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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 영어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한국인과 영어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4년 4월 / 280쪽 / 14,000원





제1장 영어는 처음부터 ‘권력’이었다 - 개화기∼일제강점기



1816년 최초의 영어 교육

1816년, 라이라호를 비롯한 영국 군함 3척이 측량을 위해 조선 서해안 일대로 왔다. 9월 8일 배질 홀 함장 일행이 신안 앞바다의 한 섬에 내려 부녀자들이 모여 있는 골짜기로 가려 할 때, 한 조선인이 홀의 팔을 꽉 잡아 눌렀다. 다급해진 홀은 “페이션스, 서(Patience, Sir, 노형 참으시오)!”라고 외쳤다. 그 뒤 주민들은 한참 동안 “페이션스 서”라고 따라 했다. 홀은 그날 어두워질 때까지 주민들에게 영어 단어를 가르쳤다. 한국에서 ‘영어 공부의 역사’ 출발점을 언제로 볼 것인지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홀의 영어 교육이 이루어진 1816년으로 보는 게 어떨까?

김대건, 최한기, 개신교 선교사들

라이라호와의 만남은 돌발적인 사건이었을 뿐이고,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영어를 공부한 이는 김대건(1822~1846)이었다. 그는 1837년부터 5년간 마카오 포르투갈 신학교에 체류하면서 라틴어ㆍ프랑스어ㆍ영어 등 6개 언어를 구사하는 천재성을 보였고, 1845년 9월 조선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이후 영어와의 접촉은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영어 천재’ 윤치호 / 1883년 보빙사 미국 파견

영어 유입의 결정적인 계기는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 5월 22일) 체결과 비준(1883년 1월 9일)이다. 이에 따라 1883년 5월 12일 초대 미국 전권공사 루셔스 푸트(1826~1913)가 입국해 비준서를 교환했다. 푸트의 통역관으로 활약한 이는 윤치호(1865~1945)였다. 윤치호는 1883년 1월부터 넉 달간 일본에서 영어를 배웠는데, 그 실력으로 미국 공사의 통역관이 되었다. 푸트가 입국한 1883년에 최초의 영어 교육 기관인 동문(同文)학교가 서울 재동에 설립되었다. 한편 1883년 7월 조선 정부는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했다. 조선어-영어 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보빙사 일행엔 ‘중국어-영어’, ‘일본어-영어’, ‘조선어-중국어’, ‘조선어-일본어’를 구사하는 통역관 4명이 포함되었다.

알렌ㆍ아펜젤러ㆍ언더우드의 입국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1858~1932)이 1884년 9월 20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 22일 서울에 들어섰다. 알렌에 이어 1885년 4월 5일 장로교 목사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와 감리교 목사 헨리 아펜젤러(1858~1902)가 인천 제물포항에 상륙했다. 이들은 교육 선교에 열을 올렸다. 아펜젤러 부부는 선교를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헌 집 한 채를 매입해 작은 교실을 만들어 학생 2~3명을 모아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육영공원ㆍ배재학당ㆍ이화학당 개교

이런 흐름을 타고 1886년 서울 정동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이 설립되었다. 총 인원은 35명으로 모두 양반 고관 자제들이었으며, 교과서는 영어로 쓰인 것이었고, 교사들은 영어로 강의했다. 배재학당은 1887년 3월에 한국 최초의 르네상스 양식의 교사를 신축했는데, 아펜젤러는 이 새 교사의 반지하실에 산업부를 두어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를 벌면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배재학당 개교와 비슷한 시기인 1886년 5월 31일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 부인이 조선 최초의 여자 학교인 이화학당을 개교했다.

출세 도구로서의 영어

《독립신문》 1898년 7월 4일 자에는 학교 다닐 사정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외국인이 특별 영어 교습을 한다는 광고가 실릴 정도로 영어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다. 1903년에 생긴 YMCA도 영어 학습의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일부 조선인들은 영어를 ‘항일 언어’로 여겨 열심히 공부했겠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영어는 출세의 도구이기도 했다.



제2장 영어는 ‘시대정신’이었다 - 해방 정국~1950년대



‘통역정치’의 전성시대 / 영어는 최대의 생존 무기

미군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해방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생존 무기는 단연코 영어였다. 영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제시대 때 해외 유학을 했거나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에는 친일파, 해방 후에는 친미파 노선을 걸었다. 한편 영어 능력이 우대받는 해방 정국에서 영한사전은 최초의 베스트셀러였는데, 유형기 편 『신생 영한사전』이 그것이었다.

6ㆍ25전쟁과 영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영어의 달인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그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우대했고, 그 대표적 인물이 국방부 장관 신성모(1891~1960)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전쟁 중에도 영어 강습회가 열린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제3장 영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 1960~1980년대



미군과 영어로 통해야 권력을 잡는다

1960년 4ㆍ19혁명 이후 등장한 정치 지도자들 역시 영어에 능통한 사람들이었다. 제2공화국 내각제하의 대통령 윤보선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 출신의 유학파로 영어에 능통한 점이 정치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총리에 오른 장면(1899~1966)은 서울 중앙크리스트교 청년 학관 영어과 출신으로 초대 주미대사를 지내면서 미국 쪽 인맥을 탄탄하게 만들었다.

“조국을 버린 자들?”

1961년 5ㆍ16쿠데타도 영어를 향한 열망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미군과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중요했다. 나중에는 반(反) 박정희 노선을 걷게 되지만, 쿠데타 직후 미군으로부터 사상을 의심 받은 박정희(1917~1979)를 위해 미군과의 다리를 놓아준 인물은 영어가 능통한 장준하(1918~1975)였다. 그리고 군사정부가 수출 지향의 경제개발에 눈을 돌리면서 영어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세태는 이런 현실을 따라가기 마련이었다. 《조선일보》 1961년 10월 22일 자는 “어떤 별 밑에서 태어났는지 어머니 품속에서 배워먹은 말만 가지고는 좀처럼 행세하기 힘든 것이 조상 때부터 짊어지고 온 우리의 비운인가 보다”라고 말했다.수출 전쟁 체제하에서의 영어



본격적인 ‘수출 전쟁’이 시작된 1970년대에 영어는 생존의 문제로 격상되었다. 수출을 지휘하는 정부의 중앙부처가 영어 붐 조성에 앞장섰다. 한편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점에서는 관광객 유치도 수출의 일환이었다. 1970년 9월 서울시는 외국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시내 125개 시장, 백화점 간판을 모두 한글과 영문을 함께 쓴 간판으로 바꾸도록 했다. 이런 영어 붐을 타고 문교부는 1971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조기 영어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공청회까지 열었지만, 반대가 워낙 심해 철회하고 말았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영어가 생존의 무기였지만, 집단적 차원의 대중 정서는 조기 영어 교육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문화적 민족주의’

그런 민심을 의식한 걸까? 박정희 정권은 영어를 최대의 무기로 삼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펴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때때로 강력한 ‘문화적 민족주의’를 내세우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했으며, 1975년에 건립한 민족문화의전당을 세종문화회관으로 명명했고, 어린이회관 앞에 세종대왕의 동상을 세웠다. 동시에 한글 전용 정책을 추진했다. 박정희의 그런 의지는 방송에도 반영되었다. 1974년 2월 7일 MBC는 방송 프로그램과 연예인의 이름에서 외래어를 추방한다고 발표하고 그날부터 〈MBC 페스티벌〉은 〈MBC대향연〉, 〈뉴스라인〉은 〈2시의 취재현장〉으로, 〈스포츠 자키〉는 〈스포츠 얘기〉로 바뀌었다.

1970년대의 ‘조기 영어 교육’ 논쟁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련의 정책들이 영어 붐을 약화시킨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영어가 국민의 일상적 삶을 지배하는 가운데 어린이 영어 조기 교육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일부 사립 초등학교에서는 과외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영어 학습지도반을 만들어 5ㆍ6학년 학생들에게 전담 강사를 두고 1주에 2~3시간씩 영어 교육을 실시했다. 조기 영어 교육에 대한 격렬한 찬반토론이 벌어진 가운데 국어학자 서정수는 “교육의 중점은 ‘주체적 인간화’여야 한다”며 “‘미국으로 들어간다, 한국으로 나온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없어지지 않는 한 영어의 조기 교육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문교부는 ‘엉터리 영어 교육’을 탈피하겠다며 중고등 영어 교과서를 말하기-듣기 위주로 개편하겠다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제4장 세계화 시대에 영어 광풍이 불다 - 1990년대



‘영어 격차’의 소외감

1990년대 들어 ‘주체의식’을 외치는 목소리는 ‘국제화’를 외치는 목소리에 확연하게 압도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잘 보여준 게 이른바 ‘민족 고대’를 내세운 고려대가 1990년 11월 7일 발표한 ‘대학 교육의 국제화 방안’이었다. 이 방안에 따라 고려대는 1991년부터 54개 전공 강좌를 영어로 강의하기로 했다. 대학 밖에선 영어 과외가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1988년 3월 과외 금지 조치가 부분 해제된 뒤 나타난 현상이었다. 과외 열기는 대학 입시를 위한 과외뿐 아니라 영어 기초를 위한 초등학교 3~6학년 과외까지 생겨나게 했다.

조기 유학 붐

1992년 조기 유학 붐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기 유학 붐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 듯, 1992년부터 국내 초등학교에서도 방과 후에 희망 학생들을 뽑아 수강료를 받고 영어 회화 등의 과목을 가르치는 ‘학교 과외’가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서울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유치원생들에게까지 조기 영어 교육 바람이 불었다. 이에 《한겨레신문》은 “세 살을 갓 넘은 유치원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서울의 강남 지역 등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보도는 가뜩이나 문화적 식민지로 전락해 있는 우리 사회의 병든 현실에 짙은 그늘 한 자락을 더 드리운다”고 주장했다.

〈톰과 제리〉논쟁

그러나 치열한 생존경쟁 앞에서 ‘이성을 벗어난 풍조’는 전 국민적인 ‘이성적 풍조’로 확산되는 게 현실이었다. 간판 언어의 변천도 그런 변화상을 말해주었다. 1993년 8월 한 달 동안 국어학회가 서울ㆍ부산 등 7대 도시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간판은 모두 26개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 고유어와 한자어 등 국어로 된 간판이 50.1퍼센트, 외국어나 외래어 간판이 49.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어 간판 가운데는 영어가 70.1퍼센트로 가장 많았다. 이 조사는 한글날을 앞두고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1993년 한글날 하루 전인 10월 8일, 국내 최고기업인 삼성그룹은 국제화ㆍ정보화 시대에 맞는 인재를 선발ㆍ육성하기 위해 전공 시험을 폐지하고, 영어 듣기 시험을 도입하는 등 신입 사원 채용 방식을 대폭 바꾸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자식을 삼성그룹에 입사시키고 싶어 하는 학부모들은 이 발표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학부모들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듯, MBC는 10월 20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미국 만화 영화 〈톰과 제리〉를 영어 대사와 우리말 자막 방송으로 내보냈다. 이에 서울기독교청년회 시청자시민운동본부는 MBC가 주장하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서비스 차원의 자막 방송이라면 당연히 우리말 대사에 한글 자막이 나가야 하므로 어불성설이며, 한글을 읽지 못하는 미취학 어린이들의 시청 기회를 빼앗는 데다, 논란을 빚고 있는 외국어 조기 교육 문제를 시청자의 의견도 수렴하지 않고 공영방송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해 방송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반발이 거세게 일자 11월 5일 MBC는〈톰과 제리〉를 11월 10일부터 다시 우리말로 방송하되, 영어 시청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영어 음성 다중 방송을 실시하기로 한 발 물러섰다.

‘카투사 고시’와 ‘토익 신드롬’ / ‘바람난 조기 영어 교육’

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 지원군인 카투사(KATUSA)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률도 높아졌다. 1995년 1,200명 모집에 무려 1만 5,000여 명이 몰려 평균 12.5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다. 특히 영어에 능숙한 외교관ㆍ교포 출신 지원자가 많아져 국내파 학생들이 카투사 시험에 합격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카투사 입시 학원까지 생겨나는 기현상마저 나타났다. 영어 능력 평가 시험도 대목을 만났다. 1995년 6월 삼성 등 대기업들이 필기시험 과목 중 영어를 토익(TOEIC) 등 공인 시험 성적으로 대체하면서 ‘토익 신드롬’이 일어났다. 영어 교육열은 상식을 초월했다. 두 살을 갓 넘은 어린아이들에게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하는 학원까지 생겨났는가 하면, 이젠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린이들까지 해외 어학연수 길에 올랐다.



제5장 “한국에서 영어는 국가적 종교다” - 2000~2002년



“토플과 토익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

영어 열풍은 ‘토익 폭풍’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입학 자격까지 영어가 좌우했다. 2001학년도 대학 입시에서 토플, 토익 등 영어 특기자로 신입생을 선발키로 한 학교는 고려대ㆍ성균관대ㆍ경희대를 비롯해 총 72개교에 달했다. 이에 따라 ‘토플과 토익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서울 강남ㆍ종로 등지에는 이를 노린 전문 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때 아닌 호황을 누렸다.

‘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

2002년 5월 영미문학연구회가 낸 학술지 「안과밖」은 ‘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라는 특집을 마련하고, 최근의 영어 열풍은 억압에서 비롯된 병리적 현상으로,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더욱 강화하는 경향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덕성여대 교수 윤지관은 “영어의 억압은 일차적으로는 각 개인에게 닥치는 스트레스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 같은 개별적 발현의 근저에는 우리 개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의 방향 전체를 추동하는 어떤 구조적인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구조적인 모순’은 영어 산업의 상업적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제6장 영어, 정치와 유착하다 - 2003~2007년



영어캠프ㆍ영어마을 붐

영어 교육,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영어와 정치의 유착이었을까? 서울시, 경기도 등 광역자치단체는 물론, 기초자치단체 등이 앞다투어 영어캠프를 열거나 영어마을을 조성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대해 교육시민단체들은 “행정기관의 영어 교육 투자는 일부에게만 혜택이 돌아갈 뿐만 아니라, 공교육을 피폐시키는 것”이라면서 전국의 영어마을 붐을 비판했다.

‘영어가 권력이다’

2006년 3월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서울대 경영학과 86학번 졸업생 51명을 조사한 결과, ‘영어 실력이 우수하다’고 응답한 그룹의 평균 연봉(1억 600만 원)은 ‘중간 혹은 그 이하’라고 답한 그룹보다 3,000만 원 이상 많았다. 이와 관련, 《한국일보》는 “영어는 우리 사회의 파워집단을 더욱 공고히 하는 ’무기‘로 작용하며, 조기 영어 교육을 받기 어려운 소외계층의 상실감을 부추기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어의 권력화는 외국어고 입시 열풍과 대학의 편중된 영어 교육으로 이어진다. 고려대는 어윤대 총장 취임 이후 전체 강의의 30%를 영어로 진행하고 있으며, 일부 대학은 국제화를 명분으로 국문학과와 한국사 교수들에게까지 영어 강의를 요구하고 있다. 경제전문가 공병호 박사는 ‘지식 중심 사회로 가면서 영어 네트워크로의 편입 여부가 부가가치 창출 능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됐다’며 ‘한국 사회의 권력과 계급을 구분하는 잣대는 이제 영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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