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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4년 6월 / 360쪽 / 15,000원





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이게 나라인가?”라는 말이 나오는가? - NIH 증후군

소문자로 쓰인 니힐리스트(nihilist)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허무주의자를 말한다. 대문자로 쓰인 니힐리스트(NIHilist)는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회사에서 만들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Not Invented Here)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철학의 소유자다. NIH의 철학은 IBM, P&G 등 대기업 공학자들이 거대한 실험실에서 일하던 시절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시대는 종식되었다. P&G의 경우 4분의 1 이상의 혁신이 외부에서 비롯한 것이다. IBM은 전략적 파트너십에 의존한다. 애플 또한 지금은 휴렛 패커드와 모토롤라와 손잡았다. NIH식 사고방식을 탈피하지 못하면 아이디어도 얻을 수 없다.

기업들이 자신들의 아이디어만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경향을 가리켜 ‘NIH 증후군(NIH syndrome)’이라고 한다. NIH 증후군은 기업 내부에서도 발생하는데, 특히 제조와 R&D, 마케팅이 서로 다른 별에서 오기라도 한 듯 독자적으로 행해져, 신상품이 개발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자기 회사나 부서에서 개발한 것을 불편하게 여겨 채택하지 않으려는 성향도 있는데, 이는 ‘IH 증후군(Invented Here syndrome)’이라고 한다. 문제의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에 대비한 면책 심리가 발동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미국의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직류(DC: direct current) 전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교류(AC: alternating current) 전기가 주는 기회를 상실한 것이 NIH 증후군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당시 에디슨의 회사에서 일했던 세르비아 출신의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는 교류 전기를 개발하면서 직류 전기는 전구 정도의 기기를 밝힐 수 있을 뿐이지만, 자신이 개발한 교류 전기는 똑같은 전력망을 사용하면서도 거대한 산업기계를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테슬라가 자신의 회사 직원이었기 때문에 에디슨은 교류 전기에 대한 특허를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발명에 애착이 너무 큰 나머지 교류 전기의 가치를 폄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위험성을 널리 알림으로써 사람들이 교류 전기를 두려워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그런 캠페인의 일환으로 흉악범들의 사형에 사용될, 교류 전기를 이용한 전기의자 개발에 투자하기도 했다. 에디슨의 이런 노력은 대중이 교류 전기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데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지만, 결국 교류 전기가 직류 전기를 압도함으로써 에디슨은 실패를 맛보게 된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경제심리학』에서 이렇게 밝혔다.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신념이나 언어, 프로세스, 제품 등을 중심으로 기업문화를 창조해간다. 기업조직 내의 사람들이 이러한 조직문화에 흡수되면 조직 내부에서 만들어진 아이디어를 조직 외부의 것보다 더욱 유용하고 중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애리얼리는 그 대표적 기업으로 일본의 소니를 꼽는다. 소니는 자기 회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니는 가장 대중화된 메모리 기기들과 호환되지 않는 디지털 카메라처럼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제품들을 개발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허비한 나머지, mp3플레이어나 평판텔레비전 같은 새로운 제품들을 만들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소니의 전 최고경영자 하워드 스트링거는 소니가 엔지니어들의 NIH 성향으로 인해 상당한 손해를 입어왔다는 걸 시인했다.

NIH 증후군은 그 어떤 뚜렷한 의도가 없이 거의 본능적으로 나타나는데,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NIH 성향을 ‘칫솔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모두에게 칫솔이 필요하고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칫솔은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나와바리 전쟁’으로 부르는 현상인데, 특히 관료 집단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한국의 세월호 참사에서도 이 나와바리 근성은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세월호 생존자 김 모 씨(제주 거주)는 배가 침몰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신고 전화를 세 번이나 걸어야 했던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생각나는 대로 119로 전화했다. ‘배가 물로 들어가고 있다. 신고 접수된 게 있느냐’고 묻자 자신들은 육지 관할이어서 모른다고 했다. 몇 마디 더 나눴지만 시간만 지체될 것 같아 빨리 끊고 112로 전화했다. 이번에도 잘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몇 마디 더 나누다 해양경찰 관할 122를 알게 됐다. 세 번째 전화를 해 겨우 신고할 수 있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규연은 「공직 적폐 1호는 ‘나와바리’다」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와바리는 ‘새끼줄을 쳐서 경계를 정한다’는 뜻의 일본말이다. 조폭에게 나와바리는 힘의 원천이다. 영업수입과 충성심이 여기에서 나온다. 남의 나와바리를 넘보려면 목숨을 건 싸움을 각오해야 한다. 이 조폭 은어가 공직사회를 설명할 때 종종 쓰인다. 관료는 철저하게 담당업무를 챙긴다. 틈만 나면 그 영역을 넓히려 한다. 생색나지 않는 업무는 다른 데 떠넘기려 한다. 취재기자를 하면서 지켜본 관료사회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나와바리다. 세월호 침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도 일부 공직자는 나와바리 근성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초기 늑장 대응의 가장 큰 원인도 따지고 보면 나와바리 때문이었다. 첫 신고는 해양수산부가 맡는 제주 해상교통관제(VTS)센터로 들어왔다. 정작 사고해역을 책임지는 진도센터는 11분 뒤에야 세월호와 교신을 시도했다. 진도센터는 해수부가 아닌 해경 소속이다. 둘 사이에 원활한 전파가 이뤄지지 않았다. 수많은 생명의 운명을 가른 11분을 이렇게 허비했다. …… 공직사회에서 관할권 분할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해야 책임도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조폭 세계 같은 나와바리를 용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기 나와바리만 챙기면서 국민은 안중에 없다면 그런 나와바리는 회수돼야 마땅하다. 국가개조 수준의 고강도 개혁을 한다면 끔찍하리만큼 견고한 나와바리 근성부터 깨야 한다.”

사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많은 문제는 대부분 그런 나와바리 근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거시적 차원에서 주범으로 지적되고 있는 ‘관피아(관료+마피아)’ 현상도 따지고 보면 그 핵심은 나와바리 근성이 아닌가. 2010~2012년 관료 낙하산을 막는 재취업 심사 749건 중 ‘취업불가’ 판정이 0건이었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먹고사니즘’이며, 안전이나 직업윤리보다는 소속 집단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가치에 우선순위가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니고 무엇이랴.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김우창은 「‘평범한 악’이 대한민국을 침몰시켰다」는 칼럼에서 세월호 선장이 수백 명의 승객을 버려둔 채 부하와 함께 먼저 탈출한 것을 통해, 선장의 윤리의식이 가까운 사람에게만 작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게 바로 나와바리 근성이다. 나와바리의 안과 밖, 그 경계선이 윤리와 책임을 가르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이게 나라인가?”라거나 “이건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수많은 나와바리의 할거(割據) 체제를 가리켜 어찌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동물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다리를 들고 오줌을 싸 자기들의 영역을 표시하는 걸 보여주는 동물 다큐는 바로 우리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인간 다큐가 아닐까?



왜 우리는 정당을 증오하면서도 사랑하는 걸까? - 스톡홀름 신드롬

1973년 8월 23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은행 인질 강도 사건에서 은행 직원 4명은 6일간 인질로 당한 폭력적인 상황을 잊어버리고 강자의 논리에 동화되어 인질범의 편을 들거나 심지어 사랑하는 행태를 보였다. 심리학자들은 이 놀라운 현상을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불렀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1999년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인질 범죄 희생자의 27퍼센트가량이 스톡홀름 신드롬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톡홀름 신드롬은 ‘정신적 외상에 의한 유대’의 일종으로 ‘억류 우대’라고도 한다. 피해자가 자아를 방어하기 위해 공격자와의 동일시를 추구한다는 프로이트 이론으로 설명되는데, 프랑스 정신과 전문의 파트리크 르무안은 인질범들이 부모와 같은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인질이 된 사람들은 생사는 물론 식사와 배설 등 모든 것을 인질범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갓난아기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인질범들은 “시키는 대로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단호하면서도(야만적이지는 않고) 안심시키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래서 인질로 잡혔던 사람이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주 친절했고 절도 있게 행동했습니다. 그들의 범행 동기 또한 공감할 만하고요. 우리는 그 범인들보다 경찰이 더 무서웠습니다.” 물론 스톡홀름 신드롬은 인질범이 어느 정도의 친절을 베풀 때에만 발생한다. 인질로 붙잡혀 있으면서 나타나는 극도의 불안감을 인질범에 대한 애정의 신호로 잘못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는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아내의 심리와 비슷한 것이다.

‘인질’의 경계가 늘 명확한 건 아니다.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는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개념의 용법 타당성을 놓고 논란이 자주 빚어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여성부 장관 지은희는 《신동아》(2004년 11월호) 인터뷰에서 ‘스톡홀름 현상’을 언급함으로써 성매매 여성을 ‘포주의 인질’로 보는 시각을 드러냈다. 이는 성매매 여성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2005년 철학자 김진석은 ‘재벌독재’를 주장하면서 그것을 일종의 인질극으로 보았다. 그는 “언젠가부터 인질은 그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을 이용하되, 단순히 강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돌리고 또 돌려서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일이다”라며 “새로운 인질들은 어느 정도 자발적으로 인질범에 협조하는 듯하다”라고 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소식에 통곡하는 북한 주민들을 보고 이들이 스톡홀름 신드롬에 걸린 것이 확실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미국의 정치 컨설턴트 딕 모리스는 정부에서도 ‘스톡홀름 신드롬’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난공불락의 관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사 결정 과정을 민간에 넘기는 것이지만, 장관 등 여러 요직에 임명한 사람들이 관료들의 포로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한국 정당과 유권자의 관계를 ‘스톡홀름 신드롬’의 관점에서 보는 건 어떨까? 왜 우리는 정당을 증오하면서도 사랑하는 걸까? 잘 생각해보자. 한국인의 정당 충실도는 대단히 높다.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사람이 다수인데 그게 무슨 말인가? 투표를 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평소엔 지지하는 정당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당들에 침을 뱉다가도 투표를 할 때엔 정당만 보는 게 한국 유권자들의 속성이다.

왜 그럴까? 한국인들은 정당 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정당을 신뢰할 수 없는 집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더욱 정당에 집착한다. 정당이 공명정대한 집단이라면 굳이 정당에 연연할 이유는 없다. 정당은 불공정과 편파에 능한 집단이기에 지역발전을 위해선 힘이 있는 정당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유권자들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통찰이다. 좀 점잖게 이야기하자면, 유권자들에겐 정당정치에 대한 신념보다는 정당 중심의 정략적 파워에 대한 기대(또는 공포) 심리가 강하다는 뜻이다. 지역주의적 투표 행위도 궁극적으로 ‘우리 지역 정당’을 키우자는 장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는 게 옳다. 동기야 어찌 되었든 유권자들의 높은 정당 충실도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 할 정당정치의 발전에 기여하는 게 아닌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정당들은 바로 그 점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유권자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습게 본다.

1960년 이후 2005년까지 생겨난 정당은 모두 109개로 정당 1개당 평균 수명이 2년 9개월에 불과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권자들은 정당을 지지한다기보다는 불공정과 편파를 자행할 힘이 있는 집단에 표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나 힘 있는 몇몇 정치인만 움직이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바로 정당이다. 2006년 5ㆍ31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당은 선거 승리를 위해 ‘묻지마 영입’ 경쟁을 벌였다. 이길 수만 있다면 어떤 후보도 좋다는 태도였다. 각 당의 영입 경쟁이 과열되면서 후보들은 당적 바꾸기를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여겼다. 심지어 ‘후보 스와핑’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언론은 각 정당이 ‘승리 지상주의’에 집착한다고 비판했다. 다 구구절절 옳은 비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정당은 바보가 아니다. 언론의 비판을 받을수록 표를 얻는 데는 더 유리하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유권자는 뭔가. 정당의 인질이나 포로라는 뜻이 아닌가.

유권자들은 거대 정당들의 파워를 잘 알고 있기에 거대 정당 이외의 정당 후보들에겐 웬만해선 표를 주지 않는다. 민주주의 원칙과 지역 이기주의 사이에서 ‘인지 부조화’가 발생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교과서적 명분이 동원된다. 다당제는 정국 혼란을 가져온다거나 무소속의 난립은 책임 정치를 어렵게 한다는 등의 이론으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한다. 일리 있는 이론이긴 하지만, 문제는 유권자들이 스스로 거대 정당의 과오를 교정하거나 응징할 수 있는 힘을 포기한다는 데에 있다. 겨우 ‘덜 괘씸한’ 양대 정당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으론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나면 승리를 거두었다고 평가받는 정당은 “위대한 민심에 감사합니다”라고 노래한다. 그게 바로 ‘스톡홀름 신드롬’의 주제가다.



왜 권력을 누리던 사람이 권력을 잃으면 일찍 죽는가? - 지위 신드롬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되는 순간부터 모든 일의 전문가로 통하고 전 세계의 신문과 TV 방송국 기자들의 표적이 된다. 나 또한 평범한 감기 치료에서부터 존 F. 케네디의 서명이 담긴 편지의 시장 가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내놓을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특정 사람에 대한 타인의 관심은 그 사람을 우쭐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사람을 타락시키기도 한다.”

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이 수상자 발표 후 8주간의 시간을 보낸 다음에 가진 수상 연설에서 한 말이다. 물론 ‘행복한 불평’이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로서의 영예를 30년간 원 없이 만끽하다가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난 50년간의 노벨화학상과 노벨물리학상 기록을 분석한 결과,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은 후보에만 그친 사람들보다 오래 산 것으로 나타났다. 노벨상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한 사람들은 모두 장수한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배우 75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수상자가 그렇지 않은 배우들보다 평균 4년을 오래 산 것으로 밝혀졌다.

영국 보건학자 마이클 마멋은 영국 정부의 고위 관료와 하급 관료가 서로 다른 건강 상태를 보인다는 점에 주목해 그 이유를 밝히는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2004년에 출간한 『사회적 지위가 건강과 수명을 결정한다』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더 건강하다는 이른바 ‘지위 신드롬’을 제시했다. 마멋은 미국 워싱턴 D.C.의 지하철을 잠깐 타보면 지위 신드롬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워싱턴 도시 동남쪽에서부터 메릴랜드의 몽고메리 카운티까지 지하철을 타보면, 1.6킬로미터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약 1년 반씩 증가하며, 워싱턴 도심 끝에 사는 가난한 흑인들과 다른 쪽 끝에 사는 부유한 백인들의 평균 수명 차이는 20년이라는 것이다.

마멋은 그 이유에 대해 “계급이 낮을수록 삶에 대한 지배력과 전면적인 사회참여 기회를 가질 확률은 낮아진다. 자율권과 사회참여는 건강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이 부족하면 건강의 악화를 초래한다”고 말한다. 마멋은 자율권과 사회참여를 위한 기회 또는 자아실현을 위한 기회가 중요하다며, 자신의 책을 다음과 같은 호소로 끝맺는다. “이런 기회를 갖는 것은 즐거운 일일 뿐 아니라, 매우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만약 이런 욕구가 좌절되면 건강이 나빠진다. 우리가 조직적으로 낮은 계급 사람들의 욕구를 좌절시켜왔다는 사실은 지위 신드롬이 문명화 사회의 오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뿐 아니라 어떻게 모두의 지배력과 참여의 기회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사회 조직을 움직여 나아갈 것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 사회에는 늘 불평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불평등이 건강에 끼치는 영향력의 크기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 왜 상황이 더 좋아지면 안 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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