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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과 지적 사기

이인식 지음 | 인물과사상사
통섭과 지적 사기

이인식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4년 3월 / 264쪽 / 14,000원





제1부 지적 사기 논쟁



소칼의 목마와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 - 이상욱

‘과학전쟁’은 무엇이었나?: 1996년 수리물리학자 앨런 소칼은 인문학 계열의 한 학술지를 상대로 감쪽같은 속임수를 성공시켰는데, 이것을 ‘소칼의 속임수(Sokal’s Hoax)’라 한다. 소칼의 속임수가 알려진 후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매체를 통해 이에 대한 수많은 논평과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소위 ‘과학전쟁(science wars)’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과학전쟁’은 과학지식의 성격과 과학 연구의 본질을 놓고서 자연과학자, 사회과학자, 인문학자 등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면서 벌인 일종의 국제적 학술토론이었다. 학술토론에 ‘전쟁’이란 극단적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이 논쟁이 대략 자연과학자를 한 축으로 하고, 사회과학자와 인문학자를 다른 축으로 하는 대결 구도로 진행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결국 ‘과학전쟁’은 과학과 관련된 근본적 질문에 대해 비교적 확연히 구별될 수 있는 견해를 가진 집단들 사이에 내재했던 긴장이 ‘소칼의 속임수’라는 계기를 만나 격렬하게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일찍이 찰스 퍼시 스노가 지적했던 인문학과 자연과학 ‘두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수준에서의 차이와 대립이 적대적으로 돌출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소칼의 목마: 소칼의 속임수는 소칼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여러 학자가 과학에 대해 쓴 여러 글을 그럴듯하게 짜깁기해서 엉터리 논문으로 만든 뒤에, 그것을 《소셜 텍스트》라는 문화학 계열의 학술지에 투고하여 출판시킨 다음, 이 사실을 《링구아 프랑카》라는 다른 인문학 잡지에 폭로한 사건이다. 결국 소칼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제작한 엉터리 논문을 관련 학술지에 싣게 함으로써, 그 학술지는 물론 과학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 학자의 견해, 더 나아가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쓴 글 모두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그는 〈경계를 벗어나서: 양자 중력의 변환 해석학을 향하여〉라는 거창한 제목을 단 《소셜 텍스트》 논문에서 자크 라캉, 질 들뢰즈, 줄리아 크리스테바, 브뤼노 라투르 같은 저자들의 저술이 물리학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중력에 대한 최신 물리학 이론의 핵심을 정확하게 집어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주장의 근거로 이 저자들의 글에서 따온 수많은 발췌문을 제시했다. 그런 다음 소칼은 《링구아 프랑카》 논문에서 실은 자신이 이 저자들이 과학 전문용어를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마구 사용하여 터무니없는 결론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한 문장만으로 《소셜 텍스트》 논문을 짜깁기했다고 폭로했다. 왜 그 문장들이 터무니없는지에 대해서는 과학계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 근거하여 조목조목 비판했다.

소칼이 보기에 자신의 엉터리 논문이 《소셜 텍스트》에 실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학문의 수준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보여준 명백한 증거였다. 소칼의 속임수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고 뜨거웠다. 평소에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글의 난삽함에 질려 있던 사람들은 ‘그것 참 고소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더 나아가 과학을 잘 모르는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감을 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스티븐 와인버그를 비롯한 다수의 과학자와 일부 공학자가 주로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소칼의 속임수는 거드름 피우는 임금님이 실제로 벌거벗었다는 진실을 일종의 트로이의 목마 같은 속임수로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트로이 사람들이 아테네 연합군이 패해 돌아간 것으로 알고 으쓱한 마음에 목마를 자신의 성안에 들여와 잔치를 벌이다가 멸망하고 말았듯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연구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과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한 물리학자의 주장에 고무되어 ‘소칼의 목마’를 자신들의 학술지에 실었다가 큰 낭패를 본 셈이었다.

한편 소칼이 속임수를 사용한 방식이 비열했음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소칼의 논문은 당시 미국의 과학자와 인문학자 사이에 고조되던 긴장감을 과학전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학술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준비된 《소셜 텍스트》의 특집호에 실렸다. 특집호는 대부분의 학술지가 채택하고 있는 관련 전문학자에 의한 동료평가를 하지 않고 편집위원의 토의를 거쳐 논문의 채택 여부를 결정했다. 토의 과정에서 소칼의 논문이 아주 난삽하여 무슨 주장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편집위원회는 소칼에게 논문의 상당 부분을 수정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자신의 글이 특별히 형편없는 상태로 출판되기를 원했던 소칼은 한 글자도 바꿀 수 없다며 이 요구를 거절했다.

소칼의 논문이 출판되게 된 이러한 과정을 살펴볼 때, 소칼은 과학계와 인문사회학계의 불필요한 대립을 학술적으로 정리하려는 특집호의 기획 의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은밀한 목적을 달성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소칼의 논문이 출간된 후 인문학자나 사회과학자 사이에서는 자신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견해에 대해 진지한 학술토론 대신 치사한 속임수로 공격한 소칼의 방식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과학전쟁’ 이후: 과학전쟁 참가자 사이에 열띤 설전이 진행되면서 양측 모두 상황이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 소칼은 벌거벗은 채로 거들먹거리며 걷는 임금님을 당황하게 만든 순진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현실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가진 구좌파 지식인의 정체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런 소칼의 눈에 비친 1980년대 이후의 신좌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어유희에 빠져 사회개혁과 같은 실천적 문제에서 멀어져 있었고, 소칼은 이에 대해 큰 실망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소칼은 자신의 속임수를 통해 젊은 세대 좌파들에게 현실의 급박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과학의 객관적 진리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반대로 소칼이 비판했던,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ㆍ사회과학적 연구를 수행했던 사람들은 과학에 무지한 사기꾼 재단사가 아니었다. 소칼의 엉터리 논문이 학술지에 버젓이 실렸다는 선정적 대중매체 보도만을 읽은 많은 과학자는 과학자가 아닌 사람이 과학에 대해 내놓는 분석은 하나같이 초보적 과학 지식도 모른 채 이루어지고 있다고 개탄했지만, 실제로 소칼이 비판했던 학자 중 상당수는 자신이 연구하는 과학 내용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소칼은 ‘소칼의 사기’ 이후 장 브리크몽과 함께 쓴 『지적 사기』라는 책에서 과학지식의 진리성이나 과학 연구의 객관성과 같은 메타적 주제에 대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과학기술학 학자들을 과학 무식쟁이로 몰아붙이려 했지만, 사실 그들과 소칼 사이의 차이는 특정 과학지식을 제시함으로써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소칼은 그 책에서 『과학혁명의 구조』의 저자로 잘 알려진 토머스 쿤을 격렬하게 비판했는데, 쿤의 최종 학위는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 박사로서 어떤 의미로도 과학에 무지하다고 평가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편 과학전쟁 초기에는 상대방 연구와 학술적 가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원색적 비난이 많았다. 하지만 논쟁이 진행될수록 과학전쟁이 발생하게 된 일차적 원인은 전문 분야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고유한 개념, 표현 방식 그리고 논증을 전개하거나 증거를 제시하는 과정의 차이를 참여자들이 서로 잘 몰랐기 때문이라는 점이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당신이 과학 혹은 철학에 대해 뭘 알겠어?” 식의 비난에서 “당신의 말하는 객관성이란 게 그런 뜻이었군요!” 식의 대응으로 조금씩 논쟁의 지형도가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과학전쟁을 스노가 지적한 두 문화 문제의 과격한 변주곡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가 두 분야 사이의 문화적 차이라면 어떻게 전쟁을 끝내고 생산적 협동을 성취할지도 비교적 명확해 보였다. 스노는 두 분야 사이의 협력이 막연히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경쟁국에 비해 뒤처져 있다고 평가되던 영국의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또 한 번의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을 이룩하는 데 필수적이라 보았다. 스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적극적 협력은 아닐지라도 소모적인 과학전쟁은 양쪽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 없으므로 끝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물론 전쟁을 최전방에서 이끌었던 양 진영의 열혈 투사들은 자신의 견해를 바꾸거나 화해를 시도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전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간접적으로 논쟁에 참가하던 대다수의 인문사회과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 사이에는 서로 익숙하지 않은 상대방의 문화적 행태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과학전쟁의 후반기로 갈수록 학술적으로 더 의미 있고 수준 높은 논쟁적 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논쟁 참가자들은 과학전쟁이 시작될 때는 너무나 극명하게 차이 나는 의견 대립으로 간주되던 사안들이, 서로 이해가 깊어질수록 실은 정반대 의견이기보다는 같은 의견의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또 설사 분명한 의견 차이가 있다고 판단되더라도 그것이 각자의 학문적 정체성에 비추어볼 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전쟁은 전쟁의 피해보다 그것에서 얻은 깨달음이 많은 보기 드문 전쟁이었다. 물론 모든 문제가 매끈하게 해결되고 달콤한 밀월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과학기술학 연구자 일부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과학자 일부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과학지식의 성격과 과학 연구의 본질에 대해 서로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전제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여전히 문제인가?: 그렇다면 비본질적이고 소모적인 논쟁 말고, 과학전쟁에서 진정으로 남는 쟁점은 무엇인가? 두 가지 쟁점이 가장 두드러진다. 첫째는 특정 현상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어떤 이론이 더 좋은 이론이라고 합의하게 되는 과정에 어떤 종류의 요인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는지와 관련된다. 과학전쟁 초기에 과학자들은 과학지식의 형성 과정이 순수하게 관찰이나 실험에 기반을 둔 논리적 추론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반면, 반대 진영은 다른 사회적 과정과 별 차이 없이 다양한 이해관계가 작용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논쟁이 진행될수록 과학 내적인 요인과 과학 외적인 요인 모두가 과학적 합의 도출 과정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양측 모두에게 어느 정도 분명하게 인식되었다. 구체적인 합의 도출 과정을 놓고 양측의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질수록 과학지식의 형성 과정에서 과학자들이 강조하는 인식적 요인과 반대 진영이 강조했던 사회적 요인 모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과학 활동을 사회적 요인이 결정하는지, 인식적 요인이 결정하는지를 묻는 것은 마치 개인의 특징을 유전적인 요인이 결정하는지, 양육적인 요인이 결정하는지를 묻는 것만큼이나 소모적인 질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과학지식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련 과학자 집단의 합의라는 절차가 필요하고, 이 절차에서 개별 과학자가 수행하는 인식론적 고려가 과학자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합의 도출로 이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과학지식에 대한 소칼식의 ‘소박한’ 실재론은 유지되기 힘들다. 하지만 과학지식의 형성 과정에서 인식적 요인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회적 활동과는 분명히 구별될 수 있다는 점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과학지식의 형성 과정에서 사회적 영향을 탐색하는 연구들은 사례를 분석하는 방식 때문에 사회적 영향을 과장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사례연구들은 경험적 증거에 의해 경쟁하는 이론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이론인지가 완전히 결정될 수 없음을 우선 보인 후, 인식적 고려사항을 아무리 많이 더해도 이러한 부분결정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나서, 최종적으로 사회적 요인을 등장시켜 논쟁을 해결하는 분석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분석 방식을 뒤집어 이론 부분결정 상황에서 사회적 요인을 아무리 많이 더해도 일반적으로 논쟁을 종결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보인 후, 인식적 요인을 끌어들여 논쟁을 종결시키는 방식으로 사례를 기술하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이 경우에는 마치 인식적 요인이 결정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구성주의자들이 과학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편리하게 사용하는 경험적 증거에 의한 이론의 부분결정성은 역설적으로 과학의 인식론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결론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 논쟁에서는 인식론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사회구성주의자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둘째 쟁점은 ‘해석적 유연성’에 대한 것이다. 해석적 유연성이란 과학 활동에서 경험적 자료가 충분히 있더라도 과학자에게는 그 자료들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서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폭이 상당히 주어짐을 의미한다. 사실 이 해석적 유연성 개념은 과학전쟁의 모든 논쟁의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해석적 유연성을 되도록 무시하거나 그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려 하고, 과학지식의 구성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자신들의 분석 틀을 이 개념에 바탕을 둔다. 해석적 유연성이 과학 활동, 특히 이미 논쟁이 완료된 과학지식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과학 연구에서 잘 드러난다는 사실은 여러 사례연구에서 설득력 있게 논증되었으므로 부인하기 어렵다.

최고 수준의 과학자들도 종종 특정 실험 결과가 함축하는 바에 대해 서로 상반된 해석을 내놓거나 미래 연구 방향에 대해 엇갈린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이미 이루어진 연구에 비추어 평가 지침을 얻을 수 있는 상황보다 그런 합의가 어려운 첨단 연구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실제로 과학적 논쟁이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경험 자료에 대해 해석적 유연성이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해석적 유연성’ 개념은 앞서 소개한 ‘이론의 부분결정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해석적 유연성과 관련된 진정한 쟁점은 그것의 유무 여부라기보다는, 해석적 유연성이 과학 연구의 객관성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한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적 질문이나, 해석적 유연성이 실제 과학 활동에서 어느 정도로 발휘되고 있는지에 대한 경험적 질문이 될 것이다.

각각 과학철학과 과학사회학ㆍ과학인류학이 탐색하는 이 두 질문에 대해,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자들은 과학자들이 실제로 활용하는 해석적 유연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일부 학자는 의심스러운 인식론적 근거에 입각하여 해석적 유연성이 거의 무제한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과학자들이나 많은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는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여러 인식적 조건을 만족시키는 자연현상에 대한 이론이나 모형을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다. 해석적 유연성이 원리적으로는 무한해 보일지라도 자연현상의 경험적 구조나 이론적 고려사항이 부과하는 제한조건들이 실제 과학 연구 과정에서는 해석적 유연성을 생각만큼 자유자재로 쓸 수 없게 한정한다는 것이다. 과학 연구에서 인식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이 어떻게 결합하여 합의 도출 과정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한 논쟁, 그리고 해석적 유연성의 범위와 역할을 둘러싼 논쟁은 당분간 쉽게 종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제2부 컨실리언스 논쟁



‘통섭’이라는 말과 그 안에 담긴 생각 - 고인석

‘통섭’이라는 말을 요즘 주변에서 자주 듣는다. 이 말은 하버드 대학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교수와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최재천 교수의 합작품이다. 1998년에 나온 윌슨의 저서 『Consilience』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최재천 교수가 이 말을 썼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한편 웬만한 크기의 영어사전에는 나오지도 않는 낱말 ‘consilience’ 자체는 역사적으로 윌리엄 휴얼이 1840년 『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에서 처음 썼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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