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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의 힘

최석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혼신의 힘

최석영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4년 2월 / 384쪽 / 16,000원





일본 속의 한국인들, 그 파란만장한 삶



한창우 - 그만이 할 수 있는 한류

삼천포의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재일 교포 출신 실업가라고 하면 소프트뱅크의 손 마사요시(한국명 손정의), 롯데 그룹의 시게미쓰 다케오(한국명 신격호), 마루한의 한창우를 꼽을 수 있다. 파친코 체인점 마루한의 오너인 한창우는 포브스가 선정한 일본의 10대 부자에 선정되기도 했는데, 일본의 10대 부자 중 타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외국인 출신은 그가 유일하다. 그는 1930년 삼천포에서 소작농 집안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고, 해방이 되면서 일본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 형의 권유에 따라 일본행을 결심한다. 머리도 좋고 성적도 우수하지만, 한국에 있어 봤자 하고 싶은 것도 못하니 일본에 가는 것이 낫다는 강력한 권유에 한창우의 마음이 움직였다.

재일 조선인에 대한 오해: 1947년 10월 혼자서 밀항선을 타고 무사히 일본에 도착한 한창우는 곧장 친척이 있는 이바라키 현 이시오카로 갔다. 시골 마을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공부를 가르치는 것으로 돈을 벌던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1948년 도쿄의 호세이 대학에 들어간다. 한창우는 형과 매부의 경제적 지원으로 비교적 돈 걱정을 하지 않으며 학교에 다녔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생활은 아니어서 양배추와 된장을 주식으로 삼고 살았다.

망해가던 파친코로 시작한 첫 사업: 1953년 호세이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을 하지 못했고, 한국전쟁 때문에 고국에 돌아갈 수도 없었던 한창우는 누나와 매부를 찾아간다. 매부는 미네야마라는 작은 항구 마을에서 파친코 매장을 하고 있었는데, 최신 설비를 갖춘 다른 매장에 손님을 뺏겨 슬슬 매장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부의 파친코 일을 돕던 한창우는 매장을 매각하려는 매부를 설득해 가게를 물려받는다. 돈을 벌어서 후일 갚겠다는 막연한 조건이었다.

경험이 적었기에 초기에는 적자의 연속이었지만, 한국전쟁 특수로 일본이 빠른 속도로 경제를 회복하자 한창우의 가게도 착실히 성장했다. 4년 후인 1957년, 가게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이번에는 커피숍을 열었다. 클래식 음악을 전문적으로 틀어주는 커피숍 ‘루체’는 우동 한 그릇에 20엔 하던 시절, 커피를 60엔에 파는 고급 가게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 후 그는 한 일본 여성에게 반했고, 곧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와 결혼을 하고, 신혼 생활과 가게 운영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낸다.

파친코도 커피숍도 꾸준히 성장했고, 종업원도 계속 늘어났다. 그러면서 점차 사업가로서의 감각과 능력을 갖추게 됐다. 그는 신용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지불해야 할 돈은 날짜를 꼭 지키고, 지불할 돈을 받으러 오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서 돈을 건넸다. 그렇게 신용을 쌓으며 차곡차곡 자금을 모은 한창우는 미네야마에 최신식 호화 레스토랑을 짓기로 마음먹는다. 2층부터 옥상까지 커피숍, 레스토랑, 중화요리 전문점, 비어가든으로 꾸민, 지방 도시에서는 볼 수 없던 복합 공간이었다. 이 레스토랑은 크게 성공해서 미네야마의 명물이 되었고, 성공한 젊은 사업가로서 그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유행의 무서움, 볼링 사업의 실패: 37세의 한창우는 1967년에 새로운 사업에 도전한다. 그것은 당시 조금씩 일본에 침투하기 시작했던 볼링이었다. 이전부터 레저와 오락 산업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던 한창우는 볼링이야말로 오락 산업에 딱 들어맞는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사업체의 몸집이 급격히 불어나자 관리를 하기 위해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비약하기를 원하던 그는 이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볼링 사업 확장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1972년 한창우는 시즈오카에 120레인짜리 초대형 볼링장을 열었다. 전례가 없는 매머드급 볼링장이었다. 하지만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던 볼링 사업은 이 볼링장과 함께 추락을 맞이한다. 오픈 직후에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으나, 해가 바뀌면서 손님이 조금씩 줄어드는가 싶더니, 5월이 지나면서 볼링장을 찾는 사람들이 격감했다. 한창우가 운영하는 볼링장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볼링 붐이 한풀 꺾이자 전국의 볼링장이 갑작스런 불황을 맞은 것이다. 그 시기 한창우는 결정적 위기를 맞았다. 1975년 당시 60억 엔, 요즘 물가로 치면 1,000억 엔에 가까운 빚을 지게 된 것이다.

한창우는 빚을 갚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채권자들 앞에 인감과 모든 도장을 내놓으며 ‘미안하지만 빚을 상환할 수 없다. 이것을 가지고 맘대로 하시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자포자기의 상황이었다. 그때 그에게 돈을 빌려준 한 회사의 임원으로부터 벼락같은 호통을 듣는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우리는 당신을 신용해서 돈을 빌려준 것인데……. 당신은 아직 마흔둘이요. 좀 더 노력을 하세요. 우리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한창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자신을 믿고 돈을 빌려준 재일 조선인 사업가들과 금융회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를 악물고 빚을 갚기로 한다.

재기의 길, 파친코 사업에 집중하다: 그가 확장했던 볼링장은 엄청난 빚을 졌지만, 두 개의 파친코 매장은 꾸준한 흑자를 내고 있었다. 결국 그는 놀리고 있던 볼링장 부지에 파친코 매장을 내기로 하는데, 이 선택이 후일 그의 재기를 가능하게 한다. 돈이 없었기에 가능한 한 돈을 들이지 않고 파친코 매장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화려한 조명이나 인테리어, 경품이 없어도 배당만 잘 터지면 손님이 많이 몰린다는 것에 주목하여, 배당률을 높이고 적극적 홍보를 펼쳐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그는 누구보다도 차별을 많이 겪었지만, 오히려 차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세계 어디든지 차별은 있다. 차별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스스로 교양과 견식(見識)을 가지고 그 사회에 공헌하는 길밖에는 없다”라며 일본 사회에 차별과 피해를 호소하는 재일 동포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는 재계의 거물이 된 뒤에도 일본과 한국의 자선사업에 힘써왔고, 세금 신고와 기부에서도 항상 모범이 되려고 노력했다. 일본 사회에 공헌하고 그들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야말로 재일 동포의 권리를 신장하고 인정을 받는 지름길이라는, 평소의 지론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계 일본인이 되자: 한창우는 2000년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한다. 그의 주장은 단순했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아왔고 가정과 사업을 비롯한 삶의 기반이 일본에 있기 때문에, 귀화를 해 일본 사회에 공헌하면서 선거, 피선거권 등의 권리를 구사하는 것이 재일 동포의 위상을 더욱 높이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민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정체성을 가지고 떳떳이 살자고 주장한다. 한국 이름 그대로 귀화를 하자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파친코 업계의 틀을 깬 발상 전환: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던 마루한은 1990년부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레저, 골프 회사에서 서비스의 기본을 배운 그의 차남 한유가 마루한에 입사한 것이다. 차남은 아버지에게 새로운 시대에 맞춰 서비스도 개선을 해야 한다며 파친코 사업의 대대적인 변신을 주문했다. 기존의 파친코 매장은 구슬의 소음과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담배 연기로 가득한 어둡고 음침한 공간이었다. 이 분위기를 밝고 깨끗하게 바꾸어나가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무뚝뚝한 표정의 남자 점원들 대신 밝고 상냥한 표정의 젊은 여자 점원들을 고용했고, 친절한 응대와 서비스로 업계에 화제를 일으켰다. 마루한의 이러한 변신을 대변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거리 시부야 한복판에 건설한 ‘시부야 마루한 파친코 타워’다. 차남인 한유가 주도한 이 실험적인 프로젝트는 젊은이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었고, 사업에서도 멋지게 성공했다.

천황과 만나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황궁에 초대를 받아 일본을 공식 방문하는데, 이때 한창우도 재일한국상공회의소 회장 자격으로 초대를 받는다. 어쩌면 이 자리는 그가 이제 마이너리티가 아니라, 천황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일본 사회의 주류로 발돋움했음을 확인한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화려한 성공과 발자취는 놀라운 것임에도 한국 사회에서 그의 지명도나 평가는 손 마사요시나 신격호보다 높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한창우의 쓴소리가 원인일지도 모른다. 그는 재일 동포 사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 한국의 대통령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자주 해왔기 때문이다.

한창우는 귀화를 했다는 것 때문에 재일 동포 사회에서 비난을 받았지만, 손 마사요시나 시게미쓰 다케오 등 일본식 이름을 쓰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체성 문제만 본다면 일본식 이름으로 바꾼 손 마사요시나 신격호보다 한국식 이름 표기와 발음을 그대로 쓰는 한창우가 훨씬 떳떳한데도 말이다. 한창우는 국적만 일본일 뿐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지키면서 한국 출신이라는 것을 떳떳이 밝혔고,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외모나 춤이 아닌, 신뢰와 선행의 한국인상을 일본에 각인시킨 인물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한창우류, 즉 그만이 할 수 있는 한류(韓流)다.



굴종하지 않는 반항아로 한 시대를 살다



이시이 고키 -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우국의 폭탄 사나이

학생운동가에서 국회의원으로: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국부(國富)를 좀먹는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싸운, 귀감이 될 만한 일본의 국회의원이 있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최일선에서 리더로 활약하다가 국회에 진출,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다 ‘제거된’ 민주당의 국회의원 이시이 고키다. 1940년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시이는 1960년 주오 대학에 입학한 후 격변의 시대와 마주한다. 이때는 전후 일본을 크게 뒤흔든 ‘안보투쟁’이 정점에 오른 시기였다(안보투쟁은 국회의원, 노동자, 학생, 시민 및 일본 내 좌익 세력이 참여한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정부, 반미 운동이다).

1960년 6월 1일, 대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대는 국회에 돌입하여 경찰들과 충돌 직전의 상황에 있었다. 그 자리에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버렸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역시 정치인이란 놈들은 다 이렇다”라고 기존 정치인들에게 실망했는데, 경찰 기동대가 강경 진압을 하려고 할 때 나타난 단 한 명의 국회의원이 있었다. 진보개혁 성향의 사회당 의원 에다 사부로였다. 그는 흥분한 양쪽을 진정시키며 학생들을 지켜주려고 했다. 이시이는 여타 정치인과는 다른 에다에게 크게 감명 받고 정치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바꾼다. 또한 에다 의원을 인간적으로 동경하여 후일 그와 인연을 맺는데, 이 만남이 이시이가 정치가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4ㆍ19에 고무된 일본 대학생들 / 귀국 후 사회당에서 일하며 정계 입문: 당시 일본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한국의 4ㆍ19였다. 이시이는 시위 현장에서 거친 활동을 펼치는 활동가 스타일이 아니라 조직의 관리와 기획ㆍ운영을 맡는 관리자 스타일이었는데, 자치회에서 활동하다가 후일 자치회 임원을 거쳐 서기장과 위원장을 맡으며 학생운동의 핵심 멤버로 떠오른다. 그 후 이시이는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 진학하는데, 그곳에서 유학의 기회를 얻어 모스크바 대학 대학원으로 갔고, 그곳에서 소련의 문제점이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관료들이 국가의 이익과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또 그것은 그가 후일 국회의원이 되어 일본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계기가 된다.

학업을 마치고 1972년에 일본에 돌아온 이시이는 사회당 기관지 기자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그만두고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정치인인 에다 사부로의 아들이자 국회의원인 에다 사쓰키의 비서로 변신해 정계 활동을 시작한다. 1989년에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도쿄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다가 낙선하지만, 1993년에 재도전, 첫 당선의 쾌거를 이룬다. 학창 시절부터 부패한 정치인과 권력에 비판적이던 그가 드디어 국정에 참가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일본을 망치는 고질병, 아마쿠다리: 2012년 총선거를 앞두고 일본의 각 정당이 내건 공약을 훑어보면 자주 눈에 보이는 단어가 있다. ‘아마쿠다리’라는 말이다. 너도나도 ‘아마쿠다리의 폐지’, ‘아마쿠다리 엄격한 제한’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보수, 진보를 떠나 이 공약을 공통적으로 내건 이유는 간단하다. 유권자, 즉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쿠다리란 하늘, 즉 위에서 내려온 것을 일컫는 말인데, 한국으로 치면 ‘낙하산 인사’가 비슷한 의미의 단어다. 아마쿠다리는 낙하산 인사 중에서도, 공기업이나 정부에서 주로 일감을 얻는 공단, 재단, 협회 등 정부 산하 단체에 은퇴한 고위 공무원이 재취업하는 것을 주로 말한다.

예를 들어 정부의 차관급, 국장급 등 중요한 직위에 있던 사람이 은퇴한 뒤,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단체에 이사나 감사 등으로 다시 들어가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을 말한다. 명목상 재취업이기는 하지만, 실제 일을 하기보다는 노인정에 나가듯 형식적으로 출근하면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그들이 누리는 혜택이 전부 국민의 세금이라는 데 있다. 정부와 지방 관청에서 은퇴하는 수많은 고위 공무원의 배를 불리기 위해 엄청난 국가 예산이 낭비되는데도 일본의 역대 정권은 그것을 일소하지 못했다. 이것은 이시이가 소련에서 보아왔던 문제점의 판박이나 다름없었다.

이시이는 아마쿠다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일 먼저 대표적인 ‘세금 먹는 하마’인 일본 전국의 지방 공항 조사에 착수한다. 일본에는 ‘농도공항’이라는 것이 있다. 1988년 유통의 합리화와 농업의 효율화를 위해 만든 법에 따라, 1991년부터 1996년까지 전국 여덟 곳에 지어진 미니 공항이다. 농산물을 항공편으로 운반하기 위한 공항이며 총공사비는 112억 8,000만 엔이다. 그렇다면 각 공항은 완성 후 얼마나 이용되었을까. 연간 이용 횟수가 가장 많은 후쿠시마의 이자카 공항이 37회, 홋카이도의 기타미 공항과 나카소라치 공항은 각각 17회와 14회로 목표를 한참 밑돌았다. 적자가 늘자 결국 지방 공항의 용도를 다목적 공항으로 변경했다. 이름은 그럴듯한 다목적 공항이었지만 실제로는 놀이 기구를 설치하거나 무선조종 모형 비행기 경기장으로 가끔 이용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었다.

국가를 지배하는 철의 연결 고리: 왜 이런 만화 같은 사업이 시행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세금을 눈먼 돈이라 생각하고 털어먹으려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세력은 다름 아닌 정치가-관료-기업의 삼각 편대다. 그 구조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 그 안을 파고들면 상당히 복잡하다. 운수성과 건설성, 농산성은 공항 건설 계획을 세우고, 정치가들은 그 계획을 국회에서 통과시킨다. 사업이 확장되면 운수성, 건설성, 농산성은 공사 업체를 선정하는데, 대부분 각 성의 퇴직자들이 퇴직 후 설립하거나 낙하산 인사로 취업한 업체다. 그 업체들은 사업만 따올 뿐 실제 공사는 하청 업체에 전부 맡겨버린다. 간판만 건설 회사일 뿐 실제로는 일거리를 따오는 로비 단체인 것이다.

하청 업체의 선정 역시 공짜는 없다. 각 정부 기관의 퇴직자들을 임원으로 받아준 회사에만 일을 의뢰한다. 건설 업체들은 또한 이 사업 계획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정당과 정치가들에게 우회적이고도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치자금을 제공한다. 이렇게 보면 건설 업체들이 먹이사슬의 가장 하층에 있는 샌드백처럼 보이지만, 이들도 그렇게 순진하지는 않다. 퇴직 공무원과 정치인에게 제공한 헌금을 메우기 위해 공사 대금을 부풀려 정부에 청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국민의 세금이다. 이시이는 저술과 국회 발언을 통해 끈질기게 비리를 추적하는가 하면, 정부 기관장을 소환해 관련 문제를 집중 추궁하면서 돈키호테처럼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갔다. 그만큼 국가의 문제에 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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