청교도들이 부근 왐파노아그 인디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인디언들이 물고기를 잡고 옥수수를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준 덕분에 백인들은 연명할 수 있었다. 10월 첫 번째 추수 후 정착민들은 추수감사절 파티를 열고 원주민들을 초대했다. 참석자는 정착민 53명, 원주민 90명이었다. 겨울에 사망한 카버에 이어 새 지사가 된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이날을 ‘감사의 날’로 선포했다.
“추수감사절이 아니라 추수강탈절”이다
이게 바로 오늘날 미국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다. 1789년 11월 29일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일회성 국경일로 선포했으며, 남북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매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기념하게끔 정례화했다. 1941년 의회에서 법률을 통해 11월 넷째 주 목요일로 확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추수감사절은 대다수 미국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국경일이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추수감사절을 미국사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기회로 여긴다.
1970년 매사추세츠 주 상무성이 순례자 상륙 350번째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왐파노아그족에게 연사를 선택해달라고 요청했다. 프랭크 제임스라는 인디언이 선택되었지만, 연설 원고를 사전에 검열한 상무성 당국은 그의 연설 기회를 박탈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었길래 그랬을까? 제임스는 그 원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은 당신들이 축하할 시간입니다.……그러나 나로서는 축하할 시간이 아닙니다. 내 동족에게 일어났던 일을 회상해볼 때 가슴이 무겁습니다.……순례자들은 내 조상의 무덤을 파헤쳐 물건을 훔치고 옥수수, 밀, 콩 낱알을 훔쳐갔습니다.……왐파노아그족의 위대한 추장이신 마사수와는 이 사실을 알았지만, 정착민을 환영했고 우정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기도 전에 왐파노아그족과 정착민 주변에 살았던 다른 인디언은 그들의 총에 맞아 죽었거나, 그들로부터 전염된 질병으로 죽었습니다.……비록 우리의 삶의 방식은 거의 사라지고 우리의 언어는 사멸되었지만, 우리 왐파노아그족은 여전히 매사추세츠의 땅을 걸어 다닙니다.……과거의 일은 변화될 수 없지만 오늘날 우리는 보다 좋은 미국, 사람과 자연이 다시 한 번 중요한 인디언의 미국을 향해 일합니다.”
일부 원주민들은 1975년부터 매년 추수감사절 때마다 “반추수감사절” 행사를 열어 억울하게 죽은 조상들을 추모하고 있다. 2005년 11월 24일 뉴욕이 화려한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로 흥청이던 날, 북아메리카 원주민 3,000명은 인디언 권리 운동의 성지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앨커트래즈 섬을 찾아 추수감사절을 애도하면서 “추수감사절이 아니라 추수강탈절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식량을 나눠주며 백인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기력을 차린 백인들은 원주민을 배반하고 땅을 빼앗았다”고 말했다.
추수감사절 다음 날로 1년 중 가장 많은 쇼핑이 이루어지는 이른바 ‘블랙 프라이데이’의 쇼핑 광란이 잘 말해주듯이, 이젠 추수감사절의 성격도 완전히 바뀌었다. 엄청난 할인 혜택을 잘 누리기 위해선 마트 앞에서 밤을 새우고,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내달려야만 한다. 그렇게 쇄도하는 인파에 깔려 숨지는 사람이 가끔 나타나긴 하지만, 약 400년 전 영양실조와 질병 등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던 것에 비추어 보건대 ‘광란’이라고 개탄할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커다란 짐승’인가, ‘생각하는 육체’인가? 해밀턴파와 제퍼슨파의 갈등
고조되는 연방파와 공화파의 갈등
1789년 초기 몇 달 동안 미국 헌법 아래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통령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로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 존 애덤스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재무 장관엔 알렉산더 해밀턴, 국무 장관엔 토머스 제퍼슨이 임명되었다. 1790년에 제정된 미국 최초의 귀화법은 “자유의 몸이 된 백인만이 미국 시민이 될 자격이 있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인구조사에서 인종은 네 종류로 분류되었다. 백인 남성, 백인 여성, 노예(흑인), 기타(인디언)였다. 이는 백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가장 중요한 인종ㆍ영토 문제를 비롯해 미국을 경영하는 데 어떤 철학으로 임할 것이냐 하는 갈등은 건국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중앙집권화 주창자들은 ‘연방파’로 해밀턴이 이끌었다. 이에 대응해 제퍼슨과 매디슨의 지도 아래 새로운 정치조직이 등장했으며, 스스로를 ‘공화파’라고 했다(이 공화파는 1850년대에 출현한 현대의 공화당과는 관련이 없다). 제퍼슨은 상업 행위를 경멸하지는 않았지만, 농본주의적 공화국의 비전을 제시했다. 미국이 지나치게 도시화되거나 산업화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연방파와 공화파는 인간에 대한 정의부터 달랐다. 해밀턴은 “인간은 커다란 짐승”이라고 생각한 반면, 제퍼슨은 “인간은 생각하는 육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밀턴은 강력한 정부를 주장한 것이고, 제퍼슨은 반대로 생각한 것이다. 연방파는 강력한 연방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미국의 사명이 중앙집권적 권위, 정교한 산업경제, 세계문제에 적극 대처하는 능력을 가진 진정한 국민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온건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구상했던 공화파는 미국이 고도로 상업화되거나 도시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또한 연방파와 공화파는 프랑스혁명을 보는 시각에서도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공화파인 제퍼슨은 처음부터 프랑스혁명을 긴 세월에 걸친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합법적 시도로 보고 찬양했다.
프랑스혁명과 연방파의 공화파 공격
1793년 이후로 혁명이 더욱 급진적이고 폭력적 성향을 띠게 되자 많은 미국인은 프랑스혁명이 정당한 한계를 벗어났다고 간주했다. 특히 급진적인 자코뱅파가 1793년 1월,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실시하자 미국의 보수파들은 프랑스혁명파를 문명의 파괴자로 보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어 온건 지롱드파에 대한 급진 자코뱅파의 승리 그리고 그 절정인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화가 난 미국의 비판자들은 프랑스혁명을 대놓고 비난하기 시작했고, 연방파가 이런 비난을 주도했다. 제퍼슨은 프랑스혁명 덕에 연방파가 진정한 자유의 벗인 공화파를 공격할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을 개탄했지만, 그 역시 훗날 프랑스혁명과 그 혁명의 후유증은 ‘공포’, ‘광기’, ‘범죄’, ‘인간적 참상’, ‘치명적 오류’에 뒤덮인 개탄할 만한 인류사의 한 시대였다고 회고했다. 그가 보기에 프랑스의 자유를 궁극적으로 짓밟은 것은 ‘원칙이 없고 유혈만 낭자한 로베스피에르의 폭정과 이에 못지않게 무원칙하고 광기 어린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독재’였다.
프랑스혁명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건 단지 생각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외교문제로 다가왔다. 루이 16세가 처형된 지 11일 후인 1793년 2월 1일 프랑스가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자 미국은 난처해졌다. 프랑스와의 동맹조약에 따라 미국은 프랑스를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제퍼슨과 해밀턴 사이의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친프랑스계인 제퍼슨파는 프랑스를 위해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친영국계인 해밀턴파는 프랑스혁명의 폭력성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쳤다고 비판하고 무질서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있는 영국을 지원하고자 주장했다.
워싱턴은 이런 당파적 갈등을 개탄하면서 1793년 4월 22일 중립을 선언했다. 1796년 가을 두 번의 대통령 임기를 마쳐가는 워싱턴은 1796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통해 고별사를 발표했다. 더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미국의 지역주의와 당파 싸움에 지쳤음을 한탄하고 미국이 하루빨리 북부와 남부, 동부와 서부 간의 지역적인 편견과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그는 세계 어느 나라와도 ‘영원한 동맹’을 맺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세계 모든 나라와 우호와 정의를 나누어야 하지만 특정 국가에 대한 ‘습관적인 미움이나 습관적인 우호 감정’을 피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향후 미국 외교의 주요 원칙이 되었다.
이처럼 미국 건국의 초기 역사를 지배했던 해밀턴파와 제퍼슨파의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미국 정치를 지배하는 기본 갈등 전선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런 갈등의 당사자들을 연방 중심이냐 주의 독립된 권한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해밀턴파 또는 제퍼슨파로 부른다. 이 갈등은 세월이 흐르면서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으론 포착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이런 질문은 가능할 것 같다. 제퍼슨과 해밀턴의 경쟁에서 누가 이겼을까?
이름은 제퍼슨이 훨씬 더 빛났는지 모르지만, 최종 결과를 보자면 해밀턴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 것 같다. 제퍼슨은 “부지런한 사람들이 일하는 데 붙어사는 너무 많은 기생충들”이라고 할 정도로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등 거대한 중앙집권 체제를 혐오했지만, 제퍼슨 시대에도 강력한 중앙정부를 전제로 한 해밀턴식 미국 정치체제는 지속되었다. 1803년 루이지애나 영토 매입도 해밀턴식 행위가 아닌가. 게다가 루이지애나 매입은 제퍼슨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반대한 해밀턴의 국립은행 창설 제의로 발행된 미국 채권으로 이루어졌지 않은가. 사실상 해밀턴의 승리였다.
울분과 탐욕의 폭발인가? 남북전쟁 직후의 미국 사회
KKK단의 탄생과 흑인에 대한 공격
남북전쟁(1861~1865) 직후 남부 백인들은 패전에 대한 울분으로 적개심을 키워나갔는데, 그 출구 중에 하나가 흑인에 대한 공격이었다. 백인 지배권 유지를 목표로 한 비밀폭력단도 결성되기 시작했다. 비밀폭력단 중 가장 강력하고 오래 살아남은 단체는 KKK단이다. KKK단은 테네시 주의 조그만 도시 풀라스키에서 시작되었다. 1865년 12월 24일 퇴역 군인 6명이 모여 조직해 1866년 6월 정식으로 발족했다. KKK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의 모임ㆍ단체를 뜻하는 kyklos에 씨족ㆍ가족을 뜻하는 clan을 두음에 맞춰 klan으로 바꾼 것이다. KKK단은 1867년 4월 본부를 테네시 주 주도인 내슈빌로 옮긴 후 성장하기 시작했다. 조직의 간판으로 남부군 장군 출신 네이선 포레스트를 영입했다. KKK단의 주요 멤버는 전직 사령관, 병사, 남부연합 지도자, 교회 목사 등이었다. 이들의 활동 방식에 대해 이구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한밤중에 길고 하얀 수의를 입고 흰 천으로 덮은 말을 타고 다녔다. 옷 속에서 송장 뼈 소리를 내거나, 긴 장대에 해골을 올려놓고 다니며 흑인들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때로 그들은 유령 모습을 하고 흑인들의 집 앞에 나타나 ‘자네, 연방에 절대로 가입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라고 말했고, 흑인들은 겁에 질려 그대로 복종하였다. 따라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서도 선거 때면 흑인들을 투표장에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흑인들이 그들의 행동에 면역이 되자 그들은 서서히 폭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흑인에 대한 폭력이 심해지자 포레스트는 KKK단을 떠나면서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KKK단은 이미 탄력을 받아 성장하는 상태였으므로 해산하기는커녕 오히려 세를 더 키워갔다. 결국 연방의회는 ‘반KKK단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런 조치로 제동이 걸려 KKK단의 활동은 끝이 나지만 그건 ‘1기 시대’였을 뿐, 20세기 들어 다시 되살아나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연방정부의 확대와 로비스트의 등장
대선이 있던 1868년의 미국 정치는 ‘재건’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1868년 5월 공화당은 남북전쟁의 영웅 율리시스 그랜트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고, 그랜트는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랜트의 시대는 로비의 시대였다. ‘로비스트’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이 바로 그랜트다. 그는 부인이 담배 냄새를 싫어해 백악관에서 두 블록 거리에 있는 윌러드 호텔에 자주 들러 시가를 피우고 브랜드를 마셨는데, 정치인들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이 호텔 1층 로비에서 장사진을 쳤다. 이를 보고 그랜트가 “로비스트들이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로비스트가 왜 갑자기 그랜트 행정부 때에 등장한 걸까? 그 이유에 대해 미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딜로렌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뇌물은 언제나 정치의 일부분으로 존재했으나, 연방 정부가 확대되면서 로비 활동과 뇌물도 그만큼 증가했다. 정부는 많은 돈을 배분했으므로 그 돈을 손에 넣기 위한 로비도 어느 때보다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